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의 왕자와 공주들
김 성 문
금관가야 수로왕과 허왕후는 금슬이 좋아서 열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를 두었다. 옛날에는 자녀를 많이 낳았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밝혀진 조선 시대 왕들의 자녀 숫자를 보면, 태종은 무려 31명, 성종 28명, 세종 18명 등 많은 자녀를 두었다. 물론 후궁에 의해 출산한 자녀도 포함되었지만, 정력이 대단하다. 나의 형제자매도 6남매로 많은 편이다. 1960년대 이전까지는 가정마다 대부분 형제자매들이 많았다. 수로왕의 왕자와 공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수로왕의 왕자 중 풍채가 좋은 태자인 거등(居登)은 왕위를 이어받아 가야국 제2대 왕이 되었다. 옛날에는 왕의 이름으로 거등왕이라 했으나, 후에 시호가 내려져 도왕(道王)이라 부른다. 서기 199년에 즉위하여 서기 253년에 붕어하였다. 재위 기간은 54년 6개월로 매우 길었다. 도왕의 비(妃)는 허왕후가 가야 땅으로 올 때 신하로 같이 온 신보(申輔)의 아름다운 딸이다. 성은 신(申)씨이고, 이름은 모정(慕貞)이다.
도왕이 부모의 은혜와 자녀를 위해 절을 지어 축원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아버지를 위해서는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 천태산에 부은암을, 어머니를 위해서는 김해시 생림면 무척산에 모은암을, 자녀를 위해서는 김해시 진영읍 봉화산에 자암을 지어 축원했다. 자암은 폐사되어 터만 남아 있다. 한편 이 절들은 수로왕이 부모와 자녀를 위해 지어 축원했다는 설도 있다. 가야에 불교가 들어와 번성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도왕은 아버지 성인 김씨를 이어받았다. 다른 두 왕자는 허왕후가 이역만리 가야 땅까지 와서 자기 성(姓)을 전할 길이 없다고 하니, 수로왕은 두 왕자에게 허(許)씨 성을 사용하게 했다. 수로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 혼인이고, 다문화 가족의 시작이었다. 그 당시 모계 사회도 중요시 한 것 같다. 모계 사회는 인도의 나야르족, 인도네시아의 미낭카바우족, 라오스의 라오족 등 여러 부족이 있다.
허씨로 사성 받은 두 왕자는 석(錫)과 명(明)이다. 석 왕자를 서기 102년 진례성(進禮城)의 성주(城主)로 봉해진 왕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쉽게도 명 왕자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진례면지에 의하면, 수로왕의 한 왕자가 진례성의 성주로 봉해졌다. 그는 왕궁과 태자단을 만들고, 진례토성을 쌓았다. 서기 103년에는 진례성에 첨성대를 설치했다고 하니 경주 첨성대보다는 약 530년 앞선다. 서기 2018년 청명한 봄날에 진례토성과 첨성대가 있었다는 자리에 가보았다. 토성 자리는 성이 모두 무너져 성을 쌓은 자리의 흙 색깔만 다르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침략군이 토성을 무너뜨린 듯하다. 첨성대는 흔적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는 주춧돌만 몇 개 남아 있어 허무함만 안고 왔다.
허씨 후예 중 아찬인 허기(許奇)는 서기 756년 신라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당나라 현종은 서기 755년 ‘안녹산의 난’으로 촉나라 수도 성도(成都)에 피신해 있었다. 이때 허기는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이 당시 수도인 장안으로 돌아오는 데 공을 세워 당나라 국성인 이(李)씨로 사성 받았다. 허씨에서 다시 인천이씨로 갈라져 김해김씨, 허씨, 인천이씨는 모두 수로왕의 후예들로 서로 간에 혼인도 안한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외삼촌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을 스승으로 삼았다. 장유화상은 허황옥 공주가 가야로 올 때 같이 온 오빠 허보옥이다. 일곱 왕자는 외삼촌과 함께 가야국의 평안을 위해 속세와 인연을 끊고 불가에 귀의하여 경상남도 여러 산에서 수도하였다. 마지막에는 하동 쌍계사 말사인 칠불사(七佛寺) 운상원에서 성불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칠불사 대웅전 안에 들어서니 오른쪽 벽에 부처가 된 일곱 왕자의 목탱화가 금빛을 발산하고 있다. 일곱 왕자를 바라보노라니 나라의 평안을 위해 부처가 된 모습에 고개가 숙어진다.
