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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명(姜文明)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AC15BB38BA85B1613X0
자 공저(公著)
생년 1613(광해군 5)
졸년 병술(丙戌)【補】(주1) 1646년 (인조 24)
향년 34세
합격연령 21세
본인본관 금천(衿川)
거주지 한성([京])
시대 조선 중기
활동분야 왕족
부 강원기(姜遠期)
관직 : 학생(學生)
[생부(生父)]
성명 : 강석기(姜碩期)[生]
품계 : 자헌대부(資憲大夫)
관직 : 행사헌부대사헌(行司憲府大司憲)
겸직 : 겸 동지경연성균관사(兼同知經筵成均館事)
겸직 :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관련정보]
[진사시]인조(仁祖)11년(1633)계유(癸酉)식년시(式年試)[식년진사]3등(三等) 28위(58/100)
[상세내용]
강문명(姜文明)에 대하여
1613년(광해군 5)~1646년(인조 24). 조선후기 왕족. 자는 공저(公著)이다. 본관은 금천(衿川)이고, 거주지는 한양이다.
부친은 강원기(姜遠期)이고, 생부 자헌대부(資憲大夫) 행사헌부대사헌(行司憲府大司憲) 강석기(姜碩期)와 모친 신씨(申氏)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처부는 이조참판(吏曹參判) 김광현(金光炫)이다. 형은 강문성(姜文星)이고, 동생은 강문두(姜文斗)‧강문벽(姜文璧)‧강문정(姜文井)이며, 여동생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인 강빈(姜嬪)이다.
1633년(인조 11) 식년시 진사 3등 28위로 합격하였다.
1646년(인조 24) 소현세자의 빈인 여동생이 평소 소용조씨(昭容趙氏)를 미워하더니 음식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모함을 받아 사사되었다. 당시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철(李石鐵)등도 연루자로 지목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때 여동생인 세자빈의 장삿날로 정해진 날짜가 불길하다며 형과 함께 지관(地官)인 최남(崔楠)을 찾아가 협박하는 등 오만방자하게 굴었다가 먼 섬으로 유배를 갔다. 이후, 다시 서울로 불려가 고문을 받던 중 매를 맞다가 형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1718년(숙종44) 모친 신씨를 복작시킬 때 강문명(姜文明)도 함께 복관(復官)되었다. 1786년(정조10) 숙종 때 강문명의 묘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던 것을 정조가 해제시켜주어 이때부터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仁祖實錄, 肅宗實錄, 正祖實錄,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은영
2011-10-31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진사시]인조(仁祖)11년(1633)계유(癸酉)식년시(式年試)[식년진사]3등(三等) 28위(58/100)
규106본에는 시험일자가, 규귀본에는 이와함께 무과 장원이 더 나온다. 국도본에는 시험관의 성명만 나와 있고, 장서각본에는 무과 장원 강전(姜戩) 등 29인을 뽑았다고 나온다.
시험일자가 모든 방목에는 11월 18일로 나오는데, 인조실록의 시험일자를 따랐다. 1633년 11월 17일
인조실록에 목행선(睦行善) 등 33인을 뽑았다고 나온다.
이 시험의 문무과 단회방목(單回榜目)은 현존하고 있다.
서두의 ‘일소(一所)’, ‘이소(二所)’의 시험관이 상단과 하단에 각각 기재되어 있고, 이어서 ‘방방(放榜) 10월 초10일’이라 하였다. 방목 말미에는 ‘방중색장(榜中色掌)’ 명단이 있다.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
성명 : 강원기(姜遠期)
관직 : 학생(學生)
[생부]
성명 : 강석기(姜碩期)
품계 : 자헌대부(資憲大夫)
조선시대 정이품(正二品) 동서반(東西班)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정이품의 하계(下階)로서 정헌대부(正憲大夫)보다 아래 자리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로 문무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임금의 4대손까지의 친족)과 의빈(儀賓:임금의 사위)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해당 관직으로는 종친부(宗親府)의 군(君)‧지종정경(知宗正卿), 의정부(議政府)의 좌참찬(左參贊)‧우참찬(右參贊), 충훈부(忠勳府)의 군(君), 의빈부(儀賓府)의 위(尉), 돈령부(敦寧府)‧중추부(中樞府)‧의금부(義禁府)‧경연청(經筵廳)‧성균관(成均館)‧춘추관(春秋館)‧훈련원(訓練院)의 지사(知事),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 규장각(奎章閣)의 제학(提學),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한성부(漢城府)의 판윤(判尹),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좌빈객(左賓客)‧우빈객(右賓客), 수원부(水原府)‧광주부(廣州府)의 유수(留守),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총관(都摠官), 제언사(堤堰司)‧비변사(備邊司)‧선혜청(宣惠廳)‧준천사(濬川司)‧교서관(校書館)‧승문원(承文院)‧봉상시(奉常寺)‧종부시(宗簿寺)‧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사섬시(司贍寺)‧군자감(軍資監)‧장악원(掌樂院)‧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사역원(司譯院)‧훈련원(訓練院)‧선공감(繕工監)‧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사도시(司䆃寺)‧사재감(司宰監)‧전함사(典艦司)‧전연사(典涓司)‧소격서(昭格署)‧종묘서(宗廟署)‧사직서(社稷署)‧경모궁(景慕宮)‧제용감(濟用監)‧평시서(平市署)‧전생서(典牲署)‧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예빈시(禮賓寺)‧전설사(典設司)‧장흥고(長興庫)‧빙고(氷庫)‧장원서(掌苑署)‧사포서(司圃署)‧사축서(司畜署)‧조지서(造紙署)‧혜민서(惠民署)‧도화서(圖畵署)‧활인서(活人署)‧와서(瓦署)‧귀후서(歸厚署)‧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영희전(永禧殿)‧화령전(華寧殿)‧장생전(長生殿)‧훈련도감(訓鍊都監)‧양향청(糧餉廳)‧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제조(提調), 용호영(龍虎營)의 별장(別將), 총리영(總理營)‧수어청(守禦廳)의 사(使) 등이 있었다.
돈령부‧중추부지사를 제외한 지사, 양관대제학, 도총관, 좌우빈객, 제학, 제조, 총리영‧수어청사는 모두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관직 : 행사헌부대사헌(行司憲府大司憲)
조선시대 사헌부의 으뜸 벼슬로 종이품(從二品)이며, 정원은 1원이다. 현실 정무(政務)를 논평하고, 모든 관료를 규찰(糾察)하며 풍속을 바로 잡고, 억울함을 풀며 외람되고 거짓된 것을 금하는 등의 일을 관장한다.
사헌부의 장(長)으로, 그 밑에 있는 집의(執義:從三品) 1원, 장령(掌令:正四品), 지평(持平:正五品) 각 2원, 감찰(監察:正六品) 13원을 감독하고 통솔하였다.
대사헌 이하 집의‧장령‧지평까지의 사헌부 소속의 관원을 통칭 대관(臺官)이라고 하였으며, 또 장령과 지평을 별칭 대장(臺長)이라고 하였으며,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뛰어나 이조(吏曹)에서 대관으로 추천(推薦)된 사람을 남대(南臺)라고 하였다.
모든 대관은 사헌부의 청환직(淸宦職)으로, 문과 급제자중 청렴강직하여 시류에 영합하지않고, 옳다고 믿는 바를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므로, 승문원(承文院), 성균관(成均館), 홍문관(弘文館)등을 거친 젊고 기개가 있는 인재들이 임명되었는데, 그만큼 직무가 막중하기 때문이었다. 이조의 전랑(銓郞)과 함께 전 조선시대의 사족사회(士族社會)의 틀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였다.
사헌부의 직제(職制)는 고려의 관제를 이어오다가 조선시대 초기 사헌‧중승(中丞)‧겸중승(兼中丞)‧시사(侍史)‧잡단(雜端)‧감찰등의 관원을 두었었다.
대사헌은 도헌(都憲), 대헌(大憲)이라고 하였으며, 버금 벼슬인 집의는 1401년(태종1)에 중승을 고쳐 부른 이름이며, 장령은 시사를 고쳐 부른 이름으로, 장헌시사(掌憲侍史)라고 하였으며, 지평은 잡단을 고쳐 부른 이름으로, 지헌잡단(持憲雜端)이라고 하였으며, 감찰은 전중어사(殿中御史)라 하여, 처음에 25원을 두었다가 세조(世祖) 이후에 그 수를 줄여 13원을 두었다.
겸직 : 겸 동지경연성균관사(兼同知經筵成均館事)
겸직 :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안항(鴈行)]
본생가 형(兄) : 강문성(姜文星)[生]
본생가 제(弟) : 강문두(姜文斗)
본생가 제(弟) : 강문벽(姜文璧)
본생가 제(弟) : 강문정(姜文井)[進]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계유 식년 사마 방목(癸酉式年司馬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想白古351.306-B224s-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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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28권, 11년(1633 계유/명숭정(崇禎) 6년) 11월 17일(을사) 1번째기사
과거를 실시하다
식년(式年)의 문·무과 전시(殿試)를 실시하여 문과에는 목행선(睦行善)등 33명을, 무과에는 강진(姜戩)등 28명을 합격시켰다.
○乙巳/設式年文武科殿試, 取文科睦行善等三十三人, 武科姜戩等二十八人。
강전(姜戩) 길백(吉伯) 1600 ~ ? 진주(晉州)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강의(姜嶷) 의연(嶷然) 1604 ~ ? 진주(晉州) 3등(三等) 15위(진사시)
강문명(姜文明)공저(公著) 1613 ~ ? 금천(衿川) 3등(三等) 28위
강전(姜琠) 중사(仲四) 1607 ~ ? 진주(晉州) 1등(一等) 4위 (생원시)
강의(姜嶷) 의연(嶷然) 1604 ~ ? 진주(晉州) 2등(二等) 20위
강홍헌(姜弘憲)헌지(憲之) 1602 ~ ? 진주(晉州) 3등(三等) 22위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청순치(順治) 2년) 5월 16일 정유 5번째기사
세자빈의 동생 강문명이 장사일에 대해 불평하므로 그에게 택일하게 하다
김자점등이 또 아뢰기를,
“신들은 산을 정하고 날을 가리는 것은 곧 막중한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들은 이상 감히 동요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실상은 자상하고 신중하게 하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번거로이 진계한 죄에 빠졌습니다. 삼가 전후의 엄한 분부를 받고서 황공하여 대죄합니다.”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때 술관들의 논의가 모두 영릉 동쪽 홍제동을 제일로 쳤으나, 상이 길이 멀고 폐가 크다하여 다만 효릉의 등성이를 쓰기로 하였는데, 장진한이 물러가서 뒷말을 하므로 세자빈이 그 말을 듣고 홍제동을 쓰자고 청하였지만,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강문명(姜文明)은 세자빈의 동생인데, 그가 최남에게 가서 말하기를,
“장사지낼 날에 자오(子午)가 대충(對冲)되어 원손에게 불리하다.”하니,
최남이 이 말을 김자점등에게 바로 고하였다. 그러자 김자점등은 후일 자기에게 죄가 돌아올까 염려하여 곧바로 빈청에 모여서 다른 산으로 바꾸어 자리 잡기를 청하니, 상이 노하여 그를 책망하였다. 그런데 제조등이 또 날을 다시 가리자고 청하므로 상이 크게 노하여 최남을 불러 신문하니, 최남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고는 상이 하교하기를,
“강문명으로 하여금 날을 가리게 하라.”하니,
김자점등이 황공하여 물러나왔다. 이때 강문명이 궐문 밖에 와있다가 김자점의 가마[轎] 앞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상공(相公)이 나를 살려 주시오.”하니,
듣는 자들이 해괴하게 여겼다. 강씨의 화가 실로 여기에서 싹텄다.
○金自點等又啓曰: “臣等竊以爲, 定山、擇日, 乃莫重之事, 旣聞人言, 不敢不動, 實欲詳愼, 而不自覺其陷於瀆陳之罪。 伏承前後嚴旨, 惶恐待罪。” 答曰: “勿待罪。” 時, 術官之論, 皆以英陵弘濟洞爲第一, 上以爲路遠弊巨, 特用孝陵之岡, 而鎭漢退有後言, 世子嬪聞其言, 請用弘濟洞, 上不許。 姜文明, 世子嬪之弟也。 往見崔楠曰: “葬日字午對沖, 不利於元孫。” 崔楠乃告于金自點等, 自點等恐他日歸罪於己, 乃會于賓廳, 請改卜他山, 上怒責之。 提調等又請改擇日, 上大怒, 招崔楠問之, 楠以實對。 上下敎曰: “使姜文明擇日。” 自點等惶恐而退。 文明來闕門外, 詣自點轎前曰: “相公活我。” 聞者駭之。 姜氏之禍, 萠於此矣。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청순치(順治) 2년) 윤6월 1일(신사) 3번째기사
정원에 소장을 들일 때 청나라의 연호를 썼는지를 자세히 살피라 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청나라의 연호[大年號]를 쓰지않은 소장(疏章)을 감히 들여올 경우에는, 자세히 살피지 못한 과실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하였다.
김광현(金光炫)은 고 상신(相臣) 김상용(金尙容)의 아들이며 전판서 김상헌(金尙憲)의 조카인데, 자기 아버지가 청나라 오랑캐에 의해 죽은 것 때문에 청나라 사람과 서로 접하기를 싫어하여, 벼슬이 제수되어도 흔히 병을 칭탁해서 사양하였다. 그리고 외직(外職)에 있으면서 사용하던 문서(文書)에는 간지(干支)만을 쓰고 숭덕(崇德)2021)·순치(順治)2022)등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상소문이나 차자에도 그렇게 하였으나, 상 또한 그것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현세자가 졸하자, 김광현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형편없이 병을 간호한 이형익(李馨益)등의 죄를 극력 논박하자, 상은 김광현이 세자빈 강씨(姜氏) 집안의 사주를 받고 그러는가 여겨 매우 노하였다. 강빈(姜嬪)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이 곧 김광현의 사위였으므로, 대체로 상이 이 때문에 김광현을 미워하였고, 또 청나라 섬기기를 부끄럽게 여기는 신하들을 항상 미워했기 때문에 이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註2021]숭덕(崇德): 청태종의 연호 1636∼1643.註2022]순치(順治): 청세조의 연호 1644∼1661.
○上下敎于政院曰: “疏章之不書大年號者, 乃敢捧入, 難免不察之失也。” 金光炫, 故相臣尙容之子, 前判書尙憲之從子也。 以其父死於虜, 不欲與淸人相接, 拜官多以疾辭。 其在外職所用文書, 只書六甲, 不用崇德、順治年號, 雖疏箚亦然, 上亦不之詰也。 及昭顯世子卒, 光炫以大司憲, 力論李馨益等侍疾無狀之罪, 上以爲, 姜家所指嗾, 甚怒, 蓋姜嬪之兄文明, 卽光炫之壻也。 上由是惡光炫, 又常惡群臣之恥事淸國者, 故有此敎。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청순치(順治) 2년) 8월 25일(갑진) 3번째기사
대신등을 인견하고 청나라에 쌀 운반하던 중 일어난 사건 등을 논하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청나라에 쌀 운반하는 일이 이미 잘 마무리 되었으리라고 여겼는데, 지금 회자(回咨)를 보건대, 패선(敗船)으로 인해 손실된 쌀을 은(銀)으로 보충하라는 말이 있으니, 후일의 염려가 있을 듯하다. 또 먼저 운반한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에 운반한 것도 패선된 것이 많으니, 어떻게 처리해야겠는가?”하니,
영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다면 신들도 걱정이 됩니다.”하였다.
