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첫번째 근거로, 촉나라 멸망 당시 인구와 고구려 멸망 당시 인구 기록을 들고 있는데, 아래의 기록들이 바로 그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호적상의 인구기록입니다. 참고로 아래 기록들의 출처는 고려시대의 문신 김부식이 지은<<삼국사기>>-(고구려 본기)와(백제 본기)에 실린 내용들입니다.
『본래 나라에 5부 37군 200성 76만 호가 있었다.』 (의자왕기 660년)
『우리의 5부 176성 69만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을 만들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설치하여 다스리게 했다.』(보장왕기 668년)
다음은 <<삼국회요>>에 기록된 촉나라 멸망 당시 인구 기록입니다. (주석-1)
『호구수 28만호 남녀 인구 94만명, 갑옷 입은 병사 10만 2천명, 관리 4만명에, 쌀이 40여만 휘, 금은 각기 2천근 비단과 명주가 각기 20만 필 등 남은 재물이 이와 같았다.』 (촉기 263년) (주석-2)
그런데 눈치가 빠르신 분들은 이미 찾으셨겠지만, 이 기록에서 쉽게 한가지 의문점을 찾을수 있습니다. 중학교 국사 과정만 배웠더라면 알고 계시겠지만 '고구려 멸망 시기'와 삼국지 '촉나라 멸망 시기'에는 1-2백년도 아니고, 무려 4백여년의 시차가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주석-3) 예컨데 우리나라 옛 속담에도 있듯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668년)의 인구가 '촉나라'가 존재하던 시기의 '고구려'의 인구와 같았을지는 의문인 것이지요. 이런 제 마음을 알았는지, 김재웅씨는 '참 친절하게도' 그의 책에서 이런 답변을 대신 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의 인구증가율은 매우 낮았기 때문에 400여년의 시차가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두시대(263년/668년)의 고구려 인구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고, 따라서 당시에도 (중국의 삼국시대였던 2-3세기) 고구려의 인구는 촉보다 더 많았다. 한발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삼국은 중국의 삼국보다 컸다.』
언뜻 보기에는 그럴듯한 설명입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 먼저 첫째로 김재웅씨는 촉이 멸망한때인 263년도의 고구려와 668년도의 고구려 영토문제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예로 <<위서(조조의 위가 아닌 북위)>>에는 고구려에 온 중국 사신이 장수왕 시절의 고구려 인구가 위나라 시절(조조의 위)의 고구려 인구보다 3배나 늘었다고 이야기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최소한 263년도 고구려의 인구와 668년도의 고구려 인구가 3배이상의 차이가 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혹 김재웅씨의 주장대로 아무리 인구증가율이 낮았다고 하더래도 인구증가율과는 관계없이 400여년 사이에 고구려는 수많은 정복사업을 펼쳐, 동천왕 시대보다 국력(인구,영토를 포함하여-)이 최소한 3배 이상 늘어난 것인데, 이런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채. 『고대사회의 인구증가율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4백여년간에 고구려의 인구가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라는 김재웅씨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 두번째로는 사서에 기록된(호적에 기록된-) 인구 기록을 보이는 데로 그냥 믿을수 있냐는 것입니다.
먼저 두번째 문제점을 지적 하기전에 여기서 간단하고 집고 넘어갈것이 있습니다. 김재웅씨는 물론이고, 프레시안이라는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서 현재(?)「삼국지 관련 칼럼」을 연재중인 김운회씨 등은 반복적으로 그들의 글에서 『(호적에 기록된) 촉나라 멸망 당시 인구는 94만명』 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의 병제(세병제)를 잘못 이해한데서 시작되는 잘못된 계산법입니다.
