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raining(비오는 뉴욕)
비가 오고 있었다.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비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오래 전에 이 지구상에 살던 사람들은 비에 살고 죽는 줄 알았을텐데 오늘날 도시인들에게 비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대부분 비는 일상의 삶을 번거롭게 만드는 부담일 뿐이다. 우선 손에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고, 그 우산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여 있는 물이 튀어서 옷을 버려 본 사람에게 비 오는 날은 최악의 날 가운데 한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에 나는 비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도시에 살고 있는 나에게 비는 반가운 대상이 아니라고 해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비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절대적으로 비가 그들의 삶에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도시에 살면서 비오는 것에 대해서 귀찮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이기심이리라. 언제부턴가 우리 삶은 비오는 것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달리한다면, 그래서 내게 불편한 것이라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그 불편을 용납할 수만 있다면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이 나라가 새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 아침에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비가 오고 있다고 생각하니 여행중이라고 해도 불평하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미국에서의 첫날 아침식사를 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베이컨, 소시지, 달걀, 샐러드와 과일 그리고 콘프레이크등으로 되어진 식사를 셀프로 먹는 뷔페는 우리가 미국에서 돌아오는 날까지 어쩌면 그렇게 지역이 달라도, 호텔이 달라도 똑 같은지 참 신기할 정도였다. 나처럼 애국자(국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국이 없다는 것은 고문과도 같은 일이다. 대신 신선한 주스를 마실 수 있었던 것이 약간의 위안이 되었다. 귀국 하루 전 보스톤에서 된장국을 먹었을 때의 그 감격은 애국자가 아닌 분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 맨해튼을 향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면서 주유소의 기름 가격을 보게 되었는데 눈에 띄었던 것은 휘발유 값과 경유의 값이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휘발유가 2달러 87센트였고, 경유는 2달러 83센트였다. 이 가격은 갤런을 단위로 하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미국의 기름값은 싼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갤런(gallon)은 영국과 미국에서 사용하는데 서로 그 용량이 다르다 미국 갤런은 231 in3, 즉 3.785329ℓ의 부피를 말한다. 1리터에 1,600원 정도하는 우리나라와 비교한다면 미국의 기름값은 1리터당 700원을 약간 넘는 것이다. 누군가 기름 값이 싸다고 하길래 생각해보니 미국은 산유국이 아닌가? 우리나라 앞바다에도 기름이 좀 터저 나왔으면 좋겠다. 그것도 아주 많이 ^^*
가이드가 그 특유한 호흡과 음색으로(그 음색은 내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을 연상하게 했다. 실제로 눈을 감고 들으니 정말 비슷했다.) 뉴욕과 맨해튼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동부 그중에서도 뉴욕,뉴저지,코네티컷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지역이고, 뉴욕이 워낙 물가와 주거비용이 비싸기 때문에 뉴저지가 마치 뉴욕의 베드타운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약32만명의 한인이 이 3개주에 살고 있으며 한인교회도 650개 교회 이상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어디에 가나 교회는 한국인들에게는 신앙과 공동체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유대인들도 나라를 잃고 흩어져도 성인 20명이상만 있으면 회당을 세웠지 않은가?
가이드는 미국 전체의 고속도로의 길이를 합하면 4천만 km라고 했다. 크긴 큰 나라다. 뉴욕에서 80번 고속도로를 타면 샌프란시스코까지 갈 수 있다고 했는데 그 거리는 약3,148마일(1마일은 1.6093km다.) 정도라고 했다. 감을 못 잡는 우리에게 가이드는 웃으며 말했다. “서울에서 방콕거리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이 나라의 고속도로도 짝수 번호는 가로로 국가를 횡단하고, 홀수번호는 나라를 남북으로 횡단하는 식으로 번호가 매겨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뉴욕에서도 버스전용차선을 시행하는데 통근용으로 사용하는 버스만 이용하도록 되어있다고 했다.