상이 또 김류에게 이르기를,
“말하는 자들이 모두 강도와 남한산성에 있는 곡식을 가져다가 국가의 경비에 보충할 수 있다고 하나, 그 실제 숫자를 살펴보면 역시 매우 작은 양인데, 지금 그것을 다 가져다 써버릴 경우, 급한 때를 당해서 어찌하겠는가?”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강도와 남한산성의 곡식을 가져다 써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선 목전의 일이 시급해서 여쭌 일이 있었는데, 다행히 윤허해 주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각영(各營)의 방물 값을 모두 감하라고 또 명하셨으니, 백성들의 감격하여 기뻐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고,
호조판서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조복양(趙復陽)의 상소를 보니, 금년의 세두(稅豆)를 전부 감할 것을 청하였는데, 비록 전부를 다 감하지는 못할지언정 그 절반만이라도 감해 준다면 백성들이 기뻐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후원(後苑)에 곡식을 심은 것은 대체로 해의 풍흉(豊凶)을 증험하기 위해서였다. 그 밭의 상황으로 미루어 본다면 금년엔 큰 흉년이 들지는 않을 듯한데, 바깥 사람들이 아주 심한 흉년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째서인가?”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바깥 사람들 말가운데 비록 실상에 지나친 말이 없지는 않으나, 어찌 모두 실상에 지나친 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청나라에서 세폐(歲幣)의 수량을 감해 줌으로 인하여 제감(除減)할 것이 꽤 많으니, 의당 금년에 제감한 수량을 명년으로 이월해서 써야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하면 민폐를 많이 덜게 될 것이다.”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최득남이 종전에 심양을 왕래하면서 죄악을 저지른 것이 많으나, 다만 지금의 범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신문하여 자복을 받은 다음에야 죽일 수 있습니다. 왕법(王法)을 한번 그르쳐 놓으면 뒤폐단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엄하신 성상을 가까이 모시고 어찌 감히 눈앞에서 속이겠습니까. 또 정역(鄭譯)은 성질이 반복무상하고 불측하여 국가의 안위가 모두 이 사람의 희로(喜怒)에 달려 있으니, 그가 만일 보복을 하려고 한다면 우환이 반드시 우리에게 미칠 것입니다.”하고,
대사헌 남이웅(南以雄)이 아뢰기를,
“진실로 정명수가 성을 낼까 두려워서 그를 용서하고 죽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왕법으로 말하자면, 자복을 받기 전에 지레 죽이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하니,
상이 성난 목소리로 꾸짖기를,
“최득남에게 언제 자복을 받는단 말인가? 금부의 관원은 정명수가 두려워서 반드시 감히 엄하게 형신하지 못하고 정명수가 오기만을 기다릴 터인데, 정명수가 와서 죽여서는 안된다고 말한다면 경들이 과연 죽일 수 있겠는가?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양서(兩西) 지방을 호령할 수 없을 것이다.”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이목(李楘)에 대해서는 애당초 창졸간에 그가 나를 속인다고 미리 헤아린 것이 아니고, 일찍이 그의 옳지 못한 점을 보았기 때문에 지난번의 전교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매양 청나라 사신이 올 때면 병을 핑계하여 조반(朝班)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내가 항상 그를 그르게 여겼다. 지난번의 일로 말하자면, 나도 그가 병이 있는 줄은 알고 있으나 다만 병이 과연 중하다면 처음부터 오지 않았어야 하고, 기왕 왔으면 뭇사람의 의논이 결정되기 전에 지레 나가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난번에 경들의 아뢴 말을 보고는 내가 부끄러웠다.”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이목이 거동(擧動)에 참여한 것을 신이 일찍이 보았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여한 것을 언제 보았으며, 몇 번이나 가서 참여하였는가?”하므로,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청나라 황제의 초상 때에 이목이 종이로 모(帽)를 싸서 쓰고와서 참여하여 조신의 반열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를 손으로 가리키며 웃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의 의논은 바로 막중한 일이었다. 옛날 양녕세자(讓寧世子)를 폐할 적에도 황희(黃喜)가 이의(異議)를 주장했다하니, 소견이 다르면 이의를 주장해도 될 것인데, 지레 나가서야 되겠는가?”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이목의 병이 위중하다는 것은 조신들이 다 아는 바인데, 어찌 모두가 이목을 위해 성상을 속이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신의 사이에는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전달하는 것이니, 내 또한 무슨 말인들 다하지 않겠는가. 나의 생각이 이러하므로 특별히 경들을 위해 말하는 것이다.”하니,
이경석·김육이 또한 이목을 위해 신구하는 변론을 매우 자세하게 하므로, 상의 뜻이 조금 풀어졌다. 그러자 김류가 아뢰기를,
“한때의 청론자(淸論者)로 불려진 자들은 매양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가서 참여하려 하지 않았으나, 이목 같은 사람은 본디 그런 자리를 기피하려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심지어 평상시에는 큰소리를 쳐놓고 저쪽에 가서는 자기의 지조를 끝내 지키지 못한 자들도【대체로 이경여·신익성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있으니,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이 실로 하찮게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뭇 신하들에게 묻기를,
“국본(國本)이 이미 정해진 데 대해서 바깥 의논은 어떠한가?”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인정이 모두 기뻐하며 복종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에 인심이 소란하여 평온하지 않다는 말을 한 자가【이경여가 일찍이 이 말을 했었는데, 상이 그를 미워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있었는데, 과연 인심이 소란한 형세가 있는가?”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겉으로는 비록 말하지 않을지라도 속으로는 복종하지않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하니,
뭇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사람들이 기뻐하며 복종하는데,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상의 이와 같은 하교는 매우 상하를 편안히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것에 대해서는 우연히 물은 것이다. 다만 지금 선처(善處)해야 할 일이 있으니, 시험삼아 말하겠다. 저 여러 강씨(姜氏)2071)들이 모두 어리석고 분수를 모르니, 그들을 먼 데로 이주시켜 인심이 진정되기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여러 강씨들이 비록 우매하여 망령되이 행동한 일이 있기는 하나 특별히 드러난 죄악은 없었는데, 그들을 죄인으로 취급한다면 인심이 놀랍게 여길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일이 만일 드러나버리면 사리상 안전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지금 선처를 하려는 것은 실로 심상한 뜻이 아니다.”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무슨 죄를 범한 사실이라도 있습니까?”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지난 상사(喪事) 때의 일로 말하자면 그들의 소행이 매우 어리석고 분수에 넘쳤다. 그런데도 대신까지 그들의 말에 동요되어 심지어는 계사(啓辭)를 올려 의관(醫官)을 죄줄 것을 청하기까지 했는데, 그 계가 정지된 뒤에는 또 그들이 대간을 사주해서 다시 발론케 하였으니, 이것으로 살펴본다면 그 기세가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다.”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저들은 마치 고추부서(孤雛腐鼠)2072)와 같은데, 어떻게 대간을 지휘할 수 있겠으며, 대간 또한 그 누가 그들의 말을 듣고 다시 발론하려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문명(姜文明)은 왜 김광현(金光炫)의 사위가 아니던가?”하고,
【강문명은 김광현의 사위인데, 김광현이 의관을 죄주자는 논의를 다시 제기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의심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대궐 안에 일찍이 운운한 말이 있었는데, 이에 대간의 계사를 보니 그 말과 서로 부합되었다. 대궐 안의 말을 대간이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의심을 한 것이다.”하니,
좌우에서 모두 아뢰기를,
“김광현은 기필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부제학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그때에 신도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그 논의에 참여했었는데, 뭇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갑자기 정지한 것을 그르게 여겼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문명의 사람됨이 무식하고 또 외람되므로, 만일 흉도(凶徒)에게 꼬임을 당하면 작게는 유언비어를 퍼뜨릴 것이고, 크게는 변을 일으킬 것이니, 그때에 가서는 경들이 아무리 후회한들 장차 어찌할 수 있겠는가. 그를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하여 이 전교를 하는 것이다. 강빈(姜嬪) 또한 현철한 사람이 아닌데 그의 형제들이 저렇듯 불량하니, 후일에 혹시라도 염려되는 일이 생긴다면 경들이 의당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의 뜻은 그런 흔단이 생기기 전에 선처를 하려는 것이니, 흔단이 이미 생긴 뒤에는 비록 선처를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토록 상세하시니, 참으로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면 인심이 반드시 불평할 것입니다.”하자,
상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후일의 사변을 비록 미리 헤아려 알 수는 없으나, 지금의 처치에 있어서는 의당 이렇게 하지 않아야 할 듯하니, 대신과 함께 십분 헤아려서 선처하소서.”하고,
이기조가 아뢰기를,
“연소하고 무지한 여러 강씨 무리들이 지난번에 비록 망령되이 행동한 일이 있기는 하나, 저들은 이름 있는 사대부들이 아니고 다만 두서너 포의(布衣)일 뿐이니, 후일 그들이 아무리 불령(不逞)한 일을 하려고 하더라도 그 누가 따르겠습니까. 성상께서 염려하신 저의는 말세에 인심이 착하지 못하여 혹 뜻밖의 환난이라도 있을까 해서 그들을 보전하는 뒷받침으로 삼고자 하시는 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저들이 만일 성상의 하교를 듣는다면 어찌 먼 데로 물러가 엎드려있으면서 남은 생명이나마 연장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하니, 상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김류가 다시 아뢰기를,
“외인들이 천만 뜻밖에 갑자기 이런 일을 들으면 반드시 놀라고 의심할 것입니다. 신은 여기에 실로 다른 뜻은 없고 다만 인심을 진정시켜서 국가를 편안하게 하고자 할 뿐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하니,
상이 뭇 신하들이 자신의 의논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기쁘지 않아 의논을 파하였다.
註2071]강씨(姜氏): 소현세자빈의 친족을 가리킴.註2072]고추부서(孤雛腐鼠) : 외로운 병아리와 썩은 쥐.
○上引見大臣、備局堂上, 謂曰: “淸國運米之事, 謂已停當, 今見回咨, 有敗舡米補銀之說, 似有後慮。 且非獨先運爲然, 後運之敗船亦多, 何以處之?” 領議政金瑬曰: “誠如聖敎, 臣等亦以爲憂耳。” 上又謂瑬曰: “言者皆謂江都、南漢之穀, 可以移補經費, 觀其實數, 亦甚些少。 今悉取用, 當如緩急何?” 瑬曰: “江都、南漢之穀, 誠知取用之不可, 而急於目前, 有所仰稟, 幸蒙允從。 昨者各營方物之價, 又命竝減, 民之感悅如何?” 戶曹判書鄭太和曰: “頃見趙復陽之疏, 請專減今年之稅豆。 縱不能專減, 若減其半, 則民亦悅矣。” 上曰: “後苑之種穀, 蓋欲驗其豊凶, 而以其田觀之, 今年似不至大無, 而外人言其太甚何也?” 瑬曰: “外人雖不無過實之言, 然豈可盡謂之過實乎?” 太和曰: “歲幣因淸國減數, 應除者頗多。 當以今年所減之數, 移用於明年矣。” 上曰: “如是則省民弊多矣。” 瑬曰: “崔得男從前往來瀋陽, 多有罪惡。 但今者所犯, 必須訊鞫取服, 然後乃可誅也。 一誤王法, 後弊無窮。 天威咫尺, 何敢面謾? 且鄭譯反覆不測, 國家安危, 皆係於此人之喜怒。 若爲報仇之計, 則患必及矣。” 大司憲南以雄曰: “固不可以命壽之生怒, 貸而不誅。 但以王法言之, 不宜徑誅於取服之前也。” 上厲聲曰: “得男何時取服乎? 禁府之官畏命壽, 必不敢嚴刑, 等待命壽之來, 命壽曰不可殺, 則卿等果能殺之耶? 不殺此人, 無以號令兩西矣。” 又曰: “予於李楘, 初非逆詐, 於倉卒嘗見其不是處, 故有頃日之敎矣。 此人每於淸使來時, 輒稱病不參朝班, 予常非之。 頃日之事, 予亦知其有病, 但病果重, 則初不當來, 旣來則群議未定之前, 不可徑出, 故不能無疑也。 頃見卿等之啓, 予甚慙赧。” 太和曰: “淸使來時, 楘之參於擧動, 臣嘗見之矣。” 上曰: “何時見之, 而幾度往參耶?” 對曰: “曾於淸帝之喪, 楘以紙裹帽而來參在列, 皆指笑矣。” 上曰: “當日之議, 是莫重之事。 在昔讓寧之廢也, 黃喜立異云。 所見不同, 則立異亦可, 何可徑出乎?” 瑬曰: “楘之病重, 朝臣之所共知。 豈皆爲李楘, 欺罔天聰乎?” 上曰: “君臣之間, 有懷必達, 予亦何言不盡也? 所懷如此, 故特爲卿等言之耳。” 李景奭、金堉, 亦爲楘伸辨甚悉, 上意稍解。 瑬曰: “號爲一時淸論者, 每於淸使之來, 不肯往參。 如楘者, 固非謀避之人也。 至如居常大言, 及到彼中, 不能終保其守者有之, 此則臣實小之。” 【蓋指李敬輿、申翊聖而言也。】 上問於群臣曰: “國本旣定, 外議何如?” 瑬曰: “人情無不悅服矣。” 上曰: “其時有言, 人心波蕩者, 果有波蕩之勢乎?”【李敬輿嘗爲此言, 上惡之, 故言之。】 瑬曰: “豈有此理?” 上曰: “外雖默默, 內必有不服者矣。” 群臣皆言: “人皆悅服, 安有是事? 上敎如此, 甚非安上下之道也。” 上曰: “予於此, 偶然問之耳。 第今有善處之事, 試爲言之。 彼諸姜輩, 皆甚愚濫, 欲令遠徙, 以待人心之定何如?” 瑬曰: “頃者諸姜雖有愚迷妄作之事, 別無顯然之惡, 而置之罪, 則恐人心驚駭也。” 上曰: “不然。 事若見著, 則理難安全。 今所以欲善處者, 實非尋常意也。” 瑬曰: “然則有何罪犯乎?” 上曰: “以曩日喪事時事言之, 其所作爲, 愚濫極矣。 至於大臣, 動於其言, 至爲啓辭醫官請罪之啓, 旣停之後, 又嗾臺諫而更發。 以此觀之, 其勢焰亦且不小矣。” 瑬曰: “彼輩如孤雛、腐鼠, 何能指揮臺諫, 臺諫亦誰肯聽其言, 而更發乎?” 上曰: “姜文明豈非金光炫之壻乎?”【文明乃光炫之壻, 而光炫更發醫官之論, 故疑之如此。】 又曰: “闕內曾有云云之說, 及見臺諫啓辭, 乃與相符。 闕內之言, 臺諫何鎰聞? 予以是疑之。” 左右皆曰: “光炫必不如是矣。” 副提學李基祚曰: “其時, 臣以諫長, 亦參其論, 群議皆以遽停爲非矣。” 上曰: “姜之爲人, 無識且濫, 若見誘於凶徒, 小則流言, 大則生變。 伊時卿等雖悔, 將何及乎? 思其可生之道, 有此敎耳。 姜嬪亦非賢哲之人, 而其兄弟之不良如彼, 日後倘有可虞之事, 卿等當思予言。 予意欲於其釁端未生之前, 爲之善處, 釁端旣生, 則雖欲善處, 不可得也。” 瑬曰: “聖敎委曲至此, 誠爲幸甚。 但人心必皆不平矣。” 上默然良久。 景奭曰: “他日事變, 雖不可逆料而知, 然在今處置, 似不當如是。 乞與大臣, 十分商量而善處之。” 基祚曰: “諸姜年少無知之輩, 曩者雖有妄作之擧, 彼非名士大夫, 特數三布衣耳。 日後雖欲爲不逞之事, 其誰從之乎? 聖慮所在, 不過以末世人心不善, 或有意外之患, 欲爲保全之地也。 彼輩若聞聖敎, 則豈不遠去退伏, 以延餘喘乎?” 上皆不答。 瑬復曰: “外人千萬意外, 忽聞此擧, 則必且驚疑。 臣於此實無他意, 只欲鎭定人心, 使國家安寧耳。 伏願聖明, 更加深思。” 上見群臣不從其議, 不悅而罷。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청순치(順治) 2년) 8월 26일 을사 1번째기사
특명으로 강문성등 4인을 먼 고을에 정배하다
상이 특명으로 강문성(姜文星)등 4인을 먼 고을에 정배(定配)하였다. 여러 강씨 형제인 문성(文星), 문명(文明), 문두(文斗), 문벽(文璧)은 모두 강석기(姜碩期)의 아들이다. 강석기는 청백하고 신중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여 사류(士流)들의 존경을 받았고, 끝내 좋은 명예를 남기고 죽었다. 오직 문성, 문명은 어리석고 망령되게 기세를 부렸고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문명은 장사지낼 날짜가 불길하다고 함부로 말하고 지관(地官) 최남(崔楠)을 찾아가 협박하였으므로, 상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그때는 오히려 죄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강문성등은 사람됨이 무식하고 처사하는 것이 분수에 넘치니, 몇 해동안 먼 고을에 정배해서 안과 밖을 다 보전하는 뒷받침으로 삼으라.”하니,
금부가 양남(兩南) 지방을 배소로 정하자, 상이 다시 문성, 문명은 절도(絶島)에 정배하고 문두, 문벽은 강원도의 궁벽한 고을에 정배할 것을 명하였다가, 또 제주(濟州), 진도(珍島), 흡곡(歙谷), 평해(平海)로 바꾸어서 네 사람을 나누어 유배하였다.
○乙巳/上特命姜文星等四人, 定配遠邑。 諸姜兄弟文星、文明、文斗、文璧, 皆碩期之子也。 碩期淸愼恭儉, 見重士流, 竟以令名終焉。 唯文星、文明愚妄使氣, 及昭顯世子卒, 文明妄言葬日不吉, 往喝地官崔, 上聞之大怒, 然猶未罪也。 至是乃下敎曰: “姜文星等爲人無識, 處事泛濫, 限數年定配于遠邑, 以爲內外保全之地。” 禁府以兩南爲配, 上更命文星、文明絶島定配, 文斗、文璧江原道僻邑定配, 乃改以濟州、珎島、歙谷、平海, 分配四人。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청순치(順治) 2년) 8월 27일 병오 2번째기사
간원이 강문성등을 정배하라는 성명을 거둘 것을 청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강문성등을 정배하라는 명은 진실로 성상께서 그들을 보전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다만 생각건대, 강문성등이 비록 어리석고 분수에 넘친 일은 있지만 아직 확실히 드러난 죄명은 없으므로, 원근 사람들이 이 사실을 듣고서 성상의 염려하신 저의를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의혹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니,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諫院啓曰: “姜文星等定配之命, 固出於聖上保全之至意, 而第念, 文星等雖有愚濫之事, 未有見著罪名, 遠近聽聞, 未曉聖慮所在, 必有疑惑之心, 請還收成命。” 不從。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청순치(順治) 2년) 8월 28일 정미 3번째기사
헌부가 강문성을 정배했다가 또 절도에 이배한 성명을 거둘 것을 청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강문성(姜文星)등을 처치할 일에 대해서는 신 남이웅(南以雄)이 이미 탑전의 하교를 받았고, 또 삼가 비망기 가운데의 사지(辭旨)를 보건대, 성상께서 깊이 염려하신 뜻은 실로 그들을 보전하려는데 있었으니, 어찌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문성등이 비록 무식하고 우람한 일은 있었으나 대단한 죄상은 드러난 것이 없는데, 처음부터 먼 곳에 정배했다가 또 절도에 이배하시니, 성상 뜻의 소재를 개개인에게 납득시키기 어려워서 원근 사람들이 이 사실을 들으면 반드시 의혹을 갖게 될 것입니다. 신들은 삼가 성명께서 오히려 지나치게 염려하신 바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니, 성명을 도로 거두소서.”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憲府啓曰: “姜文星等處置之事, 臣以雄旣承榻前之敎, 又伏覩備忘中辭旨, 聖上深慮, 實在保全, 豈出於得已哉? 第念, 文星等雖有無識愚濫之事, 大段罪狀, 未有現著, 而初配遠地, 又移絶島, 聖意所在, 難以戶喩, 遠近聽聞, 必致疑惑。 臣等竊恐, 聖明猶有所過慮也, 請還收成命。” 不從。
인조 47권, 24년(1646 병술/청순치(順治) 3년) 2월 5일 임오 5번째기사
강문성, 강문명등을 잡아다 국문하여 처리할 것을 하교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죄인 강문성(姜文星), 강문명(姜文明)등은 지난해 세자의 상(喪)에 감히 간여하여 도감(都監)을 지휘하였다. 그때에 내가 이미 그들이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분명하게 말하고 싶지 않아서 경미한 과실만 적용하여 귀양보냈었다. 지금은 그들의 누이가 직접 큰 죄를 범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먼 지방에 있기는 하지만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해당 부서로 하여금 급히 붙잡아들여 전후의 범죄 사실을 엄히 국문하여 처리하게 하라.”하였다.
