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선생문집에 나오는 김성일의 답
당초에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와서
두 사람이 적의 정세를 말한 것은 서로 달랐다.
내가 하루는 친히 김성일을 만나 보고 묻기를,
“그대가 말한 것이 황윤길과 다르니,
만일 왜군이 실지로 온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하였더니,
김성일이 말하였다.
“나도 어떻게 왜군이 끝끝내 오지 않는다고 기필할 수야 있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꼭 왜놈들이 우리 사신들의 뒤를
바로 쫓아오는 것 같아 인심이 흉흉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했을 뿐입니다.”
西厓先生文集卷之十六
雜著
書壬辰事始末示兒輩
壬辰之變。國事顚覆。當時大臣。固無所逃其罪。嘵嘵自辨。秖以爲累。但其當日事蹟。亦不得不粗陳一二。使汝輩知之也。當初黃允吉,金誠一等回自日本。二人所言賊勢不同。余一日親見誠一問之曰。君言與黃使有異。萬一倭果來則如何。誠一曰。吾亦豈必倭之終不來耶。但黃言太重。似若倭踵使臣而來。人情洶洶。故如此言之耳。余日夜憂倭兵之至。凡於備邊一事。苟有所見。不敢不盡其愚。嘗與首台在政府。同坐議倭變之有無。余曰。吾則以爲倭兵必來。今國家昇平日久。邊患之作。不可不慮。且以一事言之。東海産魚。近日移於西海。以至漢江亦有之。此亦恐海氣遷移而然也。全羅水使闕。薦井邑縣監李舜臣代之。壬辰春。以慶尙右兵使曹大坤年老難策應。於筵中請以李鎰代大坤。使之先期下去。措置邊備。以擬倉卒。而主兵之官難之而不行。又以兩南制勝方略。分軍失宜。請復祖宗鎭管之制。使之鱗次待變。事下本道而不能行。又以倭兵善用鳥銃。而我國但有勝字銃筒。不可敵。時倭國所獻鳥銃新到。啓請以訓鍊副正李鳯領京上番軍士。使之訓習鳥銃。而議者皆以爲迂。日久悠悠。竟亦無效。然則以倭不來而緩於防備者。實非臣之本意也。但區區愚見。以爲人心先動。則智勇皆竭。必須先爲鎭定。然後凡事可以措手。且聞南方築城。或未得形勢。而徒勞民力。因弘文館劄子而有所妄陳。則似有之。而日久之事。未知所言如何也。及賊勢已深。朝議當遣體察。使檢勑諸將。而余謬膺其任。卽請以兵曹判書金應南爲副使。與之同坐中樞府。治行事。時義州牧使金汝岉坐事繫獄。以其人頗有武略。啓請解放自隨。忽申砬自外來。謂余及副使曰。聞賊兵已過密陽。將至嶺下。朝廷使李鎰獨以孤軍在前。而後無策應之將。勢甚危急。體察使雖下去。非戰將。賊勢若緩。則猶可在後檢勑諸將。今賊已逼。何不使猛將星馳先下。爲鎰軍繼援耶。余深然其言。卽答曰。令公之言甚是。但武將無可去者。柰何。砬應聲言曰。國事方急。誰不可去。雖小人。若令去則敢不去耶。余面歎曰。令公許國之忠。人不可及。此大事也。吾等當卽請對陳達。上必招令公而下問。可以此意同啓。卽時余與副使請對。啓達如砬所言。余旣退而砬繼入。遂受巡邊使之命而出。時余與副使還在中樞府。軍官應募者八十人。點閱書單子將入啓。砬又到余坐言其事。又曰。吾亦出闕門外。召募軍官。良久入來。頗有怒色。謂在庭軍官等曰。汝輩何以投歇厭苦。不應我募耶。因謂余曰。軍官無一人應募者。極爲過甚。余謂之曰。同是國事。何分彼此。吾所募得者。令公可先帶去。吾行在後。可更募而行也。因以軍官單子投其前。砬手持單子。顧在庭軍官曰。來。遂引出。汝岉亦同行。砬旣去數日。余意妄以爲砬旣去。當留待數日。聞賊勢。治行迺發爲宜。且倉皇失次之際。料事失宜。方欲更募軍官啓行。不意二十八日夕。砬敗報來。洶洶罔措。政院吏於昏黑中來言曰。以隨駕落點。可扈從。遂於明曉扈駕而出。當時事情。不過如此。若使一言半句有所遷就粉飾。則神明必殛之矣。當時之事。不獨他人有所不知。汝輩亦不知。死者如申知事金判書。旣無所問。獨此頑命猶不殞絶。以累人世。若不一言以暴當日心事。則死不瞑目。遺恨無竆。故粗具一二。此外他事。不敢盡書。書亦不能盡也。
해석-46부터-51-까지
임진년(1592, 선조25) 일의 시말(始末)을 적어 아이들에게 보임
임진년의 난리로 국사가 그르쳐졌으니 당시의 대신들은
정말 그 죄를 피할 길이 없으니, 구구하게 스스로 변명해 봤자 다만 허물만 더할 뿐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실정을 대략 한두 가지라도 진술하여 너희들이 알도록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초에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와서
두 사람이 적의 정세를 말한 것은 서로 달랐다.