칠불사는 지리산 반야봉의 남쪽 800m 고지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칠불사는 칠불선원 또는 칠불암이라고도 한다. 칠불사는 가야 불교의 발상지이고, 지혜를 담당하는 문수보살의 상주 도량이며, 동국제일의 선원이다. 이 사찰은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동시에 성불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수로왕이 창건한 사찰이라 전하고 있다.
부처가 된 일곱 왕자 중 혜진(彗眞)은 김왕광불, 각초(覺初)는 김왕동불, 지감(智監)은 김왕상불, 등연(等演)은 김왕행불, 두무(杜武 또는 주순柱淳)는 김왕향불, 정홍(淨洪 또는 정영淨英)은 김왕성불, 계장(戒莊 또는 계영戒英)은 김왕공불이다.
일곱 왕자가 부처가 된 후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일곱 왕자가 일본의 규슈 녹아도 산봉에 강림하여 규슈 지방을 개척한 일본 왕실의 조상이라고도 한다.
두 공주의 족보를 보면, 첫째 공주는 이름이 옥환으로 영안 공주이다. 김해김씨와 김해배씨 족보에 태사(太師) 배열문(裵烈文)의 배필로 기록되어 있다. 둘째 공주는 신라 제4대 석탈해 이사금의 장남 구광의 비(妃)로 김해김씨와 월성석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석탈해는 가야국으로 와서 수로왕과 왕위 쟁탈전이 벌어진 사실도 있다. 수로왕과 석탈해 이사금은 사돈 간이 되었다. 가야와 신라가 평화롭게 발전하자는 뜻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사학자는 『가락국편년기』 「초선대」 편에 나오는 신녀를 가야국 묘견 공주로 추측한다. 묘견 공주는 일본으로 건너가 건국 왕인 히미코 여왕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초선대」 편에 왕자 선(仙)과 묘견 공주로 추측한 신녀(神女)를 만나 볼 수 있다.
“거등왕 기묘년, 서기 199년에 왕자 선이 더럽혀진 세상에서 쇠하고 약해진 모습을 보고, 신녀와 구름을 타고 떠나갔다. 거등왕이 도강 석도암에 올라가 왕자 선을 부르고 그림자라도 새기려 하였다. 그러므로 세속에서는 왕이 선을 부르는 대라서 초선대라고 전해 온다.”
수로왕의 왕자는 가야불교를 위해 절도 세우고, 가야국의 번영을 위해 부처도 되었다. 성주가 된 한 왕자는 진례성의 발전을 위해 노력도 했다. 한 공주는 신라와의 평안을 위해 석탈해 이사금의 태자와 혼인도 했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은 일곱 왕자의 고행 모습도 선하다. 그 당시 수로왕의 왕자와 공주들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모두가 나라를 위해 존재했다.
첫댓글 역사인데 소설 같기도 하고 신화 같기도 하네요. 흥미진지하게 읽었습니다.
칠불사 대웅전 일곱왕자도 처음 접합니다.
가야의 역사를 아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다면 큰 영광입니다.
밖에는 비가 옵니다. 눈이 오면 더 좋을
텐데~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부처님 손 모양을 ‘수인’이라고 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 수인(선정인,항마촉진인,전법륜인,여원인,시무외인)과 아미타 부처님의 구품인,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권인 정도로 파악하는데 두 손을 저렇게 들고 있는 수인이 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제가 한심한 법사라는 게 증명이 됩니다.ㅎ 근세 만들어졌고 동판입니다. 일곱 생불(生佛)이 출현했다 하여 칠불사라 불리운 이 절은 한 번 불을 때면 49일간 따뜻했다는 담공 선사가 만든 아(亞)자방이 유명합니다.
@유당 노병철 아름다운 댓글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많은 잘못된 정보를 하나 하나 정리해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ㅎ 그리고 다른 곳에 있는 댓글까지 굳이 여기 카페에 소개하지 않으셔도 될것 같습니다.ㅎ
거듭 감사드립니다.^^
칠불사 대웅전 안에 있는 금빛 칠불상은 은행나무로 1981~1984년에 걸쳐 청원스님이 제작한 칠불탱화라 합니다. 장르는 목탱화가 되겠습니다.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