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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빙점]
백미러
백화점에서 나온 나쓰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게이조와 도오루의 와이셔츠를 가슴에 안고 나쓰에는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란한 격자 무늬의 흰색 기모노에 남빛 색실을 뚜른 나쓰에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나쓰에는 지금 요코에게 어울릴 만한 블라우스를 사지 않고 나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까 매장에서 ㅂ논 엷은 푸른색 블라우스를 입은 요코의 모습을 상상하니, 나쓰에는 사고 싶은 생각이 싹 가셨다. 하지만 이렇게 남편과 도오루의 옷만 사 가지고 나와 다시 생각해 보니 그야말로 자신이 심술궂은 못된 인간으로 여겨졌다. 나쓰에는 요코가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보이는 일에는 결코 도움을 주고 싶지 않아싿.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쓰에는 역시 그 블라우스를 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금세 마음이 변한 것이다. 다시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회색 승용차가 나쓰에 옆에 와 멎었다.
“쇼핑 나오셨습니까?”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무라이가 내렸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해마다 연초가 되면 사키코와 함께 인사를 오던 무라이가 혼자 온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모셔다 드리지요.”
자신을 바라보는 무라이를 본 순간, 나쓰에는 요코의 블라우스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하지만.......”
“아직 쇼핑이 끝나지 않았나요?”
“아뇨.”
망설이고 있는 나쓰에를 보고 무라이는 미소를 지었다. 차갑고 어두운 미소였다. 지나가던 젊은 여성들이 두 사람을 돌아보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쓰에는 그 시선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벌써 병원 일이 끝났나요?”
“네, 토요일이니까요. 하지만 원장님은 중환자가 있는지 아직 병원에 남아 계시던데요.”
“그 환자 때문에 요즘 며칠 동안은 늦게 들어왔어요.”
“밑에 사람들에게 맡겨 두어도 괜찮을 텐데, 원장님은 그러지 못해 손해를 보시는 거예요. 아니, 책임감이 강한 양심적인 의사라고 봐야겠지요.”
나쓰에는 백미러를 통해 무라이가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를 띄우는 것을 보았다.
차는 이치로 거리를 지나 서쪽을 향해 달렸다. 맞은 편의 낮은 산이 오늘은 여느 때보다 가까이 다가오는 듯 보였다.
“타고난 성격인걸요.”
무라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속도를 조금 올렸다. 추베츠 강의 다리를 건너 가구라 읍의 거리로 접어들었다. 무라이는 웬일인지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쓰에는 눈을 들어 백미러에 비친 무라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라이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어머, 거리 모퉁이를 지나쳤어요.”
나쓰에의 말에 무라이는 가벼운 웃음을 띠고 말했다.
“30분쯤 함께 있어 주셔도 괜찮겠지요? 아직 세 시도 안 됐으니까요.”
30분 정도라면 싫다고 뿌리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비에이 강으로 돌아가는 료진 다리에 접어들었다. 나쓰에는 강 상류 쪽에 보이는 짙은 시험림을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떻다는 말씀입니까?”
“너무 자기 마음대로 하시는군요. 이러시면 곤란해요.”
“하지만 드라이브를 요구해 봤자 거절당한 건 뻔한 일 아닙니까? 냉정한 분이니까요, 부인은.”
무라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냉정하다뇨......?”
나쓰에는 미소를 지었다. 무라이는 휘파람을 불었다. ‘곤돌라의 노래’ 멜로디였다. 휘파람을 그치고 무라이는 중얼거렸다.
“사랑하라, 아가씨여.”
그리고 그는 노래 한 대목을 입밖에 내어 말했다.
“‘빨간 입술이 마르기 전에’ 라고 했던가요? 너무 오래된 노래라 기억도 잘 안 나네요.”
나쓰에는 ‘곤돌라의 노래’를 휘파람에 실어 그 가사를 중얼거리는 무라이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라이는 그대로 정면 언덕을 향해 차를 몰았다. 5, 6백미터 쯤 달리자, 길은 언덕 기슭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평평한 긴 비탈길이 나왔다. 길 양쪽에 숲이 우거져 있어 마치 산속에라도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머, 이쪽은 묘지로 가는 길 아녜요?”