○上下敎于政院曰: “罪人姜文星、文明等, 上年世子之喪, 渠敢干預指揮都監。 其時予已知其有無君之心, 而不欲明言, 姑以微過定配矣。 今則厥妹身犯大罪, 渠等雖在遠地, 豈有不知之理哉? 令該府, 急速拿來, 前後罪犯, 嚴鞫處置。”
인조 47권, 24년(1646 병술/청순치(順治) 3년) 2월 7일 갑신 1번째기사
김자점, 민성휘, 민응형, 김광현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자점을 내의원도제조(內醫院都提調)로, 민성휘(閔聖徽)를 제조로 삼고, 특명으로 순천부사(順天府使) 민응형(閔應亨)을 대사간으로, 김광현(金光炫)을 순천부사로, 조경을 형조참판으로 삼았다. 김자점이 병을 핑계하고 빈청에서 재차 계사를 올릴 때에 참여하지 않자, 상이 그가 다른 신하들과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과 그 사람됨이 부리기가 쉽다는 것을 알고는 끌어다 써서 자신을 돕게 하려고 한 것이다. 민응형은 일찍이 입대하였을 때 김류를 공박 배척하였기 때문에 순천으로 나가 보임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상이 김류를 미워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부른 것이다. 김광현의 사위가 바로 강문명(姜文明)이다. 소현세자의 상에 김광현이 헌장(憲長)이 되어 의관(醫官)을 죄주자는 논의를 극력 주장하였는데, 상이, 강씨 집의 사주를 받고 그러는 것인가 의심하여 몹시 미워한데다 또 강씨를 두둔하는 무리를 물리치고자 하였기 때문에 외직을 명한 것이다. 조경은 전에 대사간이 되었을 때 나인(內人)을 국문하자는 논의를 맨 먼저 제기하였으므로 상이 기뻐하여 특별히 참판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甲申/以金自點爲內醫院都提調, 閔聖徽爲提調, 特命以順天府使閔應亨爲大司諫, 金光炫爲順天府使, 趙絅爲刑曹參判。 自點稱病, 不參於賓廳, 再啓, 上知其立異於諸臣, 爲人且易使, 欲引以助己故也。 應亨曾於入對, 攻斥金瑬, 以此出補順天, 至是上惡瑬, 故遂特召之。 光炫之壻, 卽姜文明也。 昭顯世子之喪, 光炫爲憲長, 力主請罪醫官之論, 上疑其聽姜家之嗾, 深惡之, 且欲屛姜氏黨援, 遂命補外。 絅前爲大司諫, 首發請鞫內人之論, 上悅之, 遂特陞參判。
인조 47권, 24년(1646 병술/청순치(順治) 3년) 2월 15일 임진 4번째기사
의금부가 강문명이 공초받을 일을 아뢰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강문명(姜文明)을 이미 붙잡아 왔는데, 본부에서 공초를 받을 것입니까?”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임금을 무시하고 위를 도모한 등의 죄는 다 사소한 일이 아니다.”하니,
형방승지 유철(兪㯙)이 아뢰기를,
“죄인 강문명이 이미 임금을 무시하고 위를 도모한 죄가 있으니, 본부에서 공초를 받는 것은 부당합니다. 추국하라는 뜻으로 해당 부서에 분부해야겠습니다만 어떤 장소에서 추국할 것입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일 의금부에 국청을 마련하여 신문할 것이다.”하였다.
유철은 본래 상에게 중히 여김을 받았는데, 이에 이르러 이 계사를 올리자 며칠이 안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발탁 승진되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요즈음 재신이 된 것은 유추국(兪推鞫)이다.”고 하였다.
○義禁府啓曰: “罪人姜文明, 旣已拿來, 自本府捧招乎?” 上下敎曰: “無君謀上等罪, 皆非細故也。” 刑房承旨兪㯙啓曰: “罪人姜文明, 旣有無君謀上之罪, 則不宜自本府捧招, 當以推鞫之意, 分付于該府, 而推鞫於何所乎?” 上曰: “明日設鞫廳于禁府以問之。” 㯙素爲上所器, 至是爲此啓。 未數日, 擢陞嘉善, 時人爲之語曰: “今時作宰兪推鞫。”
인조 47권, 24년(1646 병술/청순치(順治) 3년) 2월 16일 계사 1번째기사
우의정 이경석이 강씨등의 옥사를 여러 대신과 처리할 것을 청하다
우의정 이경석이 병으로 국문에 참여하지 못한 정황에 대해 소를 올려 아뢰고, 또 아뢰기를,
“강씨의 죄가 비록 크지만 너그럽게 처결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신이 여러 대신들과 더불어 일전에 쟁론(爭論)을 벌였으나, 사사하라는 분부가 내린 뒤에 이르러서는 감히 자신의 견해만을 피력해 다시 논집(論執)하지 못했던 것은 비록 이미 드러난 죄로만 말하더라도 의리로 판정하면 오히려 근거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대신의 체모는 대관(臺官)과 달라서 결정된 명이 이미 내리면 임금만 혼자서 감당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원임 대신들의 뒤를 따라서 함께 분부를 받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강문성(姜文星), 강문명(姜文明)등의 옥사는 또 이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임금을 업신여기고 위를 도모한다.’는 죄목은 바로 대역(大逆)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대역의 옥사야말로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이미 고변한 자도 없고 또 연루된 것도 아닌데, 단지 ‘그 여동생의 소행을 반드시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는 것만으로 국문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강문성, 강문명등의 평소 어리석고 망령스러운 형상과 산소를 잡을 때 못된 짓을 한 일에 대해서는 신이 몹시 미워하고 있는데 불쌍히 여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후일의 폐단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무함하여 옥사를 만드는 폐단이 이로 말미암아 계속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겠습니까. 형벌을 알맞게 쓰지 않으면 백성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됩니다. 어찌하여 전일에는 형벌을 신중히 쓰시더니 지금 갑자기 이런 일을 하십니까. 《대학(大學)》에 이른바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그 천시하고 증오하는 바에 편벽된다.’는 말이 가깝지 않습니까. 이미 궁벽한 지역으로 추방하였다가 상이 노여우실 때에 곧바로 국문하시니, 형벌이 중도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여러 신하들을 짓누르시는 이유는 당을 비호하고 구원한다고 해서인데, 이 때문에 여러 사람의 입이 닫히고 의심하고 서먹해 함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보잘 것은 없지만 대신이 되었는데, 어찌 구원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신이 별다른 장점은 없지만 밤낮으로 마음속에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임금을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나라를 가정처럼 걱정하는 마음이니, 이 점만은 스스로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살펴 주시어 다시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서 처리하시고, 이어서 신의 죄를 다스리시어 망령되이 말하는 자의 경계로 삼으소서.”하니,
답하기를,
“안심하고 조리하라.”하였다.
○癸巳/右議政李景奭疏陳病未參鞫之狀, 且言:姜罪雖大, 賒貸爲可, 故臣與諸大臣, 爭論於前, 而及其賜死命下之後, 不敢獨伸己見, 更爲論執者, 雖以已著之罪言之, 斷之以義, 猶有可據。 且大臣之體, 與臺官異, 成命已下, 則不可使君父獨當, 故隨原任大臣之後, 共爲承命矣。 今此姜文星、文明等之獄, 則又有異於此焉。 無君謀上之罪目, 乃是大逆也。 大逆是何等大獄, 而旣無告者, 又非辭連, 而直以其妹所爲, 必無不知而鞫之乎? 文星、文明等平昔愚妄之狀與夫卜山時無形之事, 臣所深惡, 有何足恤? 而此路一開, 後弊無窮。 安知誣陷而成獄之弊, 不因此而繼起乎?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何。 聖明欽哉欽哉於前日, 而今忽有此擧耶? 《傳》所謂: “有所憂患, 則不得其正之, 其所賤惡而辟焉。” 者, 無乃近之乎? 旣放之於僻絶之地, 旋鞫之於天怒之時, 其可謂之刑罰得中乎? 殿下之所以摧折群下者, 護黨也, 伸救也, 衆口杜而疑阻極矣。 臣雖無狀, 忝爲大臣, 豈爲救護而發此言乎? 臣無他寸長, 而日夜耿耿于中者, 愛君如父, 憂國如家之心, 則竊自以爲, 神明可質矣。 伏乞特垂財察, 更詢諸臣而處之, 仍治臣罪, 以爲妄言者之戒。
答曰: “安心調理。”
인조 47권, 24년(1646 병술/청순치(順治) 3년) 2월 21일 무술 3번째기사
양화당에 나아가 좌의정 김자점을 불러보다
상이 양화당(養和堂)에 나아가 좌의정 김자점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근일에 사대부의 기색과 논의가 어떠한가?”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신이 오랫동안 대궐 안에 있다가 어제 겨우 밖에 나갔으므로 사람을 접한 적이 없었으니 기색과 논의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만, 전하께서 이 생각을 시원하게 푸신다면 신민(臣民)의 다행일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최명길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끝 부분에 ‘나라의 일이 우려되는 점이 많다.’고 하였다.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협을 받고서 말한 것인가, 아니면 임금을 위협하고자 말한 것인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단지 위아래가 의심하고 서먹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말한 것입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비록 위협하고자 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대신으로 하여금 미쳐 날뛰고 허둥대게 하는 등 이처럼 평상시의 성품을 잃게 하였다니 강씨의 기세가 막중하다하겠다. 무릇 이른바 대신이라고 하는 자는 비록 시퍼런 칼날이 앞에 닥치더라도 동요되지 않아야 하는데, 일을 논하는 즈음에 당초에 가졌던 견해를 지키지도 못하니, 장차 어디에다 쓰겠는가? 이것으로 본다면 근일의 기색은 반드시 우려할 만한 점이 있는 것이다.”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신이 전하를 가까이 모시고 있는데 감히 숨길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말이 의사를 잘 전달하지 못해서 그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두 대신은【최명길(崔鳴吉), 이경석(李景奭)】 다 일찍이 대제학을 역임하였는데 어찌 글 솜씨가 모자라서 그러하였겠는가? 우상이 올린 석장의 상소마다 말이 각각 다르니, 이것이 어찌 군자(君子)가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옛말에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고 하였다. 비록 벗의 사이라도 신의를 귀하게 여기는데, 임금을 섬긴다는 자가 아침저녁으로 말을 변경하고 어제와 오늘에 한 말이 다르니, 몹시 놀라운 일이다. 강씨의 죽고사는 것은 말할 것조차도 없지만 조정이 이와 같으니, 윤기(倫紀)를 어떻게 밝힐 수 있겠으며 분수를 어떻게 정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 최상(崔相), 신상(申相)과【경진이다】사람의 장단점을 논하면서 내가 이경석의 어짐을 칭찬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내 실로 눈 먼 소경이나 다름이 없었다.”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의 차자가운데 ‘계복(啓覆)’이란 말이 있는데, 이른바 ‘계복’이란 것은 살인(殺人), 강도(强盜)등에 적용하는 것이다. 어찌 강상(綱常)의 큰 변에다 적용할 수 있겠는가? 전일 진달한 바가 미진하였다고 하여 말을 이와 같이 변경한 것 같으나, 군자의 한 마디 말은 천년이 지나도 고칠 수없는 것인데, 대신의 말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이것은 큰 변이므로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진달한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것을 큰 변이라고 말하는가? 무릇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큰 변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식을 죽이고 신하를 죽이는 것은 군부(君父)가 본디 할 수있는 것인데, 어찌 감히 실없는 의논에 동요되어 임금을 위협하려고 한단 말인가?”하였는데, 상의 목소리와 안색이 엄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오늘의 일은 위에서는 너그럽게 봐주고 아래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다투어 간해야 옳습니다. 신의 의견은 본래 이와 같았는데, 여러 신하들은 오직 후세의 논의가 어떻게 평할 것인가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한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말을 가려서 하는 선비는 비록 손님을 상대할 때도 신중히 생각하여 하는데, 더구나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 어찌 감히 망발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신하들이 이와 같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힘써 너그러이 용납해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일찍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덕으로 교화하는 것 이외에 또 형법이 있으니, 이 중에 어느 것도 폐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사람이 진실로 죄가 있으면 반드시 그 법을 시행하였고, 비록 공이 있는 재상이라 하더라도 관대하게 처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다른 사람은 죽이고 친속은 용서한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형과 아우, 숙부와 조카에 있어서는 더러 법을 굽혀서 은혜를 펼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은 이 경우와는 다르다. 그리고 또 요즈음 말하는 자들이 진실로 소견이 있어서 말한 것이라면 어찌하여 ‘이것은 우리 임금이 소망하였기 때문이며 간사한 사람이 참소하였기 때문이다.’고 말하지 않는가. 일의 허실(虛實)을 명백하게 말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물어물 말하면서 다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만 하니, 이러고도 임금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의 허실에 대해 만일 친히 보아 상세히 알지 못한다면 임금의 말만 믿어야 할 것인데, 지금은 단지 강씨 당의 말에만 의거하여 임금을 천박하게 여기고 이런 해괴한 일을 말하니, 자못 통탄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또 사람이 서로 안다는 것은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귀한 것인데, 임금과 신하가 이처럼 서로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대신들이 갑자기 큰일을 당해 당황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그런 것이지 그 마음은 실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강씨의 당이라고까지 하교하셨습니다만 어찌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신자(臣子)된 자가 장차 어떻게 그 몸을 용납할 수가 있겠습니까. 위엄을 거두시어 의심하고 서먹해진 것을 푸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벼슬자리를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은 오직 시세에 달라붙을 줄만 안다. 진실로 자신이 한 말이 시행되지 않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면 어찌하여 벼슬을 버리고 떠나지 않는단 말인가. 장응일(張應一)은 임금을 사랑한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죄목을 억지로 정하고 죄없는 사람을 죽이려한다.’고 말하였으니, 이른바 임금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하자,
김자점이 아뢰기를,
“이것은 다 소견이 미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장응일은 영남 사람으로서 사람됨이 자못 질박하고 정직합니다.”하니,
상이 성내며 이르기를,
“시골 사람도 이와 같으니 더욱 놀라운 일이다. 우상이 말하기를 ‘강문명(姜文明)을 추국하면 무함의 폐단이 이로부터 일어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내가 무함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 말을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뒷날 뼈를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리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이해에 동요되어 염치를 모두 상실한 것이다. 경은 시험삼아 오늘날 정부와 대각이 하는 것을 보라. 옳은가 그른가?”하자,
김자점이 아뢰기를,
“이것이 어찌 뼈를 가루로 만드는 화를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사람들의 논의에 동요된 데 지나지 않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 또한 사람의 말에 동요되었음을 말한 것이지 대신 또한 불순한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사람의 말에 동요되지 않았다면 반드시 세 번이나 상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가 사람에게 꾸지람을 당해 마음대로 울지 못하는 것과 흡사한 것이니, 어찌 이와 같은 대신이 있겠는가. 옛적에 양녕(讓寧)을 세자에서 폐할 때에 황희(黃喜)가 홀로 안 된다고 하여 시종 그 뜻을 바꾸지 않았는데, 만일 참으로 소견이 있다면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일은 필시 몇 명의 간흉(奸兇)이 유언 비어를 조작해 대신들을 위협하여 시일을 끌려고 한 것이다. 김시번(金始蕃)의 상소는 내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어찌 이처럼 심하게 이랬다저랬다하는 자가 있는가. 이것은 사류(士類)의 마음을 잃은 것으로 종신토록 묻히게 될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다. 임금이 권한이 없다 하더라도 이 무리가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간흉들이 위협하였을 것이라고 하교하셨는데, 결코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면 대신과 대각이 어찌 이토록 겁을 먹을 수 있겠는가? 나는 장차 예상치 않았던 일이 생길까 두렵다.”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진실로 우려할 만한 단서가 있다면 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신이 크게 근심하는 바는 오직 위아래가 의심하고 서먹해질까 하는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혜로운 자도 천번 생각하다 보면 반드시 한 번은 실수하는 법이다. 환란은 반드시 소홀히 여기는 데서 발생하는 것인데 경이 여기에서 한번 실수하는 것이 아닌가?”하자,
김자점이 비위를 맞춰가며 여러 모로 누누이 변론하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위아래가 이처럼 서로 서먹해졌으니, 갈수록 더 격화되어 끝내 말할 수 없는 환란이 있을까 두렵습니다.”하였다.
또 김류와 이경석을 위해 신구(伸救)해 마지않았으나, 상이 끝내 석연해 하지 않았다. 또 이르기를,
“가령 강씨가 죄를 범한 바가 없다하더라도 위아래 인심이 이와 같이 돌아가니, 또한 죽을 만하다. 그리고 이는 외부의 죄인이 아니므로 내가 곧바로 대궐 안에서 사사(賜死)하고자 하는데 경의 생각에는 어떤가?”하니,
김자점이 묵묵히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대답하기를,
“신의 생각에는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서서히 그 죄를 정확히 밝혀 처치해야 할 것입니다. 대궐 안에서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본가(本家)로 내쫓아 두었다가 처치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무제(漢武帝)가 궁중에서 구익(鉤弋)을 죽인 것은 무슨 까닭이었던가?”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이번의 일은 구익의 일과는 다릅니다. 당초에 논의가 없었다면 할 수도 있지만 논의가 된 뒤에는 곧바로 궁중에서 처단할 수 없습니다. 대간이 저절로 얼마 안가서 정계(停啓)할 것입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연하다가 장차 큰 화가 있을까 염려된다.”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신이 목숨을 걸고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밝히겠습니다. 혹시 큰 화가 있게 된다면 마땅히 신을 먼저 처단하소서.”하자,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단지 경이 모를까 염려한 것이다.”하니,
김자점이 두 손을 땅에 짚고 얼굴을 들어 억지로 웃으면서 아뢰기를,
“신은 결단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혹시 뜻밖의 변이 발생한다면 경이 지금 이와 같이 하고서 뒤에는 장차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만일에 변이 발생한다면 신을 죽이소서.”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라가 망한뒤에 비록 처벌하고 싶어도 장차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하니, 김자점이 일어나 절하고 아뢰기를,
“일이 만일 그런 지경에까지 이른다면 전하께서 비록 신을 죽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이 자살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적에 조무령왕(趙武靈王)이 그의 자식을 폐출하려다가 끝내는 굶어죽고 말았는데, 이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이는 단지 궁중의 죄를 얻은 한 과부입니다. 어찌 이와 같은 우려할 만한 환란이 있겠습니까?”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와 같이 말하니 내 깊이 믿겠다. 근년에 늙고 병이 많은데 심장병까지 갈수록 심하여 말이 두서가 없고 선후가 뒤바뀐다. 그러나 경에게야 또한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대간이 이미 독을 넣은 일을 말하였으면 약방(藥房)은 당연히 문안해야 함에도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고 추국이 이미 끝난 뒤에도 보통 일처럼 봐넘기고 역시 와서 그 연유를 묻지않았다. 신료들은 나더러 박대한다고 말하지만 신료들이 나를 얼마나 박대하였는가? 임금을 저처럼 성의가 없이 섬기고도 임금이 우대하기를 바라는 것이 옳은 일인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를 초개처럼 보면 신하가 임금을 원수와 같이 본다.’고 하였다. 지금 신하가 임금을 이와 같이 보고 있으니, 임금이 신하를 장차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내가 덕이 박한 소치이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는가?”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약방의 일은 진실로 잘못하였습니다. 추국이 파한 뒤에 신의 생각에는 문안드리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으나 논의가 모아지지 않아서 못하였습니다”하였다. 김자점이 이어 아뢰기를,
“조속히 영상과 우상을 불러서 조용히 의논하여 정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재상들은 그전부터 실없는 의논에 동요되어 사실을 돌아보지 않았는데, 지금 비록 부른다 하더라도 저들이 어찌 즐겨 오겠는가?”하였다.
