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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6~21절)
구원받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성탄절 아침입니다. 매년 성탄절이면 복음서를 묵상하며 동방박사와 목자들, 구유에 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올해 성탄절은 다시 오실 주님을 묵상하면서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새벽 예배를 나가면서 성탄절에 새벽예배를 하는 것이 생소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았더니 항상 성탄절 이브에 찬양 축제를 하고 새벽 송을 돌고 하면서 성탄절에는 새벽예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새벽 송이 사라지고 찬양 축제도 주일에 하면서 자연스럽게 성탄절 새벽예배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것이 더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탄절 새벽에 동방박사들의 방문과 목자들의 찬양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성탄절 새벽 예배가 훨씬 어울리는 것입니다. 거기에 다시 오실 주님을 묵상하는 것은 성탄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오늘 드디어 요한계시록 묵상이 끝납니다. 요한계시록은 생각처럼 어려운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번 묵상을 통해서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 1:1~3절과 계 22:6~7절을 비교해 보는 것은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이야기는 항상 처음과 끝에 기록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본문 22:6절과 계1:1절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반복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의 또 다른 봉투는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라는 봉투입니다. 처음과 나중이라는 봉투는 속 봉투입니다. 그 겉에는 다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이라는 봉투가 씌워져 있는 셈입니다. “반드시”라는 말씀은 꼭 일어난다는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담겨져 있는 그림은 요한계시록 공부를 시작할 때 살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자주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마 16:21절에서 “예수께서 고난을 받아야 하고 죽임을 당(해야)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하실 때 그 당위성이 바로 반드시라는 말의 내용적인 의미라는 것입니다. 마24:6절에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라고 할 때 있어야 하되라는 말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부활을 말씀하시며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들은 전부 이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처럼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단2:28절에는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는 다니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다니엘이 “후일(날들의 마지막)에 될 일을 알게 하셨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사도 요한이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비추어 재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들은 우리가 말세라고 할 때 그 말세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는 것처럼 그래서 날마다 성도는 곧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임박한 종말적인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끝나는 이 시점에서 반드시라는 말씀을 다시 가슴에 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언된 말씀들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믿음 눈을 뜨시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이 말씀 앞에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의 처음과 끝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말씀이 반복되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 것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 확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그 기간은 “속히”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말씀하고 있는 성도의 삶은 미룰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개인의 인생에 종말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중적인 의미입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있는 성도들을 향한 격려입니다. 종말이 속히 온다는 것입니다. 지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의 처음 독자들에게 이 말씀은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겠습니까? 이런 심판과 완성은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도 “속히”이고 지금도 “속히”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부정적인 의미가 가미됩니다. 깨어 있으라. 인자가 어느 경점에 올지 알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재림의 지연을 무한정의 시간으로 생각하고 의식 없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속히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지금 종말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속히 오신다는 임박한 종말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게 성도가 깨어 있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22:6절에 어떤 말씀이 함께 있습니까? 천사가 말하기를 지금까지 하신 예언의 말씀들이 신실하고 참되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말씀들은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들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반드시 속히 될 일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들은 신실하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속회 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오늘을 사셔야 합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시작과 끝에 있는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하고 순종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가지 복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번에 걸쳐서 복이 있다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그 가운데 두 번은 바로 1:3절과 22:7절에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절에서는 동일한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22:7절에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그럽니다. 1:2절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에 대한 설명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예언의 말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말씀은 요한계시록에 담겨 있는 성도의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22장에서는 이 두루마리 예언의 말씀이라고 축약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로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와 여섯 번째 복이 있다는 말씀은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참된 평안과 기쁨과 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진정한 축복은 10장에서 말씀한 것처럼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쓴 두루마리 책의 말씀, 예언의 말씀을 잘 받아먹고 지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이 있다는 말씀은 14:13절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여기서 복은 그치고 따름 때문입니다. 수고는 그치게 되고 행한 선한 일은 따르게 될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죽을 때 이런 복이 있다는 것이지요.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지금 당장 순교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말세를 믿음으로 승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수구를 그치고 행함이 따르는 복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주ㅜ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평생을 믿음으로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복도 역시 첫 번째와 내용적으로 같은 말씀입니다.
