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826. 묵상글 (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 목표인 우리. 등 )
----------------------------------------------------
220826.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 목표인 우리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파견되어서 해야 할 일이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오늘 독서의 말씀은 좋은 가르침이고 지금의 저에게는
걱정을 덜어주고 힘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복음 선포와 세례 주는 것을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복음 선포보다 세례에 집착하기 쉬운데 바오로 사도는 오늘
세례의 욕심을 부리지 말고 그저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내 복음 선포의 마침표로 세례를 받게 하고픈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복음 선포로 누군가 세례를 받았다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싶고,
내가 이룬 것을 내 눈으로 보고 싶은데 이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지역 사회 복음화를 목표로 <여기 선교 협동조합>을 하고,
협동조합 사업의 하나로 식당도 하는데 세례 주는 것이 식당의 가시적인 성과의
하나라면 그런 면에서는 아무 성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고 헛발짓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매스컴을 타라는 제안을 받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신부가 하는 식당이 매스컴을 타서 후원도 받고,
그 좋은 일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라는 제안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이 매스컴을 탈만큼 그만큼 훌륭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설사 그만큼 훌륭한 일이고 그래서 매스컴을 탈 수 있을지라도 저는
그러고 싶지 않고 과거 북한 일을 할 때도 그런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좋은 일을 널리 알리고 그럼으로써 좋은 영향력을 세상에 주라는,
주님께서도 등불을 됫박에 덮어두지 말고 등경 위에 올려놓아
세상을 비추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하라는 설득을 받지만
저는 그 좋은 명분 뒤에 숨어있는 유혹을 경계합니다.
저는 매스컴을 탈 때 그것을 제 영광 삼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저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때
저는 성공의 유혹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기에 하는 하느님의 사업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때 은근슬쩍 그 사업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북한 평양에 평화 봉사소를 위한 우리 계약 조건을 북한이 수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너무 기뻐 경당으로 달려가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때 문득 깨달음이 왔습니다.
내가 왜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가?
내 뜻을 그리고 내 사업을 주님께서 이루어주셨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당신 사업을 내가 도구가 되어 이루어드린 거라면
주님께서 오히려 내게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 사업을 내 것이라고 순간 착각하고 감사를 드린 것 아닌가?
이처럼 어떤 일이 가시적인 성과와 성공을 거둘 때
그것이 하느님을 위한 것도 이웃을 위한 것도 아닌,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되기 쉬운데 세례 주는 것도 그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 우리에게는 사랑이지만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성공이 아니라 실패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따름은 그들이 볼 때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의 목표라면
세상이 볼 때 어리석을지라도 십자가라는 사랑을 목표로 삼고
그것이 우리의 복음이라고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
220826.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6)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고 올리브 산으로 가시자, 제자들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마태 24,3)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마태 24,4) 하시면서, ‘가장 큰 재난’(마태 24,15-26)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마태 24,29-31)에 대해 말씀하시고 ‘도적의 비유’(마태 24,42-44)를 통해 ‘깨어있음’과 ‘준비함’을 명령하시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이요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를 밝혀주시기 위해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탈렌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인 “열 처녀의 비유”는 혼인잔치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열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입니다. 신부는 당연히 신랑께 깨어있어야 하고, 신랑을 고대하고 기다림으로 준비합니다. 왜냐하면, 신랑이 오면 마중 나가 맞이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냥 마중 나갈 뿐 아니라, 신랑이 자신을 잘 찾아오도록 ‘등’을 밝혀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등’을 밝혀들기 위해서는 ‘기름’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이가 바로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준비해야 할 ‘등’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일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등’을 ‘선행’으로 등에 불을 타오르게 하는 ‘기름’을 ‘사랑’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의 ‘세상의 빛과 소금’의 가르침에서 말씀하십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5-16)
그러니 ‘등’은 ‘착한 행실’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등을 밝히는 데 꼭 필요한 ‘기름’은 ‘신랑에 대한 사랑’, 곧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자세’이며, 성령의 기름부음에 도유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습니다.”(마태 25,6). 여기서, “한밤중”은 가장 예기치 않은 때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등불을 챙겼습니다.”(마태 25,6-7)
여기서 ‘챙기다’(코스메오, κοσμεω)는 ‘심지를 자르다’라는 뜻으로, 다 타버린 심지 끝을 잘라서 그을음이 나지 않고 환하게 타오르도록 정돈하는 행동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곧 불꽃이 잘 타오르도록 그래서 환하게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 심지가 기름에 닿아있는지 기름은 충분한지, 그리고 심지가 타버리지는 않았는지 보고 잘라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기름에 몸을 담그고 있는지, 성령에 젖어 있는지, 그 사랑의 기름에 도유되어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신랑이신 주님’께 깨어있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인 사랑의 착한 행실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나는 ‘슬기로운 처녀’인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6).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깨어 있어라.”(마태 25,13)
주님!