“그래요.”
놀라는 나쓰에에게 무라이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묘지로 가시는 건가요?”
“그래요. 앉짢으세요, 부인?”
“싫어요, 전.”
나쓰에는 미간을 찌푸러ㅕㅆ다. 무라이는 메마른 웃음 소리를 내면서 핸들을 꺾었다.
“싫으세요? 전 마쓰사키의 무덤으로 안내해 드릴까 하는데요.”
“어머, 그 여자는 살아 있다잖아요?”
“천만에요. 살아 있지 않아요. 제가 알고 있는 마쓰사키는 죽었어요. 어느 온천가를 배회하며 살고 있는건 마쓰사키가 아녜요. 그건 그 여자의 망령이에요.”
“어머, 너무하시는군요.”
나쓰에는 백미러에 비친 무라이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쓰에를 무라이가 다시 바라보았다. 어두운 시선이었다.
길 양쪽에는 하얀 아카시아 꽃이 피어 있었다. 달콤한 향기가 차 안으로 흘러 들었다.
경사진 언덕 일대에 넓은 묘지가 있었다. 무라이는 묘지 중간쯤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내려섰다.
마쓰사키 유카코의 묘는 머위 잎들이 무성한 그늘진 덤불 속에 있었다. 꽃도 울타리도 없이 작은 비석이 쓸쓸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나쓰에는 ‘마쓰사키 유카코의 묘’라고 깊이 새겨진 글자를 바라보면서 문득 그녀이ㅔ게 연민을 느꼈다.
‘어리석은 사람이군. 묘비 값만 날린 셈이지.“
나쓰에는 말없이 옆에 있는 묘를 바라보았다. 쇠사슬로 울타리를 둘러친 한 가운데에 흰 마거리트가 피어 있고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살아 있다니 기쁘지 않으세요?”
무라이는 묘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기쁠 거 없어요.”
“........눈이 그렇게 됐으니 무작정 기뻐하실 수도 없겠군요.”
“그런 건 관계없어요. 그 여자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죽었던 게 좋았어요.”
“어머, 매정하기도 해라!”
“부인은 아무것도 몰라요.”
무라이는 담배를 홱 집어던지고는 구둣발로 거칠게 밟았다.
“왜 절 이곳에 데리고 오셨죠?”
“부인이 모르고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죠.”
“모르고 있는 여자요?”
“그래요. 다쓰코 씨가 말하더군요. 부인은 내가 사키코와 헤어졌으니 이번엔 유카코와 결합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면서요?”
“네. 그랬어요. 당신은 마침 혼자 몸이 됐고 그 여자도 혼자니까요.”
“그러니까 죄 값으로 돌봐 주라는 거로군요.”
“죄 값이라니요.......?”
나쓰에는 대답이 궁했다. 무라이는 그런 나쓰에를 바라보며 빈정거리듯이 웃었다.
“부인, 인간은 말입니다. 여러 개의 묘비를 가슴속에 시ㅔ워 두고 있어요. 내 가슴속에는 사키코의 묘비도 유카코의 묩니도 세워져 있어요. 과거에 만났던 여자나 남자들, 여러 사람들의 묘비가 세워져 있지요.”
’가슴 속에 묘비가 세워져 있다?‘
나쓰에는 무라이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유카코의 묘비를 바라보았다. 무라이에게 유카코는 이미 과거의 사람이 되어 버린 걸까, 아니면 과거의 사람으로 생각할 수 없어 묘비라도 세운 것일까? 나쓰에 자신도 무라이에게 과거의 여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인, 난 두 아이들의 묘비만은 세울 수가 없어요. 그리고 부인의 묘비도.”
“네?”
“부인의 묘비도 세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절대 매장할 수가 없어요. 정말 미운 분입니다.”
무라이는 갑자기 격렬한 시선을 던졌다.
나쓰에는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안 돼요, 무라이 씨. 그런 농담을 하시면.......”
“부인, 난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녜요.”
무라이는 다시 격한 눈빛을 보였다. 나쓰에는 짐짓 모르는 척 유카코의 묘비를 보며 말했다.
