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지난 음력 팔월 한 가위를 막 지난 달이 휘영철 밝은 날 밤에 쓴 글입니다.
저녁을 먹고, 들른 인근의 강 가,
새로 생긴 테이크 아웃 찻집에서 노년의 그를 보았다.
이제 여든 가까운 나이를 가졌을 그.
곱게 늙어 가는, 그러나 일흔은 족히 넘었을 여인과 마주보고 앉아 조용조용,
마치 눈길로 서로를 다정하게 쓰다듬듯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들은 모두 산뜻한 등산복 차림이다.
유명 브랜드의 로고가 크게 박힌,
그리고 아울렛 매장에서 6-70%의 바겐세일로 산 것이 틀림 없을, 그래서 유행을 약간 지난 디자인.
커피가 나왔다고, 알림기계가 요동을 하자 그들을 몰래 훔쳐 보던 나는
자지러지듯 놀라서 벌떡 일어선다.
주문한 커피를 가지러 가면서 그와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다른 곳을 쳐다보며 걷는다.
어쩔 수 없이 그의 테이블 곁을 살금살금 지나는데 그가 팔꿈치로 내 허리를 툭 친다.
-야, 임마. 오랜만에 만났으면 아는 척이라도 하자.
너도 이제 정년이 다 되었지?
-아, 오빠. 오랜만이에요.
저는 8월 말, 정년퇴직 했어요. 지금 커피 나와서요, 이따가......
그 <이따가>의 시간에 난 그의 테이블로 내 커피를 들고 간다.
선배는 재혼한 지 5년쯤 되었단다.
선배가 정년 퇴직하신 이후로 모임에서 몇 번 만나긴 했지만
그나마 소식이 끊긴 지 10년 가까이 흘렀으니 소식을 알 리 없지.
인터넷 카페 등산동호회에서 만난 분이란다.
여성분의 따님이 부산의 초등교사이기에 외손주를 봐주어야 하므로
주말부부가 되어 버린 두 사람은 주말의 시간이 더욱 아쉽고, 소중하단다.
외손주를 봐 주어야.......
문득 <메달> 관련 우스갯소리가 기억나서 쿡 웃음을 터뜨린다.
선배가 아들만 있는 여인과 재혼했다면 주말부부의 애틋한 사연은 없었을 텐데......
오랜 과거엔 아들 둘 나으면 금메달이었고 딸 둘은 몽메달(목매달)이었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딸 둘은 금메달, 아들 둘은 몽메달로 변했다지.
아들 낳아 처가에 빼앗겼으므로......
그런데 또 세월이 흐르자, 요즘은 아들 둘이 <돌아온 금메달>이 되었단다.
아들 낳아 키워만 놓으면 사돈이 내 아들 관리하면서 손주까지 키워줘.
그 손주들이 자라면 어디 가냐?
내 가문의 든든한 기둥일 뿐, 사돈집 기둥이 될 리 없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 아닌가?
사돈이 내 가문 기둥들 쌩고생하면서 키울 동안 난 룰루랄라 해외 여행 다니고, 놀러 다니니
어찌 아들을 다시 <금메달>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내가 삼십 대였을 때, 난 사십대의 여성은 여자가 아닌,
그냥 아줌마라는 제 3의 성별인 줄 알았다.
내가 사십 대가 되었을 때, 난 사십 대까지만 여자인 줄 알았다.
내가 오십 대가 되었을 때, 오십 대까지만 여자인 줄 알았다.
내가 육십 대가 되었을 때, 육십 대도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설혹 내가 칠십대가 된다고 해도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
어캐 칠십대가 여자냐구, 노파일 뿐이지.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칠십대도 여자일 수 있구나.
그녀의 곱게 늙은 모습과 눈가 잔잔한 웃음을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싱글 남자분들이 재혼을 해도 선배만은 혼자 살 줄 알았는데......의외예요.
나는 이 말을 삼킨다.
그랬다.
나는 세상의 모든 홀아비들이 재혼을 해도 선배만은 혼자 살 거라고 생각했었다.
다행이다.
홀로 남겨진 비둘기가 짝을 찾아서.......
나는 그들을 축복하고 또 축복하면서 일어선다.
15년 전.
딱 오늘처럼 달 밝은...... 여름의
딱 오늘처럼 새로 생긴 강가의 찻집.
딱 오늘처럼 저녁을 먹고 차나 마시자고 들렀다가 그 선배를 만난 적 있다.
딱 오늘처럼 말이다.
아래의 글은 15년 전의 딱 오늘 같았던 날 적었던 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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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강물만큼 짙푸르게 흘렀다.
동료들과 이른 저녁을 먹고, 차나 한 잔 마시자고 들렀던 강 가의 찻집에서
그 선배를 만났다.
