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제 이름, 카이넨 베른슈타인이라고 읽습니다.
이렇게 길어빠진(?) 녀석을 한 번에 올린 이유는, 단편이기 때문입니다.
단편을 몇 번에 걸쳐 나눠 올리는 걸 싫어하는 관계로...
보기 불편하시다면 리플 달아 주시구요.
그럼 부디 즐감을...
비평도 잊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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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다리에 꽉 힘을 주어 땅을 밟았다. 무릎이 시큰거리고 아릿하게 간지럽다.
우울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겉모습이 낯설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순진한 범생이 같았었는데. 지금 눈앞의 알굴에선 유쾌하고 날카로운 냉소 비슷한 게 느껴진다. 나는 안경 벗은 지희의 눈빛에 조금 주눅이 들었다.
"전학가더니 인간이 싹 달라졌어, 너."
지희는 웃었다.
"뭐-- 워낙 유쾌한 녀석들이랑 붙어다니다 보니까."
"어떤 애들인데?"
"좋은 애들이지. 돈 많고 머리좋고, 즐거운 일만 생각하는."
지희는 인사치레로 내 안부를 물었을 뿐, 다른 친구들 이야기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 듯 했다.
나는 중학교 동창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민정이 카이스트 갔다더라."
"벌써?"
"카이스트는 2학년 때 가는 거래."
"그렇군. 좋겠다, 수능 안 봐서."
그게 다였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지희가 이야기를 했다. 그애의 외모뿐만 아니라 말투까지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움츠러들듯 소극적이던 목소리는 더이상 없었다. 특이한 울림이었다. 맑은 중저음. 약간 빠르지만 절제된 듯한, 무표정한 목소리... 가끔 입가에 띄우는 미소조차 무표정했다. 나는 웃는 채로 굳어 있었다. 바람이 흘러갔다.여기서 줄곧 지희의 말소리를 듣고 싶음과 동시에, 빨리 집으로 가 버리고 싶었다.
왜 이러는 걸까...
지희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들었다. 지희의 '유쾌한 친구들'에게서 배운 것은 단지 유쾌한 성격만은 아닌 모양이다.
"어. 너 담배도 피워?"
"아아니, 이건--. 어쩌다보니."
"애들이 너 이렇게 변한 거 알면 기절할 거야."
"애들한테는 '지희? 걔 아직도 뿔테안경 쓰고 다니던 걸'이라고 전해 줘."
지희는 가볍게 몸을 풀며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굳어버린 웃는 표정으로 배웅했다. 지희는 "잘 있어라."라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있다 가라고 붙잡을까? 아니. 나는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가슴 속에서 지희의 영상을 붙잡아놓고 있었다.
나는 지희의 영상을 되풀이해 보며 생각에 잠긴 채 걸었다.
무너지는듯한 우울함 때문에 답답하다. 문득 어딘가 비좁고 어둡고 곰팡이 냄새 나는 곳에서 미라처럼 웅크리어 잠들고 싶다. 그대로 영원히 잠들어도 좋다. 몽롱하고--바람밖에는, 보이고 들리고 맡아지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 가슴 속에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지희--다 지희와의 만남 때문같다.
혼자만인 방 안에 틀어박혀, 지희가 어떤 말을 했는지 열심히 떠올려보았다. 기억 나는 내용이 별로 없다. 내 열등한 기억력을 탓해봐야 하는 수 없었다. 나는 단지 그것이 어떤 느낌이었나를 기억했다. 좋았나?-아니. 그럼 나빴나?-역시, 아니. 좋았고 나빴고를 따질 수 없이, '미묘한' 느낌. 신선한 동시에 답답한.
거실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신경이 약간 날카로워져서 방을 기어나왔다. 퉁명스레 "여보세요" 하니, 엄마였다.
"왜 아깐 전화 안 받았니?"
"집에 없었어."
"왜?"
"지희가 잠깐 왔었거든. 얘기하고 있었어."
"지희? 아--너랑 친하다가 이사간 걔 말이구나. 걘 어떻게 지낸다디? 공부는 잘 하고 있대?"
"글쎄. 자기 말론 걔네 학교 '불성실 클럽' 행동대장이라던 걸."
"'불성실 클럽'? 그게 뭐야? 걔 삐딱하게 나가는 거 아니니?"
"무슨 소리야. 그냥 농담조로 하는 말인데. 그건 그렇고 왜 전화했어?"
"아. 네 그 과외선생 핸드폰 번호 말이다."
"응. 그게 왜?"
"번호가 바뀐 모양이더구나. 다른 사람이 받던데? 그래서--"
나는 짜증이 나서 비틀린 고음으로 따지기 시작했다.
"뭐야, 도대체! 왜 전화번호가 틀리다는 건데. 그러니까 빨리빨리 전화걸어 뒀으면 되는 거였잖아!! 이제까지 질질 끌어오기만 하고. 내가 전화번호 준 지가 보름은 됐겠다. 이제 어떡해, 중간고사도 얼마 안 남 았는데 과외 못 구하면--."
그런데 엄마는 콧소리로 웃는 것이었다.
"걱정 마. 엄마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아서 한다, 알아서 한다,몇 번이나 했어. 저번 기말시험 때도 알아서 한다고 해 놓고선 과외고 뭐고 흐지부지됐잖아."
정말 버릇없는 녀석이지, 나는.
그런 식으로 전화를 끊고 나니, 웃기게도 자책감이 들었다. 담배라도 있으면 물고 싶은 심정이었다--담배는 커녕 소주 한 방울 입에 대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책상머리에 앉았다. 수1 문제집들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고 한 구석에선 양초가 타고 있다. 조잡한 꽃향기와 파라핀 냄새가 섞여 구역질이 날 것 같다.