김자점이 또 최명길(崔鳴吉), 이경여(李敬輿), 이경석(李景奭)을 위해 애써 신구(伸救)하니, 상이 미소를 지으며 이르기를,
“지금 조정이 매우 뒤숭숭하다. 이경여가 뒤숭숭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하여 한 말이다.”하였다.
상이 이어서 중국이 일본에게 군사를 요청한 일을 의논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외구(外寇)는 진실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만 성명께서 여러 신하들을 불신하여 이처럼 의심하고 서먹해졌으니, 신은 나랏일이 결국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上御養和堂, 引見左議政金自點。 上曰: “近日士大夫氣色、論議如何?” 自點曰: “臣長在闕中, 昨纔出外, 未嘗接人, 氣色、論議, 何能有知, 而自上洞釋此念, 則臣民幸矣。” 上曰: “崔鳴吉上箚末端言, 國事多有可憂。 此人被人恐動而言耶? 抑欲威脅君上而言耶? 其意何居?” 自點曰: “只憂上下之疑阻而發也。” 上曰: “然則雖不欲威脅, 必被人恐動也。 能使大臣, 狂奔疾走, 遑遑汲汲, 失其常性, 乃至於此, 姜之氣勢, 可謂重矣。 凡所謂大臣云者, 雖白刃當前, 尙不可動, 而論事之際, 不能守其初見, 則將焉用哉? 以此觀之, 近日氣色, 必有可慮者也?” 自點曰: “臣於咫尺天威, 敢有隱諱乎? 此不過辭不達意而然也。” 上曰: “兩大臣【鳴吉、景奭也。】 皆曾經大提學, 豈由文短而然也? 右相三疏, 言各不同, 此豈君子之所可爲乎? 古語曰: ‘朋友有信。’ 雖在朋友之間, 猶貴其信, 而所以事君者, 朝夕變辭, 昨今異言, 極可駭也。 姜之死生, 不足爲言, 而朝廷如此, 倫紀何由而明, 分義何由而定也? 昔者與崔相、申相【景禛也。】 論人長短, 予稱景奭之賢矣。 以今觀之, 予實無異於瞽者也。” 上又曰: “完城箚中有啓覆之說, 所謂啓覆者, 殺人、强盜之類也。 豈可比擬於綱常大變乎? 以其前日所陳, 爲未盡而變辭如此, 君子一言, 千年不改, 大臣之言, 豈容如是?” 自點曰: “此是大變, 不可不愼, 故陳達如此也?” 上曰: “此何謂大變也? 凡以下犯上謂之大變。 殺子殺臣, 君父之所固爲者, 安敢動於浮議, 乃欲脅君乎?” 上聲色俱厲。 自點曰: “今日之事, 自上寬貸, 而自下爭執可也。 臣之意見, 本來如此, 而諸臣惟恐後世論議以爲如何, 故如此耳。” 上曰: “不然。 士之擇言而發者, 雖對客之際, 猶思愼重, 況於君臣之間, 豈敢曰妄發爲哉?” 自點曰: “諸臣雖如此, 殿下勉加優容。” 上曰: “予嘗謂治國之道, 德敎之外, 亦有刑法, 此不可偏廢也。 以此人苟有罪, 必加其法, 雖勳宰之人, 亦未嘗饒貸。 今若在他人則殺之, 在親屬則赦之, 人謂何哉? 然在兄弟叔姪, 則或可屈法而伸恩, 此人則異於是也。 且今之言者, 苟有所見而言, 則胡不曰: ‘此由於吾君之老妄也, 姦人之讒愬也。’ 事之虛實, 明白言之可也。 含糊其說, 但稱不可, 若此而謂之愛君, 可乎? 此事虛實, 如不親見而審知, 則只信君上所言可也, 而今者只憑姜黨之言, 賤薄君上, 作此駭異之事, 殊可痛也。 且人之相知, 貴相知心, 君臣之不相知如此, 其何以能國乎?” 自點曰: “大臣等猝當大事, 蒼黃罔措, 其心實無他也。 至以姜黨爲敎, 豈有是理? 爲臣子者, 將安得容其身也? 願霽天威, 釋此疑阻。” 上曰: “近來患失之輩, 惟知趨時附勢。 苟以言不行爲恥, 則胡不棄官而去乎? 張應一自謂愛君, 而乃以勒定罪案, 欲殺無罪之人爲言, 所謂愛君者何也?” 自點曰: “是皆所見不逮而然。 應一, 嶺南人也, 爲人, 頗朴直矣。” 上恚曰: “鄕曲之人亦如此, 尤可駭也。 右相以爲, 推鞫姜文明, 則誣陷之弊, 自此而起, 然則予當爲誣陷之首矣。 爲言如此者, 不過畏他日碎骨飄風之禍, 利害所動, 廉恥都喪。 卿試看今日政府、臺閣之所爲, 是耶? 非耶?” 自點曰: “此寧畏碎骨之禍而然哉? 不過動於士論而已。” 上曰: “予亦謂其動於人言, 非疑大臣亦懷不軌之心也。 若不動於人言, 則必不至於三上疏也。 恰似嬰兒被人嗔喝, 啼哭不得自由, 安有如此大臣也? 昔讓寧廢立之時, 黃喜獨以爲不可, 終始不改。 若眞有所見, 則如是可矣。 今日之事, 必有若干奸兇, 作爲流言, 恐動大臣, 等待遷延也。 金始蕃之疏, 予不忍正視。 寧有反覆之態, 若是之甚者? 此畏其不得於士類, 禁錮終身也。 君上雖甚無權, 此輩安敢乃爾?” 自點曰: “奸兇恐動之敎, 必無是事。” 上曰: “不然則大臣、臺閣之畏刼, 何至此哉? 予恐其將有意外不虞之事也。” 自點曰: “誠有可虞之端, 則臣豈不知? 臣之所大憂者, 唯在於上下之疑阻也。” 上曰: “智者千慮, 必有一失。 禍患之生, 必於所忽, 卿無乃一失於此耶?” 自點俯仰進退, 縷縷辨釋。 且曰: “上下之相阻至此, 竊恐輾轉相激, 終有難言之患也。” 又爲金瑬、李景奭, 伸救不已, 上終不釋然。 又曰: “假令姜氏無所負犯, 上下人心之歸往如此, 亦足死矣。 且此非外廷罪人, 予直欲賜死於闕內, 卿意如何?” 自點默思良久, 乃對曰: “臣意以爲不可也。 徐當明正其罪而處之, 何必於闕內乎? 出置于本家, 而處之似當。” 上曰: “漢武帝殺鈎弋於宮中者, 何也?” 自點曰: “此與鈎弋有異。 當初若無論議則可也, 論議旣發之後, 不可徑先處斷於宮中。 臺諫自當未久停啓矣。” 上曰: “慮其遲留, 將有大禍。” 自點曰: “臣請以死明其不然。 倘有大禍, 宜先臣身。” 上笑曰: “直恐卿不之知耳。” 自點兩手據地, 仰面而强笑曰: “臣決知其不然也。” 上曰: “脫有意外之變, 則卿今如是, 後將奈何?” 自點曰: “苟有變, 請殺臣。” 上曰: “國亡之後, 雖欲罪之, 其將何施?” 自點起拜, 且言曰: “事若至此, 殿下雖不殺臣, 臣當自殺。” 上曰: “昔趙武靈王欲廢其子, 終至餓死, 此不可不慮。” 自點曰: “此特宮中之得罪一寡婦也。 焉有如此可慮之患乎?” 上曰: “卿言如此, 予當深信。 近年予年老多病, 心恙轉劇, 言語無倫, 先後倒錯。 然於卿亦何所不言哉? 臺諫旣言置毒之事, 則藥房固當問安, 而終不提起, 推鞫旣畢之後, 視若尋常, 亦不來問厥由。 臣僚則謂予薄待, 而臣僚待予之薄, 顧如何哉? 事君如彼無誠, 而望君上之優待, 其可乎哉? 孟子曰: ‘君視臣如草芥, 臣視君如仇讐。’ 今者臣之視君如此, 君之視臣將如何也? 然此予德薄之致, 誰怨誰咎?” 自點曰: “藥房之事, 誠有失矣。 推鞫罷後, 臣意以爲, 不可不問安, 而論議不一未果耳。” 自點仍曰: “速召領、右相, 從容議定。” 上曰: “此相從前動於浮議, 不顧實事, 今縱召之, 彼豈肯來?” 自點又爲鳴吉、敬輿、景奭伸救甚至, 上微笑曰: “卽今朝廷之波蕩甚矣。 李敬輿波蕩之說, 正爲今日道也。” 上仍論中國請兵日本之事, 自點曰: “外寇固不足恤, 聖明不信群下, 疑阻至此, 臣未知國事終作如何出場也。” 上不答。
인조 47권, 24년(1646 병술/청순치(順治) 3년) 2월 26일(계묘) 2번째기사
영의정 김류가 강상에서 대죄하다가 상소하여 사직하다
영의정 김류가 강상(江上)에서 대죄(待罪)하다가 이에 이르러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신이 대신의 윗자리에 있으니, 논의를 주장한 것도 신이고 계사의 초안을 구상해 낸 것도 신이며, 곧바로 먼저 나간 것도 신이고 즉시 문안드리지 않은 것도 신입니다. 신은 바로 죄인의 우두머리로서 감히 하루도 도성에서 태연히 있을 수가 없기에 강상으로 물러나와 날마다 형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렸는데, 형벌은 가하지 아니하고 소명(召命)만 재차 내렸습니다.【강씨를 사사하라는 분부를 내리면서 대신을 명초(名招) 하였는데 김류가 나아가지 않았고, 강문명(姜文明)을 추국할 때도 명초하였는데 김류가 또 나아가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같은 반열에 있는 대신들은 신보다 죄가 가벼워도 귀양까지 갔는데, 더구나 신이 지은 죄는 다른 대신들보다 백배나 더 무거운데 말할 게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조속히 신의 죄를 바로잡아 불충하는 자의 경계로 삼으소서.”하니,
답하기를,
“경은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공무를 보라.”하였다.
○領議政金瑬待罪江上, 至是上疏辭職曰:臣忝在大臣之首, 主張論議者臣也, 搆出啓草者臣也, 徑自先出者臣也, 不卽問安者臣也, 臣卽罪之首也。 不敢一日偃息於都下, 屛伏江上, 日俟鈇鉞, 刑章不加, 召命再下。【姜氏賜死有敎, 命招大臣, 瑬不進。 姜文明推鞫時, 又命招, 瑬又不進。】 顧念同列大臣, 罪輕於臣者, 亦至於流竄, 況臣負犯之重, 百倍於他大臣者乎? 伏乞亟正臣罪, 以爲不忠者之戒。答曰: “卿其勿辭, 安心行公。”
인조 47권, 24년(1646 병술/청순치(順治) 3년) 2월 29일 병오 2번째기사
강문성과 강문명이 곤장을 맞아 죽다
강문성(姜文星)과 강문명(姜文明)이 곤장을 맞다 죽었다. 강문명은 강석기(姜碩期)의 둘째 아들로 사람됨이 교만하고 망령되며 객기를 부려 사람을 능멸하였고, 그의 형 강문성은 더 심하였는데, 다 말하기를 “강씨의 화가 반드시 이 무리들로부터 연유할 것이다.”하였었다.
그러나 그들이 죽자, 사람들이 오히려 억울하게 죽었다고 원통해 하였다.
