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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이미 <콰이강의 다리>로 작품성과 흥행면에서 재미를 톡톡히 본 제작자 샘 스피겔과 데이비드 린 감독이 다시 한 번 의기투합하여 만든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다. T. E. 로렌스의 자서전 <지혜의 일곱 기둥>을 바탕으로 <사계절의 사나이> <닥터 지바고>의 각본으로 유명한 로버트 볼트가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중동지역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과 여기에 휘말린 아름다운 몽상가인 로렌스라는 한 개인의 삶을 장쾌한 화면 속에 담아내면서 '생각하는 인간 서사시'라고 평가를 받았다. 통상적으로 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과는 달리 이 영화는 주인공 로렌스를 일방적으로 영웅화하지 않는다. 비록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만 목 타게 바라던 아랍권의 독립이 실패로 끝나는 과정에서 정신 분열 단계에까지 이르는 로렌스의 복잡한 심리를 깊이 있게 파헤치고 있다.
이 영화의 상영시간에 대부분 등장하는 것은 광활한 사막의 모래바람과 뜨거운 태양, 그리고 그곳에서 거주하는 베두인들이다. 요즘 같이 디지털 시대의 화려한 편집이 난무하는 영화들도 발끝도 따라오지 못할 거대한 장관을 연출했다. 영상으로 펼쳐진 방대한 사막의 풍광은 숨이 막히게 아름답다. 그야말로 관객들 스스로 사방이 모래로 덮인 사막의 여정 길에 함께 동참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다. 장장 2년간 요르단에서 진행된 이 사막 촬영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라이프》지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지금까지 만들어진 영화 중 가장 공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총 제작 기간이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된 작품이었다. 오로지 촬영 기간만 3년이 훌쩍 넘었으며 수천 마리의 낙타가 동원되는 등 투입된 물량도 어마어마했다. 신인급인 피터 오툴, 오마 샤리프가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1963년 제35회 아카데미에서 7개 부문(최우수작품상·감독상·남우조연상·촬영상·편집상·음악상·음향효과상)을 수상했다. 이전에 <콰이강의 다리>에서 메가폰을 잡은 데이비드 린은 이 영화 이후 <닥터 지바고> <라이언의 딸> <인도로 가는 길> 등을 연출하며 완전히 대작 전문 감독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영화는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를 비롯한 수많은 거장 감독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특히 스필버그와 역시 이 영화의 열광적인 팬인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나중에 함께 이 작품을 원작의 길이(216분)로 복원하는 방대한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휩쓸어가는 듯한 멋진 주제곡도 이 영화를 명작으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프란시스 레이·미셸 르그랑과 함께 프랑스 영화 음악 3대 거장으로 불리는 모리스 자르가 음악을 맡았다. 린과 명콤비였던 자르는 이 영화 이후에도 <닥터 지바고> <라이언의 딸> <인도로 가는 길>에서 음악을 담당했다.
이밖에 <위트니스> <죽은 시인의 사회> <사랑과 영혼>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등 200여 편이 넘는 작품에서 음악을 담당했다. 자르는 이 영화에서 광활한 아라비아 사막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대서사시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장쾌한 음악으로 어루만지며 생애 최초로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7개 부분에 걸쳐 상을 받았지만 남우주연상 후보였던 피터 오툴은 아쉽게도 받지 못했다. 그의 이 탈락은 이후 8회에 걸쳐 후보에 오르지만 일생동안 끝내 수상을 못하는 불운(?)의 전주곡이기도 했다. 그해에 남우주연상은 <앵무새 죽이기, 일명 알라바마에서 생긴 일>의 그레고리 펙에게 돌아갔다.
처음에 오툴이 영화의 주역을 맡는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다.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 영화의 주연이 알려지지 않는 무명 배우에게 돌아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실 로렌스란 인물은 연기하기가 만만치 않은 복잡한 내면을 지닌 캐릭터이다. 그러나 오툴은 놀라운 연기력으로 로렌스 역할을 100% 소화해 내었다.
오툴이 캐스팅되기까지 말론 브랜도나 앤서니 홉킨스, 알랭 들롱 등 여러 배우들이 로렌스 역으로 물망에 올랐다. 제작자 스피겔은 오툴의 캐스팅을 극구 반대하면서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밀었다. 그러나 클리프트의 심각한 알코올 중독 문제가 거론되면서 린 감독이 적극 추천한 오툴이 발탁되었다는 후문이다.