눈을 부릅뜨고 깨어 있되, 신랑인 당신을 향해 깨어있게 하소서.
당신을 희망하고 기다리며, 더더욱 갈망하게 하소서.
빛 속에서 은총을 볼 줄 알게 하시고,
그 은총이 얼마나 큰지, 경이로워하고 놀라워할 줄 알게 하소서.
사랑의 등불을 켜들고, 임을 보게 하소서. 임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에 깨어있게 하시고,
당신 사랑에 기름칠 되게 하소서. 아멘.
----------------------------------------------------
220826.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보든 안 보든 한결같아야 한다
맥시칸의 결혼식과 인도 사람의 결혼식, 그리고 미국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문화가 다르지만, 복을 빌어주고 헤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자녀의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는 기원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신랑과 신부를 끈으로 묶는 행위라든지 반지를 교환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쌀을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선언 후 성모님께 꽃을 봉헌하는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모습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약혼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약혼으로 법적인 혼인이 성립되지만 약 1년간은 신부가 친정에 머물러 있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으로 갑니다. 신부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을 마중합니다. 그리고 신랑 일행이 도착하면 함께 들어가 밤새도록 잔치를 벌입니다. 왠 등불이냐고요? 사막지역은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밤을 이용하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고 다섯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신랑이 일찍 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늦어져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등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기름이 얼마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처녀의 잘못입니다. 우리도 나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 어리석은 처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 내 삶의 태도가 어떠한지 살펴야 합니다. 물론 기준은 언제나 예수님이십니다.
어리석은 저는 하루 일정을 마감하며 자동차의 주유상태를 확인합니다. 혹 급한 일이 있어도 일정한 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간혹 확인을 소홀히 한 날이면 하필 그날에 일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하루쯤이야! 하고 방심하는 그 날이 심판의 날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 깊은 우정을 쌓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천상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인 풍습은 다르지만, 그 안에 예식이 의미하는 알맹이가 있듯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의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삶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20826.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루사이에 부고를 두 번 들었습니다. 여행사를 하시는 형제님의 아들이 밤사이 심장마비로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젊은이가 꿈을 다 펴지 못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부모님의 상실은 어찌 말로 표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젊은 청년이 주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세상을 떠난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부모가 슬픔을 딛고 힘을 내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내년에 부제품을 받는 형제님의 장모님이 가슴이 답답하여 병원엘 갔지만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일주일에 3번씩 투석을 하였던 어르신입니다. 자식들에게는 큰 슬픔이지만 어르신께서는 이제 투석이 없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리라 믿습니다. 라틴어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Hodie mihi, Cras tibi)”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의 문을 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0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0처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모두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등잔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름은 그 시간과 공간에 채워야 하는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빌려올 수도 없고, 나의 것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 주어라. 누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까지 내 주어라.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이런 삶은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은 타인에게 빌려 올 수 없습니다. 공기가 있어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것처럼 그냥 우리가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삶 또한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빌릴 수 없습니다. 물이 있어서 마시는 것처럼 우리가 행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참된 신앙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불빛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
220826.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도박하는 사람의 승률은 얼마나 될까요? 실력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아마 도박에서 이기는 사람보다 지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 도박을 끊지 못하는 이유는 본전 생각과 막연한 희망 때문입니다. 본전까지만 찾으면 그만하겠다고 하지만, 본전 찾기 전에 패가망신 당하고 말지요. 또 본전을 찾아도 더 딸 것이라는 잘못된 희망에 매달려서 쫄딱 망하고 맙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분은 절대로 도박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이런 도박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돈이 아닌 시간을 가지고 하는 도박입니다.
