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대하 20장 20-23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승리를 맛보라8-이상한 전쟁의 승리
하나님은 때때로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구원역사를 이루실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전무후무한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인간 역사에서는 도저히 찾아볼수 없는 그런 구원입니다. 그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사람으로써 찬송하는 직무를 맡았던 아삽의 후손인 야하시엘을 통해 승리를 약속하시자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고 레위 사람들은 거기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일찍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고아 들로 대열을 정비하고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나가면서 여호사밧 왕이 서서 백성들을 향하여 큰 소리로 말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그리고는 백성들과 의논하여서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면서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했습니다. 물론 뒤따르는 군인들 역시 그 성가대들의 노래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기쁨이 넘쳤고 전쟁을 하기도 전에 이미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이 주신 확신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하여 기뻐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행한 이상한 전쟁이며 전투방식입니다.
세상 어느 나라가 막강한 적뜰 앞에서 무기가 아닌 찬송을 전투 무기로 삼습니까? 하지만 유다백성들은 왕과 상의해서 이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희는 싸울 것이 없다” 하시면서 “이 싸움은 내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싸울 것이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믿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투가 아닌 찬송으로 무장하고 앞으로 전진한 것입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삼개국의 군사들과 직접 전쟁을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삼개국 연합군이 하나님을 본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자기들을 멸망하게 하시는 무서운 진노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편이 되셔서 자신들을 위해 싸우시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싸움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습니까? 우리 22-2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마치 하나님은 찬송을 신호로 일하신 것처럼 노래와 찬송이 시작되자 숨어 있던 복병들이 유다를 치러온 암몬과 모압과 세일 산 자손을 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복병들이 어디에서 나온 사람들일까요? 여기서 보면 복병들의 정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복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깨서 어떤 나라 사람들을 끌어 드린 것이라고 볼수 있는데 그 복병들이 어쩌면 에돔군대처럼 보이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압과 암몬이 힘을 합해서 친 것이 바로 세일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세일 사람들을 힘을 합해 공격한 이유는 세일 사람들이 자기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두 나라 연합군들은 화가 나서 힘을 합해 세일 사람들을 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압과 암몬 역시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면서 축였습니다. 그로인해 삼개국 나라 군인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악인들은 서로 손을 잡을 지라도 서로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이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배반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도 역시 그럴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더라도 이익의 여부가 크냐 작으냐에 따라 순식간에 갈라지게 됩니다.
이런 악인들의 마음을 가진 삼개국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서로를 온전히 믿지 못한 상태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유다 진영에서 이상하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들은 서로를 의심하면서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복병들의 기습을 받자 당황해서 복병들과 싸웁니다. 그러면서 우선적으로 모압과 암몬이 같은 롯의 후손으로써 손을 잡고 세일 자손을 공격합니다. 어떨결에 두 나라의 공격을 받은 세일 자손도 힘을 다하여 싸우지만 역부족인지라 결국 전멸하고 맙니다.
그렇게 싸움이 끝나는 듯 했지만 이번에는 모압과 암몬이 서로를 의심합니다. 그래서 또다서 서로를 향해 무기를 들어 공격을 합니다. 그렇게 서로를 죽이다가 전멸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서로를 의심하도록 영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의심하도록 역사하시고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게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지 아니면 자기들의 마음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끔 이런 방법을 쓰기도 하십니다. 이와 똑같지는 않지만 신약성경 사도행전에서도 역시 찬송을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감옥에 갇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들은 아시아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유럽으로 갔고 그 유럽에 도착한 첫 성읍인 빌립보에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그 당시 상류층을 상대로 일하는 자주색 옷감장사인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녀는 해변에 나갔다가 여인들을 만나 자기의 제품을 설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그들에게 다가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과 실라였습니다. 그들은 거기에 모여 있는 여인들에게 말을 걸더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을 여인들이 듣고 있을 때 루디아도 역시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여인들에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 루디아에게는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설명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이 믿어진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다 전하고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 루디아는 그들에게 자기 집으로 가서 오늘 전한 말을 더 자세히 들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흔쾌히 응했습니다. 루디아의 집으로 갔을 때 루디아는 자기 가족들을 불러서 함께 복음을 듣게 하였습니다. 복음을 들은 루디아의 가족들은 루디아와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빌립보에 첫 번째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루디아의 집을 거점으로 해서 빌립보시내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러 가다가 귀신들린 여종을 만났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그런데 그 여종에게는 점을 치는 귀신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점을 치면 어느 정도는 잘 맞았기 때문에 여종의 주인들이 여종으로 인해 돈을 짭짤하게 벌고 있었습니다. 그 여종은 그 주인들의 희생물이 되어 점을 쳐야했고 번돈을 모두 주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녀는 귀신들에게 이용당하고 악한 육신의 주인들에게도 역시 이용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온 도시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여종 안에 들어가있던 귀신이 사도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이 택하신 종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여종 안에 들어가 있는 귀신이 사도 바울과 실라를 계속해서 쫓아다니면서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어떻게 방해합니까? 사도행전 16장 17-1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그 여인과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여러 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방해하자 사도 바울은 심히 괴로워 견디다 못해 그 여인 안에 들어가 있는 귀신을 향해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종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자 귀신은 그 여인 속에 있지 못하고 즉시 나가버렸습니다. 그로인해 그 점하던 여인은 귀신으로부터 영적인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육신의 자유도 얻은 것은 아닙니다. 육신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이익의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이 부리는 여종이 점을 칠수 없게 된 것을 본 것입니다. 그들은 화가 나서 바울과 실라는 붙잡아 관리들에게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저 사람들 때문에 우리 수입이 끊겼다”고 하면 아무도 자기들을 지지해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감옥에 가둘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관리들과 자기들이 동원시킨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고발합니다. 사도행전 16장 20-21절입니다.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여기서 여종의 상전들이 로마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로마시민으로서 가진 권세를 활용하여 빌립보 지역에서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에게 압력을 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관리들은 그들의 편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는 로마 황제에게 고소할 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 역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넘기워 채짝애 맞고 감옥에 갇히면서도 자기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점이 이상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말은 빌립보 감옥에서 나올때에 그것을 알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왜 채찍을 맞기 전에 밝히면 맞지도 않을 것을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혔다가 나올때가 돼서야 그 사실을 밝혔을까요?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들이 여종의 주인이 몰고 온 사람들을 로마시민이라는 점을 들어 고난을 회피하려고 할 때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곤란한 지경에 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면 순간적으로는 재판에 이길 수도 있지만 복음의 길은 막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시민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로인해 그들은 그 맞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고통스럽고 아픈 채찍을 다 맞았습니다. 그로인해 찢긴 살로 피와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온몸이 욱신거렸습니다. 그리고 지하에 있는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도 바울과 실라는 그 고통스럽게 몸이 욱신거리고 아픈 그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 감옥을 하나님께 찬송하며 예배하는 자리로 삼았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찬송소리가 온 감옥에 들렸습니다. 그 조용한 지하 감옥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아름다운 찬송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그것을 죄수들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해 잡혀왔지만 그래도 자기들의 처지를 당연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당할 판결이나 형벌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도는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이 피투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의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입니다.