나는 촛불 끄트머리로 손바닥을 가져갔다. 천천히-- 거대한 구름이 어느날 생명의 불꽃을 덮치듯이. 뜨겁고, 아팠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미쳤어, 미쳤어! 바보같은 게, 뭐하는 거야! -- 험악한 마음의 목소리가 외쳤다. 순간 나는 움칫, 손을 거두었다. 촛불이 하느작하다가 다시 초연해졌다.
나는 옥죄는 듯한 기분에 시달렸다. 하나에서 열까지, 맘에 드는 구석이라곤 없다. 누가 나를 마음에 들어할지, 그가 불쌍하단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거울에 비춰본 내 눈은 스스로에 대한 냉소에 차 있다. 그러나 지희의 눈처럼 차갑지 못하다. 내 눈은 미지근한 흙탕물로 더러워져 있다. 거칠한 얼굴 피부도 흙탕물에 절어 있는 듯 보인다. 또, 내 손도. 내 몸, 나라는 인간 전체가, 책상 서랍의 잘 닫히지 않은 틈새로부터 흘러나오는 흙탕물에 오염되어 있다.
서랍을 잡아뺐다. 잡동사니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만화책에서 오린 일러스트... 짝을 잃은 채 굴러다니는 머리핀... 자석에 고슴도치처럼 빽빽히 붙어있는 핀들... 색연필, 디스켓, 연필 모양 지우개, 천조각, 교표, 이름표, 핸드폰 번호가 적힌 종이조각, 기한이 지난 롯데리아 할인 쿠폰. 도무지 정리라곤 안 돼있다.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도 생기가 쭈욱 빨려나가는 것 같다.
모든 생각의 끄트머리를 놓쳐버린다. 단지 잠자기만을 원하는 무기력이 눈꺼풀을 덮었다. 자야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느끼지도 말고... 시도 때도 없이 시큰거리는 왼쪽 무릎의 간지러운 통증조차 느끼기 귀찮다.
언제부터 무릎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던가? 한 달이 채 안 된 것 같지만,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다.
국사 수업 시간에 우리는 필담을 나누었다. 소리내어 이야기하다간 책과 공책을 들고 복도로 나가 세 쪽을 베껴야 하기 때문이었다.
짝은 '한미애, 오늘은 안 자네? 사람됐어' 라고 썼다.
'이 시간을 위해 커피 한 사발을 준비했었지.'
'일년동안 그러다간 카페인 중독이 될 걸.'
'그러게 말야. 그러니까, 자고 싶을 땐 자야 한다구.'
짝은 1학년 때 나와 지희와도 친했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필담에 지희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다. 나는 짝이 써 놓은 시시껄렁한 말들을 보며 소리죽여 웃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오히려 우울하다. 나는 조금 움찔하며 우울한 기분을 지우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괜히 우울해 하는 건 우스꽝스럽다.
게시판에 붙은 시간표를 돌아보니, 다음 시간은 체육이다. 피구를 하기로 선생님과 약속했었지. 몸을 움직이다 보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다.
다른 분단 아이를 흘낏 돌아보았다. 아무런 표정없이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수업에 집중한다'라는 게 저런 건지도. 나랑은 인연없는 표정이다.
종이 치고, 건성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선생님이 나가기도 전에 아이들은 체육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끼리끼리 팔짱을 끼고 체육관으로 나갔다. 나는 빌린 교과서를 갖다준다는 핑계로 혼자 복도를 걸어갔다.
이과반 복도에서 아이들이 손을 들고 서 있었다. 내 친구도 그 안에 끼어 있었다.
"뭐하냐?"
"벌 서."
"바보같이."
내 친구와는 좀 멀찍이서 손을 들고 서 있는 아이들이 하는 대화가 들려왔다. 이거 알아? ...빙빙 돌아가는 장미꽃들... 주머니 가득한 꽃다발...잿더미, 잿더미, 우리 모두 쓰러지네. 아, 그거 마더 구스잖아. 마더 구스? 너 그거 알아? 응, 어렸을 때 얼마나 좋아했었는데... 우리 이모가 읽어주셨었거든... 집에 책이 있어? 있긴 한데 독일어야. 우리 이모 독일어 전공이라서... 그거 영어론 없어? 있긴 하겠지만 희귀할 걸. 아마...인터넷 통신 판매에서 살 수 있을 거야. 그래애? 그리고 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한다. 룬 문자... 러시안 타로... 친구의 교과서를 사물함에 넣어 주면서 나는 그 아이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나는 친구에게 한 번 손을 흔들고 스쳐지나갔다.
체육관에선 아이들이 몸을 흔들며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오자 누군가 팔로 내 목을 휘감았다. 나는 웃으면서, 몸이 아프다고 하고 그냥 앉아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가, 또 머리를 흔들었다. 몸을 움직여야지...
종이 치고 5분 정도 기다려도 선생님이 오시지 않자, 아이들은 홀 짝 번호로 팀을 나누어 피구를 시작했다. 각 팀에서 제일 키가 큰 아이들이 점프볼을 했다. 공이 저쪽으로 넘어갔다. 나는 우르르 뒤쪽으로 피하는 아이들을 좇았다. 공은 높게 떠올라, 라인 밖에서 대기하던 아이의 벌린 팔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이들은 반대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 사이에 누군가가 공에 맞았다. 아이들은 소리를 질렀다. 공에 맞은 아이는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며 반대편 라인 바깥으로 나갔다. 공을 잡은 우리편 아이가 눈을 번뜩이며 세게 공을 던졌다. 우르르 몰려가던 아이들 중 하나가 맞았다. 그 아이도 비실비실 웃으면서 라인 밖으로 나갔다.
몇 발자국을 옮기며, 공을 잡은 내가 그렇게 세게 던지는 상상을 했다. 누군가의 등에 퍽 소리를 내며 맞는다... 공이 나에게로 다시 날아온다... 잡는다. 손이 얼얼하다. 다시 던진다.
