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37-43 야곱이
본문은 야곱이 자기 독자적인 가계를 세우기 위하여 재산 축적까지를 염두에 두면서 힘쓰고 있는가? 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에 대하여 하나님의 안목과 그분의 의지를 얼마만큼 인식하였는가는 밝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도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전적인 돌보아 주심과 은혜로 복 주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1. 본문 37-39절은
“(37)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무늬를 내고
(38)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 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39)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 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입니다
얼핏 보기에 모세의 서술은 불합리한 듯이 보입니다. 모세의 의도는 거룩한 야곱을 협잡범으로 흑평하려거나 그의 근면을 칭찬하려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문맥으로 보아 야곱의 이런 기민성은 죄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행위가 어떻게 변명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가 야곱이 자기 장인에게 아주 많은 피해를 입었으므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면 그런대로 변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런 변명은 확고하지도 못하며 그럴 듯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비록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꼭 같은 불의로 경쟁해선 안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이 당한 피해를 직접 복수하거나 우리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스스로 바로 잡도록 허용된다면, 합법적인 재판이 설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가공할 만한 혼란이 야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변종의 양떼나 염소 떼를 생산할 목적으로 이 계략에 호소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여호와께서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 전달하신 말씀, 곧 신자는 선으로서 악을 이기도록 노력해야 한다(롬12:21)는 규칙을 따랐어야 옳았습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하늘로부터 달리 명령을 하지 않으셨다면 야곱 자신이 이런 순전성(純全性)을 개발했어야 했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기사에는 나중이 처음으로 되는 일(hysteron proteron)이 있습니다. 모세는 사건을 먼저 기술하고 난 뒤 야곱이 하나님 명령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 추가하기 때문입니다. 유해하고 기만적인 사람들을 대항하는데 그들과 똑같은 오류를 이용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을 옹호하시는 분이시라고 주장할 권리가 없습니다.
야곱이 자기를 파렴치하게 기만했던 라반에게 교묘한 속임수를 마음껏 구사한 것은 제 스스로의 뜻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방도를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정당한 범위 안에서 자제하였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야곱이 어디서 이런 방법을 배웠는지에 대해 논란을 벌이는데 우리 판단으로는 그런 일은 소용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일부 사람은 야곱이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자기 부친이나 그 윗대 조부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서 배웠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마 갑작스럽게 문제에 대해서 하늘 하나님께로부터 교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그 방법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이 기만 행위 제안자가 하나님이라는데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종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뻗치실 때 그가 기만술을 안출해 낸다고 하는 것은 불합리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가 억울한 피해를 입을 때 하나님께서 복수자로 개입하는 것보다 더 적당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그분의 공의에 일치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행동 방법을 지시하는 일은 우리 권한에 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라반이 부당하게 소유한 것을 그대로 묵인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 년이 지나자 자기 복을 라반에게서는 거두어 들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 야곱에게 자기 복을 옮기셨습니다. 만일 땅에 속한 재판관이 도둑질한 자에게 두 배나 네 배를 상환하라고 판결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불평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해서 우리는 죽어 없어질 인간보다 하나님께 양보를 더 적게 하는가?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사용하실 능력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야곱이 지금까지 해왔던 수고와 근면에다 자기 은혜를 결부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기만당해 왔던 품삯을 공공연하게 야곱에게 되돌려 주려는 의도입니다.
라반은 이제까지 하늘을 향하여 또 땅에 있는 자기 이웃에 대하여 눈이 감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서 피와 땀을 예사롭게 착취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뜨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체 조성에 대해서는 모체가 바라보는 대상물이 태아의 형태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야곱은 세 가지 일을 행합니다.
첫째, 그는 나뭇가지에서 껍질을 벗겨 냈습니다. 이것은 껍질을 몇 군데 칼로 째서 흰 부분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얼룩덜룩한 색깔이 생성되었습니다.
둘째. 그는 암놈과 수놈이 모이는 시기를 택했습니다.
셋째. 그는 그 가지들을 개천가에 두었습니다.
모세가 튼튼한 자라고 말하는 것은 봄철에 태어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약한 자라는 것은 가을에 태어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본문 40-42절은
“(40)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41)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42)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입니다.
야곱은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 한하여 그 “양떼의 눈앞에” 무늬있는 가지를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아롱진 양은 모두 “실한 양”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야곱은 세 가지 나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 의 ‘푸른 가지’에 ‘흰무늬’가 생기도록 껍질을 벗겨서 그것을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놓고 양으로 하여금 새끼 밸 때에 그것을 보게 하므로 아롱진 새끼를 낳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많이 빼앗기고 억울함을 당한 자로서 취한 계획적인 정당 방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방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질적으로 축복하신 것도 사실입니다(31:8-13, 42).
너무도 여러 차례 라반에게 속아 온 야곱은(31:7, 41) 그 방위책으로 저런 꾀를 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야곱의 그와 같은 행동을 이삭의 관대한 처사처럼 높이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삭과 같이 너그러운 양보심으로 행할 때에 도리어 더 큰 축복을 받습니다(26:12-22).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참으로 주시며 받아 누리기 원하시는 신령한 복까지 부가해서 주십니다. 물론 야곱이 수행한 이런 방식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이 그에게 복이 되게 하신 분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만은 명심해야겠습니다.
3. 본문 43절은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 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입니다.
모세가 이 기사를 추가한 목적은 야곱이 기적에 의하지 않고는 이처럼 급하게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부어진 재물이 얼마나 풍요한지는 나중에 읽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 그는 완전히 적수공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거의 무로부터 그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는 웬만한 재산자가 이삼십년 만에 모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재산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보통 방법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 기사는 터무니없는 전설로 생각하는 자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 모세는 야곱이 비상한 방법에 의해 부유해졌다고 말함으로서 비판을 막습니다. 야곱이 크게 부하여진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요, 그 자체이었습니다(3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