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와 상상력, 야성을 갖추자
서울고 총동창회 뉴스레터 제6호(2017. 7. 9)
황영기(23회 – 65세) 금융투자협회장
일보다 사람이 커야지, 일이 사람보다 크면 안 된다고 봐요
이번 호 주인공은 황영기(23회) 금융투자협회장이다. 황 회장은 삼성그룹 출신의 대표적 금융통이다.
삼성그룹 비서실 국제금융팀장, 삼성전자 자금팀장, 삼성투자신탁운용 대표, 삼성증권 대표 등을 지냈다.
삼성을 떠난 뒤에는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과 KB금융지주 초대회장 등을 역임했다.
공격적인 추진력과 조직 장악력, 그리고 민감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진가를 드러낸 승부사적 기질과 전략가적인 면모로 ‘검투사’ 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서초역 인근 온새미에서 이뤄진 좌담회에서는 ‘달변가’ 황 회장의 리드로 같은 길을 걷는 선후배 사이의 격의 없는 대화가 펼쳐졌다.
또 금융계 현안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과 대답도 오갔다.
디너타임 인터뷰 내용
+학창 시절 일화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서울고는 당시 한 반에 60명씩 총 8개 반이었는데 절반은 타교에서 진학했어요. 저도 경동중학교를 나온 타교 출신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본교(서울중)에서 올라왔는데 이 중 30~40명이 재수해서 온 친구들이었어요. 그렇다 보니 본교 재수생과 타교에서 온 신입생이 늘 으르렁거렸죠. 그러던 중 가을 소풍날 신문로 골목길에서 결국 큰 패싸움이 벌어졌어요. 지금은 산부인과 의사가 된 친구가 주먹에 눈을 맞아 일이 커졌지요. 그때 체육 선생님 방에 가서 마대자루로 열 대씩 맞았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아무튼 그렇게 1학년 내내 가방에 교과서 대신 짱돌과 방 망이를 넣고 다녔으니 공부를 제대로 했을 리 없죠. 1학년 말에 시험을 봤는데 60명 중에 54등 했어요.”
+그 뒤로는 모범생으로 돌아온 건가요?
“2학기부터는 성적이 좀 오르다가 3학년 때 또 일이 생겼어요. 당시 교장선생님이 보결생을 많이 받고 기상청에 학교 부지를 무단으로 내줬다는 얘기가 돌아 9월쯤 교장선생님 퇴진 데모가 있었어요. 당시 방송실을 점거하고 1ㆍ2학년 후배들을 밖으로 불러내 연설을 하는 등 조직화된 데모를 하니 학교가 뒤집어졌지요. 나는 주동자라서 한 달간 학교를 못 갔어요. 별로 얌전한 학생은 아니었던 셈이죠.”
+그래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하셨는데.
“원래 정치학과에 가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3학년 때 데모하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반대해 상과대로 방향을 틀었어요. 그때 한 달 논 바람에 경제학과, 경영학과, 무역학과 가운데 입학이 좀 쉽다고 하는 무역학과에 원서를 넣었죠.”
+그게 삼성물산에 취직한 계기군요.
“그렇죠. 입사 1ㆍ2ㆍ3 지망 모두 삼성물산이라고 썼을 정도로 그 길을 갈 거라고 철썩 같이 믿었죠. 그런데 인생이 제 맘대로 되는 게 아니더군요. 당시 군 미필 상태에서 입사를 했던 터라 군대를 나중에 갔는데 눈이 나빠 4급 보충역을 받아 공군 방위로 13개월을 보냈어요. 성남비행장 기지로 출퇴근을 했는데 허송세월 하면 안 되겠다 싶어 영어잡지를 갖고 다니면서 늘 공부를 한 게 운명을 바꾼 계기가 됐어요. 군 복무 후 삼성그룹이 실시한 영어경시대회에서 문법ㆍ회화 부문 1등을 한 거죠. 그 덕에 그 해 말 비서실 국제금융팀으로 전출됐어요.”
