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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 이 시집____함종호
허무를 요리하는 법
──박소란의 『심장에 가까운 말』과 여성민의 『에로틱한 찰리』 곱씹기
함종호
자,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허무를 요리해 보겠습니다. 지난 번 방송에서 재료를 준비해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다들 준비가 됐겠죠?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요리는 재료가 생명입니다. 재료를 잘못 고르면 아무리 정성을 들여 요리를 해도 제맛이 나지 않거든요. 제가 이번에 준비한 재료는 박소란의 『심장에 가까운 말』과 여성민의 『에로틱한 찰리』입니다. 이들은 각각 2009년과 2013년에 등단했고, 이번에 처녀시집이 출간됐네요. 이렇게 새로운 요리 재료가 나오게 되면 늘 가슴이 설레곤 하죠. 처음이라는 것, 새로움이라는 것은 늘 그런 것 아닙니까? 제가 여러분들께 기회가 될 때마다 되도록 새로운 재료를 선보이려고 하는 것 또한 여러분도 저처럼 처음을 마주하는 설렘을 경험해보면 어떨까 하는 취지에서입니다.
자, 각설하고 오늘의 요리 재료를 소개해 볼까요? 오늘의 주 요리 재료는 박소란의 시편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여성민의 시편들이 맛을 돋우는 주변 재료로 활용될 거예요. 사실 이들은 매우 이질적인 재료입니다. 요리의 세계를 알고 보면 참 재미난 게 많아요. 가령 우리가 자주 먹는 찌개들을 보세요. 거기엔 온갖 것들이 들어가죠. 김치찌개를 만드는데 고기가 들어가고요, 된장찌개를 만드는데 두부나 호박이 들어가죠.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라고 부르는 것은 거기에 사용된 주재료가 김치와 된장이라는 것뿐입니다. 찌개 양에 따라 다르겠지만, 김치나 된장보다 고기나 두부·호박이 더 많이 들어간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된장찌개만 해도 그래요. 정작 들어가는 된장의 양은 1~2큰술 정도인데 비해 두부나 호박의 양은 입맛에 따라 얼마든지 많은 양이 들어가죠. 본래 손이 큰 분들이 있잖아요.
박소란의 시편들은 체념, 절망, 회피 등의 모습이 주를 이룹니다. 허무의 맛을 내기에 충분히 갖추어야 할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봐야겠죠. 물론 여성민의 시편에도 이런 요소는 몇몇 감지되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자아내도록 만드는 효과와 기술 방식 입니다. 얼핏 보기에 매우 이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한데 섞으면, 음, 뭐라 말할까. 묘한 맛이 우러난다고 할까요? 하여간 참으로 독특한 맛이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허무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가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맛이 없고(무미無味), 향이 없고(무취無臭), 색이 없다(무색無色)고 하죠. 이를테면 깊은 허무에 빠진 경우, 별로 재미가 없어요. 우스운 얘기를 해도 시큰둥해 하고요. 그리고 주변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해요. 존재감 자체가 없는 편이죠. 더욱이 무미건조하다보니 화려함 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허무라는 것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양극단은 서로 통한다는 말이 있죠? 경우에 따라선 저게 허무한 것인가 하고 의심이 들 정도로 평상시에는 잘 모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의외의 모습이 나타나곤 하죠. 박소란의 시편에다 그런 의외의 맛을 연출시키는 데에는 여성민의 시편만한 것이 아마 없을 겁니다. 여성민의 시편은 때론 발랄할 뿐만 아니라 엉뚱하기까지도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 둘은 서로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이 둘이 만나면 또 다른 독특한 맛을 풍길 수 있습니다.