분명히<<삼국회요>>에는 촉나라 인구가 『남녀 호구수 28만호,94만명 갑옷입은 병사가 10만2천명 관리가 4만명』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여기서 병적등을 생략한채. '호'만을 생각하고 계산하는데, 사실은 여기에 있는 병사들이나, 관리등을 모두 포함해서 계산해야 옳은 계산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모두 통합해서, 촉나라의 인구를 알아보면, 촉나라의 인구는 94만명이 아니라. 94만+10만2천+4만=108만2천명(주석-4) 이 됩니다. 이상이 2-3세기 사서(호적)에 기록된 촉나라 (익주 지방)의 인구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기록된(2-3세기) 고구려의 인구 기록은 찾을수 없는것일까요 ? 『나관중도 몰랐던 삼국지』의 저자 김재웅씨가 계산한 방식대로 수세기 후인 고구려 인구에서 당시 인구를 추측해서 힘들게 계산해야 하는것일까요? 대답을 먼저 하자면, 그렇게 힘들게 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삼국지>>에 당시 고구려의 인구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죠. 사실 제가 김재웅씨의 책을 보면서 수년동안 이상 했던 부분인데요. 김재웅씨라면『삼국지』의 기록도 당연히 보았을 텐데, 왜 이런 기록을 그냥 넘어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 기록이 믿음직하지 못해서 일부로 서술하지 않았다면 '왜' 참고하지 않았는지 라는 말이나, 하다못해 그런 이유라면 『삼국회요』의 인구기록도 의문을 표시해주어야 정상일텐데 어째 '일언방구'없이 넘어가는지-개인적으로 참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혹 정말로 보지 못했다면 김재웅씨는 가장 기본이 되는 책인<<삼국지>>를 제대로 보지 않고 책을 쓴 무책임한 작가 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듯 보이는군요. 더 나아가,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지만 혹시 김재웅씨는 고의로 누락시킨것은 아닐런지요.
어쨋든 간에 멀리서 찾을 필요없이 <<삼국지>>-<동이전>의 기록을 보면 당시 고구려의 인구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이당시 고구려의 인구기록은 '3만호' 자 그럼 사서에 기록된 거의 동시대의 (+- 50) 인구 비교입니다.
(실제 인구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사서에 기록된 2-3세기 인구) 촉나라 약 110만 고구려 인구 고구려 약 12-15만
다음은 필자가 왕육민이 지은 '중국 인구사'를 참고해서 계산한 고구려 후기의 인구와 비슷한 시기의 중국 인구입니다.
고구려 멸망시기(668년) 69만호(약350만) 비슷한 시기의 중국 신룡 원년 (705년) 37,140,000
이상의 기록등을 볼때 김재웅씨의 「인구증가율이 거의 없기 때문에 4백년이 지나도 인구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라는 주장에 대해서 비교가 되는지 필자는 의문스럽습니다. 여담이지만 여기까지 글을 읽고, 많은 분들이 오해하실까 덮붙이건데 지금까지의 인구 비교는 어디까지나 김재웅씨의 주장대로, 일부러 '사서에 기록된 호적상의 인구'만 비교하여 그의 논리를 살짝 비꼰것으로 이제부터, 호구상의 인구기록 비교가 아닌, 실질적 인구 기록 비교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구려 인구 기록에 대해서 필자는 집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삼국지>>-<동이전>에 기록된 고구려 인구 3만호 대한 문제인데, 만약 이 3만호의 인구가 '동명왕'이나 '유리명왕' 시절의 인구라면 대략적으로 납득이 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천왕 시대에는 이미 부여와 대등하거나 그를 능가하는 국력을 고구려가 가지고 있던 시점인데, 고구려의 인구가 부여의 인구의 반도 채 못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수 없는 부분입니다. 바다건너 일본의 비미호 여왕의 야마토국 7만호에 비교해보면 더 그렇지요. 문제는 또 있습니다. 만약 이 기록을 그대로 믿었을 경우에는 고구려의 전성기 시절인 '장수왕' 시절의 인구가 겨우 45-50만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는데, 당시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고구려의 인구라고 생각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문제와 마찬가지로 동일선상에서 볼때. 고구려 멸망 당시의 후기 인구(69만호 - 약 350만명)도 필자는 의문이 갑니다.