좁디 좁은 이 도시에 근무하는 우리 일행이나 선배의 일행은 모두 선후배 사이거나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기에 자연스럽게 합석이 되었다.
마치 두 일행들이 함께 저녁을 먹고, 찻집을 찾기나 한 듯이.
선배는 보름 전쯤의 동문 모임에서 만났을 때보다 한참 늙어 있었다.
사람이 그렇게 빠르게 늙을 수도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이따금 선배를 만날 때마다 난 생각하곤 한다.
암으로 아내를 잃은 지 3년이 넘었을까?
혼자 남겨진 선배는 빠른 속도로 늙어간다.
-** 차를 얻어 탈까?
선배의 말에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술을 유난히 좋아하시는 선배다.
선배네 집과 우리 집이 같은 방향이었기에.
강 건너 마을에는 이미 불이 밝혀져 있다.
-한 겨울에도 강 건너 마을에 돋아난 불빛을 보면 마음이 따스해지더라.
**야, 차좀 세워주라. 저 불빛을 보고 싶다.
남자들은 늙어갈수록 목소리도 쓸쓸하게 비어가는 모양이다.
슬픔으로도 채울 수 없는 텅 빈 목소리.
혼자 남겨진 계절엔 여름이라도 추웠던 것일까?
그래서 따스한 불빛을 그리워한 겔까?
강 가에 차를 세운다.
칠월 백중을 이틀 앞 둔 달이 마알갛다.
강물 흐르는 소리일까?
시퍼렇게 물 오른 갈대들이 낮은 바람에 흔들리며 살을 섞는 소리일까?
여름새들이 집을 찾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 시각.
눅눅한 강물의 숨소리.
난 안델센의 달님이 들려 준 "그림 없는 그림책"을 무척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첫 번째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살아가다가 간혹 호젓한 강 언덕에 서 있게 되는 날이라도 있다면
그리고 그 시각이 오늘과 같은 밤이라면
오늘처럼 달이라도 있는 밤이라면 더욱
난 늘 그림 없는 그림책의 첫번째 이야기를 떠올린다.
인도의 어느 강이었을까?
한 처녀가 밤 강물 위에 등불을 떠내려 보내는 이야기이다.
등불이 꺼지지 않고 강물을 따라 떠내려 가면
멀리 가 있는 사람이 무사하다는 이야기가 그 종족에겐 전해오는 모양이다.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은 멀리 떠나 있고
그의 안위를 염려하면서 처녀아이는 등불을 띄운다.
여자는 가슴을 졸이면서 등불이 꺼지지 않기를 염원한다.
그녀의 등불은 강물을 따라 멀리멀리 떠내려 가다가
아득하게 멀어져 간다.
여자의 남자는 무사할 것이다.
안도와 감사와 행복에 넘치는 그녀의 모습을 달님도 행복해 하면서 지켜본다.
나도 멀리 아슴하게 멀어지는 등불을 지켜보듯 눈을 가늘게 뜬다.
이 세상에서 약속만큼 설레이는 희망도 드물 것이다.
약속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그리움이다.
기다림은 만남을 약속하는 희망과 같은 그리움이다.
등불을 띄워보낸 여자의 남자는 어느 날엔가 강을 거슬러서 돌아올 것이다.
여름 아침의 텃밭에 잘 자란 채소처럼 푸르고 싱싱한 약속이 되어서......
-아, 따스하다.
저 불빛 아래서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
니는 무엇을 할 것 같노?
기다림과 소망을 간직한 인도 여인의 등불을 생각하고 있던 난
선배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다.
-저녁 먹고 텔레비전 보겠지, 뭐.
난 건성으로 대답한다.
내가 생각해도 참 멋 없는 대답이다.
-아, 참 따스하다. 저 불빛들.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선배의 목소리가 눅눅하게 젖어있다.
그랬다.
선배에겐 자녀도 없었다.
자식 없으면 어때. 우리 두 사람 비둘기처럼 살면 되지.
선배는 배태하지 못한 아내를 탓하지 않았다.
이제 홀로 남겨진 비둘기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기다림마저 지닐 수 없는 그리움을 이미 알고 있는 나는
어떤 말로도 선배를 위로할 수 없다.
밤이면 가족들이 불빛 아래로 모여든다는
그 평범한 일상마저
온 가슴으로 그리워하고 있는,
그리고 그 그리움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늙어버린 한 남자.
그의 목숨 끝에 도사린 울음을 알고 있는 까닭에.
술 한 잔 더 마시고 들어가겠다는 선배를
억지로 태워서 그의 아파트 앞에서 내려주었지만
아파트로 들어가지 않고 휘청거리면서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백미러로 안타깝게 바라본다.
술을 들이부어도 채워지지 않을 그의 야윈 목숨.
기다림의 등불 하나.