“돈에 여유가 생기면 봉사할 거야.”, “시간이 나면 성당에 열심히 다닐 거야.” “은퇴하면 가족과 열심히 함께할 거야.” 등등 우리는 막연히 시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지금 하지 않고 뒤로 미룹니다. 시간을 가지고 도박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되찾을 수 없는 돈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거의 100%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에 대해서 도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 나중에’라는 말로 지금을 소홀히 한다면, 큰 후회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미루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자주 말씀하셨지요. 특히 깨어 기다리라는 교훈을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확실한 이해를 위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열 처녀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스라엘의 혼인 잔치는 야단스러울 만치 온 동네가 함께 기뻐합니다. 혼인 며칠 전부터 밤에 횃불을 밝히고 춤과 노래로 밤을 지새웁니다. 신랑이 자기 집에서 친구들과 잔치를 벌이고 혼인날 저녁에 신부 집을 찾아가 결혼합니다. 그래서 언제 올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신랑 집의 잔치가 끝나야만 신부 집에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신랑이 제때 오지 못하고 꽤 늦어졌다는 것입니다. 신부 측 들러리들은 신랑 측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등을 들고 기다리는데, 이 등은 약 15분가량 있으면 꺼집니다. 그래서 신랑이 올 때를 잘 맞추든가 여유의 기름을 준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두 부류로 나눠집니다. 할 일에 늘 대비하는 성실한 사람과 그저 그때를 안일하게 넘기는 게으른 사람으로 나뉩니다.
성실한 사람은 잔치에 들어가고 게으른 사람은 문을 두드리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성실히 주님의 나라를 준비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나라가 아직 오려면 멀었다면 게으르고 불성실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큰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
역경은 당신에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할 용기를 준다(앤디 그로브).
------------------------
----------------------------------------------------
220826.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8월 26일 금요일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3-4)
기름이 나타내는 것
이 기름이 나타내는 것은 어떤 위대한 것, 참으로 지극히 위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가정한다고 할 때, 우리는 전혀 경솔히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어째서 기름이 사랑을 나타낸다고 보는지 제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1코린 12,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 13,1).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다른 것들 위에 있는 길이며’ 기름으로 표현되기에 합당합니다. 기름은 액체들 가운데 가장 위에 뜨기 때문입니다. 물 위에 기름을 부으면,기름이 위에 뜹니다. 기름 위에 물을 부어도 기름이 위에 뜹니다. 여러분이 보통 섞는 순서대로 섞어도 기름이 제일 위에 뜹니다. 순서를 바꾸어 섞어도 기름이 제일 위에 뜹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8).
-아우구스티누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50가지 예수 모습 / 안셀름 그륀
11. 자유인 예수
예수님은 질문하는 사람들의 의중을 꿰뚫어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왜 나를 떠보는 거요?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시오. 어디 봅시다”(마르 12,15).
그들은 세금을 낼 때 쓰는 데나리온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기만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들도 세금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묻고 싶었을까? 자신들의 문제를 예수님께 덮어씌우고 싶었을 것이다. 로마에 세금을 내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아 온 그들은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다. 그런 질문을 해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려고 했다.(67)
✝️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8월 성령 열매성월 3주간 기쁨 / 선행 ✝️
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5-7장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테르툴리안
인내와 조급함의 바탕과 본질
조급함은 악마가 받아들인 것이고 악마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한 것이다. 악마는 자신의 경험으로 교활하게 되어 죄의 달콤함을 즐기면서 인간도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데에 이 조급함의 도움을 활용했다.
악마는 즉시 여자를 유혹했는데 유혹에 넘어간 여자는 그 악마 곁으로 다가가 이미 조급함으로 물든 악마의 정신을 전달받고 말았다. 만약 그 여자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켰더라면 그리고 조금만 더 인내했더라면 결코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혼자만 악마와 만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당시 아직 자신의 남편이 아닌 아담도 이 악마와의 관계 안으로 끌어들였다.
아담은 당시 이 여자의 말을 들을 필요가 결코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자신이 악마로부터 받은 것을 아담에게 전달하고 말았다.
이제 이 첫 인간이 가진 조급함에 의해 다른 사람도 몰락에 빠져 들게 되었다. 물론 이 인간도 자신의 조급함으로 인해 죽는다. 이 조급함은 두 가지 측면으로 작용한다. 하나는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나가지 못하도록 작용하고, 다른 하나는 악마의 감언이설을 물리치지 못하게 한다.