II. 아카데미상 최다 수상 실패, 피터 오툴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명배우 피터 오툴은 1932년 출판업자 아버지와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아일랜드인으로 태어났다. 이후 영국으로 가족이 옮겨가서 어린 시절을 리즈에서 보내게 된다. 아버지가 인쇄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 했던 그의 어렸을 때 꿈은 저널리스트이었다. 《요크셔 이브닝 뉴스》라는 신문사의 기자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열일곱 살 때 연기자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후 왕립 연극 아카데미에 입학,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1955년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출연,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연극계에 데뷔하게 되었고, 1960년에 영화 <납치>에 첫 출연했다. 이때 데이비드 린 감독의 눈에 띄면서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것이 바로 <아라비아의 로렌스>였다. “하루 밤 자고 깨어나 보니 스타가 되어 있더라.”라는 말이 바로 오툴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빼빼마른 체격에 나르시즘에 빠져 새하얀 아랍 의상을 걸치고 낙타에 걸터앉아 아랍병사들을 이끌고 사막을 질주하는 그의 연기에 세계 영화계는 화들짝 놀랐다.
한때 아랍의 스타가 되었다가 배신당하고 실의에 고통 받는 한 인간의 모습을 절절하게 보여준 그의 연기는 최고였다. 모두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들 했지만 <앵무새 죽이기>의 주연을 맡았던 그레고리 펙에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이후 아카데미상은 평생을 손에 잡힐 듯 말듯하면서 그로부터 멀어져갔다.
사진, <트로이>에서 프리아모스 왕으로 나오는 오툴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음한 그는 이후 오드리 헵번과 공연한 <백만 달러의 사랑>을 비롯해서 <베켓> <겨울의 라이온> <굿바이 미스터 칩스> <바르샤바의 밤> 등에 출연했다. 그는 <맨 오브 라만차> 돈키오테 역이나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로렌스처럼 광기어린 역할도 소화했으나 주로 왕이나 귀족 등 품격 있는 역할을 맡는 등 폭넓은 연기로 주목을 받았다. <마지막 황제>에서 청나라 황제 푸이의 영국인 사부(師父)인 레지널드 존스턴 역을 맡기도 했고 2004년에는 <트로이>에서 프리아모스 왕으로 출연,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비통함을 생생한 연기로 보여주며 큰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한때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기도 했고,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그는 말도 못할 음주가로 유명했다. 배우 마이클 케인과 리처드 해리스에 의하면 그는 영국의 연극계에서 알아주는 술꾼이었다고 한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찍을 때에는 오마 샤리프와 술에 쩔어 살았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결국은 1975년 건강 때문에 술을 끊었다.
오툴은 1962년 출세작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처음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후보로 지명된 이래 2006년 <비너스>까지 여덟 번이나 추천을 받았으나 끝내 수상에는 실패했다. 그는 수상에 8번 실패하고 난 뒤 2003년 공로상을 수상하면서 “세상에! 주인공은 못 되고 늘 들러리만 섰네요.”라며 진한 아쉬움을 표했다고 한다.
사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오툴
당시 71세였던 오툴은 이 상을 받기 전 “그 멋진 녀석(남우주연상)을 정정당당히 따낼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 활동 중이니 80세가 될 때까지만 공로상을 미뤄 달라.”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대한 미련을 표시했다. 이는 사실상 수상을 거절하는 의사였으나 주최 측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상을 받았다.
오툴이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한 것은 ‘아카데미의 큰 실수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오툴에게는 ‘아카데미상 최다 수상 실패 배우’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으나 네 차례의 골든글로브상과 한 차례의 에미상을 받았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영원히 기억에 남을 위대한 배우 오툴은 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런던에 있는 웰링턴 병원에서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III.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생애
로렌스는 1888년 8월 16일 웨일스의 작은 마을 트리머독에서 태어났다. 로렌스는 어린 시절부터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했다. 이 기질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원래 이름은 토마스 로버트 채프먼 경이었다. 그는 원래 아일랜드의 웨스트미트에 본부인과 네 딸을 둔 가장이었다. 그런데 그만 하녀 사라 메이든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사랑과 가정을 동시에 지킬 수도 있었으련만, 그는 가정과 나라, 이름까지도 팽개치고 사라와 함께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다. 결국 바다 건너 웨일스의 트리머독에 새 보금자리를 꾸렸다.
새로운 둥지에서 그는 성을 로렌스로 바꾸고 5형제를 낳았다. 토마스는 둘째였다. 아버지가 본부인에게 이혼을 요청했으나 본부인이 딱 잘라 거절하는 바람에 로렌스 형제는 법적으로 사생아가 되었다. 귀족신분이면서 사생아라는 불명예는 로렌스의 일생에 늘 어두운 그림자가 되었다. 그래선지 그는 음습한 웨일즈보다는 태양이 작열하는 아랍의 광활한 사막을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사냥이나 낚시·요트·승마 등 야외 스포츠광이었고 어머니는 캘빈교도로 지독한 금욕주의자였다.
