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신실
성경 말씀: 시편 89:1-8; 고린도전서 4:1-5
요약
하나님은 그분 함께로 신실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함께는 신실합니다. 이것이 신실에 대한 기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그분 함께의 언약에 신실하심으로, 언약의 백성 또한 언약에 신실합니다. 따라서 언약은 신실로 서사되고 또 신실로 펼쳐집니다. 이 점에서 성경, 곧 언약의 책은 신실의 시각으로 보아져야 합니다. 신실은 하나님의 함께로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으로 보입니다. 새 언약으로 예수님의 서사는 신실로 펼쳐집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십자가 죽음까지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을 보이십니다.
함께의 신실
신실함은 일상 삶에 자주 언급되지 않습니다. 신실함보다는 성실함이 자주 언급됩니다. 신실함은 믿음에 근거하지만, 성실함은 개인의 덕과 관계됩니다. 믿는 삶은 신실하고, 개인의 덕은 성실함으로 구비됩니다.
성경은 언약의 삶을 서사하니,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내용을 담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지닌 언약의 백성은 그 약속을 믿고 그 이루어짐을 신실하게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삶은 신실함으로 펼쳐집니다. 언약의 삶은 한 마디로 신실합니다.
물론 언약에 신실은 양면을 보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 백성의 신실함입니다. 언약의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은 함께함으로, 하나님과 그분 백성은 언약에 신실합니다. 그분 약속의 삶의 근거는 그 약속에 신실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분 약속으로 주어진 그분 말씀이 그들의 삶으로 이루어짐을 서사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서사를 계승하는 것은 신실함입니다. 즉 성경의 서사를 계승하는 맥락은 신실함입니다. 성경의 서사는 신실함이 없으면 단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두 부분으로 엮어집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각기 신실함을 보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새 언약은 엣 언약으로부터 계승되니, 옛 언약으로부터 새 언약으로 계승되는 신실함이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전반적 성경의 신실함이 보일 수 있습니다.
옛 언약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새 언약의 백성은 예수님을 따른 초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계승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따라서 엣 언약으로부터 새 언약으로 계승되는 신실함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살펴져야 합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신실함을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지키면서 보이려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분 말씀으로 함께하시니, 그들은 그분 말씀을 율법으로 지킴으로 그분과 함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은 태어남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이니, 그분 말씀을 율법으로 지키면 그분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함께가 태어남이나 율법으로 고정되는 것은 의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난 이들이나 율법으로 명시된 요구를 이행하는 이들과 함께하신다고 주장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의문입니다. 이 문제는 거꾸로 접근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난 이들이나 율법을 명시적으로 지키는 이들이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 아니냐는 의문입니다. .
사람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과 함께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율법을 겉으로 지키지만, 속으로 그의 하나님과 함께함에 관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함은 고정된 내용의 유지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가 신실하여야 하면 신실함은, 신실함은 고정될 수 없습니다. 고정됨은 존속의 측면을 보이지만, 이루어짐의 내용을 갖지 않습니다. 이루어짐의 내용을 갖지 않는 것은 약속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나 율법이 고정되는 한, 약속으로 의식되지 않습니다.
이루어지는 신실
율법으로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는 한, 신실하신 하나님은 언약으로 그들과 함께하신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지킴으로 그들의 신실함을 보일 수 없습니다. 신실함은 율법에 의해 요구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언약의 함께는 신실함으로 갖추어져야 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을 살지 않은 것을 보입니다. 신실함은 율법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율법의 삶은 고정되게 되니,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나 그들의 신실함은 율법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심으로, 그분 백성과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이루심의 신실함을 보일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분 백성의 신실한 함께는 율법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구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신실한 함께를 예언으로 남기며, 마무리됩니다. 예언의 출현은 당시 상황이 언약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시사합니다. 즉 하나님의 함께가 예언을 따라 이루어지게 될 것을 기다리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함께는 예언으로 이루어질 것이었습니다.