내가 하루는 친히 김성일을 만나 보고 묻기를,
“그대가 말한 것이 황윤길과 다르니, 만일 왜군이 실지로 온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였더니, 김성일이 말하였다.
“나도 어떻게 왜군이 끝끝내 오지 않는다고 기필할 수야 있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꼭 왜놈들이 우리 사신들의 뒤를
바로 쫓아오는 것 같아 인심이 흉흉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했을 뿐입니다.”
내가 밤낮으로 왜군들이 올까 염려하여 대체로 변방을 수비하는 일에 대하여 생
각한 것이 있으면 어리석은 도모를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은 영의정과 함께 정부에 있을 때에 같이 앉아서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를 상의하였다.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곧 왜병들이 꼭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국가가 평화스럽게 지내 온 지가 오래되어
변경 지방에 난리가 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한 가지 일로써 말한다면 동해에서 생산되는 고기가
요사이 서해로 이동하여 한강까지 오는 일도 있다 하니
이것도 바다의 기류(氣流)가 옮겨져서 그런가 염려됩니다.”
전라 수사가 결원이 되자 정읍 현감 이순신(李舜臣)을 추천하여 대치하게 하였다.
임진년 봄에 경상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이 너무 늙어 자기 직무를 수행하기가 어렵다 하여
연중(筵中)에서 이일(李鎰)로 조대곤을 교대하도록 요청하여,
그로 하여금 기일보다 앞서 내려가서 국경의 수비를 조치하여
창졸간에 일어나는 일을 대비하게 하였는데,
병사를 맡은 관리가 어렵게 여겨 실천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경상ㆍ전라 두 도의 제승방략은 군사를 나누는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진관 제도를 부활시켜서 지방마다 점차 보급 실천시켜
변란에 대비하도록 요청하여 본도에 내려 보냈으나 행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왜병들은 조총을 잘 쏘는데 우리나라는 승자총통만 가지고 적을 대항할 수 없었다.
이때에 왜국에서 헌납한 조총이 새로 도착하였으므로 장계를 올려
훈련 부정(訓鍊副正) 이봉(李鳳)으로 서울의 상번군사(上番軍士)를 통솔하여
조총 쏘는 법을 훈련시키도록 간청하였는데, 관계자들이 다 헛된 일로 생각하여
시일이 지나니 흐지부지되어 끝내 이것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니 왜군들이 쉽사리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방비를 태만하게 한 것은 사실 나의 본뜻이 아니었다.
단지 구구한 나의 소견으로는 인심이 먼저 동요되면
슬기와 용맹이 모두 고갈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선 진정시킨 뒤에
모든 일을 착수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남쪽 변방에서
성을 쌓는 일은 곳에 따라서는 지세를 옳게 잡지 못하고
백성들의 힘만 수고롭게 한다는 홍문관 차자를 인하여
망녕되이 진술한 것도 있는 듯하나,
오래된 일이라 어떻게 말하였는지 알 길이 없다.
적의 전세가 심각하게 되자, 조정의 공론이 당연히 체찰사(體察使)를
파견시켜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야 된다고 해서 내가 망녕되게
그 책임을 수락하고 곧 병조 판서 김응남(金應南)을 부관으로 삼을 것을 요청하여
그와 함께 중추부에 같이 앉아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시행하였다.
