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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3月 ☞소통과 합력의 달☜
창1:14-19절) 해와 달과 별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어둠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특히 해 뜨기 전에는 모든 것이 어둡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아침에 해 뜨는 모습은 그렇게 찬란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어둠은 물러가고, 영광스러운 햇살이 퍼져오기 시작합니다.
저는 매일 아침 창문을 열면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행하여 찬송가 552장 *아침 해가 돋을 때*를 부리며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가볍운 운동으로 즐거운 하루를 시작합니다.
해 뜨는 모습이 가장 장관을 이루는 곳은 일본의 후지 산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 뜨는 것을 보기 위하여 새벽에 후지 산에 오릅니다. 동편 바다 위로 해가 떠오를 때의 장관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향하여 연방 두 손을 모으고 절을 합니다. 그래서 일본의 국가는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순간은 정말 영광스럽고 찬란합니다.
그러나 해가 내내 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해가 지면 어떻게 됩니까? 또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쟁반같이 둥근 달이 아주 조용히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별들도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별이 수백 개나 수천 개 정도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그저 그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백 개, 수천 개가 아닙니다. 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각양각색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도 많은 별들이 박혀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 위에서는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천장을 뜯어고치거나. 지붕을 고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닌데, 우리 머리 위에서는 매일 엄청난 변화와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이 하늘에서 일어나는 이 놀라운 비밀을 보고서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그들은 태양을 보면서 절대적인 신(神)을 생각 했습니다. 즉 *태양은 절대적인 신(神)이야 태양을 건드리면 안 돼*
또 달을 보면서 *운명의 여신*을 생각했습니다.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달의 모습을 보면서 *저건 우리의 운명과 같아 달은 운명의 여신(神)이야*합니다.
그리고 별을 보며 *별 하나에 나. 별 하나에 어머니*하면서, 저 별이 우리 모든 사람을 나타내고 있으며, 저 별에 우리의 운명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나의 별이 떨어지면 나도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의 왕(王)들은 다 자기 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王)이 죽으면 피라미드에 구멍을 내서 왕(王)의 눈과 그의 별이 일치하는 위치에 시체를 안치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치되지 않습니다.
지구가 기울어져 돌지만. 약간 떨면서 돈다는 것을 학창 시절에 배운 사람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축(地軸)이 약간 떨면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만큼 각도가 안 맞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감안해 보면, 위치가 딱 맞습니다. 왕(王)은 죽어서 자기별을 보며 누워 있고, 그 별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바벨론은 별점으로 유명했습니다. 별을 보면서 인간의 운명과 국가의 장래를 점쳤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은 박사가 아니라, 별을 연구하는 점술가(占術家)였습니다.
오늘날의 천문학자는 물리학자지만 옛날의 천문학자는 점술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별을 보고, *큰 왕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왕께 경배하기 위해서 지금의 이라크 땅에서 들판을 건너고, 물을 건너서 온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비밀스러운 변화들이 일어나며, 누가 이런 일을 일으키는지 제대로 알기 전에는, 우리는 단 하루도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고대인들은 이것을 보면서 태양신(太陽神)을 생각했습니다. 태양보다 더 절대적인 신(神)은 없었습니다. 태양은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줍니다. 우리는 하루라도 태양을 보지 않으면, 두렵고 춥고, 기분이 언짢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날씨가 찌푸린 날은 영 기분이 안 좋은 여자들이 많습니다. 여자들 뿐 아니라, 남자들도 태양신(太陽神)을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안절부절 못하고, 괜히 이 방 저 방 왔다갔다. 하면서 죄 없는 커피나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달을 보면서 자신의 운명을 생각했습니다. 하루하루 변하는 달의 모습에 운명의 조화가 있으며, 저 별 하나하나에 나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즉 사람들은 매일매일 일어나는 이 엄청난 밤과 낮의 변화를 보면서 운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할 때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운명론(運命論)자였습니다. 엄청난 신비(神祕)가 그들의 머리 위에서 그들을 내리누르고 있었고, 풀 수 없는 비밀(祕密)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운명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반대로 현대인들은 철저히 하늘을 무시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도시인들은 별을 보지 않은 지 오래며, 달을 구경하지 않은 지 오랩니다. 태양도 두려워하지 않고, 달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현대인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파트 값이 올라가는 것이지, 해나 달의 변화가 아닙니다. 과학이 발달해서 태양과 달이 신(神)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그냥 빛나는 것입니다.