여기에서 바로 범죄와 벌이 시작되었다. 당신을 모독하도록 인간이 유혹되는 순간 하느님의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하느님은 분노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인내로 서서히 인간에게 다가오셨다. 그분이 악마가 정의롭게 처신하도록 하기 위해 악마에게 벌을 내리겠다는 위협만 가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첫 번째 사람이 조급함에 빠져 든 잘못 이외에 또 어떤 잘못을 범했을까? 그는 처음에는 티끌 한 점도 없이 깨끗한 사람이어서 하느님과 이웃의 친구였고 천국의 거주자였다. 그러나 그가 조급함의 잘못에 빠져 들자마자 하느님의 마음에 들기를 포기하고 천상적인 것들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부터 인간은 자신을 땅에 내어주고 말아서 하느님의 면전으로부터 숨게 되었고 조급함 속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요소들을 행하기를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을 요람으로 하여 조급함은 이후 많은 부정적인 일들을 실행해 나가게 되었다. 조급함이 차츰 성장해 보여준 꼴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첫 번째로 등장한 죄인 조급함이 이후 수많은 죄들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한 논리적 결과였다. 마치 시냇물이 큰 강으로 몰려들 듯이 조급함으로부터 수많은 다른 죄들이 흘러나왔다 ...
이것을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종류의 죄는 조급함으로부터 나온다. 악은 선을 실천하는 인내의 부족이다. 수련되지 않은 사람은 청순하게 살아갈 인내심이 부족하고,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인내를 올바르게 실천해 나갈 수 없으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인내심을 갖춘 신심이 없고, 불안정한 사람은 잠자코 있는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는다.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다른 것이 아니라 선한 것올 끈기 있게 실천해 나갈 수 없는 것에서 진행된다. 이러한 종류의 죄들은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은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109)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
220826.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말씀의 등잔에 사랑의 불꽃을 피우며 ♣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4)
오늘 복음에서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로 묘사됩니다.”(25,1) 여기서 신랑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요(9,15), 열 처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뜻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슬기로운 이들도 있고, 듣고도 지키지 않는 어리석은 이들도 있습니다(7,21-27).
선인들과 악인들이 함께 사는 불완전한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내림을(24,48) 안타까움 속에 기다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밤중, 뜻밖의 시간에 오실(25,6.13) 주님을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기다리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준비하고 있다가 마중 나가야 할 것입니다(1테살 4,17).
이렇듯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늘 깨어(24,42; 25,13) 준비하고 실행한 이들은 마지막 날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이들은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25,11) 하고 청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7,21-23. 24-27).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오시는 분이 누구이시며 기다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식 차원만이 아니라 주님을 맞기에 합당한 삶을 포함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 내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여야겠지요. 만반의 준비를 하고도 잠들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깨어 기다리며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돈으로 살 수 없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올 수도 없으며,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자가 책임져야 할 신앙의 문제요, 하느님과의 고유한 인격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등과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한 등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일까요? 등은 주님의 말씀이요 그 말씀과 주님의 영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인 깨끗하고 순수한 내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름이란 인내와 희망 가운데 주님을 기다리는 몸짓이요, 그분을 갈망하는 거룩한 열정이며, 말씀에 대한 목마름과 실행하는 태도입니다.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것은 말씀의 실행을 말합니다. 곧 가장 작은 이, 소외되고 보잘것없는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주님으로 모시는 사랑의 실천을 뜻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기도요, 선이신 주님의 사랑과 정의 안에 머무는 행실을 말합니다. 사랑의 불꽃은 나의 어두운 영혼과 세상의 어둠을 밝힐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언제든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있도록 합시다. 등도 기름도 준비하지 않은 사람, 곧 말씀을 듣지도 실행하지도 않는 사람이 될 수야 없겠지요. 또 어정쩡하게 등은 준비했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곧 말씀을 듣기는 하나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겠지요.
오늘도 불현 듯 나를 찾아오실 주님을 사랑으로 기다리는 가슴 설레는 행복한 날이 되도록,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경청하고, 주님의 영 안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사랑의 모닥불을 피웠으면 합니다.