우리가 지나왔던 링컨 터널을 통해서 도심으로 들어서면서 가이드는 터널안의 공기를 정화하기 위해서 매 30초마다 터널의 아래에서 신선한 공기를 내뿜는다고 했다. 그래서 터널안의 공기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이민 온지 20년이 넘은 그가 그 사실을 여러번 강조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젠 그도 'New yorker'가 다 되었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정책을 입안하는 분들도 그런 배려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곧 우리는 교통 혼잡을 경험하게 되었다.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서 설치해 놓은 톨게이트(유료)를 지나서 터널안의 좁은 차선으로 여러 차선의 차들이 진입하다보니 교통이 막힐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뉴욕에서는 터널마다 앞에 사용료를 받는 톨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어서 돈을 받았다. 요금은 우리나라처럼 차량의 크기에 따라서 차등으로 적용되었고, 만약에 요금을 내지 않고 통과하면 엄청난 벌과금이 청구된다고 했다. 뉴욕인구가 약1950만명인데 비해 차량은 2천만대가 넘는다고 했으니 교통이 막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같았다. 그래서 주차요금이 비싸기로 유명한데 주차비가 비싼 곳은 1시간에 15달러를 받는다고 한다. 가이드의 말이 끝났을 때 내가 우연히 쳐다보게 된 한 주차장 광고에는 1주일동안 80달러에 주차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싼데도 있어야 없는 사람들도 살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더욱 이런 심증을 굳히게 된 것은 Jack's world라고 씌여진 한 잡화상점의 간판이었다. 그 간판에는 2층에는 99센트짜리의 물건이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1000냥 하우스를 미국의 중심 뉴욕의 맨해튼에서 보다니 사람 사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괜한 웃음이 나왔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나라처럼 교통 혼잡이 더 심해지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최고의 나라인 미국도 교통정책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는 가 보다. 우리들은 거의 뉴욕시내 한복판까지 거의 1시간 30분 이상을 버스를 타고 지루하게 이동해야 했다.
우리는 우선 맨해튼의 한 식당(금강산)으로 먼저 향했다. 호텔에서 나와 왜 식당이냐고?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유럽과 달리 뉴욕시내에서는 화장실 사용료를 받지 않았지만 낯선 이방인들에게 화장실을 잘 빌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화장실을 빌려주었는데 그곳에서 마약을 하거나 범죄에 이용될 될 경우에는 주인도 처벌을 받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동포애를 발휘하는 식당으로 가서 화장실을 다녀왔다. 역시 바다를 건너가서도 피는 물보다 진했다. 대~한 민국!
비를 맞으면서 뛰어다니다가 결국 한아름 슈퍼마켓(한국인이 경영하는 마켓)을 들러 우산을 샀다. 그리고 어디서 만들었을까?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made in china'였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우산 값을 진행부에서 지불해 주셨다. 한 장로님 파이팅!
미국상점(캐나다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에서 판매하는 공산품의 대부분은 중국산이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면서 거리를 자세히 살피고 사진을 찍었지만 비가 오는 관계로 사진들이 선명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이드의 설명을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뮤지컬 극장가로 알려진 브로드웨이(Broadway)는 길이 동서로 구불구불하게 굽어 있는데 실제로 극장가는 일부라고 했다. 그는‘Off Broadway'라는 말을 소개했는데 무명으로서 브로드웨이에서 뛰고 있는 연극배우들의 무대를 말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대학 때 잠깐 연극계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그들의 기나긴 무명시절의 어려움을 공감했다. 그리고 지금도 혜화동 대학로에 가보면 살아남기 위해서 몸서리처질 만큼 열심히 뛰고 있는 연극인들이 우리들에게도 있다. 가이드는 그런 대표적인 배우로 ‘더스틴 호프만’을 말했다. ‘레인맨’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연기는 지금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탁월했다. “그래 연극이 바탕이 되야 생명이 긴 배우가 되더라.”-서목사 생각!
미국 최초의 수도가 어디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뉴욕이다. 뉴욕은 미국이 독립할 당시의 수도였다고 한다. 1904년에 처음으로 뉴욕에 지하철이 생겼다고 했다. 내가 제일 처음 지하철을 타 본 것이 1974년8월15일이었다. 우리 집이 동대문 역 바로 앞이었기에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타보았기 때문이다. 지하철만 놓고 본다면 한국과 미국은 70년의 차이가 난 것이다. 그러나 뉴욕의 지하철보다 더 먼저 지하철이 생긴 도시는 보스톤이라고 했다. 1902년에 보스톤에는 지하철이 굴러다녔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버스를 타고 우리는 광장을 돌고 있었다. 워싱턴 Plaza(광장)이라고 해봐야 조그마한 동네 공원같은 규모였지만 초대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기념하는 광장이라고 했다. 골목을 돌면서 가이드는 Le figaro 까페를 소개했다. 유명한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출연했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나온 까페라고 했다. 맨해튼의 남동쪽으로 차이나 타운이 있는데 뭘로 유명한지 아느냐고 했다. 대충 짐작을 하고 있었고 역시 그랬다. ‘짝퉁’ 중국은 짝퉁에 신바람이 나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했다. 차이나 타운에서 산 시계는 녹도 쓰는데다가 가방이나 옷은 색이 빠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역시 짝퉁의 원조는 한국의 이태원이 아니냐며 웃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좀 다르다. made in Itaewon은 브랜드 아닌가?^^*
가이드는 중국인들의 무서운 단결력도 말해주었다. 불법이민자들이 차이나 타운으로 숨어들면 거의 적발해서 내보내가 어렵다고 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보호해주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응징한다고 했다. 차이나 깽이 무서워서 흑인 깽들도 차이나 깽을 무서워한다고 한다.