해나 달이 어떤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해와 달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이 세상에서 돈버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술이 얼마나 팔리는지 몰라요. 토하면서도 죽어라고 퍼 마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상반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늘의 비밀(祕密)이 풀리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운명론적인 사고방식에 빠져서 운명에 압도된 채, 모든 것을 두려워하며 꼼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것이 신(神)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하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땅에 파묻혀서 술이나 퍼 마시면서 쾌락(快樂)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말씀하는 바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타당한지 모릅니다.
성경은 태양과 달과 별이 운명(運命)도 아니고, 신(神)도 아니며, 절대적인 존재도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被造物)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태양과 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심으로써, 사람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해야 하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의 지식(智識)은 우리가 불필요하게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자연을 잘 이용하고, 개발하는 과학적인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이렇게 불필요한 두려움에도 빠지지 않고, 불필요한 교만(驕慢)에도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하나님 생명의 말씀이 주는 지혜입니다. 고대인들은 해와 달과 별을 두려워했고, 현대인들은 정반대로 완전히 무시(無視)하고, 잊어버린 채. 태양이 한 개인지, 두 개인지도 모르고, 철저히 교만(驕慢)하게 삽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불필요하게 운명(運命)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교만(驕慢)하지 않게 막음으로써 먹고 마시고 탐닉(耽溺)하는 생활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는 놀라운 말씀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Ⅰ.일반적인 은혜
오늘 첫째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넷째 날에 태양과 달과 수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1:14절)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으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첫째 날에 만드신 빛과는 다른 큰 광명체를 하늘에 만드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빛이 아닙니다. 형체(形體)가 없는 빛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빛*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빛이 아닙니다. 태양이 있고, 거기에 핵융합(核融合)반응 같은 것이 있어서 생긴 빛이 아니라, 그냥 빛입니다. 즉 그냥 빛이 있었고, 밤과 낮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들을 비추었던 빛과 같습니다. 그때 그들에게는 빛이 있었고, 애굽 사람들에게는 어둠이 있었습니다. 왜 빛이 비추었는지, 그들은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태양이 떤던 것이 아니고, 전기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공중에 빛을 낼만한 발광체(發光體)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냥 빛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빛이고, 신비의 빛이고, 특별한 빛이고, 기적의 빛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날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빛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이 특별한 빛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비추게 하는 대신에 자연적인 빛을 만드셨습니다.
넷째 날부터는 이 정상적인 빛이 땅을 비추며, 밤과 낮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즉 특별한 빛이 정상적인 빛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좀 어려운 표현을 쓰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恩惠)가 일반적인 은혜(恩惠)로 바뀐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야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 때, 그들을 먹인 양식은 만나였습니다. 이 만나는 기적의 음식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하늘에서 양식이 내리는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恩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나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100년 200년 먹이신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 양식을 구해야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똑같이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서 추수를 해서 먹었으며, 기적의 만나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신비(神祕)는 숨고, 자연법칙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집을 지을 때, 처음에는 철근과 콘크리트와 여러 가지 다른 뼈대들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집이 완성되어 갈수록 철근은 모습을 감추고,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집을 지으면서 세웠던 뼈대들도 치우는 것을 봅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신비(神祕)이며, 기적(奇蹟)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사가 완료됨에 따라서 그가 사용하신 연장이나 기구들을 하나씩 둘씩 감추면서 그 자리를 정상적인 자연법칙(自然法則)으로 메꾸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늘 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계속 설명할 수 없는 신비(神祕)의 빛으로 이 세상을 밝히지 않으시고, 태양이나 달이나 별빛으로 대신하게 하십니까?