로렌스는 몽상가인 아버지와 금욕적인 어머니를 반반씩 닮았다. 그는 일생동안 술과 담배는 일체 가까이하지 않았고, 여자는 더더욱 멀리했다. 로렌스는 말 타는 것 빼고는 아버지의 귀족적인 취미를 거의 물려받지 않았다. 로렌스는 어릴 때부터 비정상적일 정도로 자기 단련에 열중했다. 로렌스는 철이 들 무렵부터 굶기를 밥 먹듯 했다. 먹을 걸 안 먹고 물을 안 마시고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극한에 몰아넣으면서 시험해보는 괴짜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서구인으로는 작은 편인 키가 166cm에 불과 했다.
운동신경이 뛰어났음에도 그는 여럿이 모여 하는 경기를 멀리했다. 인기 스포츠인 축구나 럭비 혹은 크리켓 따위는 구경조차 하지 않았다. 규칙이나 약속에 얽매이는 것,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가는 걸 질색을 했다. 이는 속박 받는 것을 질색하는 그의 성벽 때문이었다. 또한 사람들과의 신체적 접촉도 극도로 싫어했다. 상대방이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면 움찔하면서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등 뒤로 숨기곤 했다. 또한 섹스를 혐오해서 결혼은 물론 여자와 교제한 기록은 아예 없다. 동성애적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어쨌든 로렌스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사회성이 풍부한 원만한 타입은 아니었고, 홀로 고독을 즐기며 사색을 즐기는 전형적인 외로운 몽상가의 모습을 보였다. 방학이 되면 카메라를 들고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영국 각지는 물론 바다건너 프랑스에도 다녀왔다. 주로 옛 교회와 성터를 답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중세의 고적이라는 곳은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였다. 역사 지식에는 발군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고고학 탐구에 매료되어 있었던 그는 옥스퍼드 대학의 사학과에 진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다. 이후 첩보원 신분으로 유프라테스 강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대영박물관 원정대의 일원으로 특파되었다. 1914년까지 메소포타미아·튀르키예·그리스·이집트 등지를 조사하며 다녔다. 이 기간 동안 로렌스는 아랍인들의 문화 및 언어를 배웠다. 그는 원래 이런 수순을 밟으면서 고고학자가 될 꿈을 키우고 있었다.
대학 시절 만난 옥스퍼드 대학의 박물관장 데이비드 호가스는 로렌스를 중동지역으로 이끈 은사였다. 호가스는 로렌스에게 아랍어를 배울 것을 권했고, 그로 인해 로렌스의 아라비아에 대한 관심도가 부쩍 증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옥스퍼드 대학은 대영제국의 중동 정책 산실이었고 호가드는 중동전략 책임자였다.
로렌스의 아라비아와의 직접적인 인연은 1909년 대학에서의 마지막 여름방학 시절이었다. 졸업 논문을 완성할 겸 메소포타미아에서 진행 중이던 고대 히타이트 문명의 발굴 사업을 견학하기 위해 아라비아 여행을 추진했다. 스승인 호가스는 여름에는 여행하기 좋지 않다며 반대했지만, 로렌스는 휴대품이라고는 카메라와 권총, 칫솔만 달랑 들고는 마치 이웃 마을에 놀러 가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여정은 험난했다. 생사의 기로에 여러 번 마주치는 등 고생은 막심했지만 극기주의자인 그로써는 충분히 감내할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훗날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싹이 보이는 대목이다.
대학 졸업 후 로렌스는 시리아·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그리스·이집트 등을 홀로 싸다녔다. 어차피 혼자 생활하는 것을 즐겼던 그였기에 여행의 고독이, 특히 사막의 고독이 그에게는 오히려 오래 입은 옷처럼 편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로렌스는 정보 장교 신분으로 카이로에 있는 아랍 부서로 배치되었다. 주로 중동지역 지도제작에 참여했다.