먼저 <<삼국사기>>의 이 인구기록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후에 기록한 기록으로 이는 당나라의 막연한 추측일뿐 실제 인구를 적었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한예로 고구려 멸망후에 당나라의 행정력은 고구려의 강역 전체를 지배한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분에만 미쳤던 사실에도 볼수있습니다. (예컨데 동만주 지역 같은 지역은 당나라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음.) 또 고구려는 후기 고수-고당전쟁때 30-50만명의 대병력을 동원하기도 하는데, 이는 고구려의 인구를 69만호(약350만호)라고 보았을때는 이해하기 힘든 수치라는 것이지요. 물론,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 마다 의견이 분분한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몇몇분의 주장을 실어 보겠습니다. 유럽에서 교수를 하고 계시는, 이옥선 교수 같은 분은 고구려의 인구는 약 350만 정도일것이다. (혹은 이도 많다.) 라고 주장하고 계시고, '고구려의 발견'등의 저자, 김용만 박사 같은 분은 금나라 인구 500여만을 생각하고, 또 고구려의 복속민을 생각하면, 최대 1천만 정도는 될것이다. 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필자는 위에 글에 밝혔듯이 이상의 근거로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상으로-전성기의 고구려 인구는 '1천만' 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단 2-3세기의 고구려 인구는 이보다 반이상 적었을것) 그렇다면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인구 기록은 어떨까요 ? 저는 고구려의 인구가 지나치게 축소되었듯이 저는 이 기록도 지나치게 축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삼국회요>>나<<진서지리지>>의 인구 기록은 그 이전시대의 중국의 인구를 생각할때. 이상하다 생각될 정도로 적습니다. 예컨데 호적에 등록된 후한시대의 익주인구(전체가 아님)는 7백만에 달합니다.(주석-6) 이 익주에 속하는 영창군은 일개'군'인데도 인구가 189만에 육박하고 있지요. 또,왕육민의『중국인구사』라는 책을 보면 중국의 인구는 진시황 시절에 이미, 2천만명을 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자연재해가 유달리 많았다고 하더라도, 삼국시대의 전체 인구가 1천만명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춘추전국시대도 그렇지 않았음.)
그렇다면, <<삼국회요>>등의 인구 기록은 왜 저렇게 기록이 되었을 까요 ?
그이유는 앞에서 설명했던 고구려의 인구 기록과 마찬가지 이유라고 할수 있습니다. 먼저 첫째로는 당시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던 이유를 들수 있겠습니다. 또 두번째로는 주석이나 정사에도 나오듯이, 호족들이나, 권문들의 '부곡'의 문제인것으로 보입니다. (주석-7) 이 부곡은 일종의 개인 사병인데 이들이 호적에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삼국시대의 인구가 그렇게 나오는 것이죠. 이를 뒷받침 하는 부분은 또 있습니다. <<삼국회요>>의 촉나라 기록을 계산해 보면 한 가구당 겨우 3명 정도에 불과한데 이는 위나라의 7명에 비교하면 너무 적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호적에 등록된 인구와 실제 인구는 그렇게 차이가 나게 된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당시 촉의 실질적 인구를 최소 600만 으로 보고 있고 2-3세기의 실질적 인구를 최소 3천만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닌것이죠.
▦ 이상으로 볼때. 2-3세기 중국의 인구나 668년 경의 중국의 인구는 모두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보다, 분명히 몇배 이상은 많았다고 볼수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단순히 크다-작다를 구분하는 것은 '인구'나 '땅'의 크기로 말할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컨데 칭기즈카한의 몽골의 인구는 100만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세계의 절반이나 되는 땅을 지배했습니다. 또 저 넓은 중원땅보다 만주 벌판이 중요하지 않다 라고 말할수는 없을것입니다. - 인구와 영토에 연연하는 몇몇 사람들은 우리의 역사는 결코 중국의 역사보다, 작지 않다는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요 ?
