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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06
12월16일[대림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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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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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mrPPFSU3K1U
[서울대교구 김시몬 시몬 신부(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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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체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온전히 살아 계십니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께서 산을 내려오면서, 제자들에게 선구자 세례자 요한, 그리고 당신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제멋대로’라는 표현에 한동안 멈춰 묵상을 해봅니다. 꽤 부정적인 뉘앙스로 여겨집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 이성적이거나 상식적인 사고나 판단이 배제된 즉흥적인 행동…….
결국 ‘제멋대로’라는 표현은 진지한 성찰을 통한 신앙의 눈이 아니라 그저 인간적인 눈만으로 바라보고, 합리적인 규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정관념이나 틀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부 몰지각한 유다인들의 시선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기대했던 선구자와 메시아의 모습이 따로 있었습니다. 좋은 가문을 배경으로, 무소불위의 권능과 휘황찬란한 복장을 한 화려하고 멋진 선구자와 메시아의 모습을 잔뜩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눈앞에 등장한 선구자는 어땠습니까? 외양부터 남루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얼굴은 평생토록 계속해온 고행과 극기의 생활로 수척하고 거칠었습니다.
입고 있는 옷은 길바닥에서 주운 낙타털옷에다 맨발이었습니다. 거듭 외치는 예언의 말씀은 가슴을 후벼 파는 쌍날칼 같아 도무지 듣기가 민망했습니다.
예수님은 한술 더 떴습니다. 변반 중의 변방 갈릴래아 사람, 그 중에서도 낙후된 깡촌 나자렛 사람이었습니다. 뒷배경도 시원찮았고 가방끈도 짧았습니다. 거기다 그가 온종일 어울리는 사람은 세리와 창녀, 죄인과 중병환자들이었습니다.
너무나 실망스러웠던 유다인들은 도저히 그들을 선구자요 메시아로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뚜렷한 징표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유다인들은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고정관념, 끼고 있던 색안경으로 인해, 끝까지 그들을 거부하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선구자, 어떤 예언자, 어떤 메시아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까? 이번 성탄 우리는 과연 어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오늘도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아기 예수님께서는 탄생하시고, 성장하시고,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데, 우리는 너무 멀리서만 그분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성체는 물건이 아닙니다. 살아 있지 않은 사물이 아닙니다. 성체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온전히 살아 계십니다. 이것을 의식하며 그분을 받아 모실 때 우리는 더욱 온전히 살아 있게 되고,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와 함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니 플린, 성체성사의 일곱 가지 비밀, 성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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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은 자신이 만든 그릇의 용도와 크기만큼 채우며 산다>
1491년, 한 스페인 함장이 지구의 둘레를 계산하던 중 숫자를 몇 개 틀렸습니다. 지구 둘레는 대략 40,000㎞지만, 그는 약 24,000㎞로 계산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 계산은 틀렸다고 해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계산을 확신했습니다. 분명 거꾸로 돌아도 중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의도가 앞섰기에 지구를 실제보다 작게 계산할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확신을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에게 보고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사벨라 여왕도 그가 틀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손해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 3척을 내어줍니다. 콜럼버스는 계속 착각 속에 자신의 계산상 자신이 발견한 대륙은 인도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만난 주민들을 인디언이라 불렀고 그 제도를 인도제도라 칭했습니다.
그의 거대한 실수 때문에 발견된 신대륙 덕분으로 스페인 정부는 그 후로 200년 이상을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참조: ‘세계를 바꾼 49가지 실수; 결과가 좋았던 실수’, 빌 포셋, 생각정거장]
콜럼부스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하지 못한 발견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부에 대한 그릇이 작았던 것입니다.
반면 이사벨라 여왕은 다른 것은 몰라도 부에 대한 그릇 크기가 엄청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신 나갔다고 손가락질받는 콜럼버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스페인이 잘 살 수 있는 축복의 그릇을 누구보다 크게 만들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각자 만드는 자기 자신의 크기만큼 채워주십니다. 일본 TV 프로그램에서 모르는 사람이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실험을 해봤습니다. 그 돈을 받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의심의 눈길을 보내며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재산 차이를 조사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돈을 받지 않는 대부분 사람은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부자들이 돈을 덥석덥석 잘 받았던 것입니다.
부자들은 ‘아, 이렇게 나에게 돈이 굴러들어오는구나!’라고 생각했고, 가난했던 사람들은 ‘이 사람이 뭔 꿍꿍이속으로 나에게 돈을 줘?’라며 생각했습니다.