우르르...꺄아악.
몇 번을 그러다 보니, 서로 산 사람은 몇 명 남지 않게 되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등 뒤에서, 공에 맞은 짝이 소리질렀다.
"한미애! 한미애 맞춰버려!"
그러자 공이 나에게로 날아왔다. 나는 당황했다. 손은 공을 받을까 망설였고,다리는 피하려고 했다. 다리가 꼬였다. 나는 내 옆에서 늦장부리던 아이와 어깨를 부딪치고, 같이 넘어졌다.
와하하--웃음이 터졌다. 라인 밖으로 굴러간 공을 주은 짝이 내 머리에 가볍게 공을 튕겼다.
"실망이다아-- 야, 니가 무슨 비련의 여주인공이냐? 추태 부리지 말고 얼렁 일어나!!"
나는 왼쪽 무릎을 누르며 비치적 비치적 일어났다. 젠장!! 시큰거리는 정도가 아니다. 제법 큼지막한 얼음 조각들이 팝콘처럼 마구 튀어오르는 것 같은 감각이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웃었다.
"너무한 거 아냐? 아파. 아파."
"이리 와--호 해줄게."
"미쳤어? 무릎 썩겠다!"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미애 너무 귀여운 것 같아...라고 들렸다. 나는 여전히 무릎을 감싼 채 절뚝이며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들은 또 웃었다.
오늘은 운이 안 좋은 날인가 봐. 아, 그냥 아프다고 앉아있어야 하는 거였는데. 나는 체육복 바지를 걷어올리고 무릎을 살폈다. 부은 것 같지는 않았다. 손으로 눌러 보았다. 아팠다. 바닥을 쾅 굴러 보았다. 감전된 것처럼 찌릿하고, 지독하게도 아팠다. 젠장!
관절이 어긋난 채로 맞물려 있는 건 아닐까? 어딘가에 세게 부딪쳐 놓고도 모르고 지내온 거라면... 나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좁은 델 지나가려다가 책가방에 걸려 넘어질 뻔 한 적이 있었다. 관절이 어긋날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은 일은 아니었지만, 혹시 모른다...
불안하다. 정말로 어긋난 채 굳은 거면 어쩌지? 치료받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테고, 엄청나게 아플 텐데. 비용 때문에 이번에도 과외를 못 받는 건 아닐까?
한동안 다리를 펴고 앉아있었다. 아이들이 실내화 주머니를 찾아들고 나를 일으켰다. 아직도 아팠지만 아까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그렇지. 별 거 아닐 거야. 성장통이란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아이들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왼쪽 다리에 실리는 무게를 조심스레 조절하면서.
다음시간... 수학이다. 싫다. 무릎을 핑계로 양호실에 가 있어야겠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릎이 아프다고 했다.
"양호실 가려고? 그럼 나랑 같이 가."
짝이 달라붙었다.
"너 되게 약았다--아픈 애한테 빌붙어서 수업 띵기고--."
"야, 너도 붙어."
"그래~."
또 웃음.
"저기, 선생님, 무릎이 아픈데요."
"뭐? 어쩌다가? 체육했나 보지?"
"넘어졌어요. 무릎을 부딪쳤는데..."
양호 선생님은 내 왼쪽 무릎을 살펴보더니,
"부어오르진 않았는데...살짝 접질렀나?"
손가락으로 무릎을 꾹꾹 눌렀다.
"아프니?"
"네, 조금."
"접질러진 느낌이야?"
"모르겠어요..."
"한 번 걸어 봐."
나는 절뚝이지 않고 걸었다.
"걷는 데 지장 없어?"
"네. 저기, 선생님, 사실은 이전부터 계속 아팠었거든요..."
"응?"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계속 간질간질 거렸었는데, 이번에 세게 부딪치곤 더 심해진 것 같아요."
나는 두려워하며 말했다.
"얘, 그럼 어딘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는데..."
같이 온 짝이 히익, 소리를 냈다. 왜 자기가 놀라는 거지?
뭔가가 싸악 오그라들고, 그로부터 짜증인지 미움인지 모를 것이 욱 하고 올라왔다. 나는, 답답하고, 불길하고, 빨리 집으로 가고 싶었다.
"너, 병원에라도 가서 검사를 받아 보는 게 낫겠다."
"그럼...조퇴할까요?"
"그런 건 니가 알아서 하는 거지."
짝이 거들었다.
"그래, 조퇴해."
나는, 귀여운 한미애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짝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별 일도 아닌데 왜 남을 그런 얼굴로 보는 거지? 실제론 걱정하지도 않으면서.
짝과 교무실로 내려가며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짝이 뭔가 말을 걸어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담임 선생님에게 사정을 말하고 조퇴증을 받아 나왔다.
기막히게도 하늘이 맑은데, 불길하게만 느껴지는군. 어쩌지, 지희야? 나도 모르게 속으로 지희를 불렀다. 민지희, 그 녀석과의 재회가 무의식적으로 꽤나 인상깊었던 모양이다. 그 녀석이 그렇게 변할 줄은 미처 상상도 못 해서...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 바보 녀석의 정체를... 소극적이고, 항상 땅만 보고 걷고, 눈이 마주치면 어설프게 웃던 그 녀석. 아이들은 나와 지희가 닮았다고 했었다. 그리고 우리가 뗄레야 뗄 수 없는 단짝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와 지희는 진정한 의미의 친구가 아니었다. 심지어 서로 전화번호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생일도. 서로의 관심사가 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가 우리가 다른 아이들 눈에 단짝으로 비춰지게 된 걸까...
항상 같이 다녔으니까.