누군가 이런 우스개 소리를 했다. 뉴욕의 깽들의 먹이사슬이 있다고 우선 흑인깽들은 한국깽들을 무서워하고, 한국깽들은 중국깽들을 무서워하고, 중국깽은 베트남깽을 무서워하고, 베트남깽은 흑인깽을 무서워한다나. 아무튼 한번 웃자고 한 얘기겠지 하고 넘겼다.
미국에서 사치하는 여자를 놀릴 때 ‘자유의 여신상 같다’고 한다고 가이드가 말했지만 왜 그렇게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드디어 버스는 우리를 배위에서 맨해튼을 볼 수 있는 크루즈를 하는 항구에 내려놓았다.
짧은 Cruise(크루즈)
이 항구의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어서 다 뒤져보니 아마도 롱아일랜드 브루클린 크루즈 터미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스트 강을 따라서 맨해튼을 강위에서 바라볼 수 있는 크루즈는 비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광객들이 승선하였다.
과연 강위에서 길게 늘어선 맨해튼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이 배의 최종적인 회항지점은 아마 미국 뉴욕을 생각하면 누구나 제일 먼저 생각할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가이드는 정확하게하면 여신상이 아니라 여인상이라고 말했다. 여신이라고 알려진 것은 일제 시대에 일본사람들이‘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여신으로 번역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보니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었다. 공식적인 명칭이 <Statue of Liberty> 인 이 자유의 여인상은 원래는 '세계를 비치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로 불렸었다.
영국과 깊은 숙적관계에 있었던 프랑스 국민이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서 기증했는데, 1875년에 조직되었던 프랑스·아메리카연맹이 기금을 모금하고, 프레데리크-오귀스트 바르톨디(Frederic-Auguste Bartholdi)가 동상의 고안을 맡았다. 두꺼운 동(銅)을 늘여서 만든 연판제(延板製) 동상으로 1884년 프랑스에서 완성하여 모두 340개의 박스에 담아 미국의 뉴욕 리버티섬으로 옮겨졌고, 프랑스의 기술자들이 직접 건너와서 조립했다고 전해진다.
1886년 10월 28일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의 주재로 헌정식을 하여 오늘의 자리에 서있게 되었다고 한다. 대좌석 위에 세워진 이 여인상은 오른손에 횃불을 쳐들고,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의 날짜가 적힌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다고 했다. 무게 225t, 횃불까지의 높이 약 46m, 대좌 높이 약 47.5m이다. 내부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머리 부분 가까이까지 오를 수 있도록 되어 있고, 1984년부터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는 911테러 이후 이 여인상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다고 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염원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났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65:25)
우리가 탄 배위에는 ‘New York Water Taxi'라고 씌여져 있었다. 아무리 작은 배지만 택시로 이해하고 있는 미국사람들의 생각이 재미있었다.
배안에는 우리 일행 말고도 다른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이 제법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문득 이런 기억이 떠올랐다. 유럽을 여행할 때 가이드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유럽을 찾는 여행객을 보면 일본 사람들이 가장 먼저 다녀가고 난 다음에 한국사람 그리고 그 다음에 중국인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그래 그게 그 나라의 국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비오는 가운데도 자유의 여인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비를 맞으면서 저마다 포즈를 취하고 자유의 여인상과 사진을 찍었다. 우리 일행이 탄 배는 리버티 섬에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도가 좋은 지점을 잡아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었다. 약 1시간 정도의 크루즈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배를, 아니 택시를 내렸다.