부자들은 돈이 채워질 그릇이 이미 컸던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작은 그릇이 채워져 있기에 더 이상 채워질 기회가 와도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는 어떤 그릇을 만들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듭니다. 타볼산에서 변모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이유는 당신은 하느님을 담는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던 것을 보고 제자들이 엘리야에 대해 이렇게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메시아가 오시기 이전의 엘리야의 필요성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무엇을 바로잡는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는 하느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믿음을 심어준다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자신들의 부와 자주독립을 이뤄줄 분으로 여겼습니다. 잘못된 그릇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담기기 때문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불이 들어갈 벽난로를 불에 타는 재료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아를 세속적 욕구를 채우는 도구로 여기는 이들은 다 이처럼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도 세속적인 성공을 바랄 때는 사제가 되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제를 담을 그릇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되려면 먼저 그 무엇을 담을 그릇부터 만들어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담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주러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야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우리 존재 이유는 성전이 되기 위함이지 돈주머니나 권력주머니가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 담기 위해 크고 작은 각자의 그릇을 만들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만든 그릇만큼만 내 안에 그것이 담깁니다.
그릇의 용도는 다 다릅니다. 영원한 그릇이 되고 싶다면 영원한 것을 담을 재료로 그릇을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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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림시기에 준비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본당에서는 대림특강과 성탄판공을 준비합니다. 대림특강을 통해서 주님 성탄의 의미를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마음에 담았다면 예물을 준비했던 동방박사처럼 우리들 또한 주님께 예물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와서 경배했던 목동들처럼 깨어 주님의 탄생을 맞이해야 합니다. 성탄판공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있는 죄의 뿌리들을 없애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모시는 최초의 구유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을 맞이하는 정갈한 구유로 만들어야 합니다. 날마다 성전에서 기도했던 시메온과 한나처럼 기도하며 주님의 탄생을 축복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10일에 코네티컷 한인성당에서 ‘대림특강’을 하였습니다. 주제는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VIP' 그리고 신앙의 'MVP' 되자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으뜸과 세상의 최고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선악과를 쟁취하는 것이지만, 신앙의 으뜸과 신앙의 최고는 회개하는 것이고, 회개했다면 삶으로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으뜸과 신앙의 최고가 되어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대림시기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대림시기 전례에 사용하는 두 가지 감사송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마련해 주셨음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합니다. 독서와 복음도 이런 전례의 구조에 맞게 정해졌습니다. 두 번째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독서와 복음도 이런 전례의 구조에 맞게 정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족보, 천사 가브리엘의 예고,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주님의 탄생 그리고 천사들의 경배로 정점을 이루게 됩니다. 2000년 전에 있었던 주님의 성탄이 이제 우리의 삶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년 전례를 통해서 성탄을 준비하고, 맞이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탄’은 그저 통과의례로 연말연시의 과정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탄’은 그저 2000년 전에 있었던 한 사건에 대한 기억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탄’은 어린 시절 가슴이 설렜던 빛바랜 추억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탄’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은 일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멀리 동방에서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러 왔던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도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성탄에 합당한 예물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정화되어 이제 내가 주님을 맞이하는 구유가 되면 좋겠습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침묵과 관상 속에서 주님의 성탄을 경건하게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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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수께서는 방금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예수님은 요한 세례자를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하였다(11,1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했다(14,3-12). 이렇게 메시아의 선구자가 배척을 당한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배척을 당하셨다(11,16-19 참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12절) 그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한 헤로데와 그들이 공범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당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12절)는 말과 그에 대한 구원자의 설명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말한다. 첫 번째 오심은 지금 오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줍니다.”(티토 2,11-12)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라 한다. 엘리야나 메시아의 참모습은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난다. 우리 자신이 엘리야가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은총의 선물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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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23) 이 예언의 말씀을 근거로 유다인들은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를 칭송하는 내용이 담긴 집회서의 말씀도 같은 믿음을 반영합니다. “당신은 ……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엘리야에 관하여 던진 질문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산 위에서 목격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과(마태 17,1-8 참조) 부활에 관한 말씀을(17,9 참조) 바탕으로, 그들은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음을 깨닫습니다. 다만 율법 학자들의 주장처럼 그전에 오기로 한 엘리야는 과연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유다인들은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는 이미 그들 곁에 와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이 ‘돌아올 엘리야’였던 것입니다. 결국 유다인들은 엘리야도 알아보지 못하였고,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두 분을 모두 ‘제멋대로 다루며’ 죽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선구자로 파견되어 그분의 길을 미리 닦고 준비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3,1-12 참조) 그런데 메시아가 걸어야 할 길은 특히 수난과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 길 또한 마다하지 않았던 진정한 메시아의 선구자였습니다. 예수님에 앞서 수난의 길을 걸었던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도 수난의 여정에 기꺼이 참여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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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장서 수집광>
책이 쌓여 있는 서재에 들어서면 아직 읽지 못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아쉬워합니다. 그럴 때마다 대신 다른 것은 얻었을 것이라고 달래곤 합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열 가지 계명을 받습니다. 그것들에 여러 가지 살이 붙고 이리저리 해석이 되면서, 율법학자들에 의해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율법서들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해석이나 주석은 동양의 사서삼경이나 율법서처럼 그 양이 많긴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초본을 넘어설 수는 없나 봅니다.