○姜文星、文明, 死於杖下。 文明, 碩期之第二子也。 爲人驕妄, 使氣凌人, 其兄文星又甚焉。 皆云: “姜氏之禍, 必由此輩。”及其死,人猶以死非其罪,冤之。
인조 47권, 24년(1646 병술/청순치(順治) 3년) 3월 21일 무진 1번째기사
비국이 강씨의 폐출, 사사한 일을 심양에 먼저 주문할 것을 청하다
비국이 아뢰기를,
“강씨가 죄로써 폐출되어 죽은 것은 국가의 큰 변이므로 심양(瀋陽)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먼저 알 것입니다. 만일 저들이 먼저 물어오게 된다면 우리측에서 먼저 말하는 것만 못하게 될 것이니, 죄악을 낱낱이 진술하여 제때에 주문(奏聞)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승문원으로 하여금 주문을 지어 사은사 이경석(李景奭)의 사행에 추가로 부치도록 하였는데, 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희나라가 복이 없어 변이 궁중에서 발생하였기에 전후 사실을 상세히 진술하여 우러러 황제께 아룁니다. 의정부에서 올린 장계에 ‘삼가 전지(傳旨)를 받드니 「죽은 세자빈 강씨가 항상 그 형제가 죄를 짓고 멀리 귀양간 것을 분하게 여겨 일찍이 내가 있는 아주 가까운 곳에 이르러 성냄을 빙자해 큰 소리를 지르고, 그 뒤로는 문안마저 완전히 폐지하였으며, 이어서 흉한 물건을 가져다가 궁중에다 묻었는데 발견된 것이 많았고, 또 수라에 독을 넣어 나로 하여금 독을 입어 통증이 생기게 하여 거의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시녀들이 물린 수라를 먹고 광기를 일으키거나 쓰러졌으며, 나도 한달이 넘게 치료하여 겨우 다시 소생하였다. 또 그 형제들과 더불어 몰래 왕위를 바꾸고자 꾀하였고, 붉은 비단으로 적의를 미리 만들어 놓고 내전(內殿)의 칭호를 참람되게 사용하였는데, 흉계를 꾸민 실상이 일시에 발각되었다. 그의 형 강문성(姜文星), 강문명(姜文明)등이 비록 형신을 받다가 죽었으나 강씨가 범한 죄도 용서하기 어렵다. 너희 부서가 의금부와 더불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의논하여 정하라」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강이 분노를 빙자해 크게 고함을 지르고 문안드리는 것도 완전히 폐지하였으며, 왕위를 바꾸려고 은밀히 도모하고 적의를 미리 만들고 내전(內殿)의 칭호를 참람되게 사용한 등의 사항은 이미 훤히 드러났습니다. 이중 한 가지 행위만 있어도 진실로 용서하기가 어려운데, 궁중에다 흉한 물건을 파묻고 수라에다 독을 넣는 등 간사하고 흉측한 짓을 갈수록 더욱 부리어 전후 범한 죄가 분명해 숨길 수 없으니, 이것은 진실로 고금 천하에도 없었던 변입니다. 왕상께서 비록 극진하게 보전해 주고자 하시지만 그들의 매우 흉악한 죄는 천지의 사이에 하루도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습니다. 왕법(王法)으로 헤아려 보건대 율에 따라 처단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니, 조속히 일의 전말을 황제께 아뢰는 것이 진실로 편리하고 유익할 것입니다.’하였습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신이 삼가 생각해 보건대, 강씨는 성품이 올빼미와 같고 마음에 음험하고 사악한 생각을 쌓아 천속(天屬)의 지극한 정을 생각하지 않고 감히 시역의 참혹한 계획을 품었습니다. 그의 마음과 자취가 실패하여 드러나자 여론이 들고 일어나기에 부득이 공론을 애써 따라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율을 감하여 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신의 덕이 천박함으로 말미암아 옳은 방향으로 훈도하지 못해 이런 종전에 없던 망극한 변을 초래하게 하였으니, 자신을 돌이켜 자책해 볼 때 어떻게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강씨를 폐출하여 사사한 것 이외에 위의 일들을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戊辰/備局啓曰: “姜之以罪廢死, 國家大變, 瀋中之人必先知之。 如或自彼先問, 則不如自我先言, 歷陳罪惡, 及時奏聞, 恐不可已。” 上從之。 令承文院撰奏文, 追付於謝恩使李景奭之行。 其文曰:小邦不祿, 變生宮掖, 歷陳首尾, 仰瀆皇聽事。 議政府狀啓: “敬奉傳旨, 節該亡世子嬪姜氏, 常憤其兄弟作罪遠竄, 嘗到予至近處, 憑怒高聲, 自此專廢問候, 仍將兇穢之物, 埋藏宮寢, 多所現發。 又錯毒常膳, 使予中毒發痛, 幾至危境。 至於侍女食其退膳, 或狂或仆, 予亦經朔調治, 僅而復蘇。 又與其兄弟, 潛圖易位, 預造紅錦翟衣, 僭稱內殿之號, 兇謀實狀, 一時發覺。 其兄姜文星、文明等雖死刑訊, 姜氏罪犯, 亦難容護。 爾府與義禁府議定作何處置。 臣等竊照, 姜憑怒高叫, 專廢問候, 潛圖易位, 預造翟衣, 僭稱內殿等款, 旣已昭著。 有一於此, 固難容貸, 而埋兇宮寢, 置毒內膳, 逞奸肆兇, 逾往逾甚, 前後罪犯, 昭不可掩。 此誠古今天下, 所未有之變也。 王上雖欲曲全, 而其窮兇極惡之罪, 不可一日容息於覆載之間。 揆以王法, 理宜按律處斷。 亟將所據顚末, 轉奏天聰, 允爲便益等因具啓。” 據此臣竊念, 姜氏性稟梟獍, 心畜陰邪, 不思天屬之至情, 敢懷弑逆之慘計。 情迹敗露, 輿論奮發, 不得已勉循公議, 不忍加誅, 減律勘罪, 而緣臣德薄, 不能訓以義方, 致此無前罔極之變, 反身自咎, 無以爲心。 除將姜氏廢出賜死外,仍將右等事狀,敢此陳奏。
인조 47권, 24년(1646 병술/청순치(順治) 3년) 3월 23일(경오) 1번째기사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인견하여 도성의 인심을 묻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성난 기색으로 대하면서 이르기를,
“요즘 도성의 인심이 어떠한가?”하니,
김자점(金自點)이 안정되어 있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씨를 비호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을 일찍이 경으로 하여금 살피도록 하였는데, 경은 그 사람을 찾아내었는가?”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이것은 들뜬 의논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주장한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강씨가 이미 사사되니 여염에도 다른 의논이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향리에서도 진실로 어른이 있으면 사람들이 다 공경하고 어려워하여 감히 나쁜 짓을 못하는 것인데, 지금은 신하가 임금을 너무나 멸시하고 있다. 이러한 습관이 만일 커진다면 반드시 못할 짓이 없게 될 것이다. 신하의 형세가 매우 강성하여 오늘 말한 것을 내일 변경하고 내일 말한 것을 또 그 다음날 변경하고 있으며, 임금이 포상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천시하고 임금이 그르다고 하면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아니하니, 반드시 이를 주장하는 사람을 적발하여 부도(不道)의 법률로 다스려야만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조심할 것이다. 지난번에 대신이 곧바로 나갔던 일은 비록 옛적의 강한 번방 신하라 하더라도 이와 같이 심한 자는 있지 않았다.”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은 것은 비록 단서가 없다 하더라도 그 나머지 다섯 가지 죄에【왕위를 바꾸고자 꾀하고, 적의를 만들고, 내전(內殿)이라 칭하고, 성을 내 고함을 지르고, 문안을 폐한 것】 대해 명백히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범연히 사형을 면해주기를 청한 것은 몹시 무리한 짓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금을 시해하려고 한 자를 반드시 구원하려고 하면서 ‘나는 임금을 사랑한다. 나는 임금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니, 임금을 사랑하는 자가 반드시 뒷날 그 독에 피해를 입어야만 바야흐로 그 마음이 통쾌하겠는가. 그리고 지난번에 대각의 신하들이 혹은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고 핑계대고 혹은 병이 심하게 났다고 하고 혹은 고의로 계사에 빠져 반드시 체직되고야 말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무리들을 대각에 제수하려 하니 전형(銓衡)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강적(姜賊)이 죽지 않았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다섯 장의 종이에 써서 그 자식에게 유언(遺言)하고 시비(侍婢)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그 시비를 국문하였더니, 그런 일이 과연 있었다고 대답하였으나 끝내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하니,
구인후(具仁垕)가 아뢰기를,
“한문으로 썼다고 하였습니까, 언문(諺文)으로 썼다고 하였습니까?”하자,
상이 이르기를,
“언문인데 간혹 한문을 섞었다고 한다.”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글 가운데 말한 바는 무슨 뜻이었다고 합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글의 뜻은 대체로 ‘소숙(小叔)과 조씨(趙氏)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너희들이 성장하여 반드시 이 원수를 갚으라.’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 한 시비가 공초한 말은 이보다 더욱 참혹하다.”하자,
김자점이 아뢰기를,
“소숙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마 인평대군(麟坪大君)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하였다.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유서를 숨겨 놓은 사람을 의금부에서 국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내옥(內獄)에서 국문하였으니 밖으로 내보낼 것이 있겠는가?”하였다. 김남중이 재차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행원이 또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밖으로 내보내면 외부 사람이 다 유서의 말을 들을 것이니, 바로 그의 술책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하니,
여러 사람이 일제히 아뢰기를,
“일의 실마리가 드러났으니 비록 내보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외부 사람이 누가 모르겠습니까.”하였으나, 상이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예(禮)로 말한다면, 부모에게 불순하면 버리는 법입니다. 더구나 왕위를 바꾸려고 은밀히 도모하고 심양(瀋陽)에 있으면서 참람되게 칭호를 사용하고 독을 넣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대각의 의논에까지 나왔으니, 사대부들이 강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있겠습니까. 다만 당초에 약방(藥房)이 그 즉시 계사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러 상세히 알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사형을 면해주자는 논의는 처음에 못난 무리들한테서 나왔는데 점차로 공공의 의논으로 형성되고 말았으니, 상의 하교에 이른바 ‘의리가 분명하지 못하다.’는 말씀이 어찌 매우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당(黨)을 비호하는 논의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은데 대해서는 비록 자복한 사람은 없으나 반드시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궁중에서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람이란 강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외부 사람의 의논도 강씨를 의심하는 자가 열에 아홉을 차지하고, 어른들의 의논 또한 모두 이와 같습니다. 듣건대, 김상헌(金尙憲)의 생각도 ‘천하에 옳지않은 부모가 없다.’고 여긴다 합니다.”하니, 상의 안색이 조금 풀리었다.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김상헌이 정승될 조짐이 지금 보인다.”하였고, 혹자는 말하기를 “김상헌이 이일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원두표가 상헌의 중망을 빌어다 그의 말을 증거했다.”고 하였다. 허계(許啓)가 아뢰기를,
“궁중의 일을 외부 사람들이 알 수 없기 때문에 당초에 대간의 무리가 목숨을 살려 주자는 청을 한 것입니다.”하니,
상이 불끈 성내며 이르기를,
“이것은 신하로서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임금의 말을 어찌 감히 믿을 수 없다고 하는가?”하자,
허계가 매우 두려워서 독을 넣은 일로 인한 옥사를 끝까지 다스려서 기어코 그 단서를 찾아낼 것을 다시 청하였는데, 대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려고 한 것이다. 상이 답하지 않으니 주위 사람들이 다 속으로 비웃었다.
상이 이르기를,
“일전에 강을 동궁(東宮)에서 딴 데로 옮겨놓을 적에 쌓아놓았던 보화(寶貨)를 하루 내내 실어가고 단지 텅빈 행랑 안에 대여섯개의 보따리만 남겨 두고 갔었는데, 하루 저녁에는 어떤 사람이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그 비단들을 다 흐트러뜨려서 땅에 어수선하게 늘어놓았다. 또 종이로 싼 비단 서너 필을 담장 사이에 꽂아 두었고 또 그 중에 백납(白蠟) 몇 덩이를 꺼내서 뒷간에 던져 놓았는데, 그곳은 도둑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고 또 도둑이 한 짓도 아닌 듯하였기 때문에 나는 몹시 이상하게 여길 뿐이었다. 그 뒤에 건양문(建陽門)의 군영(軍營) 곁에 당첩(唐楪)에다 백반(白飯)을 담아 던진 자가 있어 중사(中使)가 그것을 알고 고하였다. 강의 시종을 국문하였더니, 한 시비가 스스로 말하기를 ‘비단을 흐트러뜨려 놓은 일은 내가 하였고 그 뒤에 또 와서 소식을 염탐하였다.’고 하였다. 대개 비단을 흐트러뜨려 놓은 계획은 대전(大殿)의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것이고, 당첩을 던진 계획은 외간과 내통하려고 한 것이다.”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강씨가 별도로 유치된 곳은 반드시 깊고 은밀하였을 터인데, 어떻게 이런 간사한 짓을 하였단 말입니까.”하자,
상이 이르기를,
“강이 유치당해 있을 때 외간의 일을 못 들은 것이 없었다. 강문성(姜文星)의 무리가 붙잡혀 올 때에도 사사로운 편지를 전해 들였고 정계(停啓)하였다는 내용 또한 알았었다고 한다.”하였다.
○庚午/上引見大臣、備局堂上。 上盛氣以待之曰: “近日都下人心何如?” 金自點以妥帖對。 上曰: “主張護姜之人, 曾令卿察之, 卿已得其人耶?” 自點曰: “此不過浮議。 寧有主張之人乎? 姜旣賜死, 閭閻之間, 亦無他議。” 上曰: “鄕里之中, 苟有長者, 人皆敬憚, 不敢爲不善。 今也人臣之視君上, 不啻蔑如, 此習若長, 必無所不至矣。 臣强之勢, 什成八九, 今日之言, 明日而變; 明日之言, 又明日而變, 人君褒之, 則人必賤之; 人君非之, 則不動一髮。 必須摘發主張之人, 治之以不道之律, 然後人有所畏戢矣。 向者大臣徑出之擧, 雖古之强藩, 亦未有如是之甚者。” 自點曰: “埋凶置毒, 雖無端緖, 其餘五罪,【圖易位、造翟衣、稱內殿、發叫怒、廢問安。】 不能明白伸理, 而泛請貸死, 甚無謂也。” 上曰: “欲弑君上者, 必欲伸救, 而曰: ‘我愛君也。 我愛君也。’ 愛君者, 必欲他日中其毒而後, 方快於心乎? 且向者臺閣之臣, 或稱犯馬, 或稱病重, 或故闕啓, 必遞乃已。 若此之類, 擬除臺閣, 安用銓衡爲哉? 姜賊之未死也, 刺其血書諸五紙, 遺言于其子而分授侍婢。 予聞其語, 鞫問其婢, 則對以果有之, 而終不肯現出矣。” 具仁垕曰: “眞書云耶? 諺文云耶?” 上曰: “諺文而或雜以眞書云。” 自點曰: “書中所言, 何意云耶?” 上曰: “其書之意, 槪言小叔與趙氏, 陷我於死, 汝輩成長, 必報此讐云。 其中一婢所招之說, 尤有慘於此者矣。” 自點曰: “小叔謂誰?” 上曰: “蓋指麟坪大君也。” 金南重曰: “藏匿遺書之人, 鞫問于禁府何如?” 上曰: “已自內獄鞫之, 何必出外?” 南重再請, 不許。 李行遠亦請之, 上曰: “若出于外, 則外人皆聞遺書之說, 正陷於其術中矣。” 僉曰: “事端旣發, 雖不出, 外人誰不知之?” 上猶不許。 元斗杓曰: “以禮言之, 不順父母則去。 況潛圖易位, 在瀋僭號, 錯毒之說, 至發於臺論, 士夫之間誰不知姜之可殺, 而當初藥房不卽發啓, 故或有不能詳知者。 貸死之論, 初出於庸孱之輩, 轉成公共之議, 聖敎所謂義理不明者, 豈不甚當乎? 然而謂之出於護黨之論, 則不可也。” 又曰: “埋凶置毒, 雖無承服之人, 可知其必出於疾怨之人, 宮中疾怨之人, 非姜而誰也? 外人之議, 亦以姜氏爲疑者, 十居其九, 長者之論, 亦莫不如是。 聞金尙憲之意, 亦以爲, 天下無不是底父母云。” 上顔色稍解。 人皆以爲: “尙憲之入相, 兆於今日。” 或以爲: “尙憲未嘗言及於此事, 而斗杓藉重, 以證其言云。” 許啓曰: “宮中之事, 外人不得以知之。 故當初臺諫輩, 所以有貸死之請也。” 上勃然曰: “此非人臣所敢發於口者也。 君上之言, 何敢以爲不可信耶?” 啓大懼, 復請窮治錯毒之獄, 期得其端緖, 蓋欲以自解也。 上不答, 左右皆竊笑之。 上曰: “頃日姜之移置於東宮也, 所畜寶貨, 終日輸致, 只留五六封裹於空廊之內而去, 一夜有人折其鎖鑰, 盡散其綺段, 狼藉於地。 又以紙裹數三匹, 揷之於墻壁間, 又出其中白蠟數塊, 投之於溷廁。 其處非偸兒可入之地, 而又似非盜賊之所爲, 故予甚怪之而已。 其後建陽門軍營側, 有以唐楪盛白飯而投之者, 中使得之以告。 鞫問姜之侍人, 則一婢自言: ‘散錦之事, 吾果爲之, 而其後又嘗來探其消息。’ 云。 蓋散錦之計, 則欲歸罪於大殿之人也, 投楪之謀, 欲以爲外間通謀之地也。” 自點曰: “姜氏別置之處, 想必深密, 何以有此姦耶?” 上曰: “姜之被幽也, 外間之事, 無不聞之。 至於姜文星輩被拿而來也, 亦能傳納私書, 停啓之報, 亦能知之云。”
인조 48권, 25년(1647 정해/청순치(順治) 4년) 6월 8일(정축) 1번째기사
최유지를 신구하기 위한 좌의정 이경석의 상소
좌의정 이경석이 상소하여 최유지를 신구(伸救)하고 이어 면직을 빌었는데, 그 대략에,
“신이 최유지의 일로써 등대한 날에 감히 아뢴 것은, 대개 분관(分館)하는 처음에 고치자고 논하는 경우는 있으나 몇 년이 지난 다음에 추후 삭탈하는 것은 일찍이 그런 일이 없었으며, 참으로 공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모두 너무 심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재상과 대간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했으니, 이제 어찌 그 대강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신이 산성에 있으면서 직접 최유지를 보았는데, 유생으로서 늙은 어미를 데리고 성에 들어왔고, 세마(洗馬)를 제수받은 것은 성에서 내려오기 며칠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와언(訛言)이 전파되어 ‘대가(大駕)가 성에서 나가면 몽고가 곧 들어 온다.’하므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성중에 그대로 남아 있는 자들은 그 형세가 심히 위태로웠습니다. 아들된 정리로 차마 늙은 어미를 버려두고 혼자 나올 수 없었으니, 그의 마음이 참으로 어지러웠습니다. 익위사(翊衛司)의 관원을 무신으로 바꾸려 하면서는 시강원에서 최유지를 불러 유고의 여부를 물었는데, 최유지가 들어가 정세를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시강원에서 물어서 말한 것이니, 곧바로 정원에 들어갔다는 것은 실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문답할 때에 시종하는 여러 신하 및 대소의 여러 관원들이 사면에 둘러 앉아 들었는데, 이른바 이치에 어긋났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여러 사람이 아직 살아 있으니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 꺼려한 바가 있었다면 그 죄를 면할 수 없으나, 이미 배종(陪從)을 반으로 줄이라는 명이 있었고, 강문명(姜文明)이 또 세마에 임명되었으니, 최유지 및 다른 세마는 이미 저절로 관직이 없어서 다시 쓸 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가 잘못한 바는 바로 목소리를 높이 지른 데에 있습니다. 목소리를 높이 지른 것은 여러 사람이 알아듣게 하고자 한 것인데, 의심과 비방이 생긴 것은 곧 여기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처음 대간에 임명된 사람은 지금에 와서 비로소 논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 밖에 양사에 출입한 사람을 어찌 해가 지난 뒤에 이 추삭(追削)의 논의를 한단 말입니까. 저번날 탑전에서 마침 말씀드렸는데, 뜻은 간절하고 말이 번다하여 자신도 모르게 말이 장황하게 되었습니다. 물러가 추후에 생각하니 날씨가 춥지 않은데도 오싹해집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신의 죄를 다스려 공의에 답하고 명기(名器)를 중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소를 살펴보고 경의 뜻을 모두 알았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하였다.
○丁丑/左議政李景奭上疏伸救崔攸之, 仍乞鐫免, 略曰:臣以崔攸之事, 敢達於登對之日者, 蓋分館之初, 論改者有之, 追削於經年之後, 曾所未有之擧, 苟有公心, 皆謂已甚。 宰相、臺諫, 曰可曰否, 從古而然, 今何不陳其梗槪乎? 臣在山城目見, 攸之以儒生, 將老母入城, 洗馬之除, 在於下城前數日。 其時訛言騰播以爲, 大駕若出, 蒙古且入, 人人恟懼, 落留城中者, 其勢甚危。 人子情理, 不忍棄老母而獨出, 其方寸固已亂矣。 及其翊衛之官, 將換以武臣, 則有故與否, 講院招問攸之, 攸之入陳情勢者, 因其問也, 直入政院, 似非實狀。 問答之際, 侍從諸臣及大小多官, 四面環坐而聽之, 所謂悖理之言, 未知何說話, 而諸人尙存, 非可誣也。 還京之後, 有所厭憚, 則其罪不可逭, 而旣有陪從減半之命, 姜文明又拜洗馬, 則攸之及他洗馬, 已自無職, 無復可用之事矣。 但其所失, 正在高聲。 高聲者, 稠擾之中, 欲其解聽, 而疑謗之生, 乃基於此。 初拜臺諫者, 今始論之固也, 其他出入兩司者, 何乃於經年之後, 爲此追削之論乎? 向於榻前, 適會言及, 意懇辭繁, 自不覺其縷縷。 退歸追思, 不寒而栗。 伏乞聖慈, 亟正臣罪, 以答公議, 以重名器。
答曰: “省疏具悉卿意。 卿其安心勿辭。”
인조 48권, 25년(1647 정해/청순치(順治) 4년) 7월 17일(병진) 3번째기사
순천부사 김광현의 졸기
순천부사 김광현(金光炫)이 죽었다. 광현은 김상용(金尙容)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온후하고도 간중(簡重)하였다. 과거에 올라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쳐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그의 사위가 바로 강문명(姜文明)인데, 강씨(姜氏)의 화2198)가 일어나 강문명등이 모두 죽었다. 그런데도 상은 오히려 여러 신하들이 강씨를 비호하여 뒷날을 위한 바탕으로 삼지나 않나 의심하였다. 이에 광현이 두려워하여 순천부사로 가기를 청하였는데, 근심으로 죽었다.