월스트리트를 지나면서 왜 Wall street가 되었는지 들었다. 네델란드인들이 맨해튼에 거주하면서 원주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담을 쌓았는데 그것이 유래가 돼서 오늘날의 세계의 증시에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세계경제의 중심 월스트리트가 되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를 다 빠져나와서 우리는 ‘Ground Zero'를 지나쳤다. 내가 찍은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었다. 비가 오는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우산을 쓴 채로 그라운드 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911테러 전까지 그곳에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서 있었던 자리였다.
1973년도에 완공된 건물은 높이가 417미터 110층이나 되는 거대한 빌딩이었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7시 59분, 92명의 승객을 태우고 미국 보스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던 아메리칸항공 소속 AA11 항공기가 항로를 이탈해 8시 45분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과 충돌했고, 이어 8시 14분, 65명의 승객을 태우고 역시 보스턴을 출발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던 유나이티드항공 소속 UA175 항공기가 항로를 이탈해 9시 3분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과 충돌했다. 9시 50분 남쪽 건물이 붕괴되고, 곧이어 10시 29분 북쪽 빌딩마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또 두 건물이 붕괴되면서 인근 건물에도 막대한 충격이 가해져 오후 5시 25분에는 무역센터의 제7호 건물마저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다.
그 결과 이 빌딩 안에 있던 2000-3500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면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망자들이 너무 많아서 사망자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고 했다. 최근에 뉴욕시는 이곳에 건물을 다시 짓자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고 한다. 미국의 이슬람권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침략에 대한 모슬렘의 반격이라고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세계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다.
이 원조가 바로 가미가제 아닐까? 하여간 일본 놈들은 못된 것만 퍼뜨린다니까;;;
‘Top of the Rock'
그리고 우리는 ‘Top of the Rock'로 이동하였다. 가이드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경우에는 보통 2-3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전망대에 올라가야 하는 관계로 록펠러 센타 가운데 한 건물인 ‘Top of the Rock'을 올라간다고 했다. 이곳은 기다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고 실제로 그랬다.
우리에게 석유재벌로 알려진 록펠러는 1839년에 태어나 1937년까지 살면서 스탠다드 오일이라는 회사를 토대로 사업을 해왔으며 1991년에 반독점법에 의하여 기업을 분할하여 운영하였다고 한다. 말년에 그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록펠러 재단을 통해서 자선활동에 헌신한 사업가로 기억되게 되었다. 록펠러 대학을 세우고 시카고 대학 설립을 위해서 엄청난 기부를 하고, 유엔본부를 뉴욕에 유치하기 위해서 땅을 내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록펠러 센타는 하나의 건물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삼성그룹의 본부 하면 하나의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록펠러 센터는 하나의 건물이 아니었다.
록펠러센터는 모두 21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며 우리가 올라간 전망대가 있는 ‘Top of the Rock'은 유명한 기업 GE(Gerneral Electric, 전설적인 기업인 잭 웰치가 20년간 회장으로 일했던 회사다.)가 자리 잡고 있는 빌딩이었다. 안타깝게도 시간과 비 때문에 보지 못한 록펠러 프라자 앞에는 프로메테우스 황금조각상이 있고, 그 앞에는 영화 ’나홀로 집에‘의 촬영장소로 알려져 있는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개장되는 곳이 있다고 했다.
21개 건물의 총 층수가 무려 557층, 상주인구가 7만명에 가까운 뉴욕시티 5번과 6번 애비뉴 사이의 50번가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길거리의 거리 표지판에서 거리를 street 와 avenue로 표기하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떤 거리는 street고 어떤 거리는 avenue일까? 궁금했는데 스트리트는 동서로 가로지는 길을 의미하고, 애비뉴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도로라고 했다. 뉴욕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는 바로 록펠러 센터가 있는 5번가라고 했다. 이 5번가는 avenue였다.
가이드는 이런 일화를 전했다. 기자들이 록펠러에게 “아들이 너무 사치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부자 아버지를 두어 그렇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럼 왜 당신은 돈을 안 쓰느냐?”고 묻자 ‘난 그런 아버지가 없다.’고 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일화들이 전해지지만 록펠러가 십일조를 신실하게 바치는 신앙인으로 살기를 힘썼던 것은 분명한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미국에서 부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국과는 전혀 다른 것 같고, 미국의 부자들 또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잘 알고 실천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경제의 회복을 위해 상속세를 낮추자는 미국정부의 의견에 대해서 반대한 것은 빌 게이츠등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갑부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랬다.“상속세를 낮춘다면 미국 자본주의의 사망을 선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그들에게 세금을 많이 낸다는 것은 일종의 성공한 어메리컨 드림의 증거와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해본다. 우리나라 재벌들이 어떻게 하면 세금 덜 낼까를 연구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참 존경받을 일이 아닌가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교보등 정직하게 상속하는 기업인들이 있다.)
