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38권, 29년(1703 계미 / 청 강희(康熙) 42년) 4월 28일(계묘)
박세당을 옥과로 귀양보내게 하니, 행 사직 이인엽이 그를 구하는 뜻으로 상소하다
박세당(朴世堂)을 옥과(玉果)로 귀양보내게 하였는데,
행 사직(行司直) 이인엽(李寅燁)이 상소하여 구(救)하기를,
“《사변록(思辨錄)》은, 신이 그 논설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판부(判付)로써 살펴보건대, 또한 참람하고 망녕된 잘못은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박세당은 나이가 지금 75세로 거듭 이상한 병을 얻어서 조석 사이에 관(棺)에 들어갈 것인데, 이제 만약 먼 변경에 귀양보내어 길떠날 차비(差備)를 재촉해 가게 한다면 반드시 길에서 죽을 것입니다.
그 실낱 같은 목숨을 특별히 용서해 주어 들창 밑에서 목숨을 마치게 한다면 인후(仁厚)하신 덕에 빛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박세당은 산림(山林) 밑에 물러가서 휴식한 지 40년에 고상한 풍도(風度)와 우뚝한 절개는 진세(塵世)를 멀리하고 뭇사람을 떠났으니 족히 쇠퇴한 세속을 떨쳐 가다듬게 할 만한데, 한갓 상자 솟의 사사로운 기록으로 갑자기 영행(嶺海)로 멀리 귀양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평일에 성조(聖朝)에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물며 박세당은 두 아들을 모두 잃고 외로운 그림자가 쓸쓸한데 그 아들 박태보(朴泰輔)가 뜻을 세운 바가 저처럼 우뚝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자문(子文)의 후손(後孫)은 오히려 장차 10세(世)까지 죄를 용서한다.’고 하였으며, 옛적에 백성에게 공로가 있으면 자손(子孫)이 비록 죄가 있더라도 오히려 너그럽게 용서하였는데, 지금 박태보의 절의(節義)로써 능히 그 아버지를 보전하지 못한다면 딱하고 슬프고 가엾음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청컨대, 성명(成命)을 정지하소서.”
하니,
(왕이) 답하기를,
“박세당이 성인을 업신여기고 정인(正人)을 미워하는 죄는 당연히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해야 하지만 상소의 글을 살펴보건대, 이상한 병이 거듭 들어서 장차 길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생각할 만하다.
우선 찬배(竄配 정배, 유배)의 명을 정지하도록 하되, 박세당이 사문(斯文 유학)에 죄를 얻어서 다시 볼 만한 것이 없는데 경(卿)의 추허(推許 재능이 있어 칭찬하고 인정함)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니, 참으로 이상하다.”
하였다.
박세당(朴世堂)이 곧 졸(卒)하였는데, 나이가 75세이다.
박세당은 젊었을 때 일찍이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의 집 잔치에 참석하여 일어나 춤을 추기까지 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이를 더럽게 여겨 전랑(銓郞) 추천에 저지되었으며, 뒤에 비록 임명되었으나 공론이 끝내 불쾌하게 여겼다.
박세당은 전랑 추천을 저지한 의논이 송시열(宋時烈)에게서 나온 것으로 의심하여 원한이 매우 깊어서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가서 그대로 조정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사람됨이 치우치고 어긋나며 집요(執拗)한 병통이 있으며 일찍이 장주(莊周 장자)의 글을 주해(註解)하였다.
민정중(閔鼎重)이 이를 배척해 말하기를, ‘어찌 이단(異端)을 배우는 자로 하여금 경악(經幄 경연(經筵))에 있게 할 수 있겠는가?’ 하여 드디어 부제학(副提學) 의망(擬望)을 저지당하였다.
서울 사대부의 자제(子弟)로 과거(科擧) 보는 글을 배우려고 하는 자가 가서 수업(受業)을 청하면 박세당은 망령되게 사도(師道)로 자처하여 경훈(經訓)을 마음대로 고쳐서 사사로이 전해 주었는데, 여러 해가 되어 일이 비로소 발각되었다.
박세당이 죽음에 임하여 또 그 아들에게 유계(遺戒)하여 조석(朝夕)의 상식(上食)을 베풀지 말게 하였다.
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박세당이 성인을 업신여기고 경(經)을 헐뜯으며 떳떳한 도리를 문란시키고 예(禮)를 허물어뜨렸으니, 벼슬을 버리고 물러간 한 가지 일로 그 죄를 속(贖)할 수 없다.’ 하였다.
뒤에 그의 당(黨)이 국정을 잡자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숙종 40권, 30년(1704 갑신 / 청 강희(康熙) 43년) 8월 5일(임신)
박세당의 《사변록》 처리를 의논하다.
부응교(副應敎) 이관명(李觀命)이 소매 속에서 박세당(朴世堂)의 《사변록(思辨錄)》을 변파(辨破)한 설(設)을 꺼내어 바치고 말하기를,
“신이 권상유(權尙游)와 함께 외람되게 변파(辨破)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신 등은 본래 경학(經學)에 어둡고 견문(見聞)이 적어서 진실로 경서(經書)의 뜻을 발휘(發揮)할 수가 없었지만 의리상 감히 굳이 사양할 수가 없으므로, 대략 논변(論辨)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처 탈고(脫稿)하지 못하여 권상유가 또 외임(外任)에 나갔으므로, 서찰(書札)로 왕복(往復)하여 시월(時月)을 천연(遷延)하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공정(工程)을 마치고 이에 감히 선사(繕寫)하여서 올립니다.