“…….그보다는 유카코의 눈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해요.”
가까운 나무 위에서 매미가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유카코의 눈요? 실은 부인, 전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믿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원장님이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해서 아무튼 직접 도요토미까지 확인하러 가겠다고 말했지요.”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랬다가 원장님께 크게 꾸중을 들었어요. 농담이 아니라면서 말이죠. 굉장히 화를 내시더군요.”
“어머!”
나쓰에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난 전혀 신용을 못 받고 있잖아요. 하지만 이번 일로 원장님을 다시 봤어요. 원장님이 이마에 핏대까지 세우는 모습은 처음 봤으니까요.”
무라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나쓰에는 얼굴이 굳어졌다. 유카코 때문에 그렇게까지 진지해진 게이조의 마음이 그녀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감초 잎사귀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돌아갈까요? 비가 오나 봐요.”
무라이는 손바닥으로 비를 받으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쪽으로 타지 않으시겠습니까?”
무라이는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나쓰에는 한순간 머뭇거리다 그자리에 올라탔다.
“유카코를 아사히가와로 데려오도록 부탁한 건 부인인 모양이군요.”
무라이가 핸들을 잡고 말했다.
“…….네.”
“그런 참견은 안 하시는 게 어때요? 난 유카코와는 절대 결합하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결국은 원장님이 책임을 지게 돼요. 그래도 괜찮나요, 부인?”
“……..하지만 무라이 씨는 마쓰사키의 눈을 치료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눈 치료만은 해줘야지요. 단지 눈만요.”
싸늘한 말투였다.
“다행이네요. 눈만 치료해 주면 그 여자의 인생이 다시 시작될 테니까요.”
“아마 고칠 수 있었다면 내가 치료하기 전에 진작 나았을 거예요.”
무라이는 내뱉듯이 말하고 차의 속도를 올렸다.
“무라이 씨는 무서운 분이군요.”
“천만에요. 다쓰코 씨의 말을 빌리면 난 세 살짜리 어린애에요.”
후두둑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더니 이내 세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서 차가 쓰지구치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앞 유리창이 와이퍼로 아무리 닦아도 금세 흐려질 만큼 억수같이 퍼부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그냐 ㅇ밖으로 나갔다가는 옷이 다 젖겠어요.”
나쓰에는 고분고분 무라이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비에 젖은 차창을 통해 집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집안까지 들어가려면 우산을 받쳐도 옷이 다 젖을 것 같았다. 나쓰에는 물방울이 튀기는 굵은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문득 오래 전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 날도 이렇게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지.’
도야의 요양소로 떠나기 전에 무라이는 나쓰에를 찾아왔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나쓰에의 목에 키스를 했다. 그때 남은 키스 자국을 나쓰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일이 마치 먼 옛날에 있었던 일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며칠 전의 일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기억하고 있습니까, 부인?”
무라이가 말했다.
“뭘요?”
“내가 요양소로 떠나기 전날의 일 말이에요. 그 날도 이렇게 비가 심하게 내리고 있었지요.”
“비가 내렸다뇨?”
무라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놀라면서도 나쓰에는 시침을 뗐다.
“그래요? 벌써 잊었나요?”
무라이는 앞 유리창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갑자기 무라이가 나쓰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쓰에는 당황하여 눈을 내리떴다.
“잊지 않았지요? 기억하고 있겠지요?”
“……….”
“기억하고 있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해요. 난 더 이상 부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무라이는 화난 듯이 말했다. 빗줄기가 차츰 가늘어졌다. 집안에서 우산과 나막신을 든 요코가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어머니. 비가 굉장했지요?”
요코는 방금 알고는 마중을 나온 모양이었다. 요코는 무라이를 보자 깜짝 놀란 듯이 고개를 숙였다.
“잘 있었니?”
무라이는 호쾌하게 말하며 손을 쳐들었다.
“바래다 주셨어. 백화점에서 나오는데 마침 그 앞을 지나가셨거든.”
나쓰에는 변명하듯이 말하고,
“잠깐 들렀다 가시지 않겠어요?”
하고 점잖은 어조로 무라이에게 말했다.