이들을 가지고 오늘은 일종의 탕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물은 보통 때보다 더 많이 준비해주세요. 두 배 내지는 세 배 이상 준비해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일단 물을 끓여 재료를 한 번 데칠 겁니다. 그러니 적당한 크기의 냄비가 필요하고요, 그리고 국물을 우려낼 거니까 조금 큰 솥이 필요하겠네요. 국물을 우려낼 때 휴대용 버너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으론 안 됩니다. 오랜 시간 우려내야 하고요, 센 불이어야 하기 때문에 휴대용 버너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재료를 데치고, 국물을 우려낼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은 이번에 소개한 재료 이외에 그 어떠한 첨가물도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다룰 재료는 맛을 아주 강하게 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향신료나 기타 양념들을 잘못 곁들이면 아주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국물색도 이상해져 먹기가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우선 이렇게 조금 큰 솥에 물을 충분히 붓고 센 불로 끓여주세요. 그런 다음 물이 끓기 전까지 주재료를 손질해둡니다. 오래 국물을 우려내야 하니 주재료를 먼저 손질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오늘 요리의 주재료인 박소란의 시편을 먼저 꼼꼼히 손질해볼까요? 요리는 재료 손질부터가 시작입니다. 일단 박소란의 시집을 전체적으로 둘러보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손질할지 꼼꼼히 살펴본 후 결정해야 합니다. 나름 인과관계를 구성해보는 것이죠. 재료 손질은 시간과 노력을 많이 요하는 작업입니다. 그 다음에 거기에 맛을 더해주는 여성민의 시편을 같은 방법으로 살펴보면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여성민의 시편을 박소란의 경우처럼 인과관계까지 구성해가며 세세히 손질할 필요까진 없겠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선 자칫 성의 없어 보일 수도 있겠는데요, 여성민의 시편 각각이 재료 전체의 특성을 일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리고 한 번 데친 다음에, 주재료를 넣고 우려낸 국물에 이를 첨가하여 그 맛을 한층 더해주는 역할을 할 거니까 대강 손질해도 되겠습니다. 가령 무를 넣고 국물을 우려내는 경우를 연상해보세요. 듬성듬성 잘라낸 무를 국물에 넣고 우려낼 때 제맛이 나듯이, 때론 거칠게 손질하여 주재료와 한데 섞는 것이 맛을 한층 더 깊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준비가 어느 정도 됐으니, 이제 박소란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긴 부분부터 꼼꼼히 살펴보죠.
방문 앞 수돗가에서 오줌을 싸요 엄마는
밤낮 터질 듯 충혈된 가랑이를 내벌려요 병든 집들을 빽빽이 둘러멘 앞산 구릉처럼 어금니를 앙다물고, 하지만 웬걸요
문드러진 잇새론 이내 흥건한 신음이 터져나와요
나는 꾹 참았다 밤에만 싸요 아무도 몰래 치마 속을 비집고 든 높바람이 막무가내로 온몸을 휩쓸고 가면
하수구 아린 구멍엔 우스꽝스러운 이끼만 돋아나요 우죽우죽 나는 자라나요
비가 오는 날이면 지린내는 온 동네를 뒤덮어 세수를 하다가도 이를 닦다가도 우욱우욱 종일 헛구역질을 해대는 집
담장 아래 웃자란 꽈리처럼 젖이 부푼
스무살 언니는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아요 들어와도 집에서 오줌 싸지 않아요 더이상 아무도 집으로 놀러 오지 않아요
마스크를 쓴 구청 직원들 킬킬거리며 쓰러져가는 양철문을 두드릴 때마다 대책 없이
오줌소태를 앓는 집 대책 없이
휘늘어지는 새벽이면 오줌줄기는 더욱 힘차고 억세 거짓말처럼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어요 싸늘한 머리맡이며 금 간 벽 틈으로 끝없이 넘쳐흐르는 오줌에 두둥실
집이 떠내려가는 꿈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엄마와 언니와 내가 손을 맞잡고 그득히 출렁이는 오줌 위를 떠다니는 꿈 끝내 정박하지 못한
― 박소란, 「화장실이 없는 집」 전문
슬픔은 마치 양파와 같습니다. 껍질을 벗기면 벗길수록 진한 눈물을 자아내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격하게 감정몰입을 하게 되면 실수할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세요. 생각해보세요. 손에 양파 액이 묻은 것을 미처 모르고 자신의 눈을 만졌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느 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박소란의 시편을 손질할 때 필요한 자세입니다.
