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곡서원(德谷書院)은 경남 의령 덕곡촌 입구에 있는 서원으로
1654년(효종 5)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있던 윤순거(尹舜擧)가
퇴계선생의 처가가 의령 가례마을이고, 또 한동안 머물렀던 곳이기에
퇴계 이황(李滉)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1660년(헌종 1) 덕곡(德谷)이라는 사액이 내려져 사액서원이 되었다.
덕곡서원(德谷書院)
1869년(고종 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2년(고종 39)에 강당과 솟을대문을 복원하였으며,
1992년 부터 2012년에 걸쳐 사당과 동.서재가 복원되었다.
이 서원은 경남지역에서 유일하게 퇴계선생을 단독으로 모시고 있으며,
매년 2월 20일에 향사를 지내는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덕곡서원 표석
퇴계 이황선생이 의령을 머물렀던 동기는 장인인 허찬(許瓚) 진사가
30여 년간 경북 영천시 초곡동에서 우거하다가, 출생지이며 고향인
가례촌으로 이거하면서 이곳 처가를 방문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선생 사후 1654년(효종 5) 선생의 유학 사상과 덕행을 추앙하고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유림의 건의에 따라 덕곡서원을 건립하였다.
덕곡서원 전경
서원대문인 앙지문(仰止門)
덕곡서원 강당건물과 동재와 대문채
대문이 잠겨있어 부득이 담너머로 담아본다.
덕곡서원 강학당
사당인 경덕사(景德祠)
동재(직방재)
안쪽으로 보이는 서재(존덕재)
강학당 건물
강학당 측면
마을 뒤편의 덕곡서원
서원인근 의령천옆의 탐방로
의령 퇴도암(退陶巖) 유래 안내판
의령 퇴도암(退陶巖) 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겨 넣은 것으로
"퇴도"는 퇴계와 더불어 이황의 또 다른 호이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조선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안동에서 태어나 평생동안 학문연구에 힘써 "동방의 주자"라 불린다.
퇴도암 글자가 있는 바위
수많은 조선의 선비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랐고, 류성룡,정구,김성일
같은 대학자들이 그의 주리론을 계승해 영남학파를 이루었다.
퇴계와 의령의 인연은 퇴계가 21세 되던 해에 의령 가례의 허씨
집안으로 장가를 오면서 시작된다. 퇴계는 허원보의 둘째 아들인
허찬의 동갑내기 딸과 혼인을 하였고 6년만인 27세에 사별을 하였다.
바위밑의 퇴도암
퇴계는 의령 처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며,
처와 사별한 후에도 처가가 있는 의령을 자주 드나들며
대소사를 살폈고, 그러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퇴도암(退陶巖)
처가가 있던 의령 가례마을 암벽에 새겨 넣은 가례동천(嘉禮洞天,
가례동천은 경치가 빼어난곳을 뜻함)과 가례 서암마을의 유래,
퇴도암 등을 들 수 있다. 서암은 암벽의 절경이 빼어나 퇴계가 자주
찾던 곳으로 바위에 글을 새겨 넣었다 하여 서암(書巖)이라 불렀으나,
1970년대 저수지를 건설하면서 사라지고 마을 이름으로만 남았다.
퇴도암 옆의 기린초
이곳 퇴도암 일원은 퇴계가 처가를 찾을 때면 지역 유림들과
학문을 교류하고 낚시를 즐기던 곳으로 후대, 지역 유림들의
건의에 따라 조선 효종 5년(1654)에 의령현감 윤순거가
덕곡서원을 건립하여 퇴계의 사상과 덕행을 기리고 있다.
백화등꽃
백화등 흰색꽃의 꽃받침은 바람개비처럼 다섯 갈래로 깊이
갈라지며 수술도 다섯 개이며, 열매는 삭과로 하얀색 털이 난다.
추위에 대한 저항성이 약해서 남쪽 지방에서만 자생한다.
퇴도암을 둘러보고 돌아나와 가례마을로 향한다.
가례마을의 "퇴계 이황선생 유허지 입구" 표석
가례동천 글씨 바위와 퇴계선생 유허지
이황선생의 친필 유묵 가례동천(嘉禮洞天) 바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嘉禮洞天(가례동천)이라
한자로 쓴 글자인데 지금은 희미하게만 보인다.
비가와서 물에 젖거나 빛의 각도에 따라 잘 보일것으로 보인다.
가례동천 안내문
"여기 큰 바위에 새겨진 가례동천 넉자글은 조선 중기 유학의
태두로서 "동방부자(東方夫子)로 일컬으며 만민의 추앙을 받으신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의 친필 유묵(遺墨)으로서
소중한 향토 유적입니다." ~ 이하생략
퇴도 이선생 유허비(退陶 李先生 遺墟碑)
퇴계선생 유허비와 가례마을 뒷산의 왜가리 서식지
왜가리들의 새끼 육추 시기인지라 수많은 왜가리 무리들의 소리로 시끌시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