“그럼 잠깐……..”
요코는 말없이 자신의 우산을 무라이에게 받쳐 주었다.
“요코, 아버지는 아직 들어오시지 않았니?”
무라이를 응접실로 안내하고 나서 나쓰에가 거실에 있는 요코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요코에게 너무도 잘 어울릴 블라우스를 사 오지 않은 데 대한 꺼림칙함과 무라이의 차를 함께 타고 온 데 대한 꺼림칙함이 마음에 걸렸는지 나쓰에는 요코에게 부드럽게 대했다.
요코는 커피를 따르면서 말했다.
“오늘은 환자가 아주 위독하대요. 저녁 식사 때까지 들어오시지 못할지도 모르시겠다고 전화하셨어요.”
“그래?”
“아버지가 너무 힘드실 거 같아요, 어머니.”
나쓰에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나 옷 갈아입고 나올게. 요코, 커피와 과일이라도 좀 갖다 드리렴.”
하고 말했다.
“네.”
악간 상기된 나쓰에의 얼굴을 보고 요코는 곧 눈길을 돌렸다. 웬일인지 오늘 무라이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요코는 중학생 때 안질이 생겨 무라이에게 치료를 받은 적이 있고, 해마다 연초만 되면 세배하러 오는 무라이를 보아 왔는데도 웬일인지 오늘 그에게서는 낯선 무엇인가 느꼈다.
쟁반에 커피와 바나나를 받쳐들고 응접실로 들어가니 무라이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많이 컸구나, 이젠 제법 숙녀 티가 나는 걸.”
무라이는 요코의 목 언저리로 눈길을 돌렸다.
요코는 무라이와 나쓰에의 관계는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유카코의 일은 지난번에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코는 무라이의 시선에서 끈적끈적한 불쾌감을 느꼈다. 말없이 커피와 바나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요코에게 무라이가 말했다.
“거기 잠깐 앉아 얘기나 좀 하지.”
이렇게 말하자 차마 거절할 수도 없었다. 요코는 가볍게 미소를 짓고 소파에 걸터앉았다.
“너 아주 예뻐졌구나. 역시 젊은 아가씨의 아름다움에는 당할 수가 없단 말이야.”
“고마워요.”
요코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 무라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윤곽이 뚜렷하고 균형 잡힌 얼굴이지만 어딘지 일그러진 인상이라고 생각했다.
“네 나이 때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지? 옷이나 남자친구가 공통 관심사인가?”
“선생님, 생각하는 것이 나이에 따라 다를까요? 전 사람의 기질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세요?”
“이거 한 방 얻어맞았는걸. 내가 생각하는 건 일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반은 정말이고 반은 거짓말이지.”
무라이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했다.
“나머지 절반은 무슨 생각을 하세요?”
요코는 소녀답게 솔직하게 물었다.
“이거 얘기가 너무 딱딱해지는걸, 아가씨…….글쎄, 나머지 절반은 너 같은 예쁜 아가씨한테 들려줘서는 안 되는 것만 생각하며 살지. 여자나 지긋지긋한 남자들, 술 문제. 어떡하면 마작에 이길 수 있나 등등 이 세상의 진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들일뿐이야.”
무라이는 스스로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요코는 잠자코 그런 무라이를 바라보면서 아버지 게이조와는 상당히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도 선생님과 같은 생각을 하실까요?”
“글쎄. 원장님은 나와는 달리 성실하시니까 말이야, 일에 대한 것만 생각할지도 몰라. 그런데 요코, 솔직히 말해서 난 성실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도 우리들과 본질적으로는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순결한 아가씨에게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남자란 말이야, 남자인 이상 여자에게 유혹 받기 쉬워. 이건 알고 있어도 좋으리라고 생각해. 원장님도 여자에 관해서는 마찬가지 아닐까? 마음속으로는 말이야.”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나쓰에가 들어왔다. 짙은 감색 기모노에 같은 색깔의 띠를 두른 나쓰에는 머리를 높이 빗어 올리고 있었다.
“어머, 얘기가 한창이군요.”
요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요코. 그냥 앉아 있어.”