그랬었지... 그리고 얘기도 곧잘 했던 것 같다. 한 번은 한빛은행 빌딩 안에서 그 녀석의 집안 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헤어지는 즉시 잊어버렸지만, 굉장히 복잡하고, 결손 가정이라고 부르기 딱 좋은 집안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꽤 오래 전에, 황소자리 유성우를 보느라고 그녀석 집에서 잔 적이 있었다. 오빠 방엔 상장 같은 게 걸려 있었는데, 상장의 이름이... 이름은 모르겠지만, 성이 고씨였다. 민지희. 지희오빠 고 아무개. 어머니는 안 계셨고, 성이 고씨인 언니들 둘이 우리들을 가끔 째려보면서 뭐라고 속닥거리곤 했었다.
문득, 그 녀석이 내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마음을 터놓고 싶어서, 조심스럽게 어떤 단서를 비췄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 녀석은 언제나 완전히 혼자였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늘 움츠린 듯 보일지망정, 손을 뻗치고 싶어 안달난 것처럼 보인 적은 한 번도 없다.
끊임없이 공허함, 결핍을 느끼고, 속에서 차갑게 분노하고, 자기 의견이 없는 녀석처럼 끄덕끄덕하는 얼굴 뒤로 뇌를 열심히 굴리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억누르다가...결국 견딜 수 없어져서, 자길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버린 것이 아닐까? 녀석은 친엄마에게 간다고 했었다.
아니다. 처음부터,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골똘이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복도를 걷던 지희.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걷느냐고 묻자, 그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아무 생각도 없다고 답했었다.
둘 다 같은 소리다. 어쨌든 지희는 견딜 수 없어서, 가버린 게 틀림 없다.
어젠 왜 갑자기 나를 찾아온 거지? 변한 자기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런가?
알 수 없다.
썰렁한 탁자 위에 놓인 빨간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엄마? 나야."
"응. 왜 이시간에 전화를 하니?"
"조퇴했어."
"뭐야? 왜!"
"왜긴 왜야! 아파서지."
"너, 아프다고 핑계대고 수업 땡땡이 치는 거 아냐?"
"왜 내가 그딴 짓을 해. 사람이 말 하면 좀 믿어 봐!"
그렇게 말하며 나는 내가 믿음직한 딸이 못 되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릎 아프단 말야!"
"무릎이 왜?"
"나도 몰라. 예전부터 아팠었는데 오늘 체육하다 넘어지고 심해졌어. 양호선생님이 병원에 가 보랬어."
"부었니?"
"아니. 그래서 이상해. 엄마, 지금 올 수 있어?"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라. 저어기, 냉찜질이라도 하고 있어...아니다. 그냥 그대로 놔 둬. 갈게."
"빨리 와."
엄마 회사에서 집까진 빨라도 한 시간은 걸린다. 빈둥빈둥 피시방으로 가서,40분 선불을 냈다.
지희로부터의 메일이 둘 들어와 있었다. '친구들과 망가지며 찰칵', '엽기 뮤직 비디오'.
교복을 입은 지희와 3명의 아이들이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고 있는 사진(손가락은 모자이크 처리).
코스튬 플레이. 제법 폼 잡고 있는 사진. 지희는 칼을 들고 있다.
'썸바디 헬프 미~~' 무다리들에 짓눌리고 있는 지희. 눈 부분 모자이크.
마지막으로, 남자처럼 입은 지희의 독사진이었다. 날이 흐릴 때였는지,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바보미애! 오랜만에 날 실컷 보니까 좋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야. ㅎㅎㅎ. 연락줘라.'
지희의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두 번째 메일.
'이거 보면서 '몬스터'를 생각했어. 몬스터 알아? 만화 말야. 아직 안 봤냐? 빨리 빌려봐. 정말 재미있어.'
첨부 파일이 있었다. 열어 보니, 리얼 플레이어가 튀어나왔다.
버퍼링 중...
이상한 뮤직 비디오였다. 음악도 이상하고 영상도 이상했다. 장르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테크노 종류같기도 한데...
이런 걸 좋아하나, 이녀석...
언제부터 좋아했지?
나는 지희로부터의 메일들을 접어두고, 나머지 시간을 애완견 사진들을 보며 때우다가 돌아갔다. 엄마는 한참 뒤에 돌아왔다.
"무릎은 어떠니?"
"그냥 그렇지 뭐."
엄마는 양호선생님이 하던 것처럼 무릎을 살펴보았다.
"겉보기엔 이상 없는데...너 꾀병 아냐?"
"그랬으면 차라리 좋겠어."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창문을 열어 두었다. 바람...그 외는 모든 것이 의미없었다. 늦은 사춘기라도 오나. 갑작스레 감상적이 되었다. 아니면, 예전부터 그래 왔는데 지금에야 깨달은 건가?
나는 엑스 레이 사진을 신기해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섬뜩하게 허여멀건한 내 무릎뼈는, 마치 해부한 외계인의 뼈 같았다.
의사 선생님의 사무적인 목소리를 듣는 엄마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일그러지는 듯 하다가 평편하게 펴져 굳어가는 듯했다.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종양처럼 보이는군요. (예? 종양이요?) 이상하네, 이 나이 때 생길 병은 아닌데...아, 아직 확실한 건 모릅니다.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겠습니다. (정밀 검사라구요?!) 예. 일단 피검사를... 지금 하시겠습니까?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병원에 있는 내내 나는 멍해 있었다.
엄마도 멍한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나의 뇌는, 텔레비젼 드라마 속에서 봤던 암 환자와 그 주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었는지 열심히 떠올리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괴로워한다.
그들은 슬퍼한다.
그들은 운명을 원망한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누구도 자신과 같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괴롭지도 슬프지도 운명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버림받은 느낌도 들지 않았다.
누구도 나와 같지 않으리라...
이건 우스웠다.
나는 답답하다. 병원에 오기 전과 같다.