500여 권에 달하도록 율법 해석은 했으되, 도무지 지켜낼 수가 없었고 어떠한 것은 모순이 될 수밖에 없기에, 이 율법에 따라 엄격하게 살아가는 바리사이파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500여 권을 통달하는 율법학자도, 그것을 지키겠다고 나선 바리사이파 사람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더 잘 알아보게 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지름길을 마련해 주는 참고서 역할을 하는 율법서와 그것의 실천이 도리어 주님을 못 알아보게 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있어서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농사 짓는 일은 마땅히 농부에게 물어야 한다’라는 경당문노 (耕當問奴)의 마음이나, 수영을 하려면 몇 권의 수영서적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한다는 말이 더 깊이 와닿는지도 모릅니다.
낮은 곳에 오시려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마음을 낮추어야만 비로소 그분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고,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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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우리 시대의 엘리야를 그리며>
시절이 수상하고 삶이 고달플수록 예언자 엘리야 같은 인물이 기다려집니다. 열왕기 상권이 전하는 엘리야 시대의 상황을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기원전 9세기 경 북부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역대 어느 임금보다 더 악한 짓을 합니다. 그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제벨과 혼인하고, 가나안의 우상 바알의 신전을 짓고 제단을 세웁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아세라 목상도 세웁니다.
그리고 국록(國祿)으로 바알의 예언자 450명과 아세라 예언자 400명을 고용하여 참모로 삼고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1열왕 16,29이하) 간부(姦婦) 이제벨의 농간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가로채며 끊임없이 악한 일을 골라서 하던 그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습니다.(1열왕21,1-29)
도탄에 빠진 백성들 앞에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는 가르멜 산에서 궁내(宮內) 예언자 무리들을 숙청하며 살아계신 하느님을 선포하지만 아합과 왕비 이제벨은 예언자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왕과 왕비의 박해를 받으며 외롭게 악의 세력과 싸우던 엘리야는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오릅니다.(2열왕2,1-18) 그 이후로 백성들은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는 환난과 핍박의 시절을 만날 때마다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랐던 엘리야의 재림을 고대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대도 예언자 엘리야 같은 인물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대림절(待臨節)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재림과 성탄 대축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이 이 시대의 엘리야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당신이 이 시대의 엘리야입니다. 당신은 말과 행동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선포해야 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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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구약 성경의 맨 마지막 구절은, 말라키 예언서 3장 23-24절로 다음과 같이 끝을 맺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유다인들은 엘리야 예언자가 산 채로 하늘로 올랐기에, 메시아께서 오시기 직전에 이스라엘에 다시 와서 백성을 화해시키고 열두 부족을 재건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길을 닦는 사자요, 예언자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11,14) 요한은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였고, 위정자들의 악행을 비판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종말의 때에 먼저 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렸다면,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 먼저 와서 그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듯,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또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으니, 예수님도 그렇게 대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엘리야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요? 세상 종말의 도래에 필요한 준비 작업인 회개와 쇄신을 외치는 요한의 소리를 우리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대림 시기와 한 해의 마지막 달을 지내며, 세례자 요한의 종말론적 관점에서, 곧 죽음 앞에서 오늘 하루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쁘다는 핑계로, 일과 사람, 각종 오락과 즐거움에 파묻혀 다른 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멈추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아니 다만 30분이라도 멈추어 봅시다.