(주석-4) 삼국회요등의 기록을 보면 병적,민적,이적을 구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삼국시대는 징병제 였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삼국시대의 기본적인 병제는 징병제가 아니라. 병호제(세병제)로, 인구를 계산할때는 민적,병적,이적을 모두 더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호만 생각하여 인구를 계산하는데 사실 이는 잘못된 계산법이다. <<참고문헌 / 한서, 후한서, 삼국지, 역대병지, 보한병지, 위진남북조군호고, 조위사가제도적형성화발전, 손오적병제, 삼국사(마식걸), 거연한간갑을편>>
(주석-5)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동이전의 기록을 쓰면서 위략의 많은 부분을 참고한것으로 보인다.
(주석-6) [140년] 後漢 益州 戶1,525,257 口7,242,028《後漢書·地理志》
전국시대 (기원전 5-3세기) 총 2000만명 추정 & 환제 시기 (157년) 56,486,856 <<중국인구사中>>
(주석-7) 위나라의 이전은 부곡 3천여호 1만3천명을 거느렸다. / 오나라의 주환은 부곡 1만명의 처자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했다. / 마초는 그 아버지 마등으로부터 부곡을 이어 받았다. / 당시 호적이나 권문들이 거느렸던 부곡의 숫자를 대략적으로 파악할수 있다. <<삼국지中>>
첫댓글궁금한 것이 새롭게 생겼습니다. 삼국시대때 급속하게 줄어든 것으로 기록된 중원의 인구는 이후 수-당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본래의 규모대로 서술됩니다. 삼국시대의 혼란이 끝나고 진이 들어서고 남북조시대가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인구는 이전에 비해 턱없이 적었습니다. 그렇게 봤을때 그 인구가 계속 적게 기록된 이유는 삼국시대 인구수 계산법과 같이 호구수와 달리 병적, 사적이 따로 기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으로 봐야 하는 겁니까? 그리고 그렇다고 했을때 삼국시대의 이런 제도가 남북조시대까지 지속되었던 것입니까? 그렇게 해야만 위와 같은 설명이 보다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문득 든 생각으로는
삼국시대때 인구 계산법이 저러했다면『삼국지』를 쓴 진수 역시「동이전」의 각 나라들에 대해 서술할때 중국식으로 호구, 병적, 사적을 다 구분해서 썼을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인구 3만호에 대해 중앙에 소속된 인구, 진수가 파악 가능한 범위 안의 인구 등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고구려의 인구는 실제보다 많았다고 하고 있지요. 그럼 이와 같은 서술이 남은 것 역시 진수가 자신이 익숙한 계산법에 따라 정리한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어떤가요?
진나라나, 그 후기의 나라들의 병제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 이후의 나라들의 병제가 병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진서지리지만 봐도 민적 병적이 따로 구분되어 않은걸로 보아서 병호제는 아니였던거 같습니다(확실한건 아님) 그리고 3만호 기록은 제가 알기로는 진수가 어환의 위략 기록 배낀걸로 알고 있습니다. (동이전 부분 이것도 찾아봐야 알겠음)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정리한건 아닌거 같습니다. 그냥 동이전 기록 자체의 문제라고 봅니다. 만약 그렇게 적은것이라면 민적 인구 병적 인구 등을 따로따로 적었겠지요.
