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7호선을 타고 장암역에 도착하여 수락산 방향으로 10분 남짓을 걸으면 조선 후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유적지들을 만날 수 있다. 김샘으로부터 박세당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분의 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이곳 수락산의 취승대(聚勝臺), 석천동(石泉洞) 일대에서 직접 생산 활동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오늘은(3월17일) 그분에 대한 祭를 지내는 날인가 보다 노강서원의 대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그 안을 볼수 있었고 祭物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西溪 朴世堂
박세당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ㆍ잠수(潛叟)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박세당은 1629년(인조7) 8월 19일 남원(南原)에서 태어났으나, 4세 때 부친이 7세 때에는 큰형이 사망하면서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모와 모친을 모시고 피란길에 올라 원주ㆍ청풍ㆍ안동 등지를 전전했다. 17세에는 의령 남씨 남일성(南一星)의 딸과 혼인하여 관례대로 처가살이를 하였다. 의령 남씨를 위해 쓴 묘지명에도 “박씨는 아버지 잃고 집안이 가난하여 자립하지 못한 나머지 10여 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다가 벼슬길에 오르고 나서야 처가를 나와 따로 살림을 꾸렸다.”고 하여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처가살이 기간에 박세당은 처남인 남구만과, 처숙부 남이성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박세당은 의령 남씨와의 사이에서 태유(泰維)와 태보(泰輔)를 낳았는데, 박태유와 박태보는 소론의 핵심으로 활동하다가 정쟁으로 부친보다 일찍 사망하여 박세당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박세당의 집안은 서인에서 소론으로 이어지는 가문의 핵심이 되었고, 소론 인사들과의 혼맥도 두드러졌다.
박세당은 32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ㆍ홍문관 등을 거쳐 관직생활을 이어나갔지만 40세를 기점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수락산 남쪽 골짜기 석천동(石泉洞)으로 내려와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관직에 응하지 않았다. 직접 농사를 지은 경험을 바탕으로 1676년(숙종 2) [색경(穡經)]을 저술하기도 했다. 박세당은 수락산 일대에서 학문 연구와 저술에 힘을 다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논어]ㆍ[맹자]ㆍ[중용]ㆍ[대학]ㆍ[상서]ㆍ[시경]을 주해한 사변록(思辨錄)]이었다. [사변록]은 주자의 주석을 벗어나 독자적인 해석을 가했다는 이유로 사문난적으로 공격받는 대표적인 저술이 된다. 저술활동에 매진하는 기간에도 조정에서는 박세당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대사헌ㆍ예조판서ㆍ이조판서 등의 관직을 제수했지만 박세당은 모두 거부하였다. 관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사림(士林)에서 박세당의 위상은 날로 높아졌으며, 특히 소론의 구심점이 되었다.
1666년(현종 7) 5월 부인 남씨가 사망하자, 박세당은 이듬해 광주 정씨와 재혼하였다. 1668년 박세당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양주 수락산 석천동(石泉洞)으로 들어갔다. 수락산 일대에는 부친 박정이 인조반정의 공을 인정받아 정사공신이 되면서 받은 사패지(賜牌地: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벼슬아치에게 임금이 내려준 논밭)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세당은 수락산 기슭 서계(西溪)의 아름다운 풍광을 사랑했다. 아예 호를 서계초수(西溪樵叟)라 하고, 서계의 골짜기 이름을 석천동(石泉洞)이라 하였다. [석천동기(石泉洞記)]에는 석천동에 얽힌 사연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박세당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양주 수락산의 석천동과 취승대. 왼쪽에 석천동, 오른쪽에 취승대 각자(刻字: 새긴 글자)가 보인다.
처음에는 간간이 조정의 명에 나아가기도 했지만, 뒤에는 누차 불러도 가지 않고 30여 년을 살다가 생을 마치니, 나이 70이 넘었다. 머물던 집 뒤쪽으로 백 수십 보 되는 곳에 안장하였다.”라고 하여 석천동에서 말년의 삶을 보낸 박세당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17세기 후반 소론의 중심으로, 독자적인 사상을 지킨 고집스러운 선비였지만 박세당은 수락산 석천동에서 마음의 안식처를 찾았다. 야복(野服)을 하고 자연을 음미하며 신선처럼 나무꾼처럼 살아가고자 했던 박세당의 흔적들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락산 자락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간 그의 자취를 찾아보기 바란다.
노강서원 [鷺江書院]
경기 기념물 제41호. 1695년(숙종 21) 건립.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박태보(朴泰輔)는 서인(西人)으로서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진도(珍島)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鷺梁津)에서 죽었다. 나라에서는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으로 추증하는 동시에 시호를 문열(文烈)이라 하고,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이 서원을 건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朴世堂]에 관한 내용을 짧게 간추려 보았습니다.
첫댓글 서계의 처남이 南九萬으로 친구이며, 수락산 석천동에 은거함이 아버지의 사패지가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이제 알았네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