잠시 멈추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자기 비움, 함께함, 나눔, 그리고 구원의 역사를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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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7,12)
오늘 복음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높은 산으로 데려가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되심을 목격하게 한 뒤, 산에서 내려오면서 제자들과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7,10)라는 말씀에 이어, ‘물었다.’로 시작해서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깨달았다.” (17,13) 라는 말씀, 곧 ‘깨달았다.’로 끝납니다. 이는 곧 인간 존재가 그러하듯 인간이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존재인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예수님께 ‘하느님에 대해서나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 무지하기에’ 물어야 할 존재들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몰랐던 것을 깨닫는 사람임을 가르쳐 일깨워 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복음을 읽을 때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하고 물어야 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주님의 말씀인 복음에서 찾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늘 스스로 ‘무지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물을 때 우리는 좀 더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살아갈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런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17,11) 고 대답하셨습니다. 숙지해야 할 점은 지난 목요일의 복음에서(11,11-15)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두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인정하셨고, 말라기 예언자가 특정한 때에 올 것으로 예언한 ‘사자使者’와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임을 증언하십니다. 말라기 예언자는 “보아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3,1), 그리고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3,23) 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 직전에 그 길을 닦을 주님의 사자가 먼저 올 것이며, 세상 종말에 주님의 심판이 있기 전에 불 마차를 타고 승천했던(2열2,11) 엘리야가 다시 와서 이스라엘의 화해와 재건을 도모할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집회서’에서 ‘벤 시라’는 불 마차를 타고, 불 소용돌이 속에서 하늘로 올라갔던 엘리야가 주님의 심판 날에 다시 와서, 하느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 분노의 불을 끄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하면서, 재림하는 엘리야를 볼 수 있고 그와 사랑으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집48,9-11참조)
제자들의 물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선구자로 온 엘리야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완수하지 못하고 참수되었기에 재림한 엘리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으니 곧 뒤이어 오실 메시아도 아직 오시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사람들은 메시아의 선구자로 온 세례자 요한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고 박해하여 죽였던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님까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고 박해하여 죽일 것이라고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17,12)고 하는데, 왜 사람들은 제멋대로 세례자 요한을 다루었을까요.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편견이나 고정관념 등 여러 이유가 있는 것처럼 ‘제멋대로’ 다룬 이유는 바로 그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의 무지함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에 대해서나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대해서 알지 못한 데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무지함, 하느님의 뜻과 말씀에 대한 우리의 무지함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반해서 자신의 예상과 다르다고 ‘제멋대로’ 사람들을 다루듯 우리 역시도 그렇게 ‘제멋대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의 이런 무지함과 그로 인한 어리석음에 대해서 바오로는 아주 분명하게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로1,19) 그런데 왜 예수님은 사람들의 무지함과 그 어리석음을 아시면서 그렇게 바보처럼 세례자 요한의 헛된 죽음을 방조하시고 당신 역시도 동일한 삶,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7,12)라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제멋대로’ 까불어 대는 그들을 묵인하시고 수용하신 것일까요? 물론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수용할 수 없지만, ‘그들이 제멋대로 당신을 다루도록 나둔’ 그 결과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죽임당하셨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도저히 인간의 좁은 식견이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것이 하느님의 관대함이며 사랑이십니다. 이토록 하느님의 사랑은 강요나 구속이 아닌 당신 사랑을 거부할 자유와 심지어 ‘제멋대로 다루었다.’가 의미하듯이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나누시고 바라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오만이며 무지함에 따른 죄입니다. 하느님의 뜻 보다 자기의 뜻 곧 ‘제멋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만 하려고 하는 인간의 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제멋대로’ 말하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을 바로잡을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 그리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살려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사람이 필요한 세상이며, 이런 존재가 되고 이런 삶을 바로 누가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하는 세상이라고 봅니다. “하느님, 저희를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화답송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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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사람이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취업도 되지 않고, 집에 안 좋은 일이 계속되어서 너무 힘든 상황에서 친한 친구가 이 점쟁이를 소개해 준 것입니다. 그는 삶이 너무 힘들어서 믿지 않는다면서도 시간을 내서 찾아갑니다. 점쟁이는 꽤 긴 시간 동안 점을 보더니 갑자기 큰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될 팔자입니다.”
이 사람은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점쟁이가 절까지 하는 것을 보면, 이 어려운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분명히 왕이 될 것 같았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왕이 없으니 ‘대통령이 되는 것일까?’ 싶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는 ‘아직 때가 안 되었을 뿐’이라면서 계속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남자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란 없습니다. 노력해야 여기에 걸맞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왕이 될 수 있을까요? 혹시 모르겠습니다. ‘게으름의 왕’도 왕이라고 한다면 말이지요.