우리가 보지 못했지만 록펠러 센타 중앙의 록펠러 프라자 입구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아버지 록펠러가 아닌 그의 아들 록펠러 2세가 록펠러선터의 창립자로 되어 있다고 한다. 아마도 1930년대 록펠러센터를 지을 때 록펠러 2세가 건설을 주관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테러 때문에 전망대에 오르기 전에 다시 한번 검사대를 통과해야 했다. 우리처럼 잘 생기고 점잖은 목사님들을 테러리스트 취급을 하다니? 하긴 그리스도인이란 성을 소란하게 한다는 오해를 2천년전부터 받아왔다. 행17:6절에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이 사역할 때 그 성의 무리들이 야손의 집을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복음의 능력 앞에서 어찌 세상이 요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건물 안에서 인상 깊게 본 것은 그 건물을 지을 때 노동자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벽면을 장식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은 록펠러 센터만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뉴욕의 역사를 담고 있는 ‘history floor'이었다. 아주 오래된 사진 속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우리가 올라간 전망대는 70층에 있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우리는 전망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가서 보니 참 안타까운 것이 비가 온다는 사실이었다. 비오는 유리창 저편으로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그 유명한 센트럴 파크가 보였다. 금싸라기 같은 뉴욕중심부에 무려700에이커(1에이커가 약 1224평이니까 전체면적은 약 856,800평)의 땅을 공원으로 내놓은 미국인들의 정신을 우리나라 투기꾼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반대편으로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솟아 올라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잠깐 설레이기도 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통 행크스가 출연한 1993년에 만들어진 영화 ‘씨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에서 맥 라이언과의 만남 장면이 그 빌딩 전망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비오는 엠파이어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비가 우리가 쓴 작은 우산속으로 날아들어 동주 때문에 곧바로 아래 층으로 내려와야 만 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올라가는 동안 전망대쪽 위편을 볼 수 있었는데 마치 불꽃놀이를 하듯이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했다.
1930년대는 미국의 경제공황 시대였다. 국가는 뉴딜정책을 폈는데 그 핵심은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국민들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래서 록펠러 빌딩도 그런 정부정책에 협조하는 일환으로 짓게 된 것이라고 했다. 국가라는 이름 앞에서 온 국민의 마음을 합하는 모습은 우리가 미국에서 배울 일이라고 생각한다. 빌딩을 빠져 나오면서 보니 우리가 빠져 나오는 빌딩에 미국의 3 대 방송사 가운데 하나인 NBC방송국의 스튜디오가 있었다.
아쉽게도 이것이 뉴욕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김종식목사님이 찍은 사진 가운데 한 장에 성 패트릭성당의 십자가 탑이 잡혀 있었다. 뉴욕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알려진 성당이다. 독일의 쾰른 성당을 본 따 1850년부터 38년 걸려 만들었다는 성 패트릭스 성당은 뉴욕 최대의 규모(길이 124m, 폭 53m)의 성당이다.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와 파이프오르간(7,855 pipes), 외부의 101m 높이에 이르는 2개의 고딕 첨탑(Spire)이 유명하다. 성당의 이름은 아일랜드의 수호신 성패트릭의 이름을 딴 것이며 성패트릭의 날인 3월 17일에는 수많은 아일랜드계 시민이 모여들고 퍼레이드를 연다고 한다.
뉴욕은 여행을 하면서도 계속적으로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가봐야 할 곳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유엔빌딩 앞의 평화를 기원하는 총구를 구부린 평화의 상징도,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리버티섬에 올라 자유의 여인상에도 오르고 스치고 지나쳐버린 유명한 소호(soho) 거리도 거닐어 보았더라면 하는 그런 바램들을 접고 뉴욕을 떠나야 했다.
워싱턴으로
워싱턴으로 이동하면서 우리나라와 미국의 수교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1882년 미국과 수교한 후에 1883년에 민영익대감이 사신으로 미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가 미국에 오기까지는 두달(60일)이 걸렸다고 한다. 뉴욕에서 재미있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토요일 자정12시부터 주일 오전 12시까지 스토어(상점)에서 맥주를 팔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주일은 예배드리는 날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조치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흡연자들에게 뉴욕은 참 불편한 곳이었다. 곳곳에 흡연자들이 빌딩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건물안에서는 철저히 금연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버스를 타고 지나친 소호(soho)거리는 우리나라의 명동쯤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명동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소호는 예술가들의 정신과 삶이 깃들어 있다는 것일 것이다.
