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
문희봉
아침에 일어나 맑지 않은 머릿속을 비워내려 밖을 내다봤다. 맑지 않은 이 기분은 간밤 음주 탓이려니, 내 기분 탓이 아니려니, 소주 대여섯 잔과 늦은 취침에 원인을 돌려본다.
몇 년째 동거인지 모를 화초들. 주인의 관심은 멀어졌고, 하여 강한 놈들은 살아남고 여린 놈들은 스스로를 마무리 지어버렸다.
행복은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나는 향기로운 차 한 잔으로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들길을 지나가다가 무심히 홀로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앞에서도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초원의 거친 바람이 들꽃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만든다. 거친 바람에 살아남으려면 벌과 나비를 불러야 하고, 그러려면 더 아름답고 더 향기로워야 한다. 나를 몸부림치게 하는 거친 바람이 나의 인생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한다. 그런 들꽃을, 잡초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나에게는 없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녀석들을 버릴 수 없으니 오랫동안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지난 겨울도 살아남을 녀석들만 살아남았다. 호야, 다육이, 에플민트 등은 겨울에 죽었다. 봄이 되면 새순을 피워내는 이름을 까먹은 화초도 새순을 피워 올린다. 오래된 그루터기 속에서 봄이 되면 항상 새순을 밀어 올리는 끈질긴 생명력에 경외를 느낀다.
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섰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다 호야 화분에 뿌리를 내린 잡초가 눈에 띈다. 호야가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줄기를 들어 올려 잡초의 뿌리를 뽑아낸다. 뽑아도 뽑아도 끈질기게 번식하는 잡초. 나는 너를 잡초라 하지만 너에게 넌 잡초가 아닐 거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한 개의 화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호야와 잡초에겐 누가 객식구일까를 생각한다. 잡초에게 호야가 불청객일까. 호야에게 잡초가 불청객일까. 그런 잡초에게 나는 종족의 씨를 말리려 드는 무지막지한 점령군이 아닌가? 잡초에게도 희망이 있다. 아무런 생각 없는 곳에서도 생겨나는 것이 희망과 꿈이다. 희망은 희망을 갖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 희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고, 희망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도 희망은 없다. 잡초라고 해서 희망이 없는 삶을 추구할까.
나는 누군가의 공간에 침범하여 잡초 같은 존재가 되어 본 적이 없었던가?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다. 예쁘게 보면 곱게 피는 꽃 아닌 사람이 없다. 상대를 꽃으로 보면 모두가 꽃인 게다. 씨앗이 자라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듯이, 마음씨도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나도 누군가를 내 공간에 침범한 잡초 같은 존재라 여겼던 적도 있었겠지. 문득 내 존재에까지 생각이 밀쳐들어 뽑아낸 잡초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다 잠깐 동안의 가치도 없을 미안함을 거둬들였다. 벌은 잡초에게서도 꿀을 딴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수정을 도와준다. 잡초를 뽑지 않고 적당히 놔두면 농작물들은 그것들과 경쟁하느라 성장이 한결 빨라진다. 농약을 뿌리지 않아도 병충을 이겨낼 만큼 야생화한다.
봄은 정지된 것을 움직이게 하고, 고여 있던 것을 흐르게 한다. 사물은 대지인 어머니의 젖 냄새를 맡고, 잠깬 애벌레처럼 까불기 시작한다. 오직 순하고 부드럽고 아름답기만 한 어머니는 ‘초유’를 먹여 만물을 살린다. 이 살림의 힘으로 꽃들이 피어난다. 어머니가 주는 저 ‘초유’를 잡초가 먹어서는 안 되는가.
오늘도 여전히 꽃가루인지 미세먼지인지 모를 것들로 하늘은 맑지 못하고, 그것들에 취약한 나의 섬세한 콧등은 ‘에취 에취’ 재채기를 해댄다. 올해도 벌써 2분의 1이 후딱 지나가 버렸고, 내 수명이 100살까지라면 난 내 인생의 7부 능선을 넘은 건가? 모양새가 그리 곱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언제든지 맘 편하게 쓸 수 있고, 허전한 집안 구석에 들꽃을 한아름 꺾어 풍성히 꽂아두면서 어울릴 만한 질박한 항아리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비가 내린다. 마른 가뭄을 해갈하는 비다. 비는 땅의 생물들이 받아먹으라고 내리는 하늘의 선물이다. 땅이 받아먹고 남은 것은 아래로 보낸다. 비는 웅덩이를 만들고 골을 만든다. 빗물 괸 웅덩이에는 하늘이 내려온다. 비는 잡초도 사랑하고, 화초도 사랑하고, 옥수수도, 벼도, 고구마도 똑같이 사랑한다.
세월은 참 빠르다. 비록 잡초 같은 삶이지만 숙제하듯 살지 말고, 축제하듯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