註2198]강씨(姜氏)의 화: 인조 24년에 일어난 소현세자의 빈(嬪) 강씨를 사사(賜死)한 사건을 말함. 강씨가 소용조씨(昭容趙氏)를 저주하고 어선(御膳)에 독약을 넣었다고 무고하여 사사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소현세자의 아들인 이석철(李石鐵)등은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죽었으며, 강문성(姜文星)·강문명(姜文明)등 강씨 일족이 형신을 받다가 죽거나 귀양갔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7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강빈지옥(姜嬪之獄).
○順天府使金光炫卒。 光炫, 尙容之子也。 爲人溫厚簡重。 登第歷敭淸顯, 官至吏曹參判。 其壻乃姜文明也, 姜氏禍作, 文明等皆死。 上猶疑群下有護姜, 而爲後日地者。 光炫懼, 求出守順天, 以憂卒。
효종 8권, 3년(1652 임진/청순치(順治) 9년) 4월 26일(정묘) 1번째기사
재해 문제에 관해 민정중이 상소를 올리고, 이에 대해 논의하다
부교리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
“삼가 성상의 하교를 보건대, 성상께서 하늘을 두려워하시고 재해를 경계하시어 몸이 편치 못하도록 반성하시는 한편 전교를 내리시어 방안을 찾으시는데 말뜻이 하도 간절하여 신은 감격한 나머지 감히 생각한 바를 아룁니다. 다만 드리고 싶은 말씀이 기밀(機密)에 관계되는 일이어서 감히 글을 드러낼 수가 없기에 삼가 이 첩황(貼黃)으로써 올립니다.”하였는데,
그 첩황에,
“하늘의 조화가 불행하여 나라가 어려움을 겪게 되자 상하가 걱정에 쌓여 항시 구제하지 못할까 염려해 왔는데 더군다나 하늘의 뜻이 좋지 않아 재앙이 거듭 이르니 국가의 형세가 전도되어서 마치 물이 더욱 깊어진 듯한데, 올해 가뭄이 또 이렇게까지 극심하니 백성들이 불안 속에 다 죽어갑니다. 아, 진실로 크게 한숨짓고 눈물질 만한 때라 하겠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성명께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밤낮으로 애태우시면서 자책하시기를 매우 간절히 하시고 허물 찾기를 매우 급하게 하시면서 널리 바른 말을 찾으시는 등 윤음(綸音)이 간절하시니 백성들도 감격하여 눈을 씻고 우러러 보면서 만분의 일이라도 정성을 바치고자 하는데 더구나 신같이 노둔한 자가 오랫동안 경악에서 모시면서 매우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 망언을 할까 경계하고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한마디도 진달하지 않은 채 성명을 저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인하여 생각건대, 신이 성대한 시대를 만나 외람되게 크나큰 은혜를 입어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미 몇 년을 지냈는데도 한번도 조그마한 도움을 드려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으나 성상께서는 매번 잘 보살펴 주시고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성상께서는 어리석은 신이 취할 것이 뭐가 있다고 이렇게 하셨습니까. 혹시 성상께서 신의 어리석음을 가련하게 여기시고 신이 딴 마음이 아닌 염려와 애착이었다는 것을 살피시어 너그럽게 포용해 주셔서 일 맡길 것에 대비하신 것이라면, 신 역시 어찌 감히 청반(淸班)에 버티고 있으면서 헛되이 성상의 총명(寵命)을 욕되게 하여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을 현명하신 전하 앞에 모두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먼저 신이 평소에 품고 있었던 뜻을 진달하고 그 다음에는 요즘 사정에 대하여 말씀드려서 성상으로 하여금 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통찰하시도록 하고, 신 역시 성상께서 품고 있는 뜻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싶습니다. 신이 처음에 벼슬을 할 때 외람하게 급제하였는데 통적(通籍)한 이래로 누차 근열에 제수되었습니다. 전후 임명에 대하여 감히 굳이 사직하지 않았던 것은 신의 재주와 능력이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다행히 성상께서 임어하시어 탄식을 하며 장차 크게 한번 무엇인가를 해 보시려고 한 때를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정에 있는 신료들은 종종걸음을 치지만 계획이 하루를 미치지 못하고 꾀가 멀리 가지 못하여 위에서는 의지할 바가 없고 아래에서는 명을 받들어 실행한 바도 없이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다가 결국 성상의 의지는 점점 나태해지고 시세는 더욱 떨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랜 국사가 마치 물이 골짜기를 달리듯, 해가 서산에 떨어지듯 하여 이미 쇠잔함이 심하고 어지러움이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장차 우리 성상께서 무엇인가를 하시려는 뜻에 부응하여 천하 후세에 할 말을 남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삼가 자신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허물을 참고 무릅쓴 채 나아가 성상을 가까이 모시고 생각한 바를 모두 진달하고 물러나오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연에 나아가 또 감히 말씀을 다 드리지 못했던 것은 진실로 사람이 미미하고 계획이 천박하여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 뜻을 세워 표준을 삼고, 인재를 모아 원기를 왕성하게 하고,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 백성들의 실정을 통하게 하고, 사공(事功)을 분발하여 대업을 넓히라는 소청을 드렸는데, 신의 정성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의가 천박하고 말이 졸렬하다 보니 마음을 털어놓고 있는 대로 드린 말씀이지만 진부한 얘기거나 망령스런 말이 되어, 마침내 위로는 성상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아래로는 저의 어리석은 생각을 전달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그러나 신이 감히 의혹된 마음을 품고 스스로 움츠러들지 않은 것은, 진실로 임금과 신하 사이엔 성의가 곁들여 있어야 하는데 어리석은 신의 본래의 의도를 전하께서 혹 깊이 살피지 못하셨거나 성상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여러 신하들이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위로는 하늘의 위엄을 엄중히 하시고 아래로는 백성의 사정을 가엽게 여기시어 두려운 생각으로 도모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시니, 바로 이 때가 신하로써 충성을 바칠 날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죄를 무릅쓰고 정성을 다하여 간곡한 저의 심정을 모두 진달하여 전하께서 거두어 주시거나 물리치시기를 바라는 이유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의 뜻이 굳게 결정되셨으므로 신이 감히 번독스럽게 청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인재(人材)를 수습하라는 말에 대해서는 또 다시 반복하여 말씀드리겠으니, 전하께서는 살펴 주소서.
신이 삼가 요즈음의 실태를 보니, 인물이 대단치 않아 조정에 인재가 모자라고 세상일에 마음을 쏟는 자가 드물어 단지 일을 맡고 있는 한두 사람의 신하만이 날로 생활하는 사이에 대처해 나갈 뿐입니다. 천리마를 놓아두고 천리를 가는 일과 뗏목을 타고 큰 바다를 건너는 일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도 그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고종(高宗)이 도를 생각하자 부열(傅說)이 일어났고, 선왕(宣王)이 난리를 평정하려 하자 신보(申甫)가 나왔으니 성상께서도 지성으로 구하면 됩니다. 어찌 요즘 세상이라 하여 훌륭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여자는 자신을 지키는 것을 정조로 삼고, 선비는 재주를 팔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비록 훌륭한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진실로 성의와 예의가 없다면 전하께서 어떻게 그를 쓰실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지난해에 유신들을 후한 예로 발탁할 때에 사람들이 모두 진용되는 것을 기뻐했는데, 신은 홀로 이 사람들이 혹시라도 차질을 빚어 성상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선비들이 일의 실정에 어두워 국가에는 도움이 없다.’고 여기시게 되어 문득 후일 훌륭한 사람을 구하는 뜻에 장애가 될까 염려했었는데, 며칠이 못 가서 이 생각이 과연 들어맞아 일이 시기와 더불어 서로 어긋나 결국엔 낭패를 겪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하에게 말씀을 드리는 자들이 진실로 유도(儒道)로 말씀드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재능이란 반드시 양성한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찾은 다음에 이르러 오는 것입니다. 옛날 성왕(聖王)이 인재를 널리 구하고 예로 초빙하되 조정을 대상으로 하지 아니하고 초야를 대상으로 했으며, 훌륭한 신하와 명철한 선비들이 시대에 호응하여 세상에 나온 자들은 현달한 자가 아니고 한미한 자들이었으니, 오늘날도 초야에 은거하면서 전하의 요구에 응하여 전하의 뜻을 이루어줄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신이 지난번 경연에서 이러한 뜻을 대략 진달하였으나 감히 두루 지적하여 말씀드리지 않았던 것은 사실 사람이 못나고 직책이 낮아서 천거하지 않았던 것으로, 한번 신의 입에서 나오게 되면 문득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경시되어 피차가 손해만 있고 아무런 이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성심을 갖고 구하신다면 그 사람을 모를까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오늘날 전하께서 사람을 구하시고 말을 채용하시는데 있어서 마음에 거스리는 데서 찾지 않고 뜻에 영합한 말이나 사람만 구하고 들으시므로, 조금 두각(頭角)을 드러낸 자는 조정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시사(時事)의 그릇된 것 중에서 가장 크게 그릇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백성들의 실정이 누구를 말미암아 통하겠으며, 일이 누구를 말미암아 수립되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신이 한밤에 잠을 못 이루고 탄식하며 매번 말을 아니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아, 바야흐로 지금 나라의 형편은 자주 위축되고 하늘의 경계는 기세가 대단하므로 말할 만한 일도 신이 다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또 신의 마음에 서려 있는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 바다에 표류한 한인(漢人)은 어찌 우리가 옛날에 섬겼던 명나라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설령 국가가 불행하여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차마 모두 그들을 포박하여 조금도 거리낌 없이 원수에게 몰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인정상 답답한 일이며 성상의 마음에도 슬픈 일입니다. 더구나 지난날 보냈던 자들이 모두 사형을 당했는데, 지금 이들이 죽음을 면치 못할 줄을 알면서 또 죽을 곳으로 강제로 보내는 것은 어찌 우리나라가 차마 할 일이겠습니까. 이들이 거친 파도에 표류하여 가까스로 살아나 하늘이 내려준 도움으로 우리나라에 도착한 것이므로 그들은 옛날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을 곳으로 여겼을 터인데, 도리어 천 리 밖으로 보내어 모두 북쪽으로 보낸다면 그들의 불쌍한 처지를 설명하기에 어찌 많은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인정상 차마 못할 일이며 하늘의 뜻도 반드시 편치 못할 것입니다. 옳지 못한 일을 행하여 죄없는 자를 죽이는 일이 어찌 하늘의 화기(和氣)를 손상시켜 흉재(凶災)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제주(濟州)는 본래 바다 가운데 있는 절도(絶島)이므로 피차의 소식이 누설되지 않을 만큼 비밀스런 곳입니다. 지금 만약 배를 마련하여 보내 가고싶은 대로 가도록 맡겨 둔다면 뜻밖에 발생할지도 모를 환란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만일 그들을 섬에 있게 하고 늠료(廩料)를 약간 지급하여 죽지 않게 해주어 여생을 마치게 한다면 은혜와 의리를 펼 수있고 조처하기도 편리할 것입니다. 비록 다시 간사한 적들이 은밀히 내통하여 오랑캐들이 책망을 한다하더라도 가서 확인해 보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빈말로만 위협을 할 것이니 사세를 미루어 헤아려 볼 때 필시 큰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난날 그들을 잡아보낼 때에 정적(鄭賊)이 오히려 ‘너희 나라에 쇄마(刷馬)가 얼마나 많은가?’하였는데, 그 마음에는 우리나라에 계획이 없다는 것을 가소롭게 여겼던 것입니다.
지금 어찌 이 일을 거울삼아서 전에 했던 일을 징계로 삼지 않으십니까. 만에 하나 끝까지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장차 바른 말로 말하기를 ‘명나라는 지난날 우리 부모 나라가 아닙니까. 지난번에 대국(大國)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보았는데 진실로 그러한 줄을 알면서 차마 죽을 곳으로 몰아보내지 못해서이지 딴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고 하면, 저들이 비록 짐승과 같은 자들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이 일 때문에 한나라의 화친을 잃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신이 붓을 들고 여기까지 쓰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성상께서는 어떻게 여기십니까. 지난날 이무(李袤)가 신생(辛生)을 국문하자고 청한 것은 이무의 말이 아니라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의 공통된 말이었습니다. 이무가 위엄 아래 감히 말을 다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만, 신은 임금과 신하는 아비와 자식과 같은데 생각한 바가 있으면 어찌 감히 모두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됩니다.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강역(姜逆)의 옥사가 처음에 나인들 사이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조역(趙逆)과 김적(金賊)이 실지로 그 일에 참여하였다고 하니, 온 세상이 듣고서 놀라움과 당혹을 금치 못했습니다. 지난번에 두 역적이 이미 패하여 간사한 꾀가 모두 드러났는데 지금 여항간 대중들의 말에 더러 두 역적의 간교함이 위로 성상의 귀를 가리울 수도 있다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것이 외인들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여기는데 전하께서 반드시 모두 통촉하시어 두루 살피셨으리라 생각됩니다만, 만일 혹시라도 그 사이에 한 가지라도 의심할 단서가 있으면, 형제의 인륜은 하늘에서 근본한 것이니 속히 신설하여 구천에 있는 영령을 위로하고 재앙(災殃)과 여기(戾氣)를 이완시키소서. 다만 생각건대, 이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되므로 전하께서 필시 이 때문에 어렵게 여기시겠지만 그럴 듯한 방법으로 속이면 현명한 사람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니 어찌 선왕의 큰 덕에 누가 되겠습니까. 오늘날 잘 계승하고 잘 기술한다면 선왕에게 빛이 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선왕의 영령이 어찌 이 일을 전하에게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옳고 그름에 관하여 흔쾌히 결정하시어 백성들의 의혹을 제거하는 것이 또한 가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자녀들은 왕가의 혈속인데, 어린 아이로서 아직도 섬에 갇혀서 그 목숨이 실낱같이 위태롭습니다. 만에 하나 하루아침에 안개와 이슬에 병을 얻어 제 명대로 다 살지 못하고 죽게 되면 비록 다시 소급하여 불쌍히 여긴다 하더라도 이미 때는 늦습니다. 성상께서도 이를 염려하시어 누차 자비로운 말씀을 하셨으나 그때마다 대신은 매번 오랑캐 사신이 와서 물을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두었습니다. 형편상 어려운 점이 비록 이와 같다고는 하나 알맞게 처치하는 것이 실지로 우리에게 있으니, 어찌 성상의 뜻을 받들어 실행하여 우리 성덕을 넓히지 않는단 말입니까. 더구나 그 딸이 성장하여 이미 오래 전에 시집을 갔으니, 마땅히 추은(推恩)하여 관직과 급료를 주어 속적(屬籍)토록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어찌 우리 임금의 혈속으로 하여금 시골에 파묻혀 한 고을의 평범한 사람이 되어 살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유계(兪棨)의 경우는, 신이 용서해 주어도 되겠다는 글을 두 번이나 올렸는데 지금 듣자니 심리하는 문안에 그의 성명을 지우고 황지(黃紙)를 붙여 내렸다고 합니다. 이는 전하께서 윤기(倫紀)의 밖으로 내치시어 심하게 끊어버린 것입니다. 신은 그지없이 두렵고 황송하여 비로소 전에 드린 말씀이 망령된 것으로서 스스로 큰 죄인을 옹호하는 처지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감히 죄를 짓고 안이하게 혼자만이 형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벌을 내리시어 신의 죄를 밝히소서. 그러나 어리석은 신이 감히 목숨을 걸고 한 말씀 드리겠으니 성상께서는 더욱 유의하소서. 신이 듣건대, 까마귀와 솔개의 알을 깨뜨리지 아니해야만 봉황새가 찾아오고 비방한 죄를 벌주지 않아야만 아름다운 말을 해주는 자가 온다고 하였습니다. 설사 유계의 광망(狂妄)함이 만일 비방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오히려 성세(盛世)에 가두어 두지 말아서 허물을 감싸주는 덕을 드러내야 합니다. 유계는 선조(先朝) 때 시종(侍從)하던 신하일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 일찍이 관대하게 여겼던 자가 아닙니까. 어찌 감히 선왕을 비방하여 스스로 막대한 죄를 지었겠습니까. 당초에 유계가 유신으로서 국가의 큰일을 당하여 단지 전례(典禮)를 토론하여 성상의 참고로 드리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그러한 유계를 만약 비방한 죄로 꾸짖는다면 온 나라가 모두 그의 원통함을 인정할 것입니다. 유계는 본래 충성심이 강한데다 소박하고 우직한 자로서 말주변이 없는데 거듭되는 참소에 성상께서 속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성상께서는 마음을 풀고 기운을 평이하게 가지시어 다시 더욱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원한을 품게 되면 하늘의 기운도 어긋나게 되는 것인데 유계만 드넓은 은전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공평하게 감싸주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신이 성상의 자애로움을 믿고서 죽음을 무릅쓰고 번독스럽게 하였으니, 신의 죄는 만번 죽어야 할 만큼 큽니다. 생각건대 신이 진달한 바가 말하지 않아야 할 말을 한데다, 또 극히 망령됩니다만 이미 생각한 바를 모두 말하라는 분부를 받고는 저의 직분을 헤아려 보건대, 또한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려야 하겠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리오니, 혹시라도 채납되어 전하께서 하늘을 두려워하여 재해를 이완시키려는 실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신이 말씀드리는 것은 모두 국가의 기밀이므로 쉽게 누설이 되어 뜻밖의 환란을 초래해서 그들의 노여움만 사 위로 성덕(盛德)에 누가 될까 염려되었습니다. 구구한 저의 어리석은 충성심이 이것을 보았기 때문에 감히 이와 같은 사실을 손수 써서 밀봉하여 진달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조금이나마 살펴 주소서.”하였다.