+삼성은 왜 그만두셨죠?
“비서실에 가서 국제금융업무를 하는데 씨티은행, 체이스 맨해튼, 뱅크 오브 아메리카, 영국 슈로더 은행 사람들을 만나면서 실력 부족을 절감했어요. 그래서 유학을 가기로 마음 먹었죠. ‘금융은 영국’이라는 생각에 런던 비즈니스 스쿨, 크랜필드, 런던 스쿨 오브 이코노믹스(LSE) 등에서 어드미션을 받았는데 LSE는 1년 만에 마칠 수 있어 신청을 했지요.
유학 후에는 뱅커스트러스트 동경 지점에서 아시아 파생상품 마케팅 담당 부사장으로 있다가 9년 만인 1989년 삼성 국제금융팀장으로 돌아왔어요. 말하자면 금융을 하게 된 거는 고등학교, 대학교 때 꿈은 아니고, 입사했을 때도 현업에서 장사를 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정말 예상치 않은 일로 경력이 바뀌면서 그게 내 일이 된 거예요. 결국 운명의 힘이라는 게 나를 끌고 갔다고 생각할 수밖에요.”
+은행, 증권, 자산운용사를 모두 경험했는데 각각 어떻게 전망하세요?
“어디는 좋고 어디는 나쁘다 말하기가 참 난감하네요. 그래도 일반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가져올 시대적 변화를 놓치면 밥 먹고 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가장 취약한 분야는 은행이라고 봐요. 예금, 대출, 송금, 환전 등 웬만한 서비스는 로봇이라든지 비대면으로 거래가 가능합니다. 증권도 뭘 살지 결정하고 나면 실행은 온라인ㆍ모바일상으로 다 가능하죠. 물론 종목선택이나 자산배정에 대해선 사람의 어드바이스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은행보다는 덜 취약한 편이지만 보험도 빅데이터를 이용하면 정확하게 보험료를 계산할 수 있어 상당히 취약한 분야인 것 같아요. 그러면 사람의 창의성과 상상력, 물리적 대면 (physical contact)이 필요한 업종이 무엇인가? 결국 자문상담이나 포트폴리오 구성 등의 영역이고 업종으로 보면 금융투자업, 그 중에서 자산운용업, 헤지펀드, 프라이빗 에쿼티(PEF) 이런 업종이 변화하는 시대에 비교적 안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만큼 금융거래에 보안절차가 많은 경우는 찾기 어렵습니다.
“이게 사실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과도 관계가 있어요.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면 브룩스란 무기징역수가 나와요. 교도소에서 도서관장을 지내 존재감도 있고 존경도 받았던 브룩스는 모범수로 풀려나지만 결국 자살을 해요. 오랜 시간 자유를 영위한 적이 없어 자유를 감당 못한 것이죠. 또 다른 장기수 레드는 브룩스가 나가서 자살했다는 얘기를 듣고 가석방 심사를 일부러 엉망으로 치르지만 되레 석방이 됩니다. 레드는 출소 후 유통점에서 일하는데 화장실 갈 때에도 점장한테 지시를 받으려고 해요. 점장은 ‘여기선 마음대로 화장실을 가라’고 하지만 레드는 간수가 허락을 안받으면 볼 일을 볼 수 없다고 실토하죠. 규제와 자유에 관해 굉장히 시사점이 많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취업시장에서 이과 출신 학생들이 더 대우를 받습니다. 문과 학생들이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어떤 방향으로 능력을 개발해나가야 할까요?
