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속된 말로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말한 대로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가 되어가나 봅니다.
매일 같이 언론에 오르고 내리는 소식은 그것이 차마 인간이 할 짓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예를 저는 지금 여기에 옮길 생각은 없습니다. 보고 들을 때 마음이 그렇게 아팠는데
또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다만 김 삿갓 시인이 그런 부류를 싸잡아 점잖게 한 말이 있지요.
"天脫冠而 得一點(犬)
乃失杖易 橫一帶(子)이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어찌 걸핏하면 '개'를 들먹여 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옮겨 드리는 이야기는 눈물겹도록 애잔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감동적이라 가슴이 먹먹하고 두고두고 가슴에서 맴돕니다.
개 이야기를 옮기며 곁들여 제가 살면서 접했던 개들에 대한 이야기도 올립니다.
♡ 6년 간 주인 묘소 지키고 있는 충견 이야기 ♡
충견 카피 단 이야기부터 옮깁니다.
가장 흔한 욕설인 '개새끼'를 영어로는 'Son of a bitch'라고 합니다.
bitch는 암캐를 뜻합니다. 20여 개국 수억 인구가 사용하는 스페인어에서는
'Hijo de Perra(이호 데 빼 라)'라고 합니다.
hijo는 영어의 son, perra는 dog에 해당하는 perro의 여성 형입니다.
역시 암캐의 자식이라는 뜻이지요.
충성스럽고 진솔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 개,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런 욕은 감히 입에 담지도 못할 것입니다.
아르헨티나 중부 카를로스 파스 마을의 공원묘지.
카피 단이라는 이름의 개가 한 묘소를 지키고 있습니다. 6년이 넘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2006년 3월 사망한 주인 미카엘 구 수 만 씨의 묘소 곁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카피 단은 구 수 만 씨가 세상을 떠난 날 집에서 사라졌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유족들이 아무리 찾아봐도 온 데 간 데 없었습니다.
찾다가 지친 가족은 차에 치여 죽었나보다 하고 포기했답니다.
그리고 일 주일 뒤 묘소에 갔는데, 카피 단이 묘소 곁을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가족을 보더니 마치 통곡을 하듯 울부짖으며 짖어댔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묘소에 한 번도 데리고 간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 장소를 알고 찾아갔는지….
미망인 베로나 구 수 만의 이야기 입니다.
묘지 관리인 헥토르 박 세 카에 따르면 어느 날 나타나 묘지 전체를 돌아다니더니
저 혼자 힘으로 주인 묘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가족이 몇 차례나 집으로 데려 왔지만
날이 어두워지면 주인 묘로 급히 되돌아가곤 했답니다.
관리인들은 이처럼 너무나 헌신적인 카피 단을 측은히 여겨 먹이를 주고 보살펴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가족이나 공원묘지 측 모두 카피단의 뜻에 따라주기로 했답니다.
한 가지 더 특이한 것은 매일 저녁 6시 정각이 되면 묘소 위로 올라가 엎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밤 새 그러고 있다 합니다. 어둠과 추위로부터 지켜주겠다는 듯 보듬어 안은 자세로….
아들인 데미안은 "아마 카피 단은 죽을 때까지 아버지 묘소를 지킬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카피 단 개 이야기는 받은 메일을 옮긴 이야기 이고,
제가 살면서 그리고 직접 키우면서 보았던 실제 개 이야기를 옮겨드리고자 합니다.
<이야기 1>
1950년 6.25 당시 우리 집에서는 노랑 개 한 마리를 키웠습니다.
두매 산골 시골에서 키우던 개는 족보가 있는 개도 아니고 흔히 시골에서 키우는 토종 개였습니다.
아시다시피 6.25동란 중이라 마을에서는 좌익들이 날뛰던 때였고, 야밤에 몰래 염탐하는 것이
저들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개가 방해가 되어 개만 보면 죽이던 그런 때였지요.
때가 때인지라 우리 동네에서도 심 복 동(양일동 故 국회의원 외삼촌)씨 댁과 우리 큰댁과 우리 집만
우익이었고 마을 전체가 그들 동조자였습니다.(직간접으로 살기 위한 수단이라 여기렵니다.)
그래서 심히 감시 받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하필 우리 사돈댁 지(池)씨 집안도 좌익 앞잡이였는데 우리 집이 우익이다 보니 밤낮 가리지
않고 몰래 와서 염탐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었는지 지(池) 씨네 가족이 오면
우리 집 개는 영락없이 짖고 물어뜯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집 개 같았으면 벌써 잡아 죽였을 것인데
차마 사돈네 개라 죽이지 못했습니다. 6.25 그 당시는 개가 짖어 염탐에 영향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잡아다 죽였었지요.
그럭저럭 마음속으로 신통한 개라 여기며 키우는 중에 공산치하가 패하여 도주할 때입니다.
아마 1950년 9월초쯤으로 기억됩니다. 저의 고향은 깊은 산골이었기 때문에 순박한 사람들이라 6.25
참화를 다른 곳에 비하여 아주 적었던 곳입니다. 사촌 형님이 대한청년단 단장이었기에 6.25참화를
면할 수 없었을 수도 있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서포리(西浦里) 조씨 공산 앞잡이들이 형님을 잡으러
왔는데, 바로 이웃동네에 사시던 면당 민청위원장이셨던 심 재 복이라는 분이 의용군에 입대하러
갔다가 불합격을 받아 귀가하다가 그 꼴을 보셨습니다. 자기 재가도 없이 그랬다고 오히려 잡으러
왔던 사람들은 매만 맞고 돌아가 형님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났지요.