----------------------------------------------------
220826.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 있어라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정과 순수의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수녀회 피정지도는 많이 했지만 이렇게 ‘프란치스코’ 수도사제가 남자수도회, 특히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피정은 난생 처음입니다. 이 또한 주님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강론은 참 각별한 성격을 띌 것입니다. 제 은총의 발자취, 수도여정의 렉시오 디비나이자 고백이 될 것이며 또 새로운 시작의 다짐이 될 것입니다. 총원장 형제님과 나눈 카톡의 청담淸談의 대화가 이 강론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열정과 순수의 수도공동체 형제님들의 젊고 힘차고 아름다운 시편공동전례기도에 힘과 감동을 받습니다. 피정분위기도 진지하고 열심하여 좋습니다! 공동체 힘껏 섬기시노라 수고많습니다.”
“벌써 내일 모레 피정이 끝나네요. 내일, 혹은 토요일 강론때 신부님 수도여정안에서 묻어나는 복음삼덕에 관련하여 살아오신 얘기도 듣고 싶습니다. 젊은 수도자들에게 소중한 시간이 될 듯 싶습니다.”
“아, 그것들은 이미 제1부, 체험적 고백의 강의에서 다 피력됐다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기도시, 내 수도생활관, 명상기도, 희망의 여정, 행복기도에 제 삶 모두가 담겨 있지요!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살고 있으며,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 유일한 소망이랍니다. 이에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편히 쉬세요.”
“네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이렇게 정다운 청담을 나눈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만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밤중 잠을 깨는 순간, 형제님의 청에 순종順從하여 제 수도여정을 나눠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것은 순전히 성령聖靈께서 제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도저히 나누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 못 견딜 것 같았습니다.
제 성소聖召는 참 각별한 느낌입니다. 천주교를 몰랐던 시골 어린 시절부터 결혼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늘 자리했습니다. 이때는 집근처의 감리교회에 다녔지만 그리 열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본격적인 성소의 계기는 교대시절 뇌종양 수술로 RNTC 훈련을 못받자 군에 1970년 징집되어 34개월 군복무를 시작하면서 였습니다.
입대시 소지품은 절박한 마음에 지녔던 성경 한권뿐이었습니다. 군복무중 개신교 신자로 주일 예배는 꼭 참석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은총의 섭리안에 순탄한 군복무후 제대해 마지막 한 학기를 마치고, 1974년부터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만8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1981년까지 재직하다 1982년 왜관 수도회에 만 33세로 입회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치열하고 간절했던 초등학교 8년의 교편시절이었고 수도 성소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교직을 돈벌이 직업職業이 아닌 성직聖職으로 생각하여 오로지 교육에, 아이들 사랑에 헌신하고자 했고, 결혼에 대한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유일한 바람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이었기에 8년간 학부모가 건네주는 일체의 촌지寸志도 겸손히 사양했고, 온전히 날마다 하루 전부를 아이들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았습니다. 지금은 하느님 사랑이 전부이지만 당시는 아이들이 제 사랑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향해 몸바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도 마음의 허기는, 공허는,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개신교에 다녔고 처음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을 알았고 성인의 삶에 매료되었습니다. 때로 목사님이 되라는 조언도 있었지만 직업으로의 목사님 하기보다는 교사 직업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떳떳할 것이라 생각하고 거절했습니다. 정말 내 가정을 가지고 성직을 수행한다는 생각은 염두에도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서서히 가톨릭에 끌리기 시작했고, 때로 미사에 슬며시 참석하기도 했는데 마음이 고향집에 온 듯 편안했습니다. 마음이 갈증도 허기도 해소되는 느낌이었고, 동료 가톨릭 교사들도 적극 수도사제의 길을 권했습니다. 당시 만 33세에 안정된 교직을 그만두고 수도회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모험이었습니다. 참으로 무모無謀하기에 일부는 권했지만 대부분 말렸습니다.