“어머니 차도 가져올게요.”
요코는 응접실을 나왔다. 어째서 어머니는 머리 모양까지 바꿨을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요코는 이상하게 불쾌했다. 그 불쾌감은 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키타하라가 어느 해 여름 일주일쯤 쓰지구치 가에 머물렀을 때, 그에게 말하는 한 옥타브 높아진 나쓰에의 목소리와 새빨간 입술 연지에서 요코는 지금 느낀 것과 같은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요코는 나쓰에를 위해 녹차를 준비했다. 피부가 거칠어질까봐 무척 신경을 많이 쓰는 나쓰에는 요즘 들어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았다. 차를 끓이면서 요코는 방금 들은 무라이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남자라면 누구나 여자에 관한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코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싶지 않았다. 무라이의 밑에선 왠지 끈적끈적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아버지 게이조도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무라이와 같은 감정으로는 생각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요코의 직감이었다. 다카기 아저씨도 그렇고 기타하라나 도오루도 무라이와는 다른 감정으로 여자를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를 생각한다는 것은 무라이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불결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쓰에의 차를 가져가려고 했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급히 나가 보니 게이조가 지친 얼굴로 구두를 벗고 있었다.
“이제 오세요! 환자는 좀 어때요?”
“응, 결국 숨을 거뒀어. 밤까지는 버틸 줄 알았는데…손님이 오신 모양이지?”
“무라이 선생님이 오셨어요, 아버지.”
게이조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고,
“무라이 선생이? 오랜만이군.”
하고 먼저 거실로 들어갔다.
“피곤하시죠, 아버지?”
평소에는 금방 뛰어나와 맞아 주던 나쓰에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게이조는 마음에 걸렸다. 안방에 들어가 게이조는 혼자 넥타이를 풀었다. 넥타이의 매듭이 오늘은 이상하게 잘 풀리지 않았다. 손가락 끝까지 지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머, 미안해요. 오늘은 늦게 오신다고 들었기 때문에 당신이 아닌 줄 알았어요.”
나쓰에는 게이조의 어깨에 잠옷을 살짝 걸쳐 주었다.
“무라이가 무슨 일로……?”
게이조는 언짢은 듯이 말했다. 자신이 병원에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무엇 때문에 무라이는 집으로 찾아온 것일까?
“아까 당신 와이셔츠를 사러 백화점에 갔다가 나오는데 마침 무라이 씨의 차가 그 앞을 지나가다가 집에까지 태워다 주셨어요.”
나쓰에는 명랑하게 대답했다.
“음, 그랬소? 친절하시군.”
게이조는 이렇게 내뱉고 양치질을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나쓰에의 목소리가 들떠 있는 것이 불쾌했다.
거실로 돌아오니 어느새 나쓰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게이조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폈다. ‘도시 중심으로’라는 제목을 ‘도시 심중(心中:함께 죽는다는 뜻)’으로 잘못 읽고 게이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바로 오늘 병원에서 죽은 마흔 남짓한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내의 시체에 매달려 흐느껴 울면서 이름을 불러대던 남편의 모습도 떠올랐다. 게이조는 일어나 응접실로 갔다.
“왔소? 집사람을 태워다 주었다고요?”
무라이의 얼굴에도, 나쓰에의 얼굴에도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는 것을 보고는, 게이조는 자신이 두 사람 가운데 끼어든 듯한 위화감이 들었다.
“도리어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환자는 끝내 숨졌다고요?”
“그래요. 임종을 보는 건 정말 질색이오. 아무래도 익숙해지지가 않아.”
게이조는 요코가 가져온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세요? 아지곧 익숙해지지 않으셨어요? 난 죽어 가는 환자는 거의 취급하지 않아 모르겠군요.”
무라이의 말코가 게이조에게는 냉담하게 들렸다.
무라이의 말씨나 태도 하나하나가 요즘 들어 게이조에게는 특히 불쾌하게 느껴졌다. 유카코가 지팡이를 짚고 터벅터벅 걸어가던 모습을 본 후로 게이조의 마음속에는 무라이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감정이 새로이 싹트고 있었다.
“아버지도 푸딩 좀 드시겠어요?”