상소를 들이자, 상이 즉시 그를 불러들여 대면하고 이르기를,
“그대의 상소를 보니, 대체로 전지에 응하여 상소한 말이었다. 역강(逆姜)의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그대가 어떻게 들어서 알고 이 말을 하였는가?”하니, 민정중(閔鼎重)이 대답하기를,
“신이 오랫동안 가까운 반열에서 모시고 있었으나 도움을 드린 바가 없던 차에, 마침 하늘이 재해를 내려 경계를 보여 가뭄이 매우 참혹한 시기를 만나 성상의 심기가 걱정과 두려움에 쌓여 밤낮으로 편치 못해 하시다가 전지를 내리시어 해결책을 구하시는 등 정성이 지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직분상 끝까지 잠자코 있을 수 없어 감히 생각한 바를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역강(逆姜)의 옥사에 대해서는, 신은 나이 젊은 신진이므로 그 옥사가 처음 발생했을 당시의 실정을 자세히 모릅니다. 대체로 이 옥사가 궁중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사이의 실상에 대해서 외인들로서는 알기도 어려운 바이며 말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변란이 지친에게서 발생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당혹해 하였는데 그 당시 어떤 사람은 조역(趙逆)과 김적(金賊)이 실지로 그 일에 참여하였다고 하자, 여항(閭巷) 간에서는 서로 의아해 하며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두 역적이 법의 심판을 받아 간사한 꾀가 모두 드러나니 사람들은 더욱 당혹해 하며 모두가 두 역적이 속여가지고 그 옥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는 필시 그들의 정상을 통찰하셨을 것입니다. 진실로 의혹스러운 단서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천륜(天倫)의 지극한 정에 필시 애처로움이 배나 될 것이니, 신생(辛生)을 엄하게 국문하여 그들로 하여금 즉시 원한을 풀게 하고, 만일 역모한 사실이 명백하다면 역시 빠른 시일 내에 시비를 결정하여 온 나라 사람들의 의혹을 말끔히 제거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법(常法)으로 말하면 그대는 중죄를 면하기 어려우나 내가 이미 구언(求言)을 하였고, 그대가 진달한 것도 생각한 바를 반드시 진달하겠다는 뜻에서 나왔으므로 직접 대면하여 말하고자 한 것이다.”하자,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생각한 바가 있어서 죽음을 각오하고 소를 올렸는데, 너무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죄를 주지 않으시고 사대(賜對)까지 받게 하셨으니, 황공하고 감격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결정난 옥사를 다시 언급할 것이 없다만, 외부 사람이 이 일 때문에 시끄럽게 했던 것은 선왕(先王)께서도 일찍이 아셨던 일이다. 대체로 이른바 조역(趙逆)과 김적(金賊)를 의심하게 된 것은 아마 맨 처음에 의혹을 풀지 못해서 그런 것일 것이다. 이 옥사는 심상한 사변이 아니었는데 어찌 한두 흉도가 선왕을 속일 수 있었겠는가. 설사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살아있을 때에 이러한 사변이 있었다하더라도 지금 두 역적의 흉계로 본다면 혹 의혹할 만한 일이 없지 않을 것인데, 소현세자가 이미 죽었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도 결코 기업(基業)을 부탁할 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외부 사람도 다 같이 아는 바이므로 두 역적이 실로 꺼릴 바가 없는데, 어찌 계획을 세워 속임수를 썼을 리가 있겠는가. 역강(逆姜)이 신임했던 의정(義貞)이라고 하는 계집종이 취복(就服)한 공사에, ‘강씨가 황금 3, 4냥을 자주 본가에 보내왔다.’고 하니, 이점으로 보아 많은 돈을 나누어주어 수많은 무리를 결속한 것이 반드시 이것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이러했기 때문에 불량배들이 그 실상을 감추고 근거없는 말을 주장한 것인데, 세속 사람들은 원래 주된 견해가 없는데다가 시비를 잘 알지 못하므로 와전된 말에 선동되어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못하게 하고 말았으니, 필경 아름답지 못한 말이 생겨서 과인에게까지 미칠 줄을 나는 알고 있다.
지난날 신생(辛生)을 국문하자고 청한 말은 진실로 매우 한심하다. 외부 사람이 이렇게 의심을 하므로 선왕이 매번 이것을 염려하였으며 예옥(禮玉)이【강씨의 어미이다】승복한 것에 대하여, 혹자는 김자점(金自點)이 위협하여 억지로 단안(斷案)을 만들었다하니,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강문성(姜文星)의【강씨의 생질이다】첩이 저주하는 묘기가 있어 문성의 후처가 그의 저주를 받고 죽었다한다. 대개 그의 흉악한 모의가 처음엔 그 집에서 비롯되어 결국엔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이 서로 구제하였던 것이다. 만약 근거가 없는 일이라면 저주한 그 일의 진상을 어떻게 그가 승복한 공사에 명백하게 언급하였겠는가. 이 일은 위협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닌데도 세상 사람들은 아는 자나 모르는 자 모두가 한결같이 의심을 하고 있으니, 애석하게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생(辛生)을 국문하자고 청한 것은 김진종(金晉宗)이 이른바 승려를 엄하게 국문하면 자연 승복할 것이라는 말과 서로 같으니, 매우 무리한 말이다. 그대는 나이가 젊은 사람이므로 그 당시 옥사의 실정에 대하여 필시 다 알지는 못할 것이다.”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그 일의 실상에 대하여 자세히 들어보지 못했었는데,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고 나니 그 전의 의혹이 깨끗이 풀렸습니다. 지난날 이무가 그 일의 단서에 대하여 약간 언급하였으나,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못했는데 신의 생각에는 임금과 신하는 아비와 자식 같으므로 진실로 들은 일이 있으면 마땅히 숨김없이 말씀드려야 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감히 상소하였던 것입니다.”하였다.
승지 이홍연(李弘淵)이 아뢰기를,
“지금 매우 자상하신 성상의 하교를 받고 나니, 신하들의 의혹이 이젠 풀리게 되었으며, 여항간에 떠도는 실없는 말도 이제는 그치게 되었습니다. 다만 무리를 결속지었다는 하교에 대해서는 실로 매우 미안합니다. 오늘날 전하의 신하 중에 어느 누가 역강의 무리란 말입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떠도는 말이 그 반역의 실상을 숨겼으므로 내가 이것을 지적하여 말한 것이지 오늘날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이미 말의 실마리를 끄집어냈으니 모두 말을 하겠다. 국가가 불행하여 대역부도한 사람이 궁중에 들어왔으니 그 일을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소현(昭顯)은 본래 착한 사람이었으나 다만 마음속에 주장이 없는 병통이 있었다. 그래서 비할 데없는 험악한 역강(逆姜)이 오직 애써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흉패한 일을 자행하였지만, 소현 역시 제재를 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로부터 왕가(王家)의 형제들이 어렸을 때부터 각각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다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또 각기 다른 곳에 거처하므로 실지로 서로 모여서 지내는 즐거움이 없고 동궁(東宮)에 있어서는 명분이 존엄하므로 또 자주 서로 만나볼 수가 없다. 선왕(先王)께서 일찍이, 친한 동기간에 각기 다른 곳에 거처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시고 이 법규를 과감하게 없애버린 다음 나의 형제에게 명하여 어릴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한 집에서 거처하기를 마치 평범한 사대부 집에서처럼 하였으므로, 높고 낮은 구분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서로 우애하는 정이 다분하였다.
그런데 변란 후 내가 심양에 잡혀 갔을 때 강씨가 하는 행위를 눈여겨보니 비할 데 없이 흉험하였는데, 소현은 끝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선왕이 일찍이 소현이 현명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지난날 심양에 갔을 때 강씨가 평소에 탁자를 받쳐 놓았던 나무 조각을 다락 위에 두었다가 돌아올 때에 소리쳐 말하기를 ‘나무 조각에서 가지와 잎사귀가 돋았다.’고 하면서, 감춰두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더니, 소현의 상을 당해서는 또 곡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이것을 신기한 상서라고 여겼는데 지금 도리어 재앙이 되었다.’하였는데, 대체로 세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상서를 바란다는 것은 이것이 과연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옛날 허세자지(許世子止)가 약을 맛보지 않은 것에 대하여 옛 사람은 오히려 임금을 시해했다596)고 하였는데, 이 일 또한 어떠한가. 소현(昭顯)이 병이 나자 의원이 진찰을 해보고 조심하여 조섭하지 아니한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강씨가 싫어하여 이 사실을 숨겼으며, 소현의 상을 당한 뒤에 유복자(遺腹子)마저 살해하여 그 병을 숨긴 흔적을 엄폐하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하는데 무엇을 차마 못하겠는가. 사람의 아비로서 미혹한 마음에 가리워져서 심지어 자식까지 죽이는 경우가 옛날에도 간혹 있었으나 어미로서 자식을 죽이는 경우는 무조(武曌)597)말고는 들어보지 못했으니 사람의 도리로 책망할 수조차 없다. 내가 효성이 없어 남에게 신용을 받지 못하므로 세상에 떠도는 실없는 이야기가 오래까지 그치지 않고 있으니, 내 매우 통탄해마지않는다.”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성상의 하교를 듣고 나니 모든 의혹이 환하게 풀렸습니다. 이후부터는 신민들도 마땅히 의혹을 풀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었다면 내가 어찌 지금까지 그대로 두었겠는가. 그 아이는 바로 소현의 혈속이며, 그들의 죄가 아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본래 질병이 많으므로 항상 서울로 데려오고 싶었으나 마침 구애되는 일이 많아서 뜻대로 하지 못했다. 재자관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곳 형편을 들어본 다음에 천천히 처리하려고 한다.”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아이 역시 건강하지 않다고 하는데, 만일 어느날 갑자기 기후(氣候)에 몸을 상하여 섬에서 죽게 되면 아마도 전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도리가 아닐 듯 싶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염려하고 있었다. 마땅히 잘 처리하도록 하겠다.”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그 사위는 지금 아무 직명이 없어 보통 사람과 같습니다. 국법에 의친(儀親)의 자손이라 하더라도 으레 보관(補官)을 주는 규정이 있는데, 이 사람은 바로 소현(昭顯)의 사위입니다. 왕가(王家)의 혈속을 향리에 사는 보통 사람과 비등하게 할 수 없으니, 관직을 제수하고 녹봉을 주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일은 조정에서 마땅히 잘 헤아려 처리할 것이다.”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탐라(耽羅)로 표류해 온 한인(漢人)은 비록 그대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나 역시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 대의(大義)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의 도리로만 따져봐도 사실 차마 못할 일이다. 지난날 우리나라 사람이 잘 처리하지 못하고 명나라의 백성을 묶어서 호랑이 입에다 던져넣어 마침내 모두 참사를 당하게 하였으니, 내 항시 통한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 지금 또 이자들을 저들에게 몰아 보내다니 내가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겠는가. 다만 생각해 보면 이미 잘 처리하지 못했으니, 비록 따뜻한 약간의 인정을 베풀어 숨겨주고 보내지 않는다하더라도 국가의 계획으로 보면 비밀이 누설될 염려가 없지 않고, 누설된 뒤에 저들이 비록 우리나라에게 책망한다하더라도 그 염려가 반드시 국가가 멸망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 그런데 매번 이러한 일로 그 허물을 일을 맡고 있는 신하에게 돌려 으르고 놀리며 만가지로 욕을 보이고 있다. 이경석(李景奭)과 이경여(李敬輿)는 모두 일을 맡았던 대신으로 거의 불측한 지경에 빠져 아직도 버려진 가운데 있는데, 나로 하여금 임의로 쓰지 못하게 하니 실지로 다시 이와 같은 염려가 있을까 염려된다. 지금 나라를 원망하는 간사한 무리가 기회를 틈타 꾀를 부리려고 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인데, 국가에서 진실로 살펴 분변하기가 어려우므로 비록 의심스럽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너는 필시 음흉한 역적일 것이다.’ 하고서 죄를 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는 미봉책을 쓰는 것만 못하므로 한갓 스스로 개탄만 하고 있다. 내 이미 재주가 없는데다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도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어 시세(時勢)가 여기에 이르니 일이 구차하고 소략한 경우가 많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천리나 되는 넓은 땅을 소유하고서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했는데, 지금 수천 리나 되는 강토를 가지고서 움추린 채 활기를 되찾지못하고 있으니 더욱 한스럽다.”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시운이 불행하여 이 어려움을 당했는데, 기밀이 사전에 드러나 비밀스러운 계획이 없으니 어찌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표류해 온 한인(漢人)을 지금 만약 배를 마련해서 돌려보내면 뜻밖에 생길지도 모르는 화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주(濟州)는 절도이므로 모든 일을 비밀리에 할 수 있으니, 그들을 섬 안에 있게 하고 관에서 늠료(廩料)를 지급하여 여생을 마치도록 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은 잘 생각해 보고 한 말이라고 하겠다. 다만 만약 비밀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결국 저들의 힐책을 받을 것이니, 당초에 곧바로 보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대 말을 시행하기 어렵다마는, 이 다음부터는 비국에 말하여 변신(邊臣)에게 분부하기를 ‘혹시라도 다시 이와 같은 일이 있을 경우 수신(帥臣)에게 번거롭게 보고할 것 없이 바로 비국에 알려 품처토록 하되, 만일 타고 있는 배가 견고하여 실을 만하다면 그곳에서 잘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고 배가 부서진 경우에도 즉시 치계하여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고 시끄럽게 소문이 나지 않게 하라.’고 하라.”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지난해에 불러 쓴 신하들은 모두 시골에서 글을 읽던 사람으로 돈독하게 수양을 한 공이 있으니, 만약 그들을 조정에 있게 했다면 어찌 세상의 모범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하고 꺼려하는 바가 되지 않았겠는가. 그 당시 흉적의 무리들이 저희들에게 이롭지 않다고 여기고서 오량캐에게 유언비어를 퍼뜨려 그들로 하여금, 척화(斥和)하는 거조가 다시 재야 선비들한테서 나올 것이라고 의심을 하게 하여, 마침내 위협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시세가 이렇게 되어 그들을 다시 쓰지 못한 것이지 내가 어찌 그들을 잊어버려서 그러했겠는가. 실지로 이 두세 명의 신하에게 화를 끼치게 될까 두렵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그 당시에 송시열(宋時烈) 등이 일을 세밀하게 하지 못하여 마침내 낭패되고 말았는데 신은 실로 한스럽게 생각합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무릇 사람의 재주에 대하여 어떻게 두어 달 만에 능력이 있는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송시열을 재주가 없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가 재주가 있는지 없는지 아직 시험해 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지난번에 송시열의 상소에 대하여 내가 비답하기를 ‘비록 시골에 있다하더라도 생각한 바가 있으면 숨기지 말고 모두 진달하여 나의 헛점과 실책을 보완토록 하되 마치 좌우에 있는 것처럼 하라.’고 했던 것은 사실 뜻한 바가 있어서였다. 다만 형편에 구애되어 지금은 채용할 수 없기때문에 그 말을 들어보려고 한 것이다.”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렀으니 실로 이는 신민의 다행입니다. 선비가 세상의 실정에 대하여 어두운 점은 있다하더라도, 성상의 좌우에 두어 드나들며 바른말을 하게 하여 위로는 성상의 덕을 보필하고 아래로는 세상의 본보기가 되게 하는데 있어서는 선비가 아니면 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날 불러 쓴 신하는 비록 청나라 사람에게 말을 들을까 혐의스러우나 이밖에 어찌 또 채용할 만한 훌륭한 인재가 없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시골에 있는 사람이라도 구애되는 바가 없는 자라면 내가 채용할 수 있다. 과연 누구를 지목하겠는가?”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현재 윤휴·윤선거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유학(儒學)으로 당대의 촉망을 받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특명으로 백의(白衣)를 소견하시기를 고사(古事)처럼 하시어 제각기 갖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게 하여 그들의 재주가 쓸만하면 채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돌려보내는 것이 가합니다. 윤휴와 윤선거는 모두 세신(世臣)인데, 만약 그들의 인품을 논한다면 윤휴는 재주와 식견이 탁월하고 윤선거는 국량이 견고하고 확실합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선비를 채용하는 방법은 조용히 순서에 따라 해야 하는데, 매양 서둘러 진용하려 하고 세상 사람들도 또 따라서 지나치게 책망을 하여 낭패를 사게 하니, 이야말로 탄식할 일이다.”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요즈음 사람들 가운데 세상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자는 실로 쓸만한 재주가 없습니다만, 이 사람들은 비록 시골에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잊지 않은 자들이니, 전하께서 정성을 다하여 부르시면 어찌 나와서 전하의 쓰임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의 재주와 학문은 세상에서 추대하는 바이니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하자,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그들의 성명(姓名)을 써서 올리게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그대의 상소 중에 유계의 일을 논하면서 ‘별도로 참소가 자주 있었던게 아니냐.’고 한 것은 까닭이 있다. 그대만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전부터 이런 말이 있었다. 이른바 관용을 베풀었다는 말은 당초에 옥당이 차자를 올렸을 때 너그럽게 답한 것을 지적한 듯한데, 이는 많은 관원에게 답한 것이지 어찌 유계를 위한 것이겠는가. 유계가 상소를 올린 뒤에 곧바로 그의 죄를 다스리지 않은 것은 졸곡(卒哭)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처리하고자 해서였다. 내가 어찌 사람들이 참소하는 말을 듣고서 죄를 주겠는가?”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이른바 너그럽게 용서를 했다는 것은 상소를 한 후에도 여러번 근반(近班)에 제수되었기 때문이었고, 이른바 참소가 자주 있었다는 것은 신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실정이 아닌 일로 성상의 노여움이 갈수록 격렬했으므로 그 이유를 찾지 못하여 혹시 이러한 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 것이니, 가상적으로 한 말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계가 당초에 단지 상소만 했었다면 어찌 노여워할 것이 있었겠는가? 논계(論啓)하여 기필코 자기의 뜻을 펼치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이 미웠던 것이다.”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이 일에 대하여 신이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그를 용서해 주는 것이 가하다는 상소를 누차 올렸었습니다만, 지금 마땅히 그 말씀에 대하여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그 당시에 전하께서 새로 즉위하셔서 언관을 너그럽게 대하셨으므로 단지 종조(宗祖)와 시호가 겹치는 것을 미안하게 여겼으므로 전례에 합당하지 않은 점을 진달하려 했던 것입니다. 부제학 여이징(呂爾徵)이 최초로 그 논의를 제기하여 두 번이나 회의를 하였지만 결국 차자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심대부가 예를 논의한 거조를 중간에 그만 둘 수 없다하고 먼저 상소를 올렸는데, 유계도 상소를 잇따라 올렸습니다. 유계가 간관(諫官)이 되었을 때 사피한 말이 실책이 많았으므로 이 일로 죄를 삼으면 저도 달갑게 여기겠지만 이는 언어의 실수에 불과합니다. 그가 선왕을 폄하하고 박대했다는 하교에 대해서는 신은 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 뒤에 조빈(趙贇)은 사간이 되고 유계는 헌납이 되었는데, 조빈은 말하기를 ‘이 일은 막대한 전례이므로 다시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하고 유계도 말하기를 ‘대간이 아뢴 말은 사체가 자못 달라 임금을 의논한 일에 가까우므로 차자를 올려 논쟁하는 것만 못하다.’하니 조빈도 그럴 듯하게 여겨 연명(聯名)하여 차자를 올리려고 이미 상소를 초해 놓았는데, 다른 일로 인하여 체직되는 바람에 그 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유계 등의 본정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 사람은 충후(忠厚)한 기풍이 있었다. 송 인종(宋仁宗)이 미세한 잘못이 있다 하여 상미인(尙美人)과 여이간(呂夷簡)의 참소를 받아들여 후비를 폐치하는 행위를 하였는데도 당시에 심히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고 묘호(廟號)를 인종(仁宗)이라고 하였었다. 모르겠다만 요즈음 사람의 논의가 송나라 선비보다 얼마나 뛰어나기에 기필코 자기의 뜻을 펼치려 하는가?”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진달하는 것은 그 본정이 사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설령 유계 등이 비방한 죄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성명의 세상에서 금고를 당하게 하여 허물을 덮어주는 덕성을 보여주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구언하는 전교를 내리지 않았더라도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은 마땅히 생각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여야 할 것인데 하물며 내가 이미 구언하였고 그대가 또한 숨김없이 모두 진달하였으니, 내가 과실로 여기지 않는다. 비답을 내리지 않은 것은 번거롭게 소문이 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그대를 불러보고 하유하는 것이다.”하였다.