흐음...그렇다면 이건 좀 생각해봐야 할 듯 싶습니다. 삼국시대때 인구 계산법이 다른 시대와 달랐기 때문에 인구가 기록보다 많이 줄어들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이후로 수대가 되기 전까지 중원대륙의 인구는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수백년간 말이죠. 그런데 님 말씀처럼 진나라나 그 이후의 병제 혹은 호구수 조사가 삼국시대와 같지 않았다면 이건 모순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인구 변동은 큰 차이가 없는데 인구 계산법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제가 님의 글을 보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새롭게 든 의문입니다. 전 지금까지 삼국시대가 되면서 유동인구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 수라고 하는 통일제국
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영역권 내 모든 인구를 확실하게 통제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삼국시대 인구가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많았었고 그 계산법이 맞다면...그 이후의 진과 오호십육국, 남북조 시대때의 큰 인구 변동 없이 적정 숫자의 인구(이전보다 훨씬 줄어든)가 유지된 것은 다시 봐야하지 않을까요? 알다시피 동진 최전성기때 인구가 1,700만이었고 오호십육국 시기 북방은 2,000만 내외, 동시기 남조의 송은 5백만 내외였습니다. 그래봤자 2,500만 가량, 삼국시대 이전 5,600만에 비한다면 턱없이 모자랍니다. 나머지는 다 어디로? 그리고 수 대업 2년(606), 비로소 4,600만이 됩니다. 이건 그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본문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것은 맞습니까 제가 병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민적만 계산한다 라고 지적한것은 호구상의 인구기록도 제대로 계산하지 않는다 라는 지적이고, 호구상의 인구기록은 병적+민적 이다 라는 말입니다. 사실 둘다 더해도 별반 큰 차이는 없습니다. 어쨋든 병호제를 거론하면서 지적한 부분은 호구상에서의 오류를 지적한것이지 호구 인구가 아닌 실제 인구를 거론한게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 그이유는 앞에서 설명했던 고구려의 인구 기록과 마찬가지 이유라고 할수 있습니다. 먼저 첫째로는 당시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던 이유를 들수 있겠습니다. 또 두번째로는 주석이나 정사에도
호족들이나, 권문들의 '부곡'의 문제인것으로 보입니다. (주석-7) 이 부곡은 일종의 개인 사병인데 이들이 호적에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삼국시대의 인구가 그렇게 나오는 것이죠. 이를 뒷받침 하는 부분은 또 있습니다. <<삼국회요>>의 촉나라 기록을 계산해 보면 한 가구당 겨우 3명 정도에 불과한데 이는 위나라의 7명에 비교하면 너무 적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호적에 등록된 인구와 실제 인구는 그렇게 차나게 된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당시 촉의 실질적 인구를 최소 600만 으로 보고 있고 2-3세기의 실질적 인구를 최소 3천만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닌것이죠.
제가 글을 좀 다르게 보일 수 있을만큼 썼나 봅니다. 전 삼국시대때 인구 계산법이 이전 시기와 달랐고 그에 따라 인구 계산에 있어 차이가 났다는 그 자체에 주목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그런 것이 지속되었을지 여부를 묻기 위해 장황하게 위의 글을 썼던 겁니다. 인구가 급감했다가 이후 급증한 것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유랑민과 국가에서 통제가 안 되는 사람이 많을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계산법에 착안했던 것이고요. 뭐 님의 생각을 이제 알았으니 됐습니다. 고구려의 경우는 나중에 제가 확인해 봐야겠네요.
첫댓글 궁금한 것이 새롭게 생겼습니다. 삼국시대때 급속하게 줄어든 것으로 기록된 중원의 인구는 이후 수-당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본래의 규모대로 서술됩니다. 삼국시대의 혼란이 끝나고 진이 들어서고 남북조시대가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인구는 이전에 비해 턱없이 적었습니다. 그렇게 봤을때 그 인구가 계속 적게 기록된 이유는 삼국시대 인구수 계산법과 같이 호구수와 달리 병적, 사적이 따로 기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으로 봐야 하는 겁니까? 그리고 그렇다고 했을때 삼국시대의 이런 제도가 남북조시대까지 지속되었던 것입니까? 그렇게 해야만 위와 같은 설명이 보다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문득 든 생각으로는
삼국시대때 인구 계산법이 저러했다면『삼국지』를 쓴 진수 역시「동이전」의 각 나라들에 대해 서술할때 중국식으로 호구, 병적, 사적을 다 구분해서 썼을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인구 3만호에 대해 중앙에 소속된 인구, 진수가 파악 가능한 범위 안의 인구 등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고구려의 인구는 실제보다 많았다고 하고 있지요. 그럼 이와 같은 서술이 남은 것 역시 진수가 자신이 익숙한 계산법에 따라 정리한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어떤가요?