요코가 먼저 무라이 앞에 푸딩을 내려놓고는 게이조와 나쓰에 앞에도 갖다놓았다.
“응, 먹어볼까? 요코가 만들었구나.”
게이조는 부드럽게 말했다.
“별로 잘 만들진 못했지만…….”
“응, 맛있구나. 요코도 여기 와서 함께 먹자.”
게이조는 지금 요코가 옆에 있어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요코가 옆에 있기만 해도 마음이 평안할 것 같았다. 그런 게이조의 말에 나쓰에는 요코를 흘끔 바라보고 나서,
“요코, 네가 먹을 푸딩도 갖고 오렴.”
하고 말만은 부드럽게 했다.
“오랜만에 오셨으니 천천히 놀다 가세요. 맥주나 위스키라도 가져올까요?”
나쓰에가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아니, 전 운전을 해야 돼서……..”
“하지만 모처럼 오셨는데 택시로 가세요. 그렇게 해요, 여보!”
“음, 그럼 그렇게 하는 게 좋겠소.”
게이조는 마음속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오랫동안 의사의 아내로 살아왔으면서 나쓰에는 지금 남편이 얼마나 피곤할 것이란 것도 모른단 말인가. 최근 2.3일 내내 오늘 죽은 환자 때문에 남편은 밤마다 지친 몸으로 돌와왔다. 그리고 오늘은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나쓰에한테는 오랜만의 손님일지 모르지만 무라이는 날마다 얼굴을 마주치는 존재였다.
“내일은 일요일 아녜요? 천천히 앉아 노세요. 제가 비프스테이크를 대접해 드릴 테니까요.”
“비프스테이크요? 솔깃하기는 하지만 다음에 또 들르지요.”
무라이는 말없이 차를 마시고 있는 게이조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했다. 요코가 푸딩을 가지고 들어왔다. 게이조는 뻐근해진 목을 천천히 돌렸다.
“아버지, 의사란 참으로 어려운 직업이겠어요. ‘운명했습니다’하고 말해야 하잖아요. 사람의 죽음을 선언한다는 건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요.”
“물론 그렇지. 요코는 그런 괴로움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나쓰에의 눈이 금세 흐려졌다.
“잘 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다카기 아저씨가 말씀하셨어요. 아기가 태어난 것을 가족에게 알리는 건 즐거운 일이라고요. 그렇다면 죽음을 알리는 것은 그 반대일 거 아녜요.”
게이조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요코가 말한 ‘죽음의 선언’이라는 말을 게이조는 마음속으로 되뇌어보았다. 지금까지 게이조는 수없이 많은 환자의 임종을 목격했다. 유족들이 비통하게 울부짖는 가운데 운명했음을 알리고 그 비탄에 젖은 울음소리에 떠밀리듯이 병실을 나서야 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다만 의사로서 임종이라는 과정을 지켜본 데 지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운명했다고 말할 때 한 인간의 생애 전체가 끝난 것에 대한 의미를 자신은 과연 얼마나 깊이 느끼고 있었을까?
“지금 요코가 ‘죽음의 선언’이라고 말해서 생각난 건데, 그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야. 인간이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다는 건 왠지 두려운 일이라 여겨지는군.”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원장님. 죽음엔 결코 속임수가 통하지 않으니까요. 애매모호한 건 용납할 수 없잖아요.”
무라이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바로 그거요. 무라이 선생. 진단이라면 암이라도 암인 것 같다는 표현이 통할 수 있지만 죽은 것 같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으니까 말이오.”
“죽은 것 같다……?”
무라이는 유쾌한 듯 웃었다. 나쓰에와 요코도 따라 웃었다. 게이조도 쓴 웃음을 지었지만 뭔가 웃어 넘길 수 없는 것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한 인간의 죽음을 분명히 선언한다는 것은 그곳에 모여 있는 가족들에게 낙담과 절망, 비탄과 고통을 안겨줄 뿐이다. 거기에는 한 가닥의 희망도 없다. 사흘 낮밤을 꼬박 요코의 곁에 매달려 간병하는 중에도 게이조는 거의 절망에 빠져 있었으나 그래도 그때는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실날 같은 희망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아니 조(兆)에 하나라도 희망이 있으면 그것은 완전한 절망은 아니다.