‘먹고 싼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이 둘은 우리네 일상생활에서 기본 중의 기본에 해당하는 것이죠. 먹는 문제야 다들 인정하시겠지만, 싸는 문제도 그만큼 중요하죠. 많이 먹었다면 많이 싸야 하는 것 아닙니까? 누구든지 많이 먹길 바란다면, 그것은 싸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겁니다. 어쩌면 먹는 것보다 싸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위 시를 보니 바로 싸는 것이 문제네요. 참혹하기조차 합니다. 여기서 ‘싸는 행위’는 단순히 생리적인 현상에 국한된 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싸는 행위’는 해소의 차원과 관련성이 더 큽니다. 문제는 자꾸 쌓이는데 해소될 여지는 전혀 없는 막막한 상태. 그것이 「화장실이 없는 집」의 상태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자꾸 움츠러들기 마련이죠. 이렇게 되면 급기야 세상과의 단절을 꾀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마치 “마스크를 쓴 구청 직원들”처럼 “킬킬거리며” 비웃는다고 생각하는 것, 물론 얼마든지 실제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이 또한 더욱 세상과의 단절을 조장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사로잡히게 되고, 경우에 따라선 이와 같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터무니없는 환상의 세계를 욕망할 수도 있겠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급기야 터진 “끝없이 넘쳐흐르는 오줌에 두둥실// 집이 떠내려가는 꿈”과 같은 것 말입니다.
어, 이거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겠는데요. 상처가 생각보다 깊어요. 이 재료에서 깊이 우러나는 허무의 맛, 그 근원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삶의 근거들이 상실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때 허무의 맛은 스멀스멀 생겨납니다. 음식 맛에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자꾸 먹다보니 생기는 집착 같은 것 말입니다. 제 친구 중 하나는 짜장면을 먹을 때 고춧가루를 거의 쏟아붓다시피 합니다. 짜장면을 춘장으로 섞는지, 고춧가루로 섞는지 모를 정도로요. 그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조금씩 조금씩 그 양이 늘어나게 된 거죠. 맛의 중독도 그런 것입니다. 처음엔 조금이다가 나중엔 눈덩이처럼 불어나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 허무의 맛 또한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
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대기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 박소란, 「주소」 전문
대개 집은 삶의 터전을 대표하지요. 그런 맥락에서 집은 존재의 근원, 바탕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박소란 시인에게 집은 ‘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려야 가닿는 꼭대기”, 즉 ‘종점’에 있습니다. 종점終點은 끝 지점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에게 삶의 터전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존재론적인 끝인 셈이죠. 삶을 바로 그 끝에서 영유한다는 것, 그것만큼 절망적인 상황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것도 언제나 ‘늘’ 그래왔다면 더욱 절망적이겠군요. 사람들은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주변과 단절된 채 절대적인 고독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는지도 모릅니다. 허무는 그렇게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이 재료의 경우 손질할 때 칼을 깊이 넣어야 하는 이유 말입니다. 덜어낼 부분의 뿌리가 생각보다 아주 깊어요. 그러니 다치지 않게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삼양동 시절 내내 삼계탕집 인부로 지낸 어머니
아궁이 불길처럼 뜨겁던 어느 여름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까무룩 꺼져가는 숨을 가누며 남긴
마지막 말
얘야 뚝배기가, 뚝배기가 너무 무겁구나
그후로 종종 아무 삼계탕집에 앉아 끼니를 맞을 때
펄펄한 뚝배기 안을 들여다볼 때면
오오 어머니
거기서 무얼 하세요 도대체
자그마한 몸에 웬 얄궂은 것들을 그리도 가득 싣고서
눈빛도 표정도 없이 아무런 소식도 없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느른히 익은 살점은 마냥 먹음직스러워
대책 없이 나는 살이 오를 듯한데
어찌 된 일인가요
삼키고 또 삼켜도 질긴 허기는 가시질 않는데
― 박소란, 「배가 고파요」 전문
절망의 끝에서, 허무 그 자체인 삶의 공간에서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은 어떤 모습일까요? 칼을 깊이 넣어 그 뿌리에 닿았다고 생각이 들면 주저하지 말고 꺼내들어 보세요. 그럼 이처럼 엉뚱하게도 어머니의 모습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에겐 살아생전 ‘삼계탕집’에서 일해온, 그리고 ‘뚝배기’만큼이나 무거운 삶의 고통을 지고 힘겹게 살아온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리곤 “폐암 말기의 어머니”를 “일찍이 반지하 시린 윗목”에 방치한 채 “중고 산소호흡기를 들여놓고” “장의사 명함만 만지작거렸”(「체념을 위하여」)던 슬픈 추억만을 떠올릴 뿐입니다. 그러니 이 시에서처럼 “마냥 먹음직스러”운 삼계탕을 앞에 두고도 “삼키고 또 삼켜도 질긴 허기”를 채울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아까 파낸 자리 옆으로 이동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떨까요? 보통 사람들 가슴에 영원히 설렘과 그리움으로 남는 첫사랑의 경우 말입니다. 어, 그런데 그는 “내 불온했던 첫사랑”에게서 “부패한 추억의 냄새”(「미자」)가 난다고 고백합니다. ‘집’에서 야기된 존재론적 허무는 이처럼 사랑조차도 꿈꾸지 못하게 만들어버렸군요. 그에게 허무는 참으로 지독합니다.