신약은 예수님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 함께의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영으로 잉태되심은 하나님의 함께를 영적으로 서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영적으로 서사되게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보인 행위와 마음의 괴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극복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마음으로 그들의 신실을 보일 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들 마음으로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주장하면, 그들은 언약으로 가지 않고 종교로 갑니다. 그들 마음은 개인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문제는 마음이 율법의 요구를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개인의 마음을 묶을 수 없기 때문에, 개인의 행위만 묶는 율법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언약이 율법에 의하면, 개인의 마음은 언약을 동반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마음이 다루어지게 되면, 종교가 문제됩니다.
새 언약으로 하나님의 함께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에 의합니다. 언약으로 하나님과 신실함은 개인의 마음의 확신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의 열매로 맺어집니다. 옛 언약은 다루어질 수 없는 개인의 마음을 남기지만, 새 언약은 개인의 마음을 넘어 성령님의 열매로 맺어집니다.
단지 타락으로 기운 개인의 마음이 관심되는 한, 마음의 움직임으로 종교성이 생각됩니다. 개인들은, 세상에 살며, 종교성을 지닌다고 말해집니다. 옛 언약은 종교성을 극복하려고 주어지지만, 옛 언약의 율법은 개인의 마음을 다룰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옛 언약의 삶에 보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으로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주장하지만, 율법에 의해 제어될 수 없는 그들 마음은 하나님에 반목을 보입니다. 구약의 서사에 지속적인 갈등과 반목은 그들 마음이 언약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신실
성령님의 열매로 신실은 마음의 움직임을 차단합니다. 신실은 마음의 신실이 아닌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마음이 관심되는 한, 개인이 주목되게 됩니다. 마음은 개인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은 신실이 아닌 마음으로 성실을 보입니다. 그의 개인의 독자성은 그의 마음에 반영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따라 “나는 죽는다”는 고백은 개인의 죽음을 뜻합니다. 개인은 하나님과 언약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는 그 자신의 마음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마음으로 언약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열매 맺는 이들이 언약의 삶을 삽니다.
여기 성령님의 열매가 강조되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은, 성령님의 열매 맺음으로, 개인으로 살지 않고 새 언약으로 삽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 경우 따름은 실현이 아닌 함께입니다.
신실은 함께로 보입니다. 여기 종교적 신실이 아닌 언약의 신실을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약속의 신실 또한 함께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개인들 사이의 약속은 관계를 보입니다. 따라서 약속이 개인적으로 성실히 지켜진다고 말하는 것이 충분합니다. 그러나 언약의 약속은 함께의 삶으로 이루어집니다.
언약의 신실은 함께의 삶으로 펼쳐집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신실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은 예수님으로 새로워졌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신실은 성령님의 열매로 맺어집니다. 성령님에 의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은, 신실함을 성령님의 열매로 맺으며, 하나님과 함께합니다. 그들은 새 언약의 삶을 삽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 마음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은 세상에 두드러짐으로 보이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나은 세상을 보이려 한 이가 아닌 하나님의 함께로 세상에 온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의 예수님이 아닌 언약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함께로 세상에 오셨으니, 예수님은 언약의 신실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세상을 위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세상에 예수님의 성취로 기술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로 서사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직접 이 점을 보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을 보이지만, 세상에 그분 업적을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으로부터 죄인으로 제거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상에서 실패가 아닌 하나님과 신실이 보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의 십자가는 새 언약의 기반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세상으로 살지 않고 언약으로 사신 것을 보입니다. 즉 복음서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십자가가 아닌 언약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새 언약의 십자가로 바라보는 이들은 새 언약의 삶을 삽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잘 살려고 몰두하기보다,
아버지와 신실함을 묵상하게 하옵소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신실함을
예수님으로 보게 하옵소서.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님으로 보게 하옵소서.
세상에서 구현할 수 없는 신실함이
아버지의 영으로 열매 맺어지게 하옵소서.
교회로 맺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