나는 우울하다. 병원에 오기 전과 같다.
"엄마."
"응?"
"나 이제 죽는 건가?"
그러자 엄마는 화를 냈다. 엄마가 길거리에서 그렇게 화를 낸 적은 없었다.
나는 내가 이상한 병--분명 암 종류지만 내 나이에 생길 일이 없는 종류의 증상을 보이는--에 걸렸다는 사실보다는, 그 사실에 대해 어떻게 느껴야 옳은지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한 것 같다. 대응 방식의 샘플이 된 것은 주로 텔레비전의 멜로 드라마들이었다.
머릿속에서 열심히 장면들 떠올리던 중, 수업 시간에, 나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내' 감정들은 다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어째서 무엇을 '느낄지'조차 남을 따라해야만 하는 걸까!
나는 이제껏 정형화된 감정들만을 모방하며 살아온 것이다. 텔레비전으로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나에겐 내 자신이라는 게 없다. 그 사실이 우스워서 소리죽여 킥킥킥 웃었다. 딴엔 작게 웃었는데 소리가 꽤 컸던 모양이다. 아이들이 웃음소리가 이상하다며 따라 웃었다.
나는 웃지 말라고 고함을 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쉬는 시간에 혼자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이과반 친구들과 마주쳤다.
"왜 그렇게 방황하냐?"
"안녕~ 우리랑 놀래?"
그 애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커플이 그려져 있었다.
"얜 히스테리아고 얜 사이코시스야."
"이름이 아주..."
"신군아~~신군!! 여기 편지!"
그 애의 친구인 듯한 아이가 편지를 주고 다시 뛰어갔다. 우리는 빙 둘러모여 편지 내용을 같이 읽었다.
'신군아, 안녕? 일본어 자격 시험 준비는 잘 하고 있어? '
"준비를 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시험공부도 안 하는데."
'신군~~ 수수께끼 주황주황의 시간이 돌아왔어요(편지는 주황색으로 쓰여 있었다)~~. 자! 먼저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릴게요~~.
옛날 옛적, 아주 머언 옛날에~ 어떤 왕국이 있었어요. 그 왕국엔 두 명의 아름답고 아이큐150이상인 공주님들이 살고 있었지요. 왕은 두 공주님들을 너무너무 사랑했답니다.
하지만 왕은 걱정거리가 있었어요. 두 공주님들이 한 번도 웃지 않는 것이었어요. 왕은 공주님들의 웃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지요.
어느날 왕은 포고령을 내렸어요.
'누구든지 나의 두 딸들을 웃기는 자에겐 왕국을 물려주겠다.'
그러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공주님들을 웃기려는 남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목적을 이룰 수 없었어요. 오히려 그들은 짜증이 난 공주들에 의해 목이 잘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북쪽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바람이 휙 불어오더니, 온통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슈트 케이스를 든 흑발의 남자가 왕궁에 나타난 것이었어요.
왕은 물었지요.
"너 왜 왔냐?"
남자는 더할 나위없이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어요.
"공주님들을 웃겨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소름이 쫘악~ 끼친 왕은 말했지요.
"왠만하면 그냥 집에 가라."
그러나 남자는 음산하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어요.
"저라면 틀림없이 두 공주님들을 웃길 수 있습니다."
한참 옥신 각신 하다가, 남자는 두 공주님 앞으로 불려 갔습니다.
"자, 이제 내 딸들을 웃겨 봐라."
남자는 예를 갖추어 공주님들에게 인사했습니다.
그리고...'
편지는 다음 장으로 이어졌다.
'남자는 슈트 케이스에서 보기에도 끔찍한 흉기를 꺼내 왕을 죽였습니다. 공주의 시녀들도 죽였습니다. 남자는 왕궁 안의 모든 사람들을 마법으로 불러 내 두 공주들의 눈 앞에서 죽였습니다.
남자의 검은 옷이 피에 젖었습니다. 두 공주들의 드레스도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두 공주들의 방은 시체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남자는 두 공주를 왕궁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러자 왕궁이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첫번째 공주가 웃었습니다.
두번째 공주는 웃지 않았습니다.
자!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이제 문제를 내겠습니다.
첫번째 공주가 웃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번째 공주가 웃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은 언제나 당신의 마음 속에. 진실에 언제나 저 너머에 있는 것처럼.
모든 즐거움과 모든 비극이 당신과 함께하길 바랍니다.
리들 버밀리온으로부터' --라고 하면 개폼이겠죠?! 헐헐헐~~ 정답을 아시는 분은 아무 종이 쪽지에나 적어서 수수께끼 주황주황에게 보내주세요~~
신군, 답장해~~ 마더 구스의 노래 보내주기로 한 거 잊지마~
안녕.'
"첫번째 공주를 죽이면 그제서야 두번째 공주가 웃지 않을까?"
편지를 받은 아이가 말했다.
"마더 구스의 노래란 게 뭐야?"
내가 물었다.
"아아, 그거 동요야. 전래동요 같은 거."
"으응- 너네 저번에도 마더 구스 얘길 하던데."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이야기의 답을 찾기 시작했다.
"그 공주들은 천성적으로 사이코였던 거야. 머리가 너무 좋아서 사이코가 된 거지. 그래서 웃은 거야."
"음, 웃지 않은 앤 첫째 공주보다 좀더 냉소적이어서 '그게 뭐 어쨌다고' 정신으로 밀어붙인 거지. 아주, 아주, 정답같은 걸."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내 친구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대로 등을 돌리고 걸어갔다.
내 자신이 투명한 유리 구슬이 되어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 같다. 지금이라도 깨질 것만 같은, 연약하디 연약한 유리 구슬이다. 이 건물이 무너져내려서 내가 산산조각나 버린다 해도, 다른 아이들은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 같다. 굳세게,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그대로 종알거리며 서 있을 것 같다.