“죽음이란 대체 무엇일가? 완전한 절망일까?”
“그거야 말 그대로 절망이죠, 여보.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니까요.”
나쓰에가 푸딩을 먹으면서 말했다.
“그렇죠. 죽음이란 완전한 종말을 의미하니까요. 재와 약간의 뼈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리죠. 그게 바로 죽음이에요.”
무라이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말했다.
“그럴까요? 재와 뼈밖에 남지 않는 게 죽음일까요?”
“그야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들 말하니까 업적 정도는 뒤에까지 남겠지요. 하지만 누구나 영구히 남을 만한 업적을 쌓는 건 아니지요.”
“하지만 무라이 씨, 추억도 남아요. 전 아직도 루리코를 잊지 못하고 있어요.”
루리코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나쓰에는 무심코 무라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루리코는 살해당한 바로 그 날 이 응접실에 들어왔었다. 안에는 나쓰에와 무라이만 있었다. 무라이와 단둘이 있고 싶었기 때문에 나쓰에는 루리코에게 밖에 나가 놀라고 일렀다.
“선생님 싫어, 엄마도 싫어! 아무도 나하고 놀아 주지 않아.”
루리코는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뛰쳐나갔었다. 그 말은 나쓰에가 들은 루리코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떠올리며 나쓰에는 가슴이 메어 얼마나 큰 고통을 느껴왔던가.
“나쓰에, 추억이나 이름이 남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오. 그건 말하자면 이 세상의 문제가 아닐까? 난 죽은 인간 자체의 사후 문제를 말하고 싶은 거요. 왜 흔히들 지옥이니 극락이니 하고 말하잖소?”
마직막 말은 특히 무라이에게 하는 것 같았다.
“지옥이나 극락 말입니까? 그런 아이들 속임수 같은 얘긴 아무래도…….”
무라이는 얼굴에 엷은 웃음을 띄웠다.
“과연 아이들 속임수일까요?”
현대인의 감각으로 보면 지옥이니 극락이니 하는 말에는 확실히 눈속임을 하는 곡마단의 저속한 느낌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영원한 생명’이나 ‘피’의 문제를 포함한 깊은 사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게이조는 무라이를 바라보았다.
“전 천국이나 극락이 있는 편이………”
하고 말끝을 흐리더니 나쓰에는 잠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루리코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무라이는 화제를 바꾸려 했다.
“아무튼 원장님, 극락이나 지옥같은 얘기는 의사가 관여할 분야가 아닙니다. 중이나 목사들이 할 일이니까요.”
“그래요, 분명히 의사가 관여할 분야는 아니오. 하지만….”
“의사는 병만 고치면 돼요, 원장님!”
무라이가 가로막듯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오. 하지만 환자의 가장 큰 고통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오. 무라이 선생은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인간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죠. 죽음이라는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고, 결국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니 어쩔 도리가 없어요.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서로 가능하면 좋아하는 일을 하다 죽는 거예요. 어쨌든 전 심각한 얘기는 딱 질색이에요, 원장님.”
무라이가 이야기를 중단시키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라이가 떠난 후, 게이조는 거실 소파에 걸터앉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무라이가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무라이의 차를 타고 어디 들렸다 왔소?”
나쓰에는 말없이 소파 끝에 앉았다.
“저….마쓰사키의 묘에 데리고 가더군요.”
나쓰에의 말에 게이조의 얼굴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당신을 거기에 데리고 갔다고?”
“네, 태워다 주겠다고 하기에 곧장 집으로 올 줄 알았어요. 근데 사거리에서 돌지 않고 료진 다리로 건너가 버리잖아요.”
“무례하게!”
남의 아내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싶어 게이조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집으로 차를 돌리라고 말하지 그랬소?”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기에……..”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요코에게 들리지 않도록 나쓰에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30분 정도라면 당신은 어디든지 따라갈 수 있다는 거요?”
“어머, 어디든지라뇨? 그런……..”
