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주권』을 읽고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많은 신학자들의 가지각색의 진단을 내놓는다. 물론 모두 맞는 말이다. 이 위기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으리라. 그래서 오히려 혼란스러워진다. 너무나 다양한 측면들을 다 파편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의 다양한 측면들을 모두 포괄하는, 가장 본질적이고도 통전적인, 그런 동시에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답변을 듣고 싶었다.
바로 이 책이 그러한 답변을 제공한다. 카이퍼가 살았던 시대는 오늘 우리의 시대와 다를 것이 없다. 교회 밖으로는, 인본주의의 거대한 물결-합리주의, 이신론, 자연주의, 유물론-이 무섭게 치고 있었다. 교회 안으로는 한편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를 세속화 시키고 있었고, 한편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이원론-재세례파적 고립주의, 분파주의-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인 문제의 본질을 카이퍼는 이렇게 진단한다.
“이 끔찍한 시대에 우리 나라 역시 위기를 겪고 있는데, 이 위기는 다른 모든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으며, 사유하는 인류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위기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권의 문제로서, 이 문제는 일찍이 나사렛 사람의 피를 두고 논의했던 것처럼, 이제 또한 우리의 모든 정신적, 인간적, 국가적 존재의 세계를 다시 갈라 놓았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만물의 주권자로 삼을 것인가? 자유주의는 “인간의 이성”이라고 대답했고, 이원론은 “교회 안은 그리스도, 교회 밖은 사단”이라고 대답한다. 이 모든 관점을 거부하며 그는 외친다.
“아, 우리의 사고 세계 가운데 그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들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한 치도 없습니다.”
본서는 국가의 역할, 학문의 역할, 교회의 역할, 각 영역 간의 상호관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그 모든 주제가 결국 요청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과거의 나는 오랫동안 이원론적 세계관에 갇혀 있었다. 기독교인이라면 교회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지, 교회 밖 세상에서의 삶에 시간과 열정을 쏟는 것은 육체적인 삶이라고 여겼다. 물론 세상에서의 삶을 완전히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었고, 세상에서 열심히 돈을 벌어 교회에 헌금을 하던가, 명예를 얻어 복음 전도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신앙이 더욱 깊어지는 사람은 그 직장을 관두고, 선교사나 목사가 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삶의 모범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이라는 영역을 ‘교회’라는 영역보다 열등한 영역으로 간주하는 이원론적인 사고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갇혀서 직장생활을 하던 중, 이 세계관이 주는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느끼고 말았다. 교회에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잘 따르며 살면 되고, 직장생활에 있어서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인가? 종종 쉬는 시간에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면 전하면서 그 때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 외에 순전히 업무에 임하는 순간에는 내가 주권자가 되어 하면 된다는 것인가? 성령께서 나의 양심을 찌르셨다.
나는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이원론에 오랫동안 빠져있었으나, 그러나 이원론 역시 나의 삶을 심각하게 망가뜨리고 있었다. 교회 영역에 대해서만 적극적인 삶을 살게 하고, 그 외의 영역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소극적인 삶을 살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 내 안은 육체적인 자들을 향한 정죄로 가득 찼으며, 복음 전도에 올인하고자 했던 그 사고가 도리어 복음전도를 저해시키고 있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순간은, 내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문화명령을 멸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이다. 하나님을 따르겠다더니, 하나님을 명령을 무시하고 있었다.
나는 신학적인 혼란 끝에 카이퍼의 구호를 접한 후, 바로 이 체계에 대해서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도 칼빈주의 안에서 안식을 얻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모든 교만해진 마음을 꺾어 굴복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는 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은 내게 극한의 두려움과, 극한의 감사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나는 만약 “살면서 가장 감사했던 순간이 언제냐?”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주저함 없이 답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참으로 깨닫고, 그것을 믿게 되었던 순간입니다. 저는 이것을 믿게 됐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제는 죽어도 좋을만큼, 제 평생의 가장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그런 칼빈주의를 기대하며 합신에 입학했다. 그리고 신칼빈주의적인 여러 서적들을 접하다가 이번 학기에 이 수업을 통하여 드디어 카이퍼의 1차 자료를 접하게 됐다.
“거기(칼빈주의)에서 내 마음은 안식을 발견했다.”