왜 계속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십니까? 왜 모든 것을 자연의 법칙에 따라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겸손(謙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작품에 사인(sign)을 남겨 놓지 않으십니다.
그 모든 사인(sign)을 다 지우셔서 도대체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앞에 나셔서 우쭐거리면서 자기를 자랑하는 분이 아니라 뒤에 숨어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태양 뒤에 숨어 계시고, 달 뒤에 숨어 계십니다. 아주 작은 별 빛들 뒤에 숨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실 때, 거적과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하시지만, 금방 자연법칙을 그 위에 덮어서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게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은혜(恩惠)를 일반화하심으로 사람의 중심(中心)을 시험해 보십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이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미련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이라도 기적이 일어나면, 약간 겸손해지면서 신(神)을 인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기적이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라, 날마다 일어나는 정상적인 자연법칙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정상적인 이성과 생각에 따라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은혜(恩惠)를 정상적으로 나타내면, 사람의 중심(中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으로 도움을 받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믿지만, 정상적인 도우심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해서 병이 나은 것은 하나님이 고치셨다고 믿으면서도, 병원에 가서 수술해서 나은 것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현대 의술이 치료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교만(驕慢)하고. 무지(無知)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이 없을 때, 하루하루 기적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힘들게 경쟁을 뚫고, 취직했을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생기는 수입에 대해서는 그렇게 인색(吝嗇)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토익 시험을 잘 치르고, 면접시험을 잘 보아서 취직해서 번 *내 돈*이기 때문입니다. 즉 공짜로 생긴 돈은 *하나님의 돈* 내가 번 돈은 *내 돈*입니다. 즉 *내가 수고했고, 내가 취직했고, 내가 공부했고, 내가 붙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랑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기적으로 주시지 않고, 일반적인 자연법칙으로 덮으신 것은 우리에게 은혜(恩惠)임과 동시에 시험(試驗)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정상적인 방법을 통하여 사람 속에 있는 교만(驕慢)과 간사(奸詐)함을 드러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 땅에서 추수했을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신(神)을 선택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은 것은 하나님의 공급이 아니고, 자신들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만나의 신(神)이고, 가나안의 곡식의 신(神)은 바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일반적인 은혜가 충만한 시대입니다. 사실 오늘날에는 기적(奇蹟)보다는 인간이 만든 것들이 훨씬 더 유익(有益)을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문명의 혜택을 더 받으려고, 하고 사회에서 인정받으려고 하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경배 드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도해서 병이 낫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병원이 많이 들어서 있으며, 의술(醫術)도 많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주는 은혜(恩惠)도 있지만,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시험(試驗)입니다.
사람의 됨됨이를 하나님께서 테스트해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눈에 보이는 이것을 보고 만족하면, 그 사람은 시험(試驗)에 불합격(不合格)한 것입니다.
우리는 문명의 혜택이라는 풍성한 은혜를 볼 때, 하나님을 더 바라보아야 하며, 이것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도록 더 기도해야 하고, 더 겸손(謙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반 은혜들은 금방 우리의 마음을 미련하게 만들고, 교만(驕慢)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을 때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더 많이 기도해야 했고, 더 많이 겸손(謙遜)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에서 정상적으로 얻는 수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고, 교만(驕慢)하게 만들며, 하나님을 잃게 할 가능성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난할 때보다는 생활이 넉넉해졌을 때,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집이 없을 때보다 집을 샀을 때, 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은 정반대입니다.
셋집이 없을 때에는 집주인의 마음을 감동시켜 달라고 매일 울부짖으면서, 자기 집을 사고 나서는 소파를 갈고, 인테리어를 바꾸고, 대형 텔레비전으로 바꾸는 데에만 신경을 씁니다.