1915년이 되면서 아랍 민족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여 오스만 터키에 대한 아랍진영의 반란의 기미가 솔솔 풍기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은 사우디 헤자즈 지역의 태수였던 샤리프(아랍의 지도자) 후세인에게 반란여부를 타진하고 있었다. 후세인은 반란을 일으키는 대신 헤자즈·시리아·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포함한 아랍영토에 대해 영국이 독립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사진, 영화에서
10월이 되도록 영국이 꿈지럭거리면서 회답이 없자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 편에 붙어버리겠다고 공갈을 쳤다. 그렇지 않아도 갈리폴리 전투에서 똥줄이 타고 있던 영국은 결국 헨리 맥마흔 경을 통해 부랴부랴 후세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한다. 이에 따라 정보장교 신분인 로렌스는 1916년에 아라비아 지역으로 파견되어 본격적으로 아랍 반란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영국군 수뇌부는 아랍어도 능통하고 아랍문화에 빠삭한 로렌스에게 오스만 터키에 대항할 대표 아랍인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 대상자가 바로 메카의 대종주(大宗主)이자 헤자즈의 태수 후세인의 셋째 아들인 파이잘 왕자였다. 이후 파이잘 왕자와 로렌스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다. 파이잘과 제휴하여 스스로 아라비아인으로 분장하고는 사막의 유목민인 베두인족의 유격대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1917년 로렌스는 이 유격대를 이끌고 홍해 근처 요충지인 아카바 공략에 나선다. 로렌스가 이끄는 유격대는 튀르키예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공격을 가하기로 했다. 그것은 바다로부터가 아닌 사막으로부터의 공격이었다. 2개월 동안 열사(熱砂)의 네퓨드 사막을 피 말리는 행군 끝에 1917년 7월 6일 홍해의 북쪽 끝에 있는 아카바를 점령한다. 이후에도 철도와 교량파괴 등 파상적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해나갔다. 1918년 10월 영국의 앨런비 장군의 부대와 협동 작전을 펼치면서 마침내 중동의 거점도시인 다마스쿠스를 점령할 수 있었다. 전쟁은 끝났다. 로렌스가 약속했던 아랍의 독립이 목전에 다가온 것이다.
사진, 영화에서
하지만 약속했던 아랍 민족의 독립을 논의할 시점이 다가오자 영국과 프랑스는 그동안 감추고 있던 중동의 분할 통치 음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들은 1916년 *사이크스-피코 조약을 통해 아랍영토분할을 비밀리에 체결한 바 있었다. 아랍인과 로렌스의 승리는 아랍의 독립과 해방이 아닌 제국주의 국가들인 영국과 프랑스를 위한 승리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로렌스는 본국에 항의하고 아랍 민족에게도 단결을 호소해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 사이크스 피코 협정
1916년 5월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의 조르주 피코 사이에 1차 대전이 끝난 후 오스만 터키가 지배하던 중동지역의 분할을 비밀리에 맺은 협정을 말한다. 프랑스는 시리아·레바논을, 영국은 이라크·요르단을 통치하고, 러시아에게도 터키의 동부지방을 주며, 팔레스타인은 공동관리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아랍민족의 지도자 후세인에게 독립 약속을 한 뒤였다. 이 협정은 이중외교·비밀외교라 하여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아랍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로렌스의 인생과 꿈은 종전과 함께 무너져버렸다. 제국주의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소수 민족의 독립과 해방, 평화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상적인 결말을 꿈꾸었던 로렌스는 깊은 환멸을 느꼈다. 그는 국왕 조지 5세로부터의 훈장도 거부했다. 자신은 아랍인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불어넣었다며 아랍인들의 독립전쟁에서의 자기 역할은 자신에게나 영국에게나 결국은 불명예스러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아랍의 독립 운동은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 지역에 대한 식민지 지배로 이어지면서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으나 로렌스는 실의와 좌절의 나락에 빠져버렸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가서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군대에 입대한다. 군대로 피신하고 싶다는 그의 희망은 정부도 들어주었다. 로렌스는 1935년 2월 말까지 10년의 병역 만기를 채우고 제대했다.
사진, 영화에서
이제 그를 간섭하는 일체의 요소는 없어졌다. 새로운 이름으로 개명한 로렌스는 마음껏 은둔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제대 후 그는 영국 도싯 주의 작은 마을 웨어햄에 있는 클라우즈 힐의 오두막집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회고록인 <지혜의 일곱 기둥>을 썼다. 생각해보면 지나온 세월은 꿈과도 같은 날들이었다. 그는 오토바이의 스피드를 즐기면서 고독을 만끽했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로렌스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1935년 5월 12일이었다. 친구를 초대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전보를 치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농촌의 한적한 길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데, 앞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소년들이 보였다. 그들을 피해 급히 핸들을 꺾는 순간 오토바이는 곤두박질치고 오토바이로부터 분리된 로렌스의 몸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나동그라졌다. 의식을 잃은 그는 이튿날 육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이 20세기의 괴짜 영웅은 5월 19일, 이승을 하직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45세. 그의 유해는 5월 21일 모턴 교회에 매장되었다.
사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로렌스
“인간은 누구나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밤에 꿈을 꾸는 사람은 밝은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그 꿈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반면에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몹시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눈을 활짝 뜬 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행동한다. 그렇다. 나는 낮에 꿈을 꾸었다.”
T. E. 로렌스의 저서 <지혜의 일곱 기둥> 머리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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