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바다 불교 종주국 스리랑카 성지 순례기
(2022년 11월 11일부터 18일까지) (6)
한가하고 한적한 스리랑카사원 란카틸라카
글 이병욱
란카틸라카 라자 마하 비하라(Lakatilaka Raja Maha Vihara)
여기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다. 운전기사 가미니가 이끄는 대로 갈 뿐이다. 분명한 것은 캔디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스리랑카 시골풍경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원시의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분명한 사실은 그 어디를 보아도 공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과 푸른 숲이다. 그것도 야자수가 있는 숲이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순박해 보인다. 특히 시골 사람들이 그런 것 같다. 우리나라 시골 노인을 연상케 하는 스리랑카 시골사람들을 보면 시간이 멈추어져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한가함과 한적함으로 표현할 수 있다.
스리랑카에서 현지시점은 2022년 12월 15일 목요일 오전이다. 캔디에 있는 서점 BPS(Buddhist Publication Society)를 출발해서 어디론가 향했다.
김형근 선생은 행선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 여행을 모두 기획했기 때문이다.
승용차는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 사원에 도착했다.
사하촌이 형성되어 있는 시골마을이다. 마치 우리나라 수덕사 입구에 있는 사하촌을 보는 듯 하다. 사하촌에는 갖가지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 그러나 먹거리를 파는 가게는 보이지 않는다.
사원은 언덕배기에 있었다. 약간 경사진 언덕을 올라가자 전에 보지 못하던 건축물과 접하게 되었다.
아누라다푸라와 폴론나루와에서 붉은 벽돌 유적만 보다가 여법한 모양의 사원을 보니 불교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다. 귀국해서 후기를 쓸 때 위치를 알아보
기로 했다. 오늘이 마침 그날이다. 사원 이름은 란카틸라카 라자 마하 비하라(Lakatilaka Raja Maha Vihara)이다.
사원 안에 있는 입간판을 사진 촬영해 두었는데 글 쓰는데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내문을 보면 사원은 왕 부바네카바후 4세(Buvanekabahu IV, 1341-1351 A.D) 시대에 건립되었다. 스리랑카에서 14세기에 건립된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로 따지만 고려시대 말에 해당된다.
스리랑카에서 14세기는 스리랑카 중세에 해당된다. 란카틸라카 사원은 중세에 건립된 건축물이다. 란카틸라카에 대하여 더 알기 위해서 구글검색을 해 보았다. 검색해 보니 캔디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15키로 30분 거리에 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란카틸라카는 스리랑카 캔디의 우두누와라에 위치한 불교 사원이다.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구글 지도 검색을 해 보았다. 사원의 정식명칭은 ‘Sri Lankathilake Rajamaha Viharaya’이다.
란카틸라까는 감폴라 시대에 만들어진 웅장한 건축물이라고 한다. 감폴라시대는 어떤 시대일까?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감폴라 시대는 스리랑카 중세시대로 1341-1408년까지 67년동안 존속했던 왕국이다. 모두 7명의 왕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원을 건립한 왕은 초대 부바나이카바후 4세(Bhuvanaikabahu IV, 1341–1353)이다. 안내판과 비교하니 철자와 재위기간에서 차이를 발견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감폴라는 스리랑카 중부 지방의 캔디(Kandy) 근처에 위치한 도시이자 왕국 이름이기도 하다. 14세기 중반에 12년 동안 통치한 부와네카바후 4세 왕에 의해 섬의 수도가 되었다.
왕 부와네카바후 4세(왕 비자야바후 5세의 아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세날란카디카라 장군의 지원을 받아 수도를 쿠루네갈라에서 감폴라로 옮겼다고 한다.
란카틸라까 사원은 서기 1341년부터 1351년까지 통치한 부바네카바후 4세에 의해 지어졌다. 사원의 건축역사를 보면 세날란카디카라(Senalankadhikara)라는 최고 장관에게 이 사원의 건립을 맡겼는데 사원의 건축은 남인도 출신의 건축가가 설계했다고 한다.