註596]허세자지(許世子止)가 약을 맛보지않은 것에 대하여 옛 사람은 오히려 임금을 시해했다: 춘추시대 허(許)나라의 도공(悼公)이 여름철에 병이 들어 세자가 올린 약을 먹었는데, 중독이 되어 죽으니, 춘추전에 “‘허세자가 그 임금을 죽였다.’고 썼다. 이는 세자가 아버지가 먹을 약을 먼저 맛보지 않은 것을 죄준 것이다.”하였다. 《춘추전(春秋傳) 소공(昭公) 19년.註 597]무조(武曌): 당(唐)의 측천무후. 고종(高宗)의 후비(后妃)로 고종의 사후에 그의 아들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고쳤음.
○丁卯/副校理閔鼎重上疏曰:伏覩聖上畏天驚災, 側身修省, 下敎求言, 辭意懇切, 臣不勝感激, 敢陳所懷, 而第其所言, 有關機密, 不敢露章, 謹此貼黃以上。其貼黃曰:天造不幸, 國步艱虞, 上下惴惴, 恒恐莫濟, 而加以天心不豫, 災沴荐臻, 國勢顚隮, 如水益深, 而今歲之旱乾, 又至此極, 民庶遑遑, 大命近止。 嗚呼! 誠可謂太息流涕之秋也。 臣伏覩, 聖心儆懼, 夙夜焦煎, 自責甚切, 求過甚急, 敷求直言, 綸音懇惻, 凡在臣民, 莫不感激拭目, 思欲效萬一, 何況如臣駑劣, 久侍經幄, 受恩深厚, 其可以妄言爲戒、獲罪爲懼, 不進一言, 孤負聖明哉? 仍念, 臣遭遇盛際, 濫荷洪私, 忝在侍從, 已經數年, 未嘗有一毫裨益, 有所報答, 而然聖上每軫眷渥, 不賜屛斥。 不知聖上, 何取於愚臣而至於此也? 或者, 聖上憐臣愚戇、察臣憂愛, 靡他, 優容假借, 以備任使, 則臣亦何敢竊冒淸班, 虛辱寵命, 而不盡胸中之所蘊於明主之前哉? 臣請先陳臣之素志, 次及近日之事, 俾聖上有因察臣愚衷, 而臣亦欲知聖志之所存, 果如何耳。 臣初爲祿仕, 濫竊科第, 通籍以來, 累除近列。 前後拜命, 不敢固辭者, 非謂臣之才分自能堪當, 幸値聖上臨朝, 發嘆將大有爲, 而顧惟在廷之臣僚, 蹜蹜計不及日, 謀不及遠, 上無所倚仗, 下無所承奉, 荏苒日月, 終至聖志漸懈, 時勢益隤, 悠悠國事, 如水赴壑, 如日下山, 衰微旣甚, 亂亡成象, 將無以仰副我聖上有爲之志, 而爲天下後世辭。 故臣竊不自量, 忍尤冒進, 庶幾獲近天光, 一陳所懷, 而奉身以退。 及登筵席, 又不敢盡言者, 誠慮人微計淺, 無足裨補。 然其請立大志, 以爲標準; 收拾人材, 以壯元氣; 廓開言路, 以通下情; 奮發事功, 以恢大業, 臣之眷眷, 要不出此, 而誠意淺薄, 辭說拙訥, 其所敷心瀝肝之言, 未免陳談妄說之歸, 竟不能上感天聽, 下達愚悃, 此則臣之罪也。 然臣不敢便生疑惑, 輒用自沮者, 良以君臣之間, 貴在誠意交孚, 愚臣本意, 殿下或未之深察, 聖心所在, 群下不可以窺測也。 方今殿下所以上嚴天威, 下恤民隱, 惕厲圖惟, 靡不用極, 則正是人臣效忠之日, 此臣之所以冒竭惓惓, 思欲畢陳危衷, 以冀殿下之進退之矣。 伏惟聖志堅定, 臣不敢瀆請, 而收拾人材之說, 請又以反覆之, 而惟殿下垂察焉。 臣竊觀近日人物眇然, 朝廷乏才, 經心世務者, 罕見其人, 只有一二當事之臣, 酬應於日用之間而已。 舍騏驥而致千里, 乘泛柎而濟大海, 不待智者, 而知其難矣。 高宗思道而傅說起, 宣王撥亂而申甫降, 在聖上至誠以求之耳, 豈以今世而無賢哉? 然女以自守爲貞, 士以不衒爲貴。 雖有龍蟠鳳逸之賢, 苟無誠與禮也, 殿下烏得而用之哉? 至於向年儒臣等之優禮奬拔也, 人皆喜其進用, 臣獨慮是人等, 或不無差失, 不能盡副聖心所須, 以爲儒者闊於事情, 無益於國, 而便沮日後求賢之志, 曾未幾日, 此慮果符, 事與時違, 終致狼狽。 今日進言於殿下者, 固知難以儒說。 然人之才, 必有養而後成, 有求而後至。 古昔聖王, 旁求禮招者, 不朝而野; 碩輔、哲士應時而出者, 不顯而微, 則當今之時, 隱伏山野, 足以應殿下之求, 而成殿下之志者, 又安知其無是人哉? 臣頃於筵席, 略陳此意, 而不敢歷指以告者, 實恐人微職卑, 不堪薦進, 一出臣口, 便輕衆望, 彼此有損, 徒爲無益爾。 殿下苟能誠心以求, 何患不知哉? 抑又今日殿下之取人聽言也, 不于逆于心, 而于遜于志, 是取是聽, 稍有頭角者, 便不能自立於朝, 此恐時事乖違之大者也。 下情何由而通, 事功何由而立乎? 此臣之中夜竊歎, 而每不能忘言者也。 嗚呼! 方今國勢頻蹙, 天戒爀然, 可言之事, 臣不能悉, 抑又以所槪於臣心者, 言之可乎? 嗚呼! 漂海漢人, 豈非我昔日天朝之赤子乎? 設令國家不幸至此, 尙何忍一切縛縶遺黎, 驅送仇敵, 略無疑難哉? 此誠人情之所怫鬱, 聖心之所怛然者也。 況前日所送, 皆被屠殺, 而今又知其不免, 而迫就死地, 豈我國之所可忍爲也? 此輩飄蕩海濤, 九死十生, 賴天之賜, 得到我疆, 心念舊日, 謂得活境, 而轉俘千里, 悉投有北, 其爲矜惻, 奚足多言? 人情之所不忍, 天意亦必有不平者矣。 行不義、殺無辜, 豈不足感傷天和, 以致凶災乎? 濟州本是海中絶島, 彼此消息, 可秘勿泄。 今若具船以送, 任其所之, 則意外之患, 不可不念, 如其接置島中, 略給廩料, 待以不死, 以終其年, 則恩義旣伸, 擧措亦便。 雖復奸賊陰通, 虜人致責, 旣難往驗, 空言肆嚇, 逆料事勢, 必無大患。 況前日執送之時, 鄭賊猶云: “爾國刷馬幾許多也?” 其心固已竊笑我國之無謀。 今胡不鑑於此, 而懲前之爲哉? 萬有一不得終秘, 則我將直辭以言曰: “天朝非前日父母之國乎? 向者旣見大國之屠殺, 誠不忍知其然而迫就死地也, 非有他也?” 彼雖豺狼, 固不欲以此而失一國之和也必矣。 臣援筆至此, 不覺涕之無從也。 不識聖上以爲如何哉? 頃日李袤之請鞫辛生者, 非袤之言也, 實是國人之所共言也。 袤於嚴威之下, 有不敢索言者, 臣以爲, 君臣猶父子也, 凡有所懷, 何敢不盡? 臣竊謂, 姜逆之獄, 初出於內間人, 謂趙逆、金賊, 實與其事, 擧世聽聞, 不無驚惑。 向者二賊旣敗, 奸計畢露, 卽今閭巷衆談, 或以爲二凶奸巧, 或能上蔽天聽也。 然臣以爲, 此非外人所可得知, 殿下必已備燭, 而周察之矣。 如或其間有一毫可疑之端, 則兄弟之倫, 本之天顯, 速宜伸雪, 以尉九泉、以弭災戾。 但念, 此事干係先朝, 殿下必以是爲難, 而欺蔽以方, 聖哲難免, 則何嘗有累於先王之大德, 而今日之善繼善述, 適足有光於先王矣。 如其然也, 先王在天之靈, 豈不以此望之於殿下也? 如或不然, 亦望快示是非, 以去國人之疑, 不亦可乎? 且其子女, 乃是王家血屬, 藐然孩兒, 尙拘海島, 危喘如綫。 倘或一朝霧露所傷, 不終天年而死, 則雖復追加矜憐, 已無及矣。 惟聖上亦嘗念此, 累發慈悲, 而大臣每以虜使來問爲嫌。 形勢之難便, 雖云如此, 處置得宜, 實在於我, 曷不爲將順, 以廣我聖德乎? 況其女長成, 歸人已久, 則合宜推恩, 補官給祿, 編之屬籍。 豈可使吾君血屬, 淪沒閭巷, 作一鄕里凡人也? 至於兪棨, 則臣嘗再陳可恕之狀, 而今聞審理文案, 沒其姓名, 付黃以下。 是殿下斥棨於倫紀之外, 而深絶之也。 臣不勝瞿然惶悚, 始覺前言之爲妄, 而自陷於營護大罪之地。 臣不敢負罪自安, 獨免刑章, 伏願殿下, 先賜譴罰, 以彰臣罪。 然臣愚昧死敢言, 更願聖上加之意也。 臣聞, 烏、鳶之卵不毁而後, 鳳凰來; 誹謗之罪不誅而後, 嘉言至。 設使棨之狂妄, 萬一出於誹謗, 猶不當錮於聖世, 以彰含垢之德。 惟棨也, 非先朝侍從之臣, 殿下之所嘗優容者乎? 豈敢訾謗先王, 自取莫大之罪戾乎? 當初, 棨以儒臣, 當國家大事, 只欲討論典禮, 以備聖聽耳。 若以訾謗罪之, 則擧國皆知其冤矣。 棨本孤忠樸愚, 不理於口, 無乃別有三至之讒, 至於慈母之前乎? 亦惟聖上之平心易氣, 更加之意也。 一夫抱冤, 天氣爲之謬戾, 棨之獨不蒙曠蕩之典, 恐非天覆之意也。 臣仰恃聖慈, 負死瀆擾, 臣罪萬死, 抑臣所陳, 語涉忌諱, 且極狂妄, 而旣承聖旨, 諭之以盡言, 揆以愚分, 亦當畢殫忱悃, 以暴心肝, 故玆敢冒死上章, 或冀採納, 以少裨殿下畏天弭災之實, 而然臣所言, 皆國家機密, 直恐易於洩漏, 以招意外之患, 徒爲觸忤, 上有累於聖德。 區區愚忠, 有見乎此, 敢此手寫, 密封以進, 伏乞聖明, 少垂察焉。
疏入, 上卽召見面謂之曰: “覽爾疏辭, 蓋是應旨進言, 而語及逆姜之事, 爾有何聞知, 而出此言耶?” 鼎重對曰: “臣久侍近班, 無所裨補, 適當天災示警, 旱暵孔慘, 聖心憂畏, 夙夜靡寧, 下敎求言, 誠意懇至。 分義所在, 終不敢泯默, 敢陳所懷。 至如逆姜獄事, 則臣以年少新進, 當初獄情, 不得其詳, 而蓋此獄, 出於宮掖, 其間實狀, 外人之所難知難言者也。 變生至親, 人皆驚惑, 其時或以爲, 趙逆、金賊, 實與其事, 閭巷傳疑, 至今未息。 逮至兩賊伏法, 奸謀畢露, 群情愈惑, 皆以爲, 兩賊有所欺蔽, 而鍊成其獄也。 伏惟聖上, 必已洞察其情狀矣。 苟有一毫可疑之端, 則天倫至情, 必倍惻怛, 嚴鞫辛生, 俾卽伸冤, 如或逆狀明白, 則亦宜早定是非, 快去國人之疑惑也。” 上曰: “以常法言之, 爾難免重罪, 而予旣求言, 爾之所陳, 亦出於有懷必達之義, 故欲面言之爾。” 鼎重曰: “臣旣有所懷, 冒死陳疏, 而曲加優容, 不以爲罪, 至蒙賜對, 不勝惶恐感激。” 上曰: “已斷之獄, 更無可言, 而外人之以此囂囂, 先王亦嘗洞知矣。 夫所謂致疑於趙逆、金賊者, 蓋其初疑未釋而然也。 此獄旣非尋常之變, 則豈一二凶徒所可欺蔽先王者哉? 若使昭顯在世之時, 已有此變, 而以今兩賊兇計觀之, 則或不無可疑, 而昭顯旣沒, 一男兒爲人, 決不可付托基業, 則外人之所共知, 兩賊實無所顧忌, 有何用計欺蔽之理哉? 逆姜之所信任女奴義貞就服供辭以爲, 姜頻送黃金三四兩于本家云, 於此可見散盡千金, 而徒黨之盛, 未必不由於此也。 夫如是故, 不逞之輩, 掩其實狀, 譸張浮言, 而世俗之人, 元無主見, 不諒是非, 扇動傳訛, 以致國是靡定, 予知畢竟必有不美之言, 亦及於寡躬矣。 頃日請鞫辛生之說, 誠極寒心。 外人之致疑如此, 故先王每以此爲慮, 而至於禮玉【姜之母。】之承服, 或以爲, 自點威脅, 勒成斷案, 豈有是理? 文星【姜之娚。】之妾, 妙於詛呪, 文星後妻, 亦死於詛呪云矣。 蓋其兇謀, 始於其家, 終至內外相應, 而同惡相濟。 若無根因, 則詛呪本末, 何以明白於其承服之供辭耶? 此則非威脅可得, 而世人之知與不知者, 一辭致疑, 吁亦不幸矣。 請鞫辛生者, 與金晋宗所云: ‘嚴鞫僧人, 則自爾承服。’ 之說, 正相同, 甚無謂也。 爾以年少之人, 必不能盡知其時獄情矣。” 鼎重曰: “臣未曾詳聞實狀, 今承聖敎, 快釋前疑。 頃日李袤微發其端, 不敢明言, 臣意以爲, 君臣猶父子, 苟有所聞, 固當盡言無諱, 故玆敢疏陳矣。” 承旨李弘淵曰: “今承聖敎, 不啻丁寧, 臣隣疑惑, 自此可釋; 閭巷浮言, 自此可息, 而第徒黨之敎, 實甚未安。 今日殿下臣民, 其孰有逆姜之徒黨乎?” 上曰: “當初訛言, 隱其逆狀, 故予指此而言, 非謂今日有如許人也。” 上又曰: “旣發言端, 可盡言之。 國家不幸, 大逆不道之人入於宮中, 可勝言哉? 昭顯自是善人, 而但有中無所主之病。 逆姜之險惡無比, 惟務壅蔽恣行凶悖, 昭顯亦不能制斷矣。 自古王家兄弟, 自幼各就阿保, 迨及長成, 又各異居, 實無團會之樂, 至於東宮, 則名分尊嚴, 又不得源源相見, 而先王嘗以爲, 同氣之親, 不可各處, 痛祛此規, 命予兄弟自幼及長, 同居一室, 有若閭閻士夫之家, 不知尊卑之有別, 相友之情, 有如是矣。 及至亂後, 予爲質於瀋中, 目見姜之所爲, 則凶險無倫, 而昭顯終不覺悟, 是以, 先王亦嘗痛恨昭顯之不明矣。 前日赴瀋時, 姜以其平日支床木片, 置諸樓上, 及還, 倡言以爲: ‘木片自生枝葉。’ 而秘不示人, 及遭昭顯之喪, 又哭而言曰: ‘吾始以爲奇祥, 今反爲災矣。’ 夫處儲貳之位, 而希冀祥瑞者, 是果何心也? 昔許世子止不嘗藥, 而古人猶以爲弑君, 則此又何如也? 昭顯在疾, 醫官診之以爲, 不能愼攝之致, 姜惡而諱之, 及其喪後, 有遺腹兒仍殺之, 以掩其諱疾之迹,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爲人父而有所蔽惑, 至於殺子, 則古或有之, 若其以母殺子, 則武曌後, 未之聞也。 此不可以人理責之, 而予無誠孝, 不能見信於人, 故世間浮議, 久而不已, 予甚痛恨。” 鼎重曰: “臣旣聞聖敎, 昭然開釋。 自此臣民, 亦當解惑也。” 上曰: “苟有可疑之端, 予豈至今置之耶? 其子乃是昭顯之血屬, 而非渠