“누가 태워다 주지 않더라도 택시가 있잖소, 택시 말이오.”
게이조의 목소리도 나직했으나 어조는 날카로웠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것까지야…….무라이 씨는 우리 병원의 직원이잖아요?”
“직원은 병원 일만 해주면 돼요. 당신도 루리코가 죽었을 때의 일을 생각함녀 무라이의 차에 함께 탈 기분이 나지 않았을 게 아니오. 그런게 어머니라는 거 아닌가?”
“알았어요. 당신은 20년 전의 일을 아직도 원망하고 계시는군요.”
‘당연하지.’
그날 무라이와 나쓰에가 루리코를 밖으로 내보내지만 않았더라도 루리코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무라이만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찾아왔더라도 현관에서 돌려보내기만 했더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만사에 빈틈이 없는 것 같으면서 나쓰에는 그런 면에는 느슨하다고 생각하며 게이조는 마음속으로 원망하고 있었다. 루리코만 죽지 않았던들 요코를 이 집에 데려왔을 리도 없다.
부엌에서 스푼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가엾게도!’
요코는 아무것도 모르고 무라이에게 자신이 만든 푸딩을 대접했다. 게이조는 자신이 요코를 데려오게 된 경위는 잊어버리고 무라이야말로 자기 집안의 모든 불행을 야기한 장본인이라고 생각하며 새삼스레 그에게 강렬한 증오를 느꼈다.
“무서운 분이군요, 당신은.”
“그래? 난 당신이야말로 무서운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머! 제가요?”
나쓰에는 게이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쨌든 무라이는 정말 싫소.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는 사내는 상대방의 입장 같은 건 생각지 않아요. 나쓰에. 그러니 조심해야 하오.”
“당신 아직도 절 의심하고 계세요?”
나쓰에는 안색이 싹 변하여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의심하는 건 아니오. 하지만 당신은 누가 봐도 30대로 보이니까……”
게이조는 위압당한 듯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당신 요즘 들어 말솜씨가 많이 늘었군요. 전 의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괴로워요.”
나쓰에는 응석을 부리듯이 어조를 바꾸었다.
“앞으로는 무라이와 단둘이 있는 건 왠만하면 피하도록 해요. 그것만은 부탁하오…..”
“하지만 차를 태워 주는 것쁨이야 괜찮지 않나요?”
“안 돼요. 차는 독방이나 마찬가지니까.”
“싫어요. 독방이라뇨? 독방은 밖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방을 말하잖아요. 차는 앞이나 옆과 뒤가 모두 유리창 아녜요.”
“하지만 차 안에서 하는 얘기는 밖에선 전혀 들리지 않지. 그런 의미에서는 호텔 방보다도 더 심하게 차단된 독방이라고 할 수 있소. 게다가 그 독방은 남의 눈을 피해 산속으로 이동할 수도 있잖소? 묘지에도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겠지?”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어머, 또 의심하고 계시네요. 몰라요, 전.”
“무라이도 그렇소. 굳이 남의 눈에 뜨지 않는 묘지로 당신을 데리고 갈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오.”
“또 같은 말씀을…….”
“지겨울 것 같지만, 당신에게는 귀가 닳도록 말해줄 필요가 있소.”
“마쓰사키의 묘를 보여줬다니까요, 여보.”
“죽은 사람의 무덤이라면 참배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마쓰사키 양은 살아 있소. 살아 있는 마쓰사키 양의 무덤을 뭐하러 가본단 말이오?”
어둠 속을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던 유카코의 처량한 뒷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자 게이조는 무라이와 나쓰에에게 또다시 화가 났다. 유카코를 핑계로 또다시 두 사람이 나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몰라요. 당신은 너무 끈질겨요.”
나쓰에는 고개를 돌렸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게이조는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나쓰에는 토라진 옆얼굴을 보인 채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게이조도 일어설 마음이 없었다. 요코가 부엌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리는데도 두 사람 다 잠자코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요코가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쓰지구치 집입니다. …..어머 오빠! …..그래 잘 있었어? …..응? 어머, 돌아가셨어? 응, 응, 계셔, 잠깐만.”
“돌아가시다니, 누가?”
게이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