하느님의 성소에 감사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다시 산다해도 이길뿐이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1980년 성탄절에 세례를 받고, 1981년 성탄절에 견진을 받고, 1982년초 사직辭職후 수도회의 각별한 배려의 은총으로 입회가 가능했습니다. 이때 역시 본당신부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사무장님이 잘 아시는 수도회 성소 담당 신부님을 연결해 줬기에 막차를 탄 기분으로 고령의 나이로 입회가 가능했으니 참 아슬아슬했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도 어제와 동일하게 “깨어 있어라”인데 이때부터 하루하루, 참으로 치열히, 절실히 깨어 살도록 노력했습니다. 보통 자연스런 입회자들보다 12년은 늦었기에 배로 열심히 산다는 각오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가톨릭 신학대 입학은 어려워 마침 수도자 신학교를 계획한 서강대 종교학과에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기막힌 섭리였습니다. 제가 입학한 후 더 이상 수도 신학생의 입학은 없었습니다. 마치 저를 위해 개설한 학과였던 듯 싶습니다.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신학, 철학, 종교학을 마치고 졸업하자 즉시 수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련기때는 토마스 머튼에 심취되어 수도원 도서관에 소장된 영문판 서적은 거의 읽었고, 나중 대학원 논문도 토마스 머튼의 관상에 대해 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련을 마치자 특별한 배려로 대구가대 신학대학원 제1회에 맞춰 제일 많은 나이에 자연스럽게 편입이 이루어졌습니다.
대학원 2년간 교구 학생들과 함께 학교 기숙사에 거주하면서, 신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학부과목도 12과목을 수강하여 시험을 봤습니다. 참으로 치열히, 열심히 공부하여 만학晩學의 오로도 첫 번째인 저를 의아해하던 주위의 시선이 첫학기 1등하자 깨끗이 사라졌고 보는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대구가톨릭신학대학원에 자연스런 편입도 은총의 기적이었지만 종신서원을 앞두기 한해전 1987년 성 요셉수도원의 설립도 저에게 기막힌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서강대를 마련해 주신 주님은, 자연스럽게 대구가대로 이끄셨고, 신학교 공부가 끝나자 마자 때에 맞춰 평소 갈망해왔던 관상적 성격의 요셉수도원을 마련하여 이끄셨던 것입니다. 제 일정표엔 없었지만 하느님 일정표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일편단심一片丹心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신학교 공부를 끝내고 유기서원 3년차 만39세, 1988년 7월 11일 성 베네딕도 대축일에 요셉수도원에 부임했으니 올해로 요셉수도원에 정주하기 34년째요, 수도회 입회 만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요셉 수도원 초창기 역시 참으로 생존生存을 위한 참 치열했던 삶이었습니다. 1992년부터 2014년 자치수도원으로 승격하기까지 무려 22년동안 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우여곡절에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의 은총으로 무사히, 성공적으로 통과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선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1988년 7월11일 요셉수도원 부임전날 밤, 왜관 수도원 대성전에서 밤9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3천배 기도를 바쳤던 기억입니다. 성철 큰 스님의 좌우명 종신불퇴終身不退의 정신으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살아 온 그동안의 삶이었습니다. 값싼 은총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치열하고 항구한 깨어있는 삶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유명한 제 모토가 생각납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참으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수도공동체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이 날로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2014년 자치수도원으로 승격되면서 저는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가지면서, 제 수도여정을 렉시오 디비나 하였고, 이어 훌륭한 원장 후임자를 마련해 주신 ‘신神의 한 수手’ 같은 하느님의 섭리에 정말 감격, 감탄하였습니다. 저절로 모두가 은총이란 고백과 더불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도 날로 깊어지게 됩니다.
2014년 원장직에서 내려온후 오늘까지 평범한 수도승으로서 수도형제들과 34년째 정주중입니다. 우리 나이로 40세 부임하여 34년이 지나니 현재 74세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하면 오후 4시,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면 초겨울쯤 될 것입니다. 이런 자각이 환상이나 거품을 거둬내고 깨어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날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해가면서 저절로 깨어 살게 되며 주님을 알게 되고 나를 알게 됩니다. 결코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처녀처럼 문을 두드렸을 때 주님의 다음 말씀은 듣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과 신뢰를 받았더라면,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처럼 섬김과 사랑, 겸손을 위한 분투의 노력을 다해 평상시 영혼의 등잔에 신망애信望愛와 진선미眞善美의 영적 기름을 충분히 예비하여 늘 환한 등불 환히 켜들고 깨어 주님을 기다렸다면, 하늘 나라 잔치에 입장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깨어 영혼의 등불을 환히 켜들고 주님을 기다리다가 주님을 맞이하여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 잔치를 앞당겨 체험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고백기도시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깨어,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