이때 의주 목사 김여물(金汝岉)이 일에 연좌되어 감옥에 있었는데,
그 사람이 무략이 제법 뛰어나므로 석방하여 스스로 따르게 할 것을 장계로 요청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신립이 밖으로부터 들어와서 나와 부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듣자니 적군이 벌써 밀양을 지나 머지않아 조령 밑까지 당도한다 하는데,
조정에서는 이일 홀로 외로운 군대를 가지고 앞에서 싸우게 하고
뒤에는 책응(策應)해 주는 장수가 없으니, 사세가 매우 급합니다.
체찰사께서는 비록 내려가신다 하더라도 싸우는 장수가 아니시니,
적의 형세가 만일 느슨하다면 후방에 계시면서 여러 장수들을
독려해도 되겠지만, 지금 적의 세력이 매우 급한데 왜 용맹한
장수를 시켜 시간을 다투어 먼저 내려가서 이일의 군사를 계속 지원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그의 말이 매우 옳다고 여겨 곧 대답하기를,
“공의 말이 아주 옳은 말입니다마는, 무장으로서
갈 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하니,
신립이 이어 말하였다.
“국가가 일이 시간을 다투어 급한데 누가 간들 불가하겠습니까.
비록 소인이라도 만약 가라고 명하시면 감히 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내가 그 앞에서 탄식하며 말하였다.
“공이 국가에 바치려는 충성은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는 큰일이라, 우리들이 곧 왕에게 청대하여 진달하면
상께서 반드시 공을 불러서 물어볼 것이니, 이 뜻으로 똑같이 말씀을 드리시오.”
나와 부관은 바로 청대하여 신립이 말한 대로 진달하였고,
내가 물러 나오자 신립이 곧이어 들어가서 결국 순변사의 임명을 받고 나왔다.
이때에 나는 부관과 같이 돌아와 중추부에 있으면서 군관 응모자 80명을
점검하여 명부를 작성해 가지고 들어가 아뢰려고 하는데,
신립이 다시 내 자리로 와서 그 일을 말하면서,
“나도 궐문 밖에 나가서 군관을 모집하겠습니다.”하고 나갔다.
그런데 얼마 후에 들어와서는 노여워하는 기색으로 마당에 있는 군관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괴로운 일을 싫어하며 내가 모집하는 데 응하지 않느냐?”
이어 나에게 “한 사람도 응모하는 군관이 없으니, 이건 너무 심하다.”고 하였다.
내가 “다 이것이 국사인데 왜 너ㆍ나를 나누는가?
내가 모집해 놓은 사람들을 공이 먼저 인솔해가면
나는 뒤에 가니 다시 모집하여 갈 수 있다.”고 타일렀다.
이어 군관의 명단을 그 앞에 던져 주니, 신립이 명단을 집어들고
마당에 있는 군관들을 돌아보며 오라고 하더니 인솔해 갔다.
김여물도 함께 갔다.
신립이 간 지 며칠 뒤에 나는 신립이 이미 갔으니 며칠 기다렸다가
적의 형세를 듣고 행장을 차려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창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때에 일의 처리에 실수가 있을 것 같아서
군관을 다시 모집하여 떠나려고 하는데,
뜻밖에 28일 저녁에 신립의 패전 소식이 오자 인심이 몹시 어지러워 조치할 길이 없었다.
승정원의 관리가 어둠침침할 때에 와서
“왕의 어가를 따르는 데 낙점되었으니 호종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이튿날 새벽에 어가를 호종하여 피란길을 떠났다.
그 당시의 사정은 이에 지나지 않으니, 만약 일언반구라도
사실과 달리 허위로 꾸몄다면 천지신명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
당시의 일은 다른 사람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도 모르는 바이다.
죽은 지사(知事) 신립과 판서(判書) 김응남 같은 이에게는 벌써 물을
바조차 없고, 다만 이 모진 목숨만 죽지 못하고 살아서 세상을 더럽혔으니,
만일 말 한마디라도 그날의 심정을 밝히지 않으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고
끝없는 한만이 남을 것이다. 이런 관계로 대략 한두 가지를 기록하여 두거니와,
이 밖에 다른 일은 감히 다 쓸 수도 없고, 써도 그 실정을 바로 쓸 수 없다
.[高靈]
<받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