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천계곡 [九天溪谷]는 북한산의 대동문에서 강북구 수유동 방면의 아카데미탐방지원센터로 흐르는 계곡 안에 있다. 폭포 상단에 구천은폭(九天銀瀑)이라 새겨져 있지만 그 유래는 알 수 없으며, 수도폭포라고도 한다. 북한산 수유지구의 대표적 명소로서 원효봉 자락의 개연폭포, 평창계곡의 동령폭포, 정릉계곡의 청수폭포와 더불어 북한산의 4대 폭포로 꼽힌다.
구천폭포 [九天瀑布]는 북한산의 대동문에서 강북구 수유동 방면의 아카데미탐방지원센터로 흐르는 계곡 안에 있다. 폭포 상단에 구천은폭(九天銀瀑)이라 새겨져 있지만 그 유래는 알 수 없으며, 수도폭포라고도 한다. 북한산 수유지구의 대표적 명소로서 원효봉 자락의 개연폭포, 평창계곡의 동령폭포, 정릉계곡의 청수폭포와 더불어 북한산의 4대 폭포로 꼽힌다.
북한산성(北漢山城 )
삼국시대인 132년(개루왕 5) 백제가 도성인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처음 축성(築城)되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당시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백제는 이 성에 핵심 군사력을 배치해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으며, 4세기 근초고왕이 북진정책을 펼칠 때에는 북벌군의 중심 요새로 삼았다.
고려 때인 11세기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이 성에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겼을 때 성의 중축(重築)이 있었다. 고종 때인 1232년에는 이곳에서 몽골군과 격전이 있었고, 우왕 때인 1387년 성을 개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겪으면서 도성 외곽의 성을 고쳐 쌓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1711년(숙종 37) 왕의 명령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시작하여 석성(石城) 7,620보(步)를 완성하였다.
당시 완성된 북한산성은 대서문(大西門)ㆍ동북문(東北門)ㆍ북문(北門) 등 13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동장대(東將臺)ㆍ남장대(南將臺)ㆍ북장대(北將臺) 등을 설치하였다. 성 안에는 130칸의 행궁(行宮)과 140칸의 군창(軍倉)이 있었다. 또한 12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중흥사(重興寺)는 승군(僧軍)을 배치한 136칸의 대찰이었다. 이외에 99개의 우물과 26개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삼국시대의 토성(土城)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이다. 성곽의 여장(女墻, 성위에 낮게 쌓은 담)은 무너졌으나, 성체(城體)는 대부분 보존되어 있다. 대서문을 비롯해 시설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장대지(將臺址)ㆍ행궁지(幸宮址) 등도 보존되어 있다. 북한산성은 1968년에 사적 제162호로 지정되었으며, 북한산성 행궁지는 2007년에 별도로 사적 제479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