오늘날 조금만 힘들어도 얼굴이 일그러지고 마치 죽음의 그늘로 뒤덥힌 것같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걱정과 근심으로 인해 괴로워진 얼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광채가 나기는커녕 누가 건드리면 즉시 터질 것만 같은 시한폭탄의 모습을 한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교인들은 불신자들보다 근심이 많고 평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를 처음보는 사람은 “어휴 저 사람 참 고약하게 생겼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범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온 환난과 고난을, 또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는 그런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합니다. 그들의 얼굴은 고난 가운데서도 평화가 넘칩니다. 그 마음 속에 있는 평화가 고통중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바울과 실라가 바로 이 말씀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때 사도들이 감옥에서 부르는 찬송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갑작스럽게 지진이 나면서 켜져 있던 감옥 안의 불들이 꺼지고 사도들에게 채워져 있던 착고가 다 풀어지고 감옥 문을 활짝 열렸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서 다른 죄수들 역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마음을 붙들어 놓으셔서 그들이 도망칠 엄두를 못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찬송 가운데 옥문이 열리면 ‘아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하시는구나!’ 하면서 밖으로 나갔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하나님이 하실 다른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도망을 쳤을 때 간수가 죽어야 하는 로마의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잡아둘 때 지켰던 군병들은 하나님께서 죽게 버려두셨지만 사도 바울과 실라는 지켰던 간수는 구원하시기로 하신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감옥의 간수가 감옥 안으로 횃불을 들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간수는 그 날이 자기 인생에 최고의 날이 될 것은 생각도 못한채 오직 죄수들이 도망치지 않았는지만 궁금해했습니다.
그런데 감옥 안으로 들어온 간수는 감옥안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횃불을 들고 들어왔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해 간수는 자기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모든 죄수들이 다 도망쳤다고 생각해서 칼을 빼어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로마는 죄수 한 사람이라고 놓치면 그를 담당했던 간수가 목숨을 대신했기 때문에 그는 명예롭게 죽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때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감옥 깊숙한 곳 안에서 들려왔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으니 당신의 목숨을 해하지 말라” 그 소리를 들은 간수는 홧불을 더 깊이 비춰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안에 모든 죄수들이 한 사람도 도망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간수가 한 숨을 내쉬면서 그 자리에서 엎드리면서 물었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찌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사도 바울이 “주 에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하고 대답했습니다.
간수는 사도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맞은 상처를 다 씻어주고 약을 발라주고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육신의 온갖 고통을 다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연민에 빠진 것이 아니라 신령한 찬송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었고, 또한 마귀의 영적인 진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로인해 마귀의 진이 무너지고 그 안에 갇혀 있던 간수와 그의 가정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찬송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신령한 찬송을 드릴 때, 그리고 그 찬송하는 사람과 함께 계실 때 그 찬송은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찬송과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교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서 몸은 괴롭고 힘들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세우신 종인 저를 신뢰함으로 찬송할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거시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의 약속을 받으셨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리십시오. 출애굽기 15장 2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히면서 홍해 바다와 애굽군대로부터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 날에 여러분의 힘이십니다. 노래십니다. 그리고 구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호사밧과 그 군대는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나님이 그 많고 막강한 적들을 멸망시키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로인하여 이스라엘은 단 한 명의 죽은 자도 없었고 부상을 당한 자도 없었습니다. 역사상 이런 이상한 전쟁이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영적 싸움의 현장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군사로 부르셨습니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시간을 쓰지 않습니다. 자신을 부른 나라를 위해 복무하기를 힘씁니다. 디모데후서 2장 4절을 보면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군사로 부트셨기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지에 마음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마귀와 귀신들로부터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에게 결박당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유케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마귀와 마귀가 부리는 귀신들이나 적들이 많고 아무리 강해도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있으며,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면서 승리에 대한 작전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듣고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는 승리를 맛보며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싸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이상한 방식의 승리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인해 환호하면서 그 영광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이 승리의 복이 여러분들에게 넘치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