아이들이 부러운 것이 아니었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제서야 내가 완전히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 사실을 지킬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대고 싶어한다. 누군가 나를 도와달라고 외치고 싶어한다. 여기서 주저앉아 울어야 하냐고 계속 묻고 있다. 답답해하며. 우울해하며. 이상하고 치명적인 병의 숙주가 되어서.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하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 중얼거려 봐도 뭘 느껴야 할지 모른다. 나는, 모른다.
내 몸은 알고 있다. 몸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나는 내 몸의 두려움을 모른다.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에 희망도 모른다. 무슨 암 투병기나 백혈병 투병기에 나오는 것처럼, 삶에의 의지를 갖고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끝까지 이런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백혈병과 투병중이라는 선배를 떠올랐다. 모금을 했었다. 나도 500원을 냈었다. 모금 총액이 게시판에 붙고 학교 신문에도 실렸다. 나를 위해서도 모금을 할까? 아-- 제발. 그런 거 안 했으면. 나도 학교 그만두고 병원 침실에만 누워 있게 될까? 나쁘지 않다. 나처럼 공부도 체육도 교우관계도 그렇고 그런 녀석에겐 병상에서 꼼짝않고 누워있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누워서 뭘 할 것인가. 공상? 무슨? 좋아하는 가수 오빠들이랑 사랑에 빠진다는 상상--유감스럽게도 나는 좋아하는 가수가 없다.
할 일이 없어. 의욕도 없다.
"선생님, 조퇴증이요."
"왜 또 그러니?"
"무릎이 또 아파요."
담임 선생님은 걱정스러워하는 말과 함께 조퇴증을 끊어 주셨다.
나는 내 무릎 속의 병과 함께 학교를 나왔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초콜렛 과자를 세 개 사서 먹으면서 걸었다. 거리는 조용했다.
했볕이 왼쪽 눈꺼풀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데도 새벽 냄새가 난다. 비릿하고 차갑고 약간 녹슨 쇠 같은 냄새. 상점에서 나온 할아버지가 아스팔트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그 냄새는 한순간 강해졌다가 걸어갈 수록 멀어져 갔다. 나는 내가 새벽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햇볕 쨍쨍한 새벽을.
마음이 편해졌다. 머리도 맑아져오는 것 같다. 마음의 얼룩들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다. 나는 길거리 벤치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 잘지내?'
한참 뒤에 답변이 왔다.
'안녕. 누구지?'
'바보 한미애'
'어- 바보. 수업 안 해?'
'그러는 너는?'
'독일어 시간인데 뭐 빼먹어도 따라잡을 수 있어'
'나는 학교 땡땡이야'
'.....-.-;;; 바보'
'조퇴야. 너 나올래? 같이 놀자.'
'나보러 조퇴를 하라고?'
'응♡'
'알았어. 기다려 봐, 이번 시간 끝나고 문자 날릴게'
그러자 정말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조퇴증 끊었어~~ 어디서 놀까?'
"대단하다. 정말로 조퇴했어?"
"니가 나오랬잖아."
"내가 나오라고 해서 그런 거야?"
"나도 그즈음 몸이 근질거렸어. 타이밍이 좋았던 거지."
"담임은 어떻게 속였어?"
"죽을상 폈지 뭐. 평소에 워낙 이미지가 좋아서 먹혔어. 약은 감기약 봉지 아무거나 갖고 가면 되는 거고."
나는 웃지 않았다. 지희도 웃지 않았다. 나는 "뭐하고 놀지..."하고 중얼거렸다.
"그냥 얘기나 하지."
지희는 이야기했다. 나는 들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어이."
"뭐?"
"여기 좀 잘 봐 줄래?"
하며 나는 왼쪽 다리를 들어 무릎을 가리켰다.
"그게 뭐."
"여기 흑공주님이 자라고 있어."
"흑공주..."
지희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게 뭐하는 거냐?"
"암의 일종인데 희한한 거야. 이름은 내가 붙인 거고."
"너 암 걸렸냐?"
"그랬대."
"검사 받아봤어?"
"응."
"확실한 거야?"
"응. 지금 2기 정도 진행됐다는데."
"그거 백혈병 아냐?"
"아니래. 몰라, 내 나이 때 절대 걸릴 일이 없는 병이랑 비슷하댔어."
지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희는 내가 아는 어떤 반응과도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희는 무표정하다. 지희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우리는 아이쇼핑을 하고 다니다가 '던킨 도너츠'에 들어갔다. 우리는 잡담을 하며 도너츠를 먹고 음료수를 마셨다. 나는 지희가 보낸 뮤직비디오에 대해 물었다.
"그거 에이펙스 트윈이야."
나는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테크노 하는 사람인데 천재같아. 소리 낼 때 쓰는 장비같은 것도 직접 만든대. 한번 들어 봐. 인터넷 뒤지면 있을 거야."
"응. 아, 아직 '몬스터'를 못 봤어."
"보라니까."
"괜찮아. 이제 줄곧 병원에만 있게 될 건데. 할일 없으니까 만화책이나 보고 있어야지."
"어어. 너 투병이란 거 할 거냐?"
"나도 몰라."
"바보."
지희는 다시 이야기했다. 나는 들었다.
지희는 새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희는 자기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줄곧 들었다.
지희는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
지희는 조종받지 않는다.
그것이 내 느낌이었다. 나는 저번에 만났을 때처럼 주눅들지는 않았지만, 약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지희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도 몰랐다.
나도 지희도 유리 구슬이었다. 그러나 둘이 부딪힌다면 깨지는 것은 내 쪽일 것이다. 지희는 누구와 부딪혀도 살아남는다. 지희는 유리를 닮은 다른 물질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엄마랑도 싸웠어. 내가 치료받기 싫다고 했거든. 그러니까 엄마가 막 화를 내는 거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그냥은 못 죽게 할 거라면서... 엄마들은 대단하지. 그때 엄마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구나...하고 느꼈어. 하지만 감동적이진 않았어.