어떤 사람의 ‘인맥’이 대단하다면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그렇다면 저절로 그 인맥이 생기고, 좋은 관계도 저절로 된 이루어진 것일까요? 그만큼 노력했기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좋은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맡긴 듯이 계속 요구만 하고 있으면서 하느님과 좋은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까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라고 묻습니다. 말라키서에 이런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23)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지요. 문제는 엘리야가 왔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룬 것입니다. 엘리야를 알아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도 없었기에 세례자 요한을 함부로 다룬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그칠까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향해서도 고난을 줄 뿐이었습니다.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먼저 해야 구원의 길에 가까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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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마태오 17,10-13 (엘리야의 재림)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오 17,12)
사랑이
탐욕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사랑이
이길 것입니다
희망이
현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희망이
이길 것입니다
믿음이
맹종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믿음이
이길 것입니다
밝음이
어둠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밝음이
이길 것입니다
진리가
거짓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진리가
이길 것입니다
착함이
악함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착함이
이길 것입니다
자유가
억압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자유가
이길 것입니다
연대가
배척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연대가
이길 것입니다
평화가
폭력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평화가
이길 것입니다
살림이
죽임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살림이
이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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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시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에게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게 되어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본 것입니다.
루카복음 1장16절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1,23)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6,26)
그러나 헤로데만 그를 죽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을 수 있는데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메시아이신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악하기보다도 자기 안에 갇힌 무지의 탓이 크다 할 것입니다. 물론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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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우리가 살아 있는 또 하나의 엘리야요 세례자 요한이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이 좋습니다.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새벽에 일어나 카톡을 열으니 김남조 시인의 대표작인 “겨울바다”라는 시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지난 10월10일에 96세로 선종한,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세례명을 지닌 유명한 가톨릭의 여류시인입니다. 마지막 시집은 93세 때 냈다 하니 참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시 “겨울바다” 중 마음에 와닿은 대목이었습니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그대로 시인의 뜨거운 기도시임을 깨닫게 합니다. 겨울 바다에 서듯, 새벽에 일어나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면 맨 먼저 바라보는 겨울 하늘입니다. 이어 떠오르는 예전에 써놨던 두편의 자작 고백시입니다.
“산처럼
머물러 살면
푸른 하늘
흰 구를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이 되어 주신다”-1997.8.11
“정주”라는 시에 이어 언젠가 인용했던 “당신이 그리울 때”라는 다음 고백시입니다. 물론 여기서 당신이 가리키는 바는 평생 연모戀慕의 대상인 주님입니다. 새벽마다 기상하여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었을 때,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 오는 겨울하늘에 저절로 떠오르는 “당신이 그리울 때”라는 자작시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
당신이 보고 싶을 때
눈들어 하늘을 본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흰구름, 빛나는 별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그리운 당신, 보고싶은 당신”-1998.11.22
이런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중에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의 순례여정중에 엘리야, 세례자 요한과 함께 함을 봅니다. 결코 예수님은 혼자가 아닌 무수한 도반들과 함께 함을 봅니다. 말그대로 “더불어(together)”의 여정이요 이점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엘리야의 재림에 관한 내용으로 그 앞에는 높은 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사건이 일어납니다. 세 애제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동행했으며, 영광스러운 변모시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세 제자들은 물론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세와 엘리야와도 깊은 영적 친교를 나눴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영적지평은 이렇듯 영원에 열려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으며 우리 또한 이런 예수님과 평생 도반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득 작년에 선종하신 전임 교황인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진리의 협력자로 불리기를 원했던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자신의 영적스승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보나벤투라는 고백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의 흠모하고 존경하는 성인들을 스승이자 도반으로 삼아 깊은 친교를 나눴던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분명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에 대해 깊은 애정을 지니셨을 것입니다. 오늘 집회서에서 엘리야의 활약은 얼마나 눈부신지요! 한마디로 하느님과 완전 사랑의 일치를 이룬 삶이었기에 이런 자유자재한 기적이요, 에녹과 모세에 이은 승천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 끝부분은 공동번역이 더 실감이 납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하며, 당신과 사랑으로 맺어진 사람을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 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집회 48,11)
이 대목은 30년전 어느 수녀님의 편지글에 순진하게도 당신을 저로 착각하고 많이 행복해 했던 내용인데 후에야 집회서의 말씀임을 알고 실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바로 이런 당신은 엘리야는 물론 궁극에는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을 가리키지만 이런 대상에 해당된다면 참 행복할 것입니다.