계 16:15 절에는 세 번째 복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삶에 있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은 양모로 유명한 도시인데도 벌거벗은 수치를 옷을 사서 가리라고 도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옷은 그냥 외형적인 옷이 아닙니다. 거룩한 신부로서의 옷입니다. 성도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복은 말세를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이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것은 곧 첫 번째 복인 말씀을 지키는 삶을 의미합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네 번째 복은 19:9절에 나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럽니다. 누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습니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어린 양의 신부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도들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생각한다면 그 예언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킨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어린 양의 신부들인 것입니다. 그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핵심은 옳은 행실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킨다는 말씀과 중첩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고 수고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네 번째 복도 역시 말세를 어떻게 살라는 의미입니까?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옷을 입고 살라는 것입니다. 역시 첫 번째 복과 같이 말씀을 지키며 살라는 의미입니다.
다섯 번째 복은 20:6절에 나옵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그럽니다. 여기서 말하는 첫째 부활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구원의 은총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로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축복은 천년동안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진정한 축복은 이 땅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임한 천국을 누리면서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첫째 부활에 참여한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복은 천년동안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과 22:14절에 다시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그럽니다.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가지 복의 마지막 복입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생명 나무에 나아가는 복”입니다. 그것과 병행된 표현은 무엇입니까?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성이 바로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이라고 결론 내리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문을 통해 성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완성될 천국의 영광스러운 성도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명 나무에 나아가는 복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인간이 타락할 때 생명 나무는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봉인되었습니다. 그 봉인이 언제까지 풀리지 않고 있은 것입니까? 예,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인봉이 풀리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재림하시고 천국이 완성되자 거기에는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늘어서 있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누구나 그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 나무에 나아가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복은 성경이 일관되게 말씀해 왔던 구원의 축복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이 생명 나무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었고 그 새 생명은 첫 창조에 속한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다시 오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생명 나무에 나아가는 복인 것입니다. 생명 나무에 나가는 복은 그래서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잃어버린 바로 그 영생입니다.
그런데 그 복을 받을 사람이 누구입니까?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입니다. 남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15절과 대비되는 표현으로 성도가 죄악된 삶의 방식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로 살기를 힘쓰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19:8절에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는데 이 세마포 옷이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말씀에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두루마기를 빤다는 표현은 죄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갈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7장에는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가진 셀 수 없는 큰 무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4절에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어린 양의 피로 씻었다는 말은 자기 두루마기를 빤다는 말과 같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부정과거로서 과거의 특정한 행동을 지칭하는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원은 반복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두루마기를 빠는 것은 한 번만 일어나면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두루마기를 빠는 행위는 현재형입니다. 지금도 빨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성결한 삶을 위해서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제는 뭘 씁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세제를 씁니다. 그 세제로 우리 삶을 세탁해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생명 나무에 들어가는 복을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생명 나무에 들어가는 복은 곧 영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의 처음과 끝에 반복되고 있는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요한계시록은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로 하여금 예언의 말씀을 지켜 복을 받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복이 있다는 말씀은 마 5장에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 사용했던 makavrio"입니다. 이 마카리오스라는 말은 행복한, 축복받은, 혹은 최고의 축복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복은 물질의 축복 자녀의 축복과 같은 현세적인 축복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물질의 축복 자녀의 축복 건강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고상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 즉 심령의 평안과 감사와 찬양과 같은 것들을 지칭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 복이 성도가 누리는 평안과 기쁨, 감사라고 확신합니다. 즉 말씀이 가슴을 적시고 그 말씀이 발로 내려와 삶으로 살아지게 될 때 누리는 성도의 평안, 기쁨, 감사, 섬김을 일컬어 복이라고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 이 복들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21장에서 언급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이미지로 묘사된 성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처음과 나중이십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완벽하게 주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스림 가운데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 예언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입니다.