란카틸라까 사원은 외관이 독특하다. 마치 하나의 견고한 성채를 보는 것 같다. 스리랑카에서 흔치 않는 스타일이다. 아누라다푸라 시대와도 다르고 폴론나루와 시대와도 다른 것이다. 이는 남인도 출신 건축가가 설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힌두스타일이 가미된 건축물이라고 볼 수 있다.
란카틸라카는 한적하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3층 또는 4층으로 보이는 본당 건물이 보인다. 마치 일본 전국시대 성채를 연상케 한다. 건축물 좌측에는 수투파가 있다.
스투파는 전형적인 스리랑카 불사리탑 양식이다. 반원형이 아닌 종모양의 사리탑이다. 그다지 크지 않다. 아누라다푸라의 다고바와 비교하면 매우 작은 것이다. 이런 스투파는 스리랑카 사원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스리랑카에서 사원은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불상이 있는 본당과 사리탑, 그리고 보리수를 말한다. 이곳 란카틸라카에도 보리수가 있다. 그것도 두 그루 있다. 본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수령이 매우 오래 되어 보이는 보리수가 가지를 마음껏 뻗어 있는 듯 하다.
사원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어쩌다가 두세 명의 순례자를 볼 뿐이다. 아마 평일이고 또한 특별한 날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적하고 한가롭게 보인다.
보리수 뒤편에 부속건물이 있다. 호기심에 가 보았다. 가서 일단 사진부터 찍었다. 찍힌 사진을 보니 왕모양의 사람이 보인다. 아마 이 사원의 건립자 부바네카바후 4세일 것이다. 초상화에 아무런 설명이 없지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본당을 돌아 보았다. 본당 뒤편으로 돌아 갔다. 지대가 높은데 위치해서일까 저 멀리 산들이 아스라히 보인다. 더구나 하늘은 맑고 청명하다. 흰 뭉게구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떠 있다. 우리나라 장마철에 잠깐 개었을 때 흰 뭉게구름을 보는 것 같다.
란카틸라카는 바위 위에 지어진 사원이다. 너른 바위 위에 사원이 건립된 것이다. 흰 색의 스투파 역시 너럭 바위 위에 건립되었다. 그런데 본당 옆에 있는 바위에 글자가 있었다. 스리랑카 문자로서 바위에 가득 쓰여 있다. 어떤 내용일까?
바위 글자에 대한 안내판이 있었다. 혜월스님이 영어로 된 것을 읽어 주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저주의 말이 있었다. 어떤 것인가? 바위 글자에 새겨진 것을 영문으로 옮긴 것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비문에는 Senalankadhikara 장관이 건설한 Lankatilaka Vihara가 불상, 보살상, caitya 등으로 완성되었으며 Bhuvanekabahu IV 왕 통치 10년 째인 Vesak 보름달 포야(포살) 날에 sangharama도 있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논, 땅, 소, 물소 등을 산나사(증여 증서)를 통해 유지 관리를 위해 기증했으며, 기증에 반대하는 사람은 지옥에서 개, 까마귀, 프레타(아귀)로
태어난다고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바위 글자에는 사원이 건립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기증에 반대하는 자에 대하여 저주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기증에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지옥이나 축생, 아귀로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저주의 말이다.
란타틸라카는 감폴라 왕국의 초대 왕인 부바네카바후 4세에 의해 기증 되었다. 사원이 영원히 유지 되기 위해서는 사원 재산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논, 땅, 소, 물소와 같은 재산을 기증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사원이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어 왔는지 모른다.
사원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사원 문은 열려 있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본당
내부에 있는 법당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법당은 들어갈 수 없었다.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절에 가면 부처님을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절에 가면 법당에 들어가서 불상에 참배한다. 스리랑카에서도 사원에 왔으니 불상에 참배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앙에 있는 법당문은 잠겨 있었다.