좌우간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면면한 전통은 엘리야의 재림입니다. 오늘의 구약 집회서와 마지막 성서, 말라기서 마지막 구절, 그리고 루가복음에 연이어 나오는 공통적 내용입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집회 48,10)
똑같은 내용이 구약의 마지막권 말라기서 맨 끝에도 나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땅을 파멸로 내려치지 않으리라.”(말라 3,23-24)
이어 루카복음 1장 "세례자 요한 출생 예고(1,5-24)"에도 나옵니다.
“그는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아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새삼 엘리야,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모든 성인이 죽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 안에 다 살아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런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주님은 세례자 요한이 재림한 엘리야요 이를 알아보지 못한 무지한 이들에게 고난과 죽음을, 또 예수님 자신도 당신을 모르는 무지한 자들에게 고난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내적으로 엘리야, 세례자 요한과 또 우리와 운명공동체처럼 깊이 결속되어 있는지 깨닫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후 부활하시어 우리 모두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우리는 악순환의 반복을 끊고, 이 회개와 은총의 대림시기 또 하나의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이 되어 이분들이 못다한 화해와 일치, 평화의 일들을 해야 하겠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극단의 분열과 갈등의 전쟁 시대에 화해와 일치, 평화의 일꾼이 되는 것보다 중대한 사명은 없으며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평화의 일꾼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 은총의 대림시기, 주님 평화의 일꾼이 되어 사는 것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끝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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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의 예언자는?>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세례자 요한은 다시 온 엘리아입니다. 엘리야 시대 사람들은 엘리야 예언자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다시 온 엘리야, 곧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언자는, 당대 사람들은 몰라보고 당대 사람들이 제멋대로 다뤄 죽고 난 뒤에야 후대 사람이 알아봅니다.
그러면 왜 당대에는 알아보지 못하고 후대에야 알아볼까요?
그것은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요즘 선거판에서는 <내가 하면 검증, 남이 하면 Negative 공세>, 이런 현상과 깊이, 아니 정확히 관련이 있지요.
예언자는 똑같은 예언, 곧 하느님의 말씀을 하는데 그것이 나에게 하면 예언이 아니고 트집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하면 트집이 아니고 예언이 되는 것이지요.
누구든 당장은 자기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이는 아이가 주사를 놓는 의사를 나쁘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예언자는 슬픈 운명입니다. 나중에는 높이 칭송받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 그는 죽일 놈입니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미래의 칭송을 생각하며 현재의 냉대와 질시를 감수하는 것은 아무리 예언자의 운명일지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는 예언자들은 그러므로 용기 있는 사람 그 이상의 이런 운명을 주신 하느님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존재입니다. 살을 에는 바람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이하듯 그 아픈 짓을 독하게 해내는 존재이고 그 대가로 살해당하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잘못을 놓치지 않고 또박또박 짚어내는 사람, 나의 아픈 곳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후벼 파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사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입니다. 이들이 나의 엘리야이고 나의 요한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엘리야와 나의 요한은 과연 누구일까요? 나는 지금 그들을 하느님께서 바로 내게 보내신 나의 엘리야와 나의 요한으로 알아보고 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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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17,12)
<엘리야!>
오늘 복음(마태17,10-13)은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 있은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1-12)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이 깨달은 것처럼,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주님 앞에서 길을 닦는 사자(使者)로서 주님의 날이 오기에 앞서 오는 예언자로 여겨졌던 인물입니다. 구약성경의 끝 말씀이 이를 확인시켜 줍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 3,23-24)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에 앞서 엘리야가 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고,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의 일'을 하는 사자(使者)로서 파견된, '또 하나의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신 메시아도 그렇게 다루다가 십자나무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인내합시다! 그러니 우리도 세례자 요한과 주님께서 겪으셨던 수난에 동참합시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닦는 사자(使者)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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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OXr6QlSca7E?si=Wnh4CJwW6coNUQV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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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 12)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욕심만
있을 뿐,
하느님의 뜻은
없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올바른 실천에
있습니다.
어리석음과
무지로
요한 세례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교만으로
늘 빛을
잃게 됩니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이미 와 있는
엘리야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누가 주님이고
누가 종인지를
아직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눈 앞에서
벌어지는
무례한 현상에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탄생 앞에서
교만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을
속이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마음의 올바른
자리 매김이
바로
겸손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우리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안내해 줍니다.
편협된 편견이
아니라
고정된 아집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안내하는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다루어야 할
예언자의 삶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점검하여
올바른 길을
찾게 하는
예언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고난이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을
알려줍니다.
알아볼 수 있는
은총과 지혜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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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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