결국, 요한계시록의 화두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있다는 말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 우리가 살펴볼 책이 야고보서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봉투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결론은 지식이 아니라 가슴이며 발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 요한계시록이 시작될 때에 이 책이 편지라는 사실을 살폈습니다. 계1:4~5절을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시록은 일곱 교회로 상징되는 지상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편지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래서 열린 책입니다. 누구나 읽을 수 있고, 읽고 은혜를 받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복음에 굳게 서기를 원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기간! 말세라고 부르는 1260일, 마흔두 달, 천년의 기간에 성도는 자기 옷을 빠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루 이틀 빨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매일 지속적으로 자기 옷을 빨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 진리의 말씀으로 자기 옷을 빠는 사람만이 생명 나무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지속성, 변함없는 성실성만이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은 꾸준함이 능력이라고 늘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요한계시록은 지속적으로 고난의 시대를 사는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에 대해서 강조해 왔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력에 대한 심판과 그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기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런 자들이 바로 어린 양의 신부라는 것입니다.
내가 줄 상이 있어(12절)
우리는 잘못된 차등 상급론에 물들어 있어 혼란스러웠던 시절을 지났습니다. 생명 나무에 나아가는 축복을 누리면 거기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첫 창조에 속한 질서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에 더 이상 이 땅에서 누리던 것들이 가치를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럽니다. 여기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3절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인 분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역사의 주관자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역사의 시작과 끝에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심판하실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줄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입니까? 저는 그것이 14절에 걸린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의 것입니다. 그 상이 그럼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영생과 심판입니다. 그래서 상과 심판은 항상 같이 다니는 개념입니다. 상을 받는 사람들은 생명 나무로 나가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심판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15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그럽니다. 성 밖에 있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성 밖은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21:7~8절입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려워하고 믿지 않는 행위들은 모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삶의 결과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22:15절에서 말하는 성 밖은 21:8절에 의하면 뭡니까? 둘째 사망입니다. 둘째 사망은 영원한 심판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자 이 말씀과 함께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심판이냐 구원이냐? 이 둘이 결정 날 시간이 속히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루마기를 빠는 삶을 살라는 도전인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끝까지 아직은 기회가 있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속히 오십니다. 그 속히가 오늘 일 수도 있고 천년 후 일수도 있습니다. 그 기간과 시는 주님만 아십니다. 그러나 속히 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을 살라는 것입니다. 무한한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받는 상은 천국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전부입니다. 거기서 더 무엇을 기대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올바른 기독교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오직 한 길, 천국을 향하여 최선을 다하는 성결한 삶을 살았을 때 그에게 약속된 상은 천국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상은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
계속해서 10절입니다. “이 두루마리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그럽니다. 왜 인봉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누구나 볼 수 있게 인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보고 깨어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장 사도 요한이 살았던 시대에서부터 오늘 우리 시대를 포함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필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올바르게 요한계시록을 읽고 그 말씀 앞에서 우리의 삶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책을 닫힌 책이라고 말하면서 현대판 영지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들만 요한계시록을 읽을 수 있고, 비밀이기 때문에, 비유이기 때문에 해석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런 감언이설에 속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여러분은 누구든지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이 열려진 책은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요? 이어지는 구절 때문에 우리 마음이 심히 불편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그럽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다 팔자소관이니까 그대로 살게 두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시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10절과 12절에 반복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속히 오신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11절은 무엇입니까?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자기 삶을 바꿀 시간이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의 오심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부르시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때에는 그 기회가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삶을 바꿀 시간이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경고의 시간들이 지나갔습니다. 더 이상 회개의 기회가 없을 만큼 촉박한 시간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날이 오기 전에 마음을 정하고 두루마기를 빠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서 인생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불신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이 일곱 교회로 상징되는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가운데 있는 불신자들에게 이 성경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교회 안의 불신자들에게 아직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드려지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자신만을 위해서 살겠느냐는 도전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삶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을 말합니다. 땅이 창고에 쌓기를 그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으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믿음은 생활이라고 말입니다. 믿음은 관념이나 사변이 아닙니다. 믿음은 두루마기를 빠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믿음은 그래서 지금 내 삶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에 삶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선택인 것입니다. 믿음 생활의 결국은 그래서 나눔이 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자유, 생명, 물질, 재능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 즉 어두운 곳에 외로운 사람들과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속히 오실 주님을 두려움 없이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경배하라.
8~9절은 신앙생활의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해 줍니다. 천사에게 경배하려는 사도 요한에게 주시는 천사의 음성입니다.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경배하라.”