그때 사원 관리자가 나타났다. 사원 관리자는 나이가 70세 이상인 것 같다. 마음씨 좋은 스리랑 할아버지처럼 보인다. 관리자는 친절했다. 그것은 아마도 스리랑카 사람 혜월스님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관리자는 본당 내부를 구경시켜 주었다.
본당에는 중앙에 법당을 중심으로 원형의 복도로 되어 있다. 내부는 컴컴했다. 밖에서 가느다란 빛만 들어 왔다. 밖에는 대낮인데 안에는 어둠이 있어서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게 설계되어 있다.
사찰 입구
원형의 복도에는 갖가지 신상이 있다. 놀랍게도 힌두교 신상이다. 비쉬누, 가네샤, 가루라 등 힌두신상이 원형복도 사방에 있던 것이다. 마치 불교와 힌두교가 혼합되어 있는 것 같다.
혜월스님에 물어 보았다. 어떻게 불교사원에 힌두신이 있는지 물어 본 것이다. 이에 스님은 존중의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힌두교 문화를 인정해 주기 때문에 힌두신상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스리랑카에는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 주로 타밀계통 사람들이다. 사원이 건립되던 스리랑카 중세시대 때도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심지어 스리랑카에는 힌두교를 믿는 왕도 출현한 바 있다.
불교와 힌두교는 어떤 관계일까? 인도에서는 불교는 힌두교에 흡수되었다. 그래서 부처는 비쉬누 신의 열 가지 아바타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을 본다.
스리랑카 사원에서 힌두신은 호법신장 역할을 한다.
마치 우리나라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사천왕상이나 금강역사상 같은 것이다. 인도에서는 창조신, 유지신, 파괴의 신으로 불리지만 스리랑카에서는 불상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란카틸라카 사원에 주지스님은 부재 중이었다. 주지스님이 열쇠를 가지고 있어서 불상이 있는 중앙법당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대신 위키피디아에서 불상을 볼 수 있었다. 사마디형이 아닌 눈을 뜬 모습의 불상이다. 불상은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 왔을 것이다.
사원관리자는 비밀의 방을 열어 주었다. 가지고 있는 커다란 열쇠로 방을 열자 진귀한 물건이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소라고동이다.
소라고동이 왜 절에 있을까? 아마 사원 행사할 때 사용하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소라고동은 경전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상윳따니까야 ‘소라고동 소리의 경’(S42.8)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촌장이여, 예를 들어 강력한 소라고동이 적은 노력으로도 사방으로 들리는 것처럼, 촌장이여, 자애의 마음의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성장되면, 유한한 업의 세계는 거기에 남아있지 않고 거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S42.8)
소라고동소리는 사무량심을 상징한다. 사무량심은 색계와 무색계의 마음에 대한 것이다.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이라는 무량한 마음을 내면 욕계의 업은 녹아 없어진다. 마치 작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얻는 것과 같다. 소라고동을 불면 소리가 널리 멀리 퍼져 나가는 것과 같다.
란카틸라카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원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패키지 여행 리스트에는 빠져있다. 그러나 승용차를 이용하여 순례하는 자들에게는 가능하다. 그것은 기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란카틸라카는 전혀 생각지 못한 사원이다. 이런 사원이 있는 줄 조차 몰랐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는 꽤 알려진 사원 같다. 사원 아래에 형성되어 있는 사하촌이 이를 말한다.
사원은 언덕배기 꼭대기 바위 위에 건설되었다. 그런데 사원이 있는 자리는 온통 검은 바위 투성이인 것 같다. 아래 사하촌으로 내려가는 길도 바위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한적하고 한가한 사원을 방문했다. 아마도 한국 순례자들이 이 사원을 찾아 올리는 없을 것 같다. 어쩌면 한국인 최초의 포스팅이 될 것 같다.
란카틸라카 사원은 한없이 한가해 보였고 소음이 없어서 한없이 한적해 보였다. 저 멀리 푸른 하늘과 푸른 산이 마치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보였다. 이런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보았으나 현지에서 보는 것만 못하다. 마치 건립 당시에서 시간이 정지해 버린 듯한 사원에서 한가하고 한적함을 맛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