진나라나, 그 후기의 나라들의 병제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 이후의 나라들의 병제가 병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진서지리지만 봐도 민적 병적이 따로 구분되어 않은걸로 보아서 병호제는 아니였던거 같습니다(확실한건 아님) 그리고 3만호 기록은 제가 알기로는 진수가 어환의 위략 기록 배낀걸로 알고 있습니다. (동이전 부분 이것도 찾아봐야 알겠음)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정리한건 아닌거 같습니다. 그냥 동이전 기록 자체의 문제라고 봅니다. 만약 그렇게 적은것이라면 민적 인구 병적 인구 등을 따로따로 적었겠지요.
흐음...그렇다면 이건 좀 생각해봐야 할 듯 싶습니다. 삼국시대때 인구 계산법이 다른 시대와 달랐기 때문에 인구가 기록보다 많이 줄어들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이후로 수대가 되기 전까지 중원대륙의 인구는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수백년간 말이죠. 그런데 님 말씀처럼 진나라나 그 이후의 병제 혹은 호구수 조사가 삼국시대와 같지 않았다면 이건 모순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인구 변동은 큰 차이가 없는데 인구 계산법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제가 님의 글을 보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새롭게 든 의문입니다. 전 지금까지 삼국시대가 되면서 유동인구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 수라고 하는 통일제국
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영역권 내 모든 인구를 확실하게 통제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삼국시대 인구가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많았었고 그 계산법이 맞다면...그 이후의 진과 오호십육국, 남북조 시대때의 큰 인구 변동 없이 적정 숫자의 인구(이전보다 훨씬 줄어든)가 유지된 것은 다시 봐야하지 않을까요? 알다시피 동진 최전성기때 인구가 1,700만이었고 오호십육국 시기 북방은 2,000만 내외, 동시기 남조의 송은 5백만 내외였습니다. 그래봤자 2,500만 가량, 삼국시대 이전 5,600만에 비한다면 턱없이 모자랍니다. 나머지는 다 어디로? 그리고 수 대업 2년(606), 비로소 4,600만이 됩니다. 이건 그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본문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것은 맞습니까 제가 병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민적만 계산한다 라고 지적한것은 호구상의 인구기록도 제대로 계산하지 않는다 라는 지적이고, 호구상의 인구기록은 병적+민적 이다 라는 말입니다. 사실 둘다 더해도 별반 큰 차이는 없습니다. 어쨋든 병호제를 거론하면서 지적한 부분은 호구상에서의 오류를 지적한것이지 호구 인구가 아닌 실제 인구를 거론한게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 그이유는 앞에서 설명했던 고구려의 인구 기록과 마찬가지 이유라고 할수 있습니다. 먼저 첫째로는 당시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던 이유를 들수 있겠습니다. 또 두번째로는 주석이나 정사에도
호족들이나, 권문들의 '부곡'의 문제인것으로 보입니다. (주석-7) 이 부곡은 일종의 개인 사병인데 이들이 호적에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삼국시대의 인구가 그렇게 나오는 것이죠. 이를 뒷받침 하는 부분은 또 있습니다. <<삼국회요>>의 촉나라 기록을 계산해 보면 한 가구당 겨우 3명 정도에 불과한데 이는 위나라의 7명에 비교하면 너무 적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호적에 등록된 인구와 실제 인구는 그렇게 차나게 된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당시 촉의 실질적 인구를 최소 600만 으로 보고 있고 2-3세기의 실질적 인구를 최소 3천만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닌것이죠.
라는 말입니다. 즉 병호제 이기 ?문에 호구를 병적+민적으로 해야하고 실제 인구는 유랑민+부곡을 더하면 실제인구는 3천만쯤 될것이다(호구 기록에 의하면 약 1천만)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글을 좀 다르게 보일 수 있을만큼 썼나 봅니다. 전 삼국시대때 인구 계산법이 이전 시기와 달랐고 그에 따라 인구 계산에 있어 차이가 났다는 그 자체에 주목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그런 것이 지속되었을지 여부를 묻기 위해 장황하게 위의 글을 썼던 겁니다. 인구가 급감했다가 이후 급증한 것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유랑민과 국가에서 통제가 안 되는 사람이 많을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계산법에 착안했던 것이고요. 뭐 님의 생각을 이제 알았으니 됐습니다. 고구려의 경우는 나중에 제가 확인해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