다른 자리에서 그는 “언제부턴가 세상의 모든 인사는 작별 인사”(「안부」)이고, “어떤 의문부호도 참견하지 않는 명백한 죽음만이/ 내 오랜 꿈”(「망명」)이라고도 말합니다. 가령 “핏발 선 고등어의 눈이나 찢긴 살갗으로 비어져나온 시금치의 부패한 내장”이 “아침상에 한 무더기의 시신”(「장葬」)으로 떠오르는 절망적인 삶, 이것이 이 재료가 가지고 있는 허무의 맛, 그 진상입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희망과 야합한 적 없었다 결단코/ 늘 한발 앞서 오던 체념만이 오랜 밥이고 약이었”(「체념을 위하여」)던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누군가의 마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 // 그렇게 가고도/ 아침은 왜 끝끝내 소식이 없었는지/ 이제는 이해한다”(「푸른 밤」)라는 그의 전언은 깊은 곳에 자리한 허무의 맛을 고려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재료를 손질하는 손에 더러운 것이 묻지 않았다면, 재료 곳곳을 부드럽게 눌러주세요. 얼핏 보기에 이 재료는 매우 딱딱하고, 손만 대도 튕겨져 나갈 것 같은 탄력 또한 매우 강해 보이지만 이처럼 부드럽게 눌러주면 신기하게도 어느새 말랑말랑해집니다. 허무를 맛내는 것들이 대개 이래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안으로 견고해지고, 더러는 주변의 손길을 강하게 밀쳐내곤 하지만 정말 따뜻한 손길을 건네주면 이렇게 말랑말랑해지면서 부드러워집니다. 언젠가 제가 말한 적 있었죠? 요리도 결국 사랑과 관심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한 요리 방송, 어떻습니까? 저도 모르게 그만 방송 피알을 했네요.
어디 보자. 주재료가 충분히 말랑말랑해졌는지 살펴봅시다. 어떻습니까? 충분히 말랑말랑해졌습니까? 그렇다면 물이 팔팔 끓는지 솥을 열어보세요. 충분히 끓고 있다면 조심스럽게 물에 넣어주세요. 잘 아시죠? 급하다고 무심코 넣으면 뜨거운 물이 튀어 큰일납니다. 생각보다 주재료가 근중이 나갑니다. 자, 이렇게 주요리 재료 준비를 마쳤다면, 이제 주변 재료를 손질해야겠군요. 주변 재료를 어디에 뒀더라~. 아, 여기 있군요. 제가 이렇게 깜박깜박합니다.