생각하건대, 《사변록》 안에 경서의 뜻에 위배(違背)되고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말이 하나만이 아니니, 성상(聖上)께서 이 책을 불에 던져 버리라는 명령은 진실로 심히 배척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이 그 글을 가져와 살펴보건대, 별달리 신기(神奇)하여 뭇사람을 현혹시킬 말한 것이 없고 혹은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가운데 주자(朱子)가 이미 버려서 취하지 않은 쓸데없는 말을 쓰기도 하고, 혹은 다른 소설(小說) 가운데 무릇 쓸모 없고 한만(閑漫)한 치언(卮言 앞뒤로 사리가 어긋나는 말)을 취하여 자기의 것으로 삼기도 하였으며 간혹 억지로 강경한 의논을 찾아내어 오직 전현(前賢)보다도 뛰어남을 구하기를 힘썼으므로 비록 심상(尋常)한 사자(士子)라 하더라도 경전(經傳)의 조박(糟粕)만 대략 알면 그 허탄(虛誕)하고 망령된 것임을 엿볼 수 있어서 노불(老佛)의 글처럼 빠지기 쉬운 것이 아니니, 이는 깊이 근심할 것이 못됩니다.
만약 본문(本文)을 불태워 없앤뒤에 그 문도(門徒)들이 혹시 그 스승의 말은 이와 같지 않아서 변파(辨破)한 설이 적결(擿抉)된 데서 나왔다고 한다면 또한 고정(考訂)할 수가 없으니, 내버려두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증공(曾鞏)의 《전국책(戰國策)》의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군자(君子)가 사설(邪說)을 금함에 있어서 진실로 그 사설을 천하에 밝혀 당세(當世)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설을 좇을 수 없음을 알게 한 연후에 이를 금한다면 가지런해지게 되고, 후세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설의 행할 수 없음을 알게 한 연후에 경계한다면 밝아지게 되니, 어찌 반드시 그 글을 없앨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견해(見解)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자(朱子)가 이를 취하였습니다.
신의 뜻은 우선 이 책을 남겨 두어서 후세의 사람으로 하여금 환하게 그 무패(誣悖)를 알게 하는 것이 혹시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좌의정) 이여(李畬)는 말하기를,
“이른바 《사변록》을 신도 또한 보았는데, 그 말이 지극히 천루(賤陋)하여서 진실로 한번 웃음거리도 되지 못합니다.
대개 이단(異端)의 학설은 높은 것은 혹시 사람들의 뜻밖에서 나와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때문에 세도(世道)의 해가 될 수 있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아니하여 조금만 안목(眼目)이 있으면 모두 이를 분변할 수 있으니, 조가(朝家)에서 비록 금알(禁遏)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누가 이를 믿겠습니까?
한유(韓愈)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사람대로 두고 그 책을 불태운다.’고 하고, 주자(朱子)의 시에 이르기를, ‘누가 삼성(三聖 우왕(禹王)·주공(周公)·공자(孔子))을 계승하여[誰哉繼三聖] 우리를 위해 그 책을 불태우겠는가?[爲我焚其書]’ 하였으니, 전현(前賢)이 엄격하게 이단을 물리치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으니, 이 책은 본래 힘들여 금지할 것도 못됩니다.
이제 반드시 조가(朝家)에서 취하여 불태운다면 너무 일이 많은 듯하며, 또 유신(儒臣)의 말도 의견이 없지 않으니, 버려 두어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에 불속에 던지라는 명은 사설(邪說)을 엄중히 배척하는 뜻에서 나왔으나 대신과 유신(儒臣)의 진달한 바가 과연 의견이 있으니, 불태우지 않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
박세당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등 이다.
이조 참판 박정(朴炡)과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딸인 양주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현종 1년(1660)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홍문관 교리 겸 경연시독관·북평사 등을 역임하였다.
1667년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을 때는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올려 신분제도의 모순에 따른 사대부들의 무위도식을 비판하고,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실리주의 정책을 펼 것과 백성을 위한 법률의 혁신, 정치·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1668년에는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있다가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관료생활을 그만두고 양주(楊州) 석천동(石泉洞 : 지금의 도봉산 아래 다락원)으로 물러났다.
그뒤 숙종 23년(1697) 4월에 한성부판윤을 비롯하여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 수차례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주력하였다.
그가 생존했던 시기는 송시열(宋時烈)을 축으로 한 노론계(老論系)가 정국을 주도하였고 있었기 때문에 반주자학적(反朱子學的) 입장에 섰던 그로서는 정치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예를 들면 병자호란 당시 송시열이 청태종공덕비문을 지은 이경석(李景奭)을 비판한 것에 대해 1702년 이경석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찬술하면서 송시열이 이경석을 비판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여 노론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조선의 성리학이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를 보이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1703년에는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밝힘으로써 노론으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혀 관작을 삭탈당하고 유배 도중 옥과(玉果)에서 죽었다.
그가 죽으면서 아들에게 “장례를 지낸 후에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상식(上食)을 설치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이 말은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의 행동양식 표준으로 인식되어 오던 예론(禮論)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서 당시 정치세력에게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그는 당대 조선조 유학을 지배하던 주자설(朱子說)의 절대화된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각적인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정주학적(程朱學的) 학풍과 사상이 강요되던 테두리에서 벗어나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태도로 고전의 본뜻을 찾아보고자 하였기 때문에 관념화된 성리학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이후 진보적인 학문을 촉진시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정치적으로 소론계(少論系)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소론의 거두인 윤증(尹拯)을 비롯하여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 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제자를 길렀다.
그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원(伸老)되었으나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현재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水落山) 중턱 석림사(石林寺) 옆에 그의 묘소가 있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西溪先生集)》, 《사변록(思辨錄)》,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1책 및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6책과 농서인 《색경(穡經)》이 전한다.
[출처] 박세당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