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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동아시아 역사 토론장 Re:이건 제가 고구려와 삼국시대 인구를 비교한 글입니다.
견초 추천 0 조회 334 06.09.18 18:18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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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6.09.19 17:23

    첫댓글 궁금한 것이 새롭게 생겼습니다. 삼국시대때 급속하게 줄어든 것으로 기록된 중원의 인구는 이후 수-당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본래의 규모대로 서술됩니다. 삼국시대의 혼란이 끝나고 진이 들어서고 남북조시대가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인구는 이전에 비해 턱없이 적었습니다. 그렇게 봤을때 그 인구가 계속 적게 기록된 이유는 삼국시대 인구수 계산법과 같이 호구수와 달리 병적, 사적이 따로 기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으로 봐야 하는 겁니까? 그리고 그렇다고 했을때 삼국시대의 이런 제도가 남북조시대까지 지속되었던 것입니까? 그렇게 해야만 위와 같은 설명이 보다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문득 든 생각으로는

  • 06.09.19 17:26

    삼국시대때 인구 계산법이 저러했다면『삼국지』를 쓴 진수 역시「동이전」의 각 나라들에 대해 서술할때 중국식으로 호구, 병적, 사적을 다 구분해서 썼을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인구 3만호에 대해 중앙에 소속된 인구, 진수가 파악 가능한 범위 안의 인구 등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고구려의 인구는 실제보다 많았다고 하고 있지요. 그럼 이와 같은 서술이 남은 것 역시 진수가 자신이 익숙한 계산법에 따라 정리한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어떤가요?

  • 작성자 06.09.20 01:07

    진나라나, 그 후기의 나라들의 병제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 이후의 나라들의 병제가 병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진서지리지만 봐도 민적 병적이 따로 구분되어 않은걸로 보아서 병호제는 아니였던거 같습니다(확실한건 아님) 그리고 3만호 기록은 제가 알기로는 진수가 어환의 위략 기록 배낀걸로 알고 있습니다. (동이전 부분 이것도 찾아봐야 알겠음)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정리한건 아닌거 같습니다. 그냥 동이전 기록 자체의 문제라고 봅니다. 만약 그렇게 적은것이라면 민적 인구 병적 인구 등을 따로따로 적었겠지요.

  • 06.09.20 01:32

    흐음...그렇다면 이건 좀 생각해봐야 할 듯 싶습니다. 삼국시대때 인구 계산법이 다른 시대와 달랐기 때문에 인구가 기록보다 많이 줄어들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이후로 수대가 되기 전까지 중원대륙의 인구는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수백년간 말이죠. 그런데 님 말씀처럼 진나라나 그 이후의 병제 혹은 호구수 조사가 삼국시대와 같지 않았다면 이건 모순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인구 변동은 큰 차이가 없는데 인구 계산법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제가 님의 글을 보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새롭게 든 의문입니다. 전 지금까지 삼국시대가 되면서 유동인구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 수라고 하는 통일제국

  • 06.09.20 01:39

    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영역권 내 모든 인구를 확실하게 통제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삼국시대 인구가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많았었고 그 계산법이 맞다면...그 이후의 진과 오호십육국, 남북조 시대때의 큰 인구 변동 없이 적정 숫자의 인구(이전보다 훨씬 줄어든)가 유지된 것은 다시 봐야하지 않을까요? 알다시피 동진 최전성기때 인구가 1,700만이었고 오호십육국 시기 북방은 2,000만 내외, 동시기 남조의 송은 5백만 내외였습니다. 그래봤자 2,500만 가량, 삼국시대 이전 5,600만에 비한다면 턱없이 모자랍니다. 나머지는 다 어디로? 그리고 수 대업 2년(606), 비로소 4,600만이 됩니다. 이건 그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 작성자 06.09.20 04:12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본문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것은 맞습니까 제가 병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민적만 계산한다 라고 지적한것은 호구상의 인구기록도 제대로 계산하지 않는다 라는 지적이고, 호구상의 인구기록은 병적+민적 이다 라는 말입니다. 사실 둘다 더해도 별반 큰 차이는 없습니다. 어쨋든 병호제를 거론하면서 지적한 부분은 호구상에서의 오류를 지적한것이지 호구 인구가 아닌 실제 인구를 거론한게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 그이유는 앞에서 설명했던 고구려의 인구 기록과 마찬가지 이유라고 할수 있습니다. 먼저 첫째로는 당시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던 이유를 들수 있겠습니다. 또 두번째로는 주석이나 정사에도

  • 작성자 06.09.20 04:13

    호족들이나, 권문들의 '부곡'의 문제인것으로 보입니다. (주석-7) 이 부곡은 일종의 개인 사병인데 이들이 호적에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삼국시대의 인구가 그렇게 나오는 것이죠. 이를 뒷받침 하는 부분은 또 있습니다. <<삼국회요>>의 촉나라 기록을 계산해 보면 한 가구당 겨우 3명 정도에 불과한데 이는 위나라의 7명에 비교하면 너무 적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호적에 등록된 인구와 실제 인구는 그렇게 차나게 된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당시 촉의 실질적 인구를 최소 600만 으로 보고 있고 2-3세기의 실질적 인구를 최소 3천만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닌것이죠.

  • 작성자 06.09.20 04:15

    라는 말입니다. 즉 병호제 이기 ?문에 호구를 병적+민적으로 해야하고 실제 인구는 유랑민+부곡을 더하면 실제인구는 3천만쯤 될것이다(호구 기록에 의하면 약 1천만)이라는 말입니다.

  • 06.09.20 05:10

    제가 글을 좀 다르게 보일 수 있을만큼 썼나 봅니다. 전 삼국시대때 인구 계산법이 이전 시기와 달랐고 그에 따라 인구 계산에 있어 차이가 났다는 그 자체에 주목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그런 것이 지속되었을지 여부를 묻기 위해 장황하게 위의 글을 썼던 겁니다. 인구가 급감했다가 이후 급증한 것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유랑민과 국가에서 통제가 안 되는 사람이 많을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계산법에 착안했던 것이고요. 뭐 님의 생각을 이제 알았으니 됐습니다. 고구려의 경우는 나중에 제가 확인해 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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