또 대학들어가기 전에는 그렇게 기도하면서도 대학가고 나면, 다 잊어버립니다. 또 직장이 없을 때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직장이 생기면, 굉장히 교만(驕慢)해집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중심(中心)을 드러냅니다. 승진하면, 말단에 있을 때보다 더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사회적인 신분(身分)이 장애(障礙)가 되어 하나님을 잃게 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조심하지 않으면, 태양이나 달이 하나님을 가려서 하나님을 놓치게 되고, 더 큰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간이 한 짓이 무엇입니까? 태양을 얻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달을 얻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직장과 집을 얻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식이 없을 때는 그렇게 기도하더니, 자식이 생기고 나서는 그 똥 색깔 하나하나에 너무나 신경을 쓴 나머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아이가 기침만 한번 해도 신앙이 흔들립니다. 이것이 그의 신앙의 본색입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분입니다. 불타오르는 태양 뒤에 조용히 숨어 계시고, 쟁반같이 둥근달 뒤에 숨어 계시며, 별 사이에 조용히 숨어서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적과 신비로 만드신 모든 흔적을 제거하시고, 마치 이 자연이 자연법칙에 따라 저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한 걸음 뒤에 물러서 계신 것은, 인간의 중심(中心)을 시험하시고, 그들의 겸손(謙遜)과 진실함을 확인해 보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워할게 무엇이 있습니까? 집이 있든. 없든.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태양이 있든. 없든. 하나님은 그 하나님이십니다. 월급으로 채워지든. 누가 준 쌀로 채워지든. 그 하나님은 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너무나 간사(奸詐)하고, 깊이가 없어서 조금만 편해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즉 돈이 생기면. 잊어버리고, 직장이 생기면, 잊어버리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벌어들이는 것에 대해서 겸손(謙遜)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거만(倨慢)하고, 교만(驕慢)한지 몰라요. 하나님께서는 태양과 달 뒤에서 이러한 인간의 간사(奸詐)함과 미련함을 비웃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늘 일반적인 법칙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매일매일 만나로 공급하시다가 월급으로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실 때, 그때 주의해야 하고, 겸손(謙遜)해야 하며, 더 정신을 차려서 그 두둠한 월급봉투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대학과 직장과 집이 하나님을 가리지 않도록 이것들을 치워버리고, 어렸을 때보다 더 겸손해질 때, 집이 없어서 수없이 쫓겨 다니고, 이사 다니던 시절보다 더 긴장할 때,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은혜(恩惠)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Ⅱ.바른 깨달음이 주는 유익
둘째로 성경의 지식(智識)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발광체를 통해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징조*라는 단어입니다. 이 *징조(徵兆)*라는 말을 두고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해석이 정반대로 갈라집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이 *징조*를 *정해진 운명의 사인(sign)*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태양과 달과 별의 변화를 통해 이미 정해진 신(神)의 뜻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대(古代)의 많은 사람들은 몇 년 동안 흉년이 드는 것을 *지금 통치하고 있는 왕(王)에 대한 신(神)의 불신*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흉년이 들 때, 반역과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통치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곧 이 태양의 변화, 일기의 변화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즉 지금도 *홍수가 나고, 흉년이 들면, 신(神)이 지금의 통치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하늘에서 별똥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큰 인물이 죽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운명은 정해져 있는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런 운명의 사인(sign)이 별과 태양과 달의 변화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하늘의 뜻이 정해서 있다고 생각하고, 천체(天體)의 변화를 통하여 그 징조(徵兆)를 읽으려고 합니다.
어느 경우에 사람들이 이런 것을 믿습니까? 인간의 판단이 미치지 않는 부분에서 그렇게 합니다. 도저히 내가 예측할 수 없는 일에서는 운명을 믿습니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 공사하는 사람들은 아침에 일진(日辰)을 살핍니다.