가령 이런 식, 비가 내리거나 시럽을 듬뿍 넣은 카페라테를 마시거나 비가 내리거나 외롭지 않기 위해 동물원에 가거나 비가 내리거나 흔들리며 흔들리며 비가 내리거나 가령 이런 식, 가까운 숲에서 먼 숲으로 길이 사라지는 지하에서 옥상으로 계단이 사라지는 508동에서 511동 뒤편으로 손전등 불빛이 사라지는 지상에 먼저 도착하기 위해 아이가 신발을 벗는 그러니까 가령 이런 식, 국경선의 한 무리 양 떼 옆에 딱딱한 빵을 뜯다가 세 개의 강에서 올라오는 푸른빛을 보며 무릎을 만지는 경계병 소년 옆에 에이케이소총 옆에 소년은 모두 손가락이 길다 케네디는 아직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쓰레기를 뒤지는 개 축구공이 터진 공터 깨진 유리창으로 햇살이 스며드는 스타벅스 매장 옆에 콘크리트 철근에 매달린 트랜지스터라디오 옆에 오줌을 누다가 길의 끝을 바라보는 어린 소녀의 눈동자 옆에, 죽은 눈, 죽은 눈, 그러니까 길의 끝에서 아무것도 오지 않는
― 여성민, 「무엇이 오는 방식」 전문
박소란의 시편이 가지고 있는 허무의 맛을 잘 살리는 데에는 여성민의 시편 만한 것이 없다고 좀전에 말씀드렸는데요, 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시는 마치 일종의 돌림노래 같기도 합니다. “비가 내리거나”, “시럽을 듬뿍 넣은 카페라테를 마시거나”, “동물원에 가거나” 하는 행위들이 우연적으로 계속 연결됩니다. 이들 사이에 필연성이란 찾아볼 수 없죠. 그러다가 급기야 “…… 오줌을 누다가 길의 끝을 바라보는 어린 소녀의 눈동자 옆에, 죽은 눈, 죽은 눈, 그러니까 길의 끝에서 아무것도 오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무엇’이 온다고 말하네요. 여기서 ‘무엇’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무엇’ 대신에 그 어떤 다른 것을 넣어도 그것 나름대로 의미는 통할 것처럼 보입니다. 얼핏 보기에 그저 개인이 추구하는 맛과 기호에 맞춰 아무것과 곁들여 먹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 시의 분위기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죠. 비가 내리고, 뭐가 자꾸 사라지고, 쓰레기를 뒤지고, 창이 깨지고, 죽은 눈이 있고 등등, 분명한 것은 어둡고 침울하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믿음’이니, ‘희망’이니, ‘사랑’이니 하는 밝고 아름다운 말들을 ‘무엇’ 대신 넣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요? 하여간 밝고 아름다운 말이 뜻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어둡고 침울한 것들은 이렇게 우연적으로 계속해서 아무렇게나 생겨난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금상첨화이지 않나요? 만약 ‘무엇’ 대신에 허무를 넣어보면 어떨까요? 허무도 그렇게 우연히 계속 생겨날 수도 있을 테니 말이죠. 이렇게 여성민의 시편은 박소란의 시에서 풍기는 허무의 맛을 십분 살려내기에 충분합니다. 박소란의 시에서 허무는 필연적으로, 결정론적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여성민의 이 시를 접목해보면 그것은 우연적으로 계속해서 생겨날 수 있는 요소를 또한 포함하게 될 테니, 참으로 그 허무의 맛이 한층 더해지지 않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우러나는 깊은 맛, 왠지 기대가 되네요.
강한 맛을 내는 재료에는 때론 강한 양념이 어울리곤 합니다. 어렸을 때 참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장면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어른들이 매운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고추도 매운데 거기에 또 매운 고추장을 곁들여 먹는 모습. 그 당시엔 참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장면이었는데 요즘은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일종의 상쇄 원리죠. 이열치열이라고도 하지 않나요? 자고로 강한 맛은 강한 맛으로 다스려야 하는 법이죠. 