그의 이 단순한 고백에 나는 코끝이 찡해졌다. 내가 바로 3년 전에 경험했던 그것을 그가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개혁파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한다.
“단지 “기독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로마교적”인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항변파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심지어 하나님의 실재를 부인한 자들에게조차 영광이 비치고, 그들이 비기독교화된 학교 정문 위에 “기독교적”이라는 거짓된 깃발을 매달았던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카이퍼에 완전히 동감한다. 나 또한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으며, 그 후엔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이원론적 세계관을 배웠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기독교에서 방황하다가 마침내 개혁파를 만나고서 나는 개혁파가 바로 이 땅의 소망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혁파 신학을 확고하게 추구하는 합신이 바로 교회의 소망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카이퍼는 우리가 개혁파라는 정체성을 고수하길 바라며, 자유주의나 또 다른 인본주의적인 어떤 가르침과 혼합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우리는 다른 원리에서 살아가는 학문과의 중립성 협약을 맺어 동일한 대학의 식탁에 앉아서는 안 됩니다. … 나사렛의 랍비가 자신의 지식을 세상 현자들의 지식과 결합했다고 선언했습니까? … 아닙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이 랍비는 자신의 보석 같은 지혜가 지혜자들과 명철한 자들에게 감추어졌고, 오히려 젖먹이 아기들에게 계시되었다고 당신에게 각인시킵니다.”
오늘 우리가 무장해야 할 정신이 바로 이것 아닐까? 유신진화론, 성경비평학을 가르치는 자에게도 하나님의 진리가 부분적으로 있으니, 온유함으로 수용하자고 하는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은 나의 기우일까?
나는 영역주권을 통해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불타오르는 사명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위해 모든 삶을 걸었다.
“전면에 나서기보다 배후에 머무는 편이 차라리… 우리에게는 훨씬 더 편안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했고, 우리는 반드시 행동해야 했기에, 이제 우리가 전면에 나선 것입니다. … 우리의 행동노선은… 오로지 우리 하나님의 영광의 기준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규정됩니다.”
이 대목은 오늘 내가 과연 이렇게 느긋하게, 소극적으로 있어도 될까라는 반성을 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그 적극적 삶의 태도를 카이퍼에게서 볼 수 있었다. 그는 이것을 그의 삶의 소원이라고까지 했다.
“지금까지 한 가지 소원이 내 생애를 지배하는 열정이었다. 이 한 가지 고귀한 동기가 내 지성과영혼에 박차와 같은 역할을 해왔다. … 세상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가정과 학교와 국가에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들을 다시 확립하는 것이다. … 온 국민이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 나는 카이퍼의 글에 완전히 매료됐다. 그는 쉬고있던 나의 칼빈주의를 향한 신념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 하나님은 마땅히 세상의 온 영역으로부터 찬송 받으셔야만 한다. 그는 결코 우리의 멸시와 모독을 받아서는 안될 우리의 창조주이시다. 교회 또한, 신학교 또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은근슬쩍 가로채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카이퍼도 자유대학교를 설립하며 바로 이런 점을 우려하며 무시무시한 기도를 올린다.
“우리의 심장을 시험하시고, 오, 또한 우리나라의 재판장이며 배움의 학교들을 판단하시는 심판자시여, 만일 이 기관이 언젠가 당신의 가장 부드러운 사랑스런 아들의 십자가 안에 있는 이 주권적인, 자유롭고 능한 은혜를 자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의도하거나, 언젠가 다른 것을 원한다면, 당신 자신이 이 기관의 벽들을 무너뜨리시고, 당신의 면전에서 그것들을 파멸시키소서! 주여, 주 하나님이여! 우리의 모든 도움이 당신의 이름 안에, 오로지 당신의 이름 안에만 있게 하소서! 아멘.”
카이퍼는 자유대학교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학교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파멸되기를 바랬다. 그토록 그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주권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나도 그와 같은 심장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위해 이 세계를 살아가고 싶다.
오늘날 나를 돌아본다. 나는 과연 여전히 이원론적인 사고의 잔재가 남아있진 않나? 일반은총의영역 중 무언가를 천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없나? 내가 전도사라고 해서 나를 좀 더 우월히 생각하고, 다른 직업적 소명을 받은 성도님들을 은근히 내려다보는 마음은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