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흑산도는 많은 인물이 유배생활을 했던 섬이다.
절망의 땅이라 여겨 바닷물도 푸르다 못해 검게 변한 곳이라는 표현을 했던 곳이다.
모래미마을에서 손암 정약전이 유배 생활을 하며 <자산어보>를 저술하였다.
홍어의 고장답게 거의 모든 식당이 홍어를 간판으로 내세우고 있다.
라파엘수산, 요한수산, 젬마수산...지역에 천주교 문화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흑산도는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93km 떨어져 있는 섬이다.
면적 19.7㎢에 해안선 길이 41.8km에 달하는 제법 큰 섬이다
홍도, 다물도, 대둔도, 영산도, 장도, 태도군도 등이 흑산면의 부속 섬이다.
진리 처녀당
진리마을 당숲에 있는 이곳이 진리 처녀당(일명 진리당)이다.
당제는 음력 정초부터 3일간 열렸으나 현재는 당제가 열리지 않는다.
1978년 7월 26일 KBS TV <전설의 고향>에 '흑산도처녀당과 피리 부는 소년'이 방영되기도 했었다
처녀당 근처에는 영혼을 부른다는 300년 된 초령목(招靈木)이 있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고사되고 어린 나무들만 몇 그루 남아 있다.
수백년 묵은 곰솔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어 신령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흑산성당피정의집
작년에 흑산비치호텔을 흑산성당 피정의집을 겸하는 시설로 리모델링하여 재개관했다.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며, 흑산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다.
나는 여태까지 이렇게 럭셔리한 피정의 집을 본 적이 없다.
흑산성당(1)
성당을 알리는 이정표가 윙크하는 홍어 모양으로 되어 있어 귀여웠다
바다를 바라보며 서 계시는 예수님이 혼탁한 세상에 사랑을 전하는 모습이다.
흑산성당은 등록문화재 제759호로 지정되었다.
흑산성당은 서남해안 섬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된 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에 시달리던 주민을 위해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친 장소이기도 하다.
흑산성당(2)
1층 석조 건물인 성당은 정면 중앙부에 사방으로 열린 종탑을 설치하였다.
바닷가에서 구해온 몽돌을 건축재료로 활용하는 등 건축사적 가치도 인정받아 문화재 반열에 올랐다.
정갈하게 꾸며진 제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우리의 소망을 아뢰었다.
흑산성당(3)
이곳에 본격적으로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951년 장도에 공소가 건립되면서 부터다.
1956년 심리, 1957년 사리에 공소가 건립되는 등 흑산도의 천주교세가 빠르게 확장되었다.
목포 산정동 본당은 브라질(S. Brazil, 진)신부를 파견해 1958년 11월 현 흑산성당을 건립했다.
칠락산 가는 길
흑산도의 상징과도 같은 칠락산에 오르기 위해 들머리인 샘골로 이동했다.
예리항에서 1km도 되지 않는 거리인데 택시비를 6천원이나 받았다.
흑산도 전체에 택시가 8대 밖에 없다고 하니 횡포가 심하다.
조심, 조심!
들머리에 진드기, 독사, 벌, 산거머리를 조심하라고 씌여 있었다.
모텔의 주인이 산거머리에 물려 고생한 손님들을 봤다며 주의를 당부했었다.
혹시 독사가 나타날까봐 스틱을 세게 두드리며 걸어갔다.
이 세상 모두 섬인 것을
천만이 모여 살아도
외로우면 섬인 것을
욕심에서
질투에서
시기에서
폭력에서
멀어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떠있는 섬
이럴 때 천만이 모여 살아도
천만이 모두 혼자인 것을
어찌 물에 뜬 솔밭만이 섬이냐
나도 외로우면 섬인 것을.....................................................이생진 <외로울 때> 전문
영산도가 보인다
흑산도에서 동쪽으로 4㎞, 도선으로 10분만 가면 닿을 수 있는 섬이다.
미지의 섬 영산도는 그 이름만으로 여행에 나서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런데 그런데...도선이 하루에 한 번만 운행한다고 해서 포기하였다.
흑산도비비추
홍도에선 홍도비비추라 하고, 여기서는 흑산도비비추라 부른다
지역 이기주의에 빠져서 이러는 행태가 씁쓸하다
하느님이 키운 들꽃은 그러거나 말거나 고운 빛을 머금고 있다.
칠락산(七落山 252m)
칠락산은 예리와 진리를 감싸고 있다
봉우리가 7개로 연결되어 맨 끝자락에 있다 하여 '칠락산'이라고 유래가 전해져 내려온다.
누군가 고동색과 하얀색 페인트로 ‘칠락산은 어머니 산’이라고 쓴 예쁜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정면으로 문암산과 상라산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그림같은 예리항과 대둔도가 보였다.
예리항이 보인다
칠락산에서 내려다보는 예리항은 천혜의 항구였다.
파시가 성행했던 한때는 개도 천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흥청대던 곳이다.
파시가 사라진 지금 다른 풍습이 생겨났다.
오히려 태풍이 오기를 기다리는 항구가 된 것이다.
예리항 거주민은 태풍을 피해 오는 어선들이 예리항의 주요 수입원이라 한다.
그래서 태풍이 오면 예리에서 진리까지 배 위로 걸어서 갈 지경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흑산도아가씨
홍어회에 막걸리를 마시고 노을을 바라보며 해안가를 거닐었다
해안길의 끝에 흑산도아가씨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아득한 육지를 그리워하며 서러운 세월을 살았을 그 시절을 회억해 보았다.