소호는 south of huston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예전에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거리로 유명했지만 현재는 비싼 명품 상점들이 들어선 패션과 소비의 거리로 더 유명하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200마일이 넘는 거리 시간으로 5시간 정도 계속 달려가야 워싱턴이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다. 첫 번째 들른 휴게소의 이름은 토마스 에디슨을 기념한 휴게소였다. 그가 살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휴게소들도 그렇게 그 지역의 유명한 이들을 기념하는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
두 번째로 들른 휴게소는 Clara Barton 휴게소였다.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어서 찾아보니 그녀는 미국적십자사의 창시자와 같은 역할을 한 여인이었다. 1870년 보불전쟁동안 적십자사에서 봉사활동을 했고 독일의 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미국에 돌아온 후 적십자설립 운동을 전개해서 1882년 미국정부가 제네바협약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해프닝이 일어났다. 차가 고속도로에 진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 주인백목사님이 타지 않은 것이 확인 된 것이다. 사모님이 몸이 아픈 현민이를 돌보는 사이에 차가 출발을 한 것이다. 결국 차는 갓길로 후진을 했고 열심히 휴게소를 달려온 목사님을 다시 태우고 버스는 워싱턴을 향해서 떠났다.
가이드는 미국의 서부에서는 고속도로를 freeway로 부르고 무료이며, 동부에서는 expressway(highway)로 부르고 유료라고 했다. 버스안에서 계속적인 공부가 있었다. 이번엔 돈에 대한 것이었는데 미국 돈에 새겨진 인물에 대한 공부였다. 먼저 1센트의 주인공은 링컨, 니클이라 부르는 5센트의 주인공은 제퍼슨, 다임이라 부르는 10센트의 주인공은 루스벨트, 쿼터라고 부르는 25센트 짜리에는 조지 워싱턴, 1불 지폐에는 조지 워싱턴, 5불에는 다시 링컨, 10불에는 알렉산더 해밀턴, 20불에는 앤드류 잭슨, 50불에는 그란트, 100불에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초상이 있다고 했다.
워싱턴에 도착하기 전 중간지점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난 후 버스 안에서 수요일 저녁예배를 드렸다. 어딜가나 목회자들은 예배를 생활화하고 있는 것이다.
감리사님이 사도행전 11:19-26절까지의 은혜의 말씀으로 여행에 지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위로했고, 한찬희 목사님이 기도로서 우리들의 여정을 인도해주실 것에 대한 간절한 간구를 드렸고, 임형순 목사님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외국에서 맞이하는 예배에는 특별한 감동이 있다. 우리들이 나그네라는 사실이 마음에 깊이 다가오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드디어 워싱턴 웨스트 파크 호텔에 도착한 것은 저녁 8시가 훨씬 넘어서 였다. 6시 기상, 7시 아침식사, 8시출발 가이드는 동일한 외침을 남기고 우리는 각자의 숙소로 들어갔다. 몸을 씻고 치약을 사러 나왔는데 7-eleven을 찾아가 그 유명한 콜게이트 치약을 하나 구입한 후 돌아오는 길에 보니 워싱턴은 치안이 그래도 나은 것 같았다. 뉴욕에서는 밤에 밖에 나가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라고 들었는데 여학생 하나가 조깅하듯이 걸어다니는 것을 보니 여긴 살만한 동네로구나 생각이 들었다. 2달러9센트짜리 치약에 또 세금이 붙어 15센트 정도를 더 낸 것 같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미국에서는 미리 세금을 붙여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구입할 때 세금을 더해서 계산한다고 했다. 미국 여행을 처음 하는 분들은 바가지 썼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방에 들어와 머리맡의 서랍을 여니 역시 성경책이 들어 있었다. 말씀안에는 언제나 평안이 있다.
They wandered in the wilderness in a solitary way; they found no city to dwell in. Hungry and thirsty, their soul fainted in them. Then they cried unto the LORD in their trouble, [and] he delivered them out of their distresses. And he led them forth by the right way, that they might go to a city of habitation.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시107:4-7) 아멘!
첫댓글 사진을 함께 올립니다. 함께 보면 조금 더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