저는 이 말씀이 이렇게 깨달아집니다. 주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오직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높여드리기 위해서 모든 마음이 모아져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높일 때 우리 삶은 회복되고 치유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삶을 살아갈 때 분명한 목적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천국에 우리 마음이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만 경배하고 주님만 사랑하는 자로 살아야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제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을 되짚어 보는 소중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전체를 통해 말씀하셨던 것들 가운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다시 짚어 본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 말씀드린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말세라고 일컫는 요한계시록의 다양한 시간들... 그 시간들을 변함없이 복음 위에, 말씀위에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매일 빨아야 한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매일매일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굳게 서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상을 주십니다. 영원한 천국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상입니다. 20장과 21장에 강조했던 바로 그 영원한 천국, 생명 나무에게로 나아가는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사람을 경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굳게 서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래서 마지막에 하는 말씀이 매일 매일 옷을 빠는 거룩한 생활, 성결한 생활, 천국을 사모하는 나눔과 베품의 삶을 살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씀을 쓰고 있는 22:16절에 또다시 뭐라고 말씀합니까?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의 진정한 저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복음은 열려져 있는 책입니다.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고 그 속에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되는 그런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자를 보내셔서 증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사자들은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도 요한입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수많은 사자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편지의 1차 독자들은 어떤 상황입니까? 박해로 말미암아 극단적인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 교회들에게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은 것입니까? 쉽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들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 위로이겠습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아도 고난당하는 교회에 절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겠습니까? 부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은 끝까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끝까지 인내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들에게 하나님은 거룩한 신부로서의 교회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지상교회의 정체성이 전투하는 교회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 전투는 영적 전쟁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 전쟁은 백병전의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세 개의 일곱 심판 시리즈는 본류가 아니라 지류입니다. 이 세 개의 일곱 시리즈는 심판의 임박성과 회개로 초청하기 위한 처방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주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이 아닙니다. 이런 심판이 주된 메시지가 아니라 교회의 영광과 승리가 교회들에게 주시는 핵심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교회가 살아내야 할 삶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어려운 시기를 믿음으로 인내하며 순결한 신부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요? 그런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아직 복음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시는 분들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다윗의 뿌리라는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태초 이전부터 존재하셨던 하나님은 다윗의 뿌리가 되십니다. 처음과 나중이라고 할 때 그 처음에 해당되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태초에 계신 말씀에 관해서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그때 그 말씀은 태초 이전에 존재했고 태초의 창조에 함께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다윗의 뿌리는 말씀은 그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26절에서 말씀하시고도 하셨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당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성자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는 말씀은 성령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뿌리라는 말씀은 다윗이 존재할 수 있었던 바로 그분! 즉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시록5:5절에서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고 하셨을 때 그 다윗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다윗 이전에 존재하신 알파이신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계셨던 로고스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양면적으로 표현한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에 e해서 풍성하게 말씀합니다. 사 11:1절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는 말씀은 바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잘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의 뿌리이시면서 동시에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피 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표현은 “광명한 새벽 별”이라는 표현입니다. 광명한 새벽 별은 밤이 거의 끝날 무렵에 나타나는 별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의 다른 표현으로 보입니다. 거의 시간이 다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광명한 새벽 별은 교회, 즉 모든 성도에게 구원의 빛이신 것입니다. 이 광명한 새벽 별은 모든 믿는 성도들에게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존재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들에게 주시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교회들 가운데 건강한 교회가 몇이나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그 교회들에게 이 시대를 올바르게 보고 성도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성도의 유일한 소망이어야 합니다. 아멘
교회의 초청