무심사지(无心寺址)
개인택시를 대절하여 흑산도 일주를 하기로 하였다
택시 대절료가 7만원인데 서울에서 오신 노부부와 합승하여 절반으로 줄였다.
진리 2구 마을 뒤편 도로변에 무심사 절터가 있다.
전각은 모두 사라지고 네모반듯한 축대 위에 팽나무 한 그루가 보기 좋게 자라고 있다
무심사지(无心寺址)
나무 밑동의 뿌리가 건물 부재로 추정되는 석물을 단단히 움켜쥔 모습이 인상적이다.
온전하게 남아있는 삼층석탑으로 미루어 신라 말이나 고려 초의 사찰로 추정될 뿐이다.
흑산도에서 유일한 사찰인 관음사 스님이 매일 아침 공양을 드린다고 하니 외롭지 않다.
옥(獄)섬
읍동 앞바다에는 작은 무인도 하나가 있다...옥섬(獄島).
과거 흑산도 관아에서 죄수들을 수용하던 감옥 섬이라고 한다.
섬에는 별다른 건물도 없이 죄수들이 비바람을 피해 지낼 수 있는 동굴만 하나 덜렁 있었다 한다
그런데 다리로 연결해 놓아서 옥섬이라는 느낌이 사라져 버려 매우 아쉽다.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
고갯마루에 당도하면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서 있다.
그런데 '남 몰래 서러운 세월'의 상징물로서는 너무 크고 위압적이다.
노래비 옆에는 이미자 핸드프린팅이 함께 있다.
이미자는 방송사에서 주최한 공연을 위해 2012년 9월 흑산도를 처음 방문했다고 한다.
상라봉(象羅峰 227m)
택시는 상나리고개에 정차하고 상라봉에 다녀오라고 시간을 준다.
정상에 오르는 길에 통일신라 후기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라산성이 보인다
아름다운 예리항과 올망졸망한 흑산군도의 작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열두고갯길
굽이굽이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도로를 지나야 상나리고개에 도착한다.
그 유명한 열두 고갯길로, 이 길은 상라산 전망대까지 오르는 흑산도의 명소이다.
역동적으로 용틀임하는 길옆에 나지막이 자생하는 상록수림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한반도바위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바닷가 쪽에 한반도 지도바위가 있다.
파도에 의해 기암괴석에 난 구멍이 한반도 모양과 흡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몇 걸음만 옆으로 옮기면 한반도 모양이 원형으로 바뀌어 보이는 것이 더욱 신비롭다.
하늘도로
비리마을을 지나면 허공에 떠 있는 형상의 그 유명한 하늘도로가 시작된다.
천인단애(千仞斷崖)인 이곳은 길을 내기가 도무지 어려운 지형이다.
그래서 절벽에 H빔을 가로로 박은 뒤 그 위에 다리를 축조한, 이른바 켄틸레버 공법으로 시공했다.
이 도로는 진리에서 예리까지 총 길이 25.4㎞로 공사 기간만 27년이 걸렸다고 한다.
문암산(門岩山 405m)
흑산도 최고봉인 문암산이 보인다.
문암산, 깃대봉(378m), 선유봉(300m), 상라봉(227m) 등으로 섬 전체가 산지를 이루고 있다.
등산 본능을 자극했지만 정상에는 레이더 기지가 있어 올라갈 수 없다.
지피미마을(深里)
지프미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깊은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수백년 묵은 후박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물고기솟대
사리마을에 들어서니 물고기솟대가 보였다
육지 마을의 솟대 위에는 오리가 앉아 있는데...
어청도에서는 고래가 올라앉은 솟대를 보기도 하였다.
유배문화공원
사리는 손암 정약전이 유배 생활을 하며 <자산어보>를 저술했던 마을.
1801년(순조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면서 손암은 그의 아우 정약용과 함께 유배형에 처해졌다.
다산은 강진으로 가고 손암은 우이도를 거처 흑산도까지 왔다.
정약전이 마을 아이들을 가르쳤던 사촌서당 일대는 유배문화공원으로 다듬어 꾸며졌다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터전이 어떤 이에게는 감옥이었다.
사리마을 공소
이곳 외진 마을에도 공소가 있었다.
바닷가에서 몽돌을 주워다가 지은 신자들의 정성이 눈에 보였다.
아랫쪽에서 택시 기사가 기다리는 바람에 공소의 내부는 들어가지 못했다.
복성재(復性齋)
진리로 입성한 정약전은 1807년 남쪽 사리(沙里)로 이사해 거처를 복성재라 이름 붙였다.
복성재(復性齋)란 '천주교를 버리고 성리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배교(背敎)의 댓가로 목숨을 건진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천주교와 담을 쌓고 살아갔을 것이다.
자산어보원
복성재 아랫쪽에 자산어보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정약전이 지은 자산어보에 나온 물고기들을 돌에 새겨놓았다.
그러나 이제는 자산어보 탄생의 일등공신인 장창대의 공적을 앞세워야 한다.
칠형제바위
사리마을 앞에 있는 포구에는 칠형제바위가 있다
동남풍이 불어도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섬들이 방파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파제를 만드는 바람에 섬의 경관을 완전히 망쳐버렸다.
오전 11시, 예리항에서 출항하는 여객선을 타고 흑산도를 떠나왔다
첫댓글 아주 멋지십니다, 부럽네요.
부립습니다. 짝궁은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