오늘 혹시 실수해서 떨어져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꼭 아침에 QT하듯이 화투를 쳐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가서 일을 할 수 없이요. 너무나도 작은 변수에 의해서 모든 것이 뒤바꾸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대통령 레이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점술가(占術家)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理性)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서는 포기를 해버립니다. 즉 더이상 생각을 하지 않고, 우연(偶然)에 맡겨 버립니다.
거기에 비하여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 *징조*라고 하는 것은 일기의 변화에 대한 규칙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녁 때, 노을이 붉게 물드는 것은 *날씨가 더워질 표시*라든지, 태양이 뜨는 위치가 조금씩 달라지면, *밤낮의 길이가 변한다든지, 앞으로 태풍이 불어오거나. 큰 비가 내릴 것 같은 조짐들이 곧 징조*인 것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날씨의 변화나. 태양이 뜨는 시간이나. 위치의 변화, 날씨와 비 또는 바람과의 관계 등을 부지런히 관찰해서 어떤 규칙을*찾습니다.
그래서 큰 비가 올 것 같으면, 그것을 대비하고, 가뭄이 올 것 같으면, 우물을 파든지. 가축을 물 있는 곳으로 이동시킵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일기를 예보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나라 중 하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북쪽에 큰 대륙성 기후를 가지고 있고, 남쪽에 해양성 기후를 끼고 있어서 그 사이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렸을 때는 *일기예보는 믿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즘 일기예보에서 예보가 맞을 확률이 60% 80% 라고 하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100%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일기의 변화가 그렇게 심하지 않아서 *소나기 올 거야*하면 비가 쫙 오고, *갤 거야*하면 갭니다. 믿음의 딸 기상캐스터 예쁜이들이 더 잘 알겠지만.....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규칙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즉 *입춘(立春)*이 되면. 날씨는 아직 춥지만. 봄이 옵니다. *경칩*이 되면, 개구리가 땅에서 나올 때니까 본격적인 농사 준비를 해야 합니다. 6월 말에는 장마가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7월 초순에 캠핑날짜를 정하는 사람은 징조를 잘 못 보는 사람이지요. 8월 둘째 주에 날짜를 잡으면, 거의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풍은 몇 차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사람은 당장은 햇볕이 내리쬔다 해도 태풍을 생각하고 사과나 배가 떨어지지 않게 주의를 합니다.
*소한*이면, 아직 *대한*이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오리털 잠바를 벗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징조*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별의 움직임, 별똥의 떨어짐, 달의 색깔, 태양이 이글거리는 정도 같은 것을 통해서 나라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을 찾아보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연을 자세히 관찰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대비하고, 남을 지도해서 위험에 대비하게 하는 슬기롭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미신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과 과학적인 관찰을 하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대(古代)에 과학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즉 자연은 신(神)인데, 어떻게 신(神)의 발가락을 헤아리며, 신(神)의 털을 세고, 신(神)의 심기(心氣)를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냥 운명대로 살다가 운명대로 죽어야지요. 또 낙엽처럼 왔다가 낙엽처럼 가야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자연이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이고, 탐구의 대상이며,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세밀하게 연구해서 징조를 찾아내고, 씨 뿌릴 때, 씨를 뿌리고, 추수할 때, 추수해서 겨울을 대비합니다.
미신적(迷信的)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우연(偶然)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해도 깨닫지 못합니다. 계속 같은 일을 당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미신적(迷信的)인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토속신앙은 샤마니즘, 무당,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인 사람은 한 번 당하지, 두 번은 당하지 않습니다. 한 번 당하면서 모든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속 연구(硏究)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해서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합니다. 과학적으로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두 번 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홍수가 날 때마다 떠내려가거나. 가뭄이 날 때마다 말라 죽지 않습니다.
오늘날 같은 짓을 몇 번 당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가 아직 얼마나 우연(偶然)에 지배당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단히 비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고, 우연(偶然)에 의지하고 있으며 *재수가 좋으면 한탕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컴퓨터를 두들기면, 뭐합니까? 그걸로 점(占)을 치는데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당하면,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거기에서 징조를 읽어내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예측하며, 거기에 대해서 전문가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번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 어려움에 전문가가 되어 버립니다, 여러분,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단순히 직감(直感)과 육감(肉感)을 믿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어떤 일이 한 번 일어났을 때, 자세히 관찰하고, 검토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입니까?