강물 위에 띄워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약속같은 그리움 한 조각.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너를 갈원하는 나의 그리움이 형벌이라고 해도,
비록 초라하고 남루한 불빛이라고 해도
내가 띄워 보낸 등불을 숨죽여 지켜볼 수 있음은 분명 축복이리라.
세상에는 그마저 허락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첫댓글 거의작가수준이네요. 이걸보더라도우리일상의사소함도관심을가지고관찰해보면가슴저미는멋진서정이나올수있다는걸알고한참머물다갑니다 나역시바다뷰카페에서멍때리며앉아있던시간이많기에 .....ㅋ
한바다님, 안녕하세요?
칭찬하여 주시어 감사합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멍 때리며 앉아 있는 신사분.
그 고즈넉한 초상을 떠올려 봅니다.
행복한 밤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 쉼터에 글 잘 쓰는 분들이 최근에 부쩍 늘었어요. 반깁니다.
여기서 재미지게 놀다가,
눈길로 얘기 나눌 멋진 분 만나, 강가 까페에서 차 한잔 하시길~
반길님, 그래요.
반길님의 댓글을 읽으면서
여기서 재미지게 놀다가
혹여 인연 닿는다면
멋진 분과 함께 강 가 카페에서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날을
꿈꾸어 봅니다.
행복한 밤 보내십시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정스테파노님, 안녕하세요?
이곳에 올라온 글을 읽으면서
저 또한 매번 감탄합니다.
행복한 밤 보내시기 바랍니다.
기다림의 등불하나
💝
켜놓고 갑니다
등불 하나 밝혀진 호젓한 창.
참 따스해집니다.
산중호걸님께서 밝혀둔 등불이 누군가의 밤길을
위안해 줄 것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리마님.
어쩜 이리도 댓글을 원문글이 무색하도록 잘 쓰시는지요.
정성이 가득 담긴 댓글.
글 올린 보람을 넘어 행복을 느끼게 합니다.
멋진 댓글을 읽으면서 하루를 마감하는 기분.
저 또한 참 좋습니다.
리마님의 오늘밤이 햇솜 이불처럼 보송하길 바랍니다.
언니.
기다림의 등불~~
그 단어조차도 설레이네요.^^
이 아침에 댓글을 달고,몇몇분의 글을 읽고,
특히 언니의 선물같은 글을 읽고는
마음이 너무 행복하네요^^
삶의 긴 기다림과 어떤 그리움,
그리고
필연적인 만남같은 .......
그래서 삶은 살아봐야 하는 것이고,
기다림과 긴 인내로 지켜야 하는 것이겟지요.
가을빛이 아름다운 이 아침.
모두에게 행복함이 전해졌으면 하는
바램을 적습니다^^
우리 하얀꽃님.
선물 같은 글.
아...... 하얀꽃님은 글 한 편을 보는 눈길도 이리도
따스한 감사로 가득하구나, 생각합니다.
그래요.
삶은 살아봐야 무언가를 말할 수 있겠지요.
하얀꽃님의 어여쁜 마음은
이미 우리 카페 모든 이들을 충분히 행복하게 만들었을 겝니다.
하얀첼로님 반갑습니다~^^
작가 이상으로 글을 잘
쓰십니다~
잼있는 글 기대하겠습니다~~
초이님, 안녕하세요?
저도 반갑습니다.
과분한 칭찬 민망하지만 따뜻하게 기억하겠습니다.
행복한 밤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얀첼로님 시간되시면 부경방 모임에 참석하시라고 쪽지를 보냈는데 아직 읽지도 않아서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부경방 모임 공지글도 읽어보시고 결정하여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지나는 길에 우연히 들렸다가 모처럼 글다운
글을 읽게 되는 행운을 얻고 갑니다.
다이버님.
님의 짧은 댓글이 제겐 과분한 행운처럼 느껴집니다.
앞으로도 실망하지 않으시도록 성심껏 글을 쓰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동미님, 안녕하세요?
그래요.
강 건너의 불빛처럼 따스하면서도
그 불빛을 바라보는.....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고
홀로 남겨진 한 남자의 뒷모습처럼 쓸쓸한......
저 또한 동미님의 댓글을 읽으면서 행복하기 고맙습니다.
즐거운 밤 보내십시오.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요즘 쉼터에 글 잘쓰시는분들이 얼마사이에 여러분에 계셔서
읽을거리가 너무 많아서 시간이 부족할 정도에요.
하얀첼로님 행시방글 읽으면서 글을 너무 잘쓰신다고 했는데 역시 대단하십니다
다음 글들도 기대하겠습니다
어머, 바라밀님.
행시방에서 만난 바라밀님.
안녕하세요?
이곳에서 뵈니 다른 반가움이.....
그런데 바라밀님께서는 더 잘 쓰시던데요.
행시방 글들.
참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