그런 후에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기회가 남아 있다고 말입니다. 이미 심판의 메시지가 끝나고 최후의 심판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까지 다 보여주신 후에 아직도 기회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속히 오실 주님은 아직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오라고 구원 초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 조합은 조금 이상해 보입니다만 우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부는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교회가 말해야 합니다.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오라 듣는 자들도, 목마른 자들도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통해서만 말씀하십니다. 교회, 즉 성도들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고 그 성도, 즉 교회를 통해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는 교회는 능력이 없습니다. 맛 잃은 소금에 불과합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교회를 통해서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과 신부가 초청하는 것입니다. 오라는 것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듣는 자도 오라, 목마른 자도 오라고 하십니다.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문제는 원하는 자는 이라는 말씀입니다. 듣는 사람도, 목마른 사람도 자원하여 오는 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1260일을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교회 안의 불신자들에게 던지는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이 땅에 남겨진 교회에게 주시는 사명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치열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을 지켜내는 동시에 구원에 초청하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기회는 주어져 있습니다. 주님 속히 오실 것이지만 또한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은 아직 구원에 참여할 기회가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이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더하거나 제하거나(18~19절)
아마 하나님께서는 이 책이 이단들을 안식처가 될 것을 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두루마리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말씀에 더하는 것도 제하는 것도 문제라는 것입니다. 더하는 사람에게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개의 일곱 시리즈가 말씀하고 있는 재앙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심판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재앙의 의미는 불신자들에게 주시는 심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무엇인가를 더해서 자신의 사상을 전하는 사람들을 그런 불신자들로 취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겠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생명 나무에 참여한다는 표현을 눈여겨보십시오. 그러니까 생명 나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하거나 제하거나 하는 사람들은 구원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더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의 후속편을 쓰는 것입니다. 내가 본 천국을 쓰고 꿈과 환상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들로 더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하거나 뺀다는 것은 우연히 필사자의 오류로 빠지거나 더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신천지나 온갖 이단들이 전부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교리를 세우게 될 것을 내다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교리를 요한계시록이 부정하거나 뒤엎는 상황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성경 전체를 보는 것이나 성경 전체의 관점으로 요한계시록을 보는 것이 같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특별한 해석을 경계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근거 없는 상상으로 요한계시록을 끌고 가는 것을 경계하십시오. 특히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들을 새로운 메시아의 근거로 삼는 어리석음을 번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사도 요한의 경고입니다. 이런 경고는 모세도 했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4:2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또 사도 바울도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갈 1:7~8절 말씀인데요.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럽니다. 신명기의 모세도 갈라디아서의 사도 바울이나 전부 고의적인 복음 훼방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복음을 개인의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시대의 교주들에 대해서 두 가지로 말해야 합니다. 첫째는 인간은 그리스도 외에 누구도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림 주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주님이 재림하시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복음서의 말씀과 계시록의 말씀을 기만하는 자들입니다. 두 번째로 계시록의 말씀을 가감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가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의를 가지고 악하게 본문을 왜곡해서 성도들을 배나 되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올바르게 읽고 올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올바른 신앙으로 사는 길입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0~21절).
아마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씀으로 이 말씀보다 더 적합한 말씀이 있겠습니까?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무엇입니까? “진실로 내가 속히 오리라.”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그대로 오십니다. 진실로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보다 더 위로되는 말씀이 있겠습니까? 주님은 반드시 속히 진실로 다시 오십니다. 성도는 이 말씀을 늘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이 므두셀라를 낳고부터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므두셀라는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때부터 에녹은 심각한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주님이 데려가셨습니다. 아마 에녹은 자다가도 므두셀라가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긴박한 종말론적 신앙은 우리를 건전하게 깨어 있도록 인도합니다. 성도는 속히 오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초대 교회부터 종교개혁 전까지는 교회가 예배를 마칠 때마다 ‘아멘 마라나타’하고 예배를 마쳤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마라나타라는 말은 오늘 본문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의 아람어 표현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버리지 말아야 할 좋은 전통도 버린 것들이 있는데 바로 이 신앙고백입니다. 이 종말 지향적인 신앙고백은 요한계시록이 마지막으로 가르치고 있는 소중한 신앙의 유산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다 읽고 들은 성도들의 고백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말씀을 올바르게 듣고 기대하시는 반응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온 맘 다해 환영할 수 있는 신앙생활! 주님이 기대하시는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이 신앙은 여러 가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주님이 속히 오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는 이 땅이 영원할 것처럼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다른 가치를 구가하며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끝나고 이 말씀을 들은 모든 성도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부르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서신의 처음과 거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인사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에게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축도입니다. 우리는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제 계시록을 덮으시면서 그 속에 담긴 수많은 말씀을 기억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날마다 자기 옷을 빨며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종말론자로 사십시오. 깨어 기도하고 하늘 창고에 쌓는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삶을 원하시고 기대하시고 계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