신앙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모든 것을 직감(直感)과 육감(肉感)으로 결정합니다. *왜 이런 결정을 했습니까? 하고 물어 보면 *하고 싶어서요*하고 대답합니다. *하고 나니 어떻습니까?* 하면 *속이 편한 데요*합니다. 그것이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의 전부인 것입니다. 옛날 습관입니다.
여러분, 반복적으로 일이 일어난다는 것에는 부지런히 사물을 연구하고, 검토해서 누구든지 공유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마련해 냄으로써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며, 리더십을 발휘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 내 속에 있는 기적과 체험을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법칙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늘의 색깔이 이상해지는 것을 보면,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부들부들 떨면서 이불을 뒤집어씁니다.
그때 그리스도인은 *저건 비가 올 조짐이니, 헛간을 고치고 수로를 내자*고 합니다. 그런데 보니까 정말 인류의 종말이 온 것이 아니라, 큰 비가 왔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굉장히 합리적이고, 믿음직하고, 위기 때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하고 그런 사람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 과학의 힘을 믿고 교만해졌지만, 실제로 20세기가 오기 전까지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부 성경을 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실존적인 경향이나, 자꾸 비합리적인 생각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주도적인 역할, 봉사하는 역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알아야 하고, 위에 조금 솟은 것을 보면, 밑에 있는 빙산(氷山)이 얼마나 큰지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문제가 터지고 나서야 허겁지겁하면서 *어떻게 하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Ⅲ.두개의 광명체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두 개의 광명체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는 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은 것입니다.
1:16절)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는 두 광명체(光明體)를 만드실 때, 똑같은 것을 두 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똑같은 것을 두 개 만들면, 사람들에게 혼동이 생깁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모릅니다.
태양이 두 개가 돈다면, 사람들의 가치관에는 금방 혼동이 생길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은 두 광채(光彩)를 차이 나게 하셔서 하나는 크게 만드시고 다른 하나는 작게 만드셨으며, 작은 것은 큰 것의 빛을 받아서 비추게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주관 한다*는 표현을 쓰고 계십니다. 여기서 *주관 한다*는 것은
*다스린다*는 뜻인데, 이것은 정치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다스린다, 주관한다*는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낮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태양의 지배를 받으며, 밤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달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일까?
왜 하나님은 여기에서 *주관한다.*는 표현을 쓰고 계실까? *비추게 한다.*고 하면 좋지 않을까? 왜 그보다 훨씬 더 강한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여기서 *주관한다.*는 것은 지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해와 달이 지배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직접 창조하신 의도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관한다.*는 것은 *모든 것의 실체를 명확하게 규명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물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생물체가 발견되었을 때, 그것을 수많은 계통수(系統樹)중에서 생물 분류학(分流學)의 어떤 범위 안에 집어넣고, 그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밝히고, 주관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즉 *너는 원숭이니까 원숭이 과에 들어가고, 코가 개처럼 생겼으니까 개 코 원숭이다*라고 이름을 붙였을 때, 이 개 코 원숭이는 더 이상 미확인물관체가 아니며, 언제든지 개 코 원숭이입니다.
태양이 낮을 주관하고, 달이 밤을 주관한다는 것은 밤이나 낮이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자기가 분류된 그 안에서 명확한 실체로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서 낮에는 이것이었는데, 밤에는 저것인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즉 낮에는 개였는데, 밤에는 사람이고, 낮에는 늑대였는데, 밤에는 예쁜 여자가 되는 것은 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달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채 밤낮에 따라 바뀌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낮이 개면, 밤에도 개입니다. 개는 영원히 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밤낮을 통해 어떤 것이 항상 동일한 물체로 규명될 수 있도록 정하셨습니다.