내가 가족들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가도 깨달았어. 하지만 가족들이 나 때문에 슬퍼하는 모습은 보기 싫었어. 솔직히 좀 짜증이 났어. "
나는 그때 엄마에게 기대고 싶었다. 나는 약했다. 그래서 언제나, 누군가에게 기대어야만 했다. 엄마도 내가 기대올 것을 바라고 있었다. 나는 엄마와 함께 붙들고 울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지치더라--.그냥 내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쓰러져 자 버렸어."
이번에는 지희가 잠자코 듣고 있었다. 나는 궁금증을 못 참고 "넌 어떻게 생각하지?" 하고 물었다.
"뭘?"
"그러니까-- 그 때 내가 어떻게 했어야 옳았는지..."
"몰라. 하지만 '옳고' '그른' 잣대로 잴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느끼는 대로 행동하면 그걸로 된거지."
나는 놀랐다.
"네 말이 맞아. 그런데--나는 사실 내가 뭘 느끼는 지도 모르겠어. 확신이 안 서. 내가 느끼는 모든 게 어디선가로부터 학습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
지희는 무표정하고 진지했다. 나는 그 진지함이 끔찍했다. 나는 나 또래의 아이가 그렇게 진지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 ...."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말이 머릿속에서 엉켜버렸다.
"이제 뭐하고 놀지?"
"아..."
"롯데월드에 가고 싶어."
"그만한 돈 없어."
"나 있는데."
"데려가주려고?"
"갚아라."
자유 이용권을 끊어서 마음껏 놀았다. 지희가 이거 타자, 저거 타자 하고 나를 끌고다녔다. 해가 기울어가고 바람이 많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은 맞고 서기엔 거칠었지만, 뛰어다니자 매끄럽게 느껴졌다. 무릎이 아플 때마다 "잠깐만"하고 지희를 세웠다.
"어어-- 성인병."
"아냐. 노인병이랬어."
"애늙은이."
"나 조금만 더 있으면 온몸이 멍들고 빈혈로 픽픽 쓰러지고 그럴지도 몰라--"
"로맨스 여주인공 같다. 왜, 피는 안 토해?"
"그럴걸. 머리털도 빠질까?"
"스킨헤드족 같겠다."
"너도 머리 밀어야 돼!"
"내가 왜?"
"초코파이 선전 보면 나오잖아. 백혈병 걸린 친구를 위해서 머리를 밀어버린 우정..."
"너 백혈병 아니잖아. 노인병 걸린 주제에."
"그래도--네가 아니면 날 위해 머릴 밀어줄 친구 없어--."
"미안하지만 내 머리카락을 사랑하는 친구들이 꽤 많은 관계로 그렇겐 못 하겠는걸."
놀이공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청룡 열차를 몇 번이고 탔다. 눈을 뜨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한 건 단 한 번 뿐이었다. 세상이 순식간에 핑그그르 돌았다. 뒤죽박죽... 너무나도 빨랐다.
"너, 대학은 어디 갈 거야?"
"비밀."
"나한테도 물어봐 봐."
"대학 어디 갈 건데?"
"국립대 철학과!"
"진심으로 하는 소리 아니지?"
"그렇지- 아, 나도 수능 안 보겠다."
나는 내심, 지희로부터 '투병해라'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또는 '살아라.' 아니 '너 투병할 거야?' '너 살 거냐?' '살 생각 있어?'
지희는 그러지 않았다.
헤어질 때 지희는 손을 흔들며 "잘가. 또 놀고 싶을 때 연락해." 라고 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전철이 멈춰설 때마다, 맞은 편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리는 여학생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세상이 너무나 지루하고 짜증나서 불만에 차 있다는 듯이 몸을 건들건들 흔들었다. 또는 휴식 시간을 틈타 나온 은행 여직원들처럼 세련된 아가씨같이 서 있었다. 대부분 그 둘 중의 하나에 속했다.
나는 나와 지희가 어떻게 서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생각했다. 그러다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야."
"응."
"저어기--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
"우리가 어떻게 서 있었지?"
"뭐?"
"아니야. 안 들어도 상관없는 소리였어. 문제 하나 낼게. 먼저 옛날 이야기를 들어 봐."
나는 웃지 않는 두 공주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문제야. 첫번째 공주가 웃은 이유는? 그리고 두번째 공주가 웃지 않은 이유는?"
"뭐야 그게?"
"답! 답 말해봐."
"첫번째 공주는 허무주의자라서, 허탈해서 웃은 거야. 두 번째 공주는 아마 첫번째 공주가 죽으면 웃을걸."
"틀렸어."
"답이 뭔데?"
"비밀."
"뭐야 대체."
"어이."
"뭐?"
"즐거웠어--."
"나도."
"나 강해지고 싶어."
"그러냐?"
"잘있어."
"강해지고 싶으면 강해지면 되지. 잘있어."
나는 살고 싶다. 생명력을 후광처럼 두르고 내달리고 싶다.
검은 공주님이 자라기 전에, 내 앞에 놓여졌던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고... 그저 그런 대학 국문과... 어딘가에 취직을 하고... 연애, 또는 중매로 결혼한다. 하나의 가정을 이룬다. 산다. 산다. 살아간다.
병에 걸린 모든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나도 평범한 삶의 가치를 깨닫는다. 하지만 내 삶을 다시 달라고 매달리지 않는다. 병에 걸리기 전으로 돌아가서 그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만약 병이 완쾌된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어떤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열심히-- 내 자신에게 감사하면서. 나는 한 사람의 삶 어딘가에 숨어있는 보석을 운좋게 발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병이 낫기를 열렬히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내 두 가지 소망이, 내 의지를 반으로 나누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죽기를 원한다. 병이 아니라 내 의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건 어렵다. 살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아니... 살기보다는 쉽겠다.