이처럼 6.25전쟁은 3 년여가 지속되었지만 저의 고향은 3개월 정도만 지배되었다가 1950년 9월 말쯤
저들이 패주하면서 금강을 넘어 도주하려다 인천상륙이 성공하면서 패주로가 막히는 통에 우리 동네
옆 용천 산이라는 곳에 집결하였고 대야라는 곳에는 미군이 점령하여 다음날 미군과 인민군이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한창 총탄 포탄이 쌍방 교전하면서 마을이 위태하여 아버지 나 그리고 누나는 집을 두고
마을에서 떨어진 도랑 언덕 밑에 엎드려 숨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은 왜 그러셨던지 집에 계셨습니다. 총알이 날아오고 포탄이 날아오는데도 말입니다.
그 때 키우던 개가 어머님 치마를 물고 사정없이 짖어 대더랍니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님도 집을 두고
마을을 벗어나시는 순간 집에 총알세례가 퍼부은 것입니다. 뛰어서 마을을 벗어나 마을 끝에 있는
서 마지기 논에 엎드려 있는데 거기에서도 개는 계속 어머님 치마를 물고 짖어댔답니다. 해서 어머님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 자리를 뜨는 순간 그 자리에 포탄이 날아와 터지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 개가
아니었으면 우리 어머님은 6.25 당시 하늘나라로 가셨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다른 족보도 있는
개도 아니고 시골에서 흔히 키우던 평범한 개가 어머님을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그 개에 대한 고마움으로 개는 계속해서 키우다가 늙어 죽었는데 그 개가 죽었을 때 우리 가족 모두 많이
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고맙고 우리에겐 은인 같은 개였습니다.
<이야기 2>
제가 역촌동에 살 때입니다.
우리 둘째 딸(정아)이 개를 좋아해서 애완견 치와와를 키웠습니다.
저도 개를 예뻐해서 키우고 있는데 제 아내는 개를 좋아하지 안 해서 키우는 데 많이 힘들었습니다.
개라는 짐승은 참으로 영리한 동물입니다. 자기를 예뻐하고 미워하는 것을 알아서 예뻐하는 사람만
잘 따릅니다. 그래서 딸이 학교에 가거나 외출을 하면 영락없이 저만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일터(노래방 운영할 때)에 나가면 어느 새 대문에 나가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럭저럭 힘들게 키우다 우리 딸이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시집에 데려가기도 그렇고 싫어하는 아내와 같이 키우기도 그렇고 말입니다. 치와와 처리 문제로 고민이
많을 때인데 우리 정아가 시집가기 1주일 전 쯤 이었습니다.
이게 웬일 입니까? 갑자기 개가 장염이 걸려 이틀 만에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를 사랑하는 주인이 시집가는 것을 알고, 그래서 나와 살자면 내가 힘들 것을 알고 간단 말입니까?
저는 정아와 같이 죽은 개를 좋은 함에 넣어서 집에서 한 시간도 더 되는 산에 묻어주고 같이 많이 울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게 딸이 시집을 간 후에 저는 지와와 한 마리를 또 키웠습니다.
아무래도 죽은 개가 눈에 밟혀 외로움이 왔습니다. 아내가 싫어하는 개를 키우자니 많은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 개 역시 자기를 예뻐하는 저만 항상 가까이 했습니다. 아내의 눈치를 보며 항상 저만 반겼습니다.
노래방에 나가려 움직이면 벌써 앞장 서서 꼬리를 치며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노래방에 데려가 하루를 보내다가 저녁에나 같이 집으로 같이 갔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못마땅해 했습니다. 털이 많이 떨어진다며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저는 지와와를 노래방에서 키우는 것도 힘이 들고 하여 노래방 손님으로 자주 오는 어느 초등학생에게
주기로 했습니다. 그 학생이 노래방에 오면 예뻐해 주는 것을 보고 잘 키울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였습니다.
그 학생은 좋아라 하며 잘 키우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많이 아팠습니다.
개를 주고 돌아서던 저는 결국 학생 앞에서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학생이 "할아버지 서운하시면 가져가
키우세요." 하며 망서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개가 어찌 되어 잘 자라는지 궁금했지만 단 한 번도 소식을 묻지 못했습니다. 행여 좋지 않은 소식을
받으면 제 아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개가 그립습니다.
<이야기 3>
또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역시 역촌동에 살 때 어떤 개가 저의 집으로 왔습니다. 개는 검은 색의 개였는데
족보가 있는 개로 보였습니다. 잃은 사람을 위해 집 앞에 개 사진을 붙여놓고 주인이 나타나기 기다렸지만
주인은 나타나지 안 했습니다. 유기 견 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내가 개를 좋아하고 아주 영리한 개였기에 오래
동안 같이 살다가 노환으로 수명을 다 했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옮기냐 하면 개는 예뻐하고 미워하는 것을
아주 정확히 안다는 것입니다. 나만 보면 그토록 반가와 하고 꼬리를 흔들며 몸에 붙어 비비고 핥습니다.
]그 개도 좋은 곳에 묻어주었습니다.
개는 영물입니다.
우리 어머니를 살린 개나, 우리 정아가 사랑했던 개가 주인을 보내며 먼저 간 이야기나 우연히 우리 집에
들어와 함께 살다가 간 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얼마나 다시 보고픈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