그러니까 박소란의 그 깊은 존재론적 허무를 다스리려면 이 정도 강한 재료가 아니면 안 됩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있고 앨버트 까뮈가 있다 참을 수 있는가 앨버트는 무엇인지 제임스 딘처럼 오늘밤 연애를 위해 낭만주의자들이 속에 입은 속옷일까 부드럽고 감촉이 좋은 것 같지만 막상 앨버트 앨버트 앨버트만 꺼내 불러보면 앨버트는 딱딱하고 색이 없다 앨버트는 구조가 없다 구조가 없는 앨버트에게 구조에 관해서 설명하기란 쉽지 않아서 앨버트 어디 있는가 물에 빠진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있고 앨버트 까뮈가 있다 우리가 자넬 구조하러 왔다네 앨버트 보트를 타고 손전등을 비춰보지만 앨버트는 보트보다 애인들의 입술 위에 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을 알베르트라고 부르는 앨버트의 애인이 있고 앨버트 까뮈를 알베르라고 부르는 앨버트의 애인이 있다 참을 수 있다 애인은 앨버트처럼 색과 구조를 갖지 않으니까 부드럽고 감촉이 좋으니까 파고들기 위해서 앨버트 하고 부르지만 파고드는 순간에는 구조가 발생한다 앨버트 하고 부르는 순간에 앨버트는 사라지고 구조만 남는다 구조를 가진 하얀 방처럼 구조를 갖는 검정 앨버트를 참을 수 있는가 그렇게 되면 구조를 가진 앨버트와 구조를 가지려는 앨버트들이 있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참아야 하는 것은 뭘까 앨버트
― 여성민, 「앨버트」 전문
자, 이제 이 재료를 살짝 데쳐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조금 넣고 데치는 경우도 있는데, 제가 보기에 이 재료에는 맞지 않는 방법 같아요. 왜냐하면 기름에 데치는 경우 프라이팬에 눋지 않도록 요리 재료를 살살 저어주어야만 하는데, 자칫 잘못 하다가는 많이 튈 수 있거든요. 이 시처럼 톡톡 튀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면 많이 튀니까 잘 젓지 못하게 되고, 그렇다 보니 자꾸 눋게 되고, 그래서 기름에 타 누린내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면 허무의 그 강한 맛이 변질되어 이상한 맛이 나게 됩니다. 그러니 기름에 데치는 것은 피하고 끓는 물에 데치는 것이 좋아요. 그런데 왜 음식재료를 데치는지는 잘 아시죠? 데치면 씹는 질감도 좋아질 뿐만 아니라 재료에 담긴 영양소를 충분히 잘 섭취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데치면서 보니까 이 시는 참 재밌네요. 이것이 어쩌면 오늘 요리에서 함께 섭취해야 하는 필수영양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무한 삶 속에서 자칫하면 잃어버리기 쉬운 바로 재미 말입니다. 이 재료는 언어유희적인 측면이 강해요. “앨버트”가 자꾸 대상을 바꿔가면서 반복 내지는 변주되는 무한증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발상이 기발하고 톡톡 튀지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이렇게 무한증식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우리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에서 생겨난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리곤 이내 물음을 던지네요. “우리가 참아야 하는 것은 뭘까”라고 말이죠. 어쩌면 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이렇게 유희를 벌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늘 진지하고, 늘 진지한 것만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떡 하니 양산하곤 하잖아요. 그것을 견디는 힘, 그것이 어쩌면 유희인지도 모릅니다. 박소란의 허무를 여기에 적용해볼까요? 그는 허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언제나 정론의 입장에서 드러내놓습니다. 그가 그의 깊은 허무를 감정의 과잉 없이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의 비결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요? 정면으로 부딪쳐 사유하지만 늘 부서지고 깨지는 것은 결국 본인 아닙니까? 그래 가지고는 견딜 수가 없어요. 좀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한 번 재밌게 변주시켜 보는 거예요. 어때요? 허무가 마냥 거대한 크기로 마주 서 있는 것만은 아니죠? 이것이 박소란의 시에 여성민의 시를 곁들여 먹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때론 진지하게, 때론 장난스럽게. 허무의 진가를 맛보려면 어디까지나 객관적이고 냉철한 미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때론 깊이 다가가서 진지하게 사유해볼 필요도 있지만, 이렇게 때론 멀리 떨어져서 재밌게 장난을 쳐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죠.