무슨 말을 이렇게 빙빙 돌리면서 하는지. 의아심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밤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존재가 무엇입니까? 유령(幽靈)이지요. 유령이야말로 유에프오(UFO)입니다. 우리는 비행접시를 유에프오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규명할 수 없는 물체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규명되지 않는 것이 유에프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존재하지 못하게 한다는 겁니다. 낮에는 사람이 사는 도시인데, 밤에는 유령이 돌아다니는 일은 달빛 아래에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달만 비치면, 늑대 소리가 들리면서 유령(幽靈)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잔치도 벌이고, 마녀(魔女)들이 빗자루를 타고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낮과 밤이 다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낮에도 지켜 주시고, 밤에도 지켜 주십니다. 특히 밤에는 수많은 별들을 만드셔서 밤을 아름답고, 두렵지 않게 만드셨습니다.
어떤 원주민들은 자는 사람을 옮기지 않습니다. 사람이 잠을 자는 동안에 영혼(靈魂)이 그 몸을 떠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옮겨 놓으면, 영혼(靈魂)이 자기 몸을 못 찾습니다. 즉 내가 누웠던 자리가 어디인지, 누구에게 들어가야 하는지 찾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을 굉장한 금기(禁忌)로 삼습니다.
요새 웃기는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영혼(靈魂)이 개(犬)한테 들어가서 여자 옷 냄새를 맡고, 죽기 전에는 남자였는데 죽고 나서는 여자의 속에 들어가서 활동합니다. 굉장히 웃기고, 미친(狂)짓입니다.
태양을 우습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성(性)전환 같은 것을 안 돼요. 남자는 남자로 죽어야 하고, 여자는 여자로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양을 통해 낮을 주관하시고, 달을 통해 밤을 주관하신다는 것은 밤낮이 뒤바뀌지 않도록, 밤을 혼동이 되지 않도록, 밤이 편안한 안식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밤이 겁나서 잠을 못 이루거나, 영혼(靈魂)이 빠져나가거나, 유령(幽靈)이 설치는 혼란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낫에는 해를 통해서, 밤에는 달과 수많은 별들을 통해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의 잠자리를 아름답게 하십니다.
아이들이 잘 때, 엄마가 위에 나비와 고추잠자리를 달이 주어서 아이가 *꽃밭에서 새근새근 자는 것*처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밤이 공포의 밤이 되지 않도록, 또 낮에 너무 충격을 받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어떤 물건이나. 짐승이나. 사람은 밤이나. 낮이나. 그대로 존재합니다. 그 정체성을 잃지 않습니다. 밤이 된다고 해서 그 사람이나. 물건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사람이 죽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는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분명히 나입니다. 그때는 해와 달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주관합니다.
동일한 말씀이 있기 때문에 죄인(罪人)이 의인(義人)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인으로 산 사람은 죽어서도 죄인(罪人)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은 죽어서도 의인(義人)*입니다. 바뀔 수가 없습니다. 즉 *이 사람 영혼 속에 들어갔다가 저 사람 영혼 속에 들어갔다가*할 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낮을 통해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밤을 포근하게 하시며, 혼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니다. 여러분, 밤에 뜨는 별을 보십시오. 별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밤을 더 아름답게 하신 하나님, 밤을 더 찬란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밤에 별이 없고, 달이 없다면, 사람들은 밤마다 정신병에 걸릴 것입니다. 밤이 오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 제목도 있지만, 왜 잠을 못 잡니까? 별만 헤아려도 잠이 옵니다. 성경책을 읽으면 꿀 잠이 옵니다. 왜 잠을 못 잡니까? 여기에는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밤은 무엇입니까? 깨닫지 못하고, 무지(無知)한 중에 방황할 때, 우리는 *영혼의 밤*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무서운 시련(試鍊)의 때도 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고, 깨닫지 못하고, 당하고, 깨닫지 못하고, 고난 받는 밤입니다.