"...희망을 가져라..."
엄마는 말한다.
"너보다 훨씬 심각한, 말기암 환자들도 있다. 산 채로 온 몸이 썩어 들어가는 병을 앓는 사람들도 있어.그 사람들이 다 '나 죽어야지'하는 건 아니다.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아.그 희망이 사람들을 낫게 하는 거다.너 자신을 네 희망이라고 생각해. 엄마의 희망, 아빠의 희망, 너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라고. 병은 절망이야. 너는 절망과 싸워야 해. 그리고 희망은 꼭 이길 거야."
"엄마는 나를 사랑해?"
"그럼..."
"얼마나?"
"아주 많이."
"엄마 자신보다도 나를 사랑해?"
"그래."
곧 골수 이식 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나에겐 형제가 없었다. 엄마나 아빠의 골수도 나에겐 맞지 않았다.
학교에선 모금 운동이 한창이었다. 그런 건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집은 그렇게 재산이 많지 않았다.
"엄마. "
"응?"
"나 만약에 죽어도, 영구차가 학교 한 바퀴 도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뺑뺑이 돌려서 들어간 학교라 애착도 없거든. 학교에서 하는 장례식 같은 것도 하지 말라고 그래. 애들 괜히 귀찮게 하면 나만 욕먹거든. "
엄마는 울음을 터뜨렸다.
문병도 오지 않게 하라고 말했는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버렸다. 반장, 부반장, 나랑 같이 놀던 아이들 네 명, 담임 선생님.
짝이 울먹이며 말했다.
"나는...네가 갑자기 변한 것 같아서...왜그러나...했는데..."
그렇군. 나는 변했다. 아니다. 변하지 않았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하는 법이잖아."
나는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짝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들이 짝을 감쌌다. 이게 문병 와서 뭐하는 짓들이지 하는 생각을 하고는 미안해져서, 나도 짝을 달래려고 노력했다. 담임 선생님이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대견스러워하는 것도 같고, 안타까워하는 것도 같고, 불쌍해 하는 것도 같다. 셋 다 오해 때문에 생겨난 감정이다. 나에겐 전혀 그런 감정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건 암 환자에게 주는 일반적인 시선이었다.
문병이 끝날 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반 아이들이 나에게 보내는 편지들과 시화를 주고 갔다. 엄마는 시화를 벽에 걸었다. 나는 편지들을 읽다 말고 치워 두었다.
다음 날에는 이과 반 친구들이 왔다.
"좋아 보이는데."
"그래?"
"짜식..."
"너넨 편지 같은 거 안 들고 오냐?"
"야, 그래도 우린 모금함에 한 사람 당 3천 원씩 넣었어."
모두 웃었다. 역시 이과반 아이들은 우리 반 아이들보다 시원시원했다.
"신군아, 마더 구스는 보내줬어?"
"응, 그거-- 아직도 기억하냐?"
"하나 들려 줘라."
"음...되게 귀여운 게 있어."
그 아이는 노래했다.
" 'How many days has my baby to play?
Saturday, Sunday, Monday,
Tuesday, Wednesday, Thursday, Friday,
Saturday, Sunday, Monday
Hop away, skip away,
My Baby wants to play,
My baby wants to play everyday,
우리 아기는 며칠이나 놀 수 있지?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뛰어 봐, 깡총거리며 뛰어 봐.
우리 아기는 놀고 싶어해,
매일매일 놀고 싶어해.' "
"응. 귀엽다."
나는 며칠이나 살 수 있지?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뛰어 봐, 깡총거리며 뛰어 봐. 나는 살고 싶어해, 매일매일 살고 싶어해. 그리고 나는 언제쯤 죽을 수 있지?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머릿속에서 가사를 바꿔 부르며 나는 미소지었다.
오늘은 목요일이다.
세 번째로 지희와 만났을 때, 나는 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환자복을 입은 채였다.
"문병와줘서 고마워--."
"환자는 병실에나 있지 왜 이런 데 왔냐?"
지희가 살던 아파트 옥상이었다. 옛날에, 황소자리 유성우를 관찰하러 올라왔던 곳이었다. 아파트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언덕처럼 지대가 높아서 주위가 훤히 보였다. 노을도 보이고, 희끄무레하게 떠오른 달도 보였다.
"넌 좋겠다. 건강해서."
"별로 좋을 것도 없어."
"난 너를 잘 몰라."
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중학교 때부터 작년까지 주욱 사귀어 왔지만, 그게 정말 너였다곤 생각 안 해. 나 역시 마찬가지야. 니가 사귀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인간일지도 몰라.그래도 난 니가 좋아. 니가 살았으면 좋겠어."
"'내 몫까지 살아줘'라고 하진 않겠지."
"안 해! 너는 너대로 살아줘. 그게 할 말이야.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어떤 것에도 조종받지 말고, 너 자신으로 살아."
"너 몬스터는?"
"응?"
"몬스터 봤어?"
"아, 아직."
"뭐가 아직이야. 지금 떨어져 죽으려는 폼 잡고 있는 주제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에이펙스 트윈은 들어 봤어?"
"아니."
"그동안 뭐 했냐?"
나는 대답을 못 했다.
"어차피 죽을 거면 좀 더 즐기다 죽는 편이 낫잖아,바보야."
나는 잠깐 생각해 보다가 웃었다.
"네 말대로 난 바보야. 맞아, 난 끝까지 바보야. "
나는 난간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잘있어."
지희는 무표정했다. 그 끔찍스러울만치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떨어져 내리며 나는 웃지 않는 공주들의 수수께끼의 답을 알았다. 내가 웃었는지 웃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