그늘을 보면 누군가 한 번 접었다는 생각이 든다 길에서 누군가를 만나거나 잃어버린 삶이 이쪽에 와 닿을 때 빛과 어둠 사이 오늘과 내일 사이
수긍할 수 없는 것을 수긍해야 하는 날 접을 곳이 많았다 접은 곳을 문지르면 모서리가 빛났다 창문과 절벽은 무엇이 더 깊은가
어떤 대답은 갑자기 사라졌다 모서리가 사라지듯 그런 날은 거리에 전단지가 수북했다 수도자의 발자국처럼 바람에 떠밀리며 가는
죽은 자들의 창문이거나 한 장의 절벽
버릴 수 없는 고통의 한쪽을 가장 잘 접은 곳에서 귀는 생긴다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몇 번 접으면 꽃이 되듯
종이처럼 눌린 분노를 접고 접으면 아름다운 거리가 된다
어떤 창문은 천년 동안 절벽을 누른 것이다 창을 깨면 새들이 쏟아진다 죽은 새를 접으면 고딕의 지붕 접은 곳을 펴면 수도자의 기도는 다른 영역으로 들어간다
아침에 일어나면 거리는 깨끗했다 기도하기 위해 손을 모으면 지붕의 모서리가 보였다 지붕에 지붕을 업으면 죽은 새 손을 찢다 자꾸 죽은 새
― 여성민, 「접은 곳」 전문
이 시는 박소란에게서는 쉽게 찾을 수 없었던 밝은 빛이 발견됩니다. 저는 여기서 ‘발견’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발견’이라는 말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관점에 따라 이 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본래 맛이라는 것이 그래요. 나는 참으로 맛있는데, 타인은 맛없다고 할 수도 있는 것. 이 시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다음의 구절들이 참고가 될 것입니다. “그늘을 보면 누군가 한 번 접었다는 생각이 든다”, “수긍할 수 없는 것을 수긍해야 하는 날 접을 곳이 많았다”,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몇 번 접으면 꽃이 되듯”, “종이처럼 눌린 분노를 접고 접으면 아름다운 거리가 된다” 등의 행간을 한 번 천천히 음미해보세요.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틈이 보이지 않나요? 비록 ‘깨끗한 거리에 자꾸 죽은 새’가 있어 ‘수도자의 기도’와 같은 종이를 접고 펴는 행위가 계속될지라도 말입니다.
자, 이제 데치는 과정도 얼추 끝이 났네요. 그러면 이것을 좀 전에 국물을 우려내려고 준비했던 솥에 이렇게 넣으면 됩니다. 그런 다음에 대략 3,40분 정도 더 끓입니다. 방송은 시간 제약이 있기 때문에 제가 미리 준비해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재료를 손질하고, 준비했던 과정을 그대로 똑같이 하면 이런 요리가 만들어집니다. 기왕이면 이렇게 투명한 대접을 준비해두세요. 그래야 음식을 시각적으로도 맛볼 수 있으니까요. 자, 그러면 김이 이렇게 모락모락 나는 솥의 뚜껑을 열고 국물을 이 투명한 대접에 덜어보겠습니다. 어때요, 색이 참 이쁘죠? 방송 시작할 때쯤 허무에는 흔히 무미, 무색, 무취의 특성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네요. 좋은 재료들이 만나 한데 잘 어우러지면 이렇게 훌륭한 색을 내기도 합니다. 향은 어떨까요? 뭐라 말하기 어려운 향이 납니다. 칡을 삶았을 때 나는 향에 가깝다고 할까요? 뭔가 뿌리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향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번엔 맛을 한 번 보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저만 맛봐서. 뭐랄까, 처음엔 조금 쓴맛이 납니다. 아마 허무의 성질이 강한 주재료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입맛을 다셔보면, 은근하게 묘한 단맛도 나네요. 그렇다고 아주 달지는 않아요. 쓴맛에 더 가까운데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진 않습니다. 입맛을 돋우는 여운이 있다고 할까요? 요즘 인스턴트다 뭐다 해서 상당히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게 되는데요, 그럴 때 느끼하기도 하잖아요, 질리기도 하고요. 이때 이 탕을 한 번 먹게 되면 개운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통 한방에 의하면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든 이 요리는 심신이 쇠약해진 젊은이에게 기운을 돋우는 데에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젊은이들 세상 참 살기 힘들죠? 그렇다면 이렇게 한번 허무를 요리해 먹어보면 어떨까요?
이제 어느덧 방송을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 방송의 부제가 ‘곱씹기’잖아요. 그런데 ‘곱씹다’를 사전적으로 보면 두 가지 뜻이 있어요. ‘의미를 곰곰이 새기다’와 ‘음식을 거듭하여 씹다’. 오늘 함께 만들어본 요리에 참 어울리는 말 아닙니까? 허무에 대한 의미를 곰곰이 새겨보고 거듭하여 씹어먹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허무를 딛고 당당히 일어설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이것으로 오늘 요리 방송을 마치겠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함종호 / 저서 『시, 영화, 이미지』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