그러나 이 무서운 밤에도 하나님은 별이 빛나게 하셔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날 도와주실 거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무지한 중에 방황하는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느낌이 없으면, 사람들은 어려움이 오고, 환란이 올 때, 견디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울 때에도 우리를 완전히 절망중에 몰아넣지 않으십니다. 그 중에서도 희미하지만, 소망(所望)을 주시고, 희망(希望)을 주십니다.
오늘 넷째 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단히 과학적이면서 합리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비(神祕)의 하나님이며, 기적(奇蹟)의 하나님이시지만, 그 모든 도구와 흔적을 지워 버리시고, 자연법칙(自然法則)안에 맡겨 놓으심으로써 숨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으로 이 세상을 지켜 주시는 것은 은혜(恩惠)임과 동시에 시험(試驗)입니다. 월급을 봉투가 두툼하게 받고, 내가 벌어들인다고 해서 교만(驕慢)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직장을 아주 절대적으로 생각합니다. 신앙도 주일날 예배도 통하지가 않아요.
*직장을 위해서 한다.*고 하면, 예배에 빠져도 되고, 죄를 지어도 됩니다. *사장님이 시켰다*고 하면, 술자리에서 이상한 짓해도 됩니다. *학교에서 한다.*고 하면, 신앙도 법도 필요 없어요.
얼마나 미련하고, 가증스러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만나와 가나안의 곡식이 다른 이유가 뭐가 있으며, 셋집을 전전할 때와 내 집이 있을 때가 다른 이유가 뭐가 있으며, 대학 들어가기 전과 들어간 후의 태도가 달라질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조금만 안정되면, 그때부터 교만(驕慢)이 싹이 나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신앙을 짓밟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 은혜를 통해 시험하고 계십니다. 좋은 직장을 얻었으면, 더 겸손(謙遜)해야 합니다.
더 정신 차려야 하고, 더 기도해야 하고, 주일 예배에 빠지면 안 됩니다. 공부 좀 잘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생각한다면, 속고 있는 것이며, 그때 신앙의 밑천이 다 드러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자연 질서 뒤에서 보고 계십니다. 조용히 보고 계십니다.
인간의 간사(奸詐)함과 가증됨을 보고 계십니다.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매일매일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양과 달과 별들을 만드셨고, 그것들은 매일매일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꼴통과 고집 불통은 아무리 이야기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밀(祕密)도 아니고, 신비(神祕)도 아니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생명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보면서 운명(運命)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 과학의 발달로 그것이 신(神)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 하늘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술이나 퍼 마시면서 돈 버는 재미로 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며,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토정비결을 믿지 않습니다. 징크스를 믿지 않습니다.
매번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위기가 와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생각해서 자신의 논리적인 확신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를 비추는 말씀의 빛은 어떤 빛보다 강한 빛이며,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찌꺼기와 불필요한 두려움과 운명적인 사고방식을 내쫓는 빛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이 내 마음속을 비추어서 성실하게 탐구하는 자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으로 하루를 살도록 돕고 결단하게 하십시오. 이 올바른 깨달음이 중단된다면, 미신(迷信)과 우상(偶像)과 강박관념(强迫觀念)이 다시 우리를 주장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찬송가 499장 *흑암에 사는 백성들을 보라*
율법서(모세 오경)
▣ 예배 2월 27일(주일) 셀 보고서 첨부
주일 예배와 헌금 봉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천국시민된 특권과 은혜감사
요4:23절)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순서 :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성경 : 본문 읽기와 생명의 양식 공유, ☆찬송 : 삽입된 찬송, ☆헌금 : 헌금과 봉헌기도, ☆연구원을 위한 합심기도와 주기도문으로 끝내십시요.
◈후원금 외 헌금은 전체의 10/1을 연구원 설립비로 ▽입금하고, 나머지는 성도간 교제비, 애경사, 새신자 환영, 전도비 등으로 사용하십시요.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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