“이과의 문제는 답이 있지만 문과 문제에는 답이 없어요. 가령 대한민국 대기업의 바람직한 지배구조는 어떤 것인가? 이게 질문이라면 답이 없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으니까. 문과는 답이 없는 문제를 놓고 자꾸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다양성과 상상력을 키워 가는 지적 훈련의 프로세스죠. 그런데 정답이 없는 공부를 해야 인공지능(AI) 시대에서 살아 남는다고 생각해요. 경영도 위로 올라가면 없는 답을 찾아야 하고, 어려서부터 정답이 없는 걸 찾아내는 훈련이 된 사람이 더 훌륭한 경영자, 더 큰 경영자로 클 가능성이 많아요. 이건희 회장이 1994년쯤 잭 웰치 GE회장을 만났을 때 통역을 한 적이 있어요. 웰치회장이 ‘당신 회사는 어떻게 그렇게 성장 속도가 빠르냐’고 묻자 이 회장은 곧바로 답을 안 하다가 나중에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경영이 참 어렵죠. 안 보이는 걸 경영하기 때문에 어려운 거에요.’ 이걸 제가 ‘management is about managing invisible’ 이렇게 번역을 했더니 웰치 회장이 금방 알아듣더라고요. 경영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는 안 가본 길, 없는 길을 가는 겁니다. 결국은 용기와 상상력, 야성 같은 게 없으면 리더가 될 수 없어요.”
+그럼 창의력과 통찰력을 기르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요?
“가장 싸고 효율적인 건 독서인 것 같고. 그 다음으로는 실패 경험도 좋고 여행도 좋은 거 같아요. 좋은 친구와 토론하는 것도 추천하고요.”
+해외 증권사 또는 글로벌 투자은행(IB)과 어떻게 경쟁해야 하나요?
“증권사는 규모로 승부하는 회사가 아니에요. 아이디어와 자원의 회전율로 승부하는 곳입니다. 그런 점에서 증권사의 경쟁력은 용기, 야성, 상상력이라고 봐요. 그런데 자본을 회전시키고, 남이 못 하는 거래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먼저 투자, 위험 테이크를 해 안심시킨 다음에 다른 사람한테 팔아 넘기고, 자기는 또 새로운 영역을 찾아 나서는, 이런 일을 즐겁게 하는 ‘인베스트먼트 뱅커(investment banker)’ 개념이 지금 증권사 사장들한테는 없는 거 같아요.”
+‘리스크 테이킹’이 결국은 화두입니다. 리스크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나라 국민이나 시장은 정부의 보호를 원하죠. 그러니까 규제는 기획재정부, 금융위 관료들이 권한을 확대하기 위해 시장통제를 일방적으로 강화했다기보다 멍청한 시장과 우매한 국민, 관료의 권한 강화 욕심이 잘 어우려져 만들어진 비빔밥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바로 ‘규제의 비빔밥’이죠. 삼성증권 사장 시절의 일이에요. 그룹 비서실에서 리스크 감사를 해 부정적 보고서를 작성해 갖고 왔더라구요. 당시 사표 제출도 불사하며 강하게 항의를 했어요. 전자회사는 불량품을 없애야 하지만 금융회사의 리스크는 불량품이 아니라 원재료에 가까워요. 금융사는 리스크를 피하는 게 아니라 매니지(manage)하는 거라고 설득해 결국 감사보고서도 없던 일이 됐죠.”
+핀테크, 독립투자자문업자(IFA) 등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금융산업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IFA 업종 전체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실력 있는 파이낸스 어드바이저들이 탄탄한 고객 장악력을 가지고 부동산과 세무 상담을 병행하면 실력파 3~5개 회사는 살아남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삼성증권 있을 때는 돈 있는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세무와 부동산상담사를 데리고 가도록 했어요. 돈 있는 사람들한테 부동산 세무 상담을 같이 해주는 종합자산관리가 아니고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공직에 진출해 금융개혁을 이끌어 볼 생각은 없으신지요?
“아직은 저 같은 사람을 받아들일 정도로 시장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장관ㆍ청와대 수석 같은 자리를 준다고 하면 감읍해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이 일보다 커야지, 일이 사람보다 크면 안 된다고 봐요. 축문 쓸 때 ‘현고(顯考) 장관’ 한 줄 쓰려 무작정 들어가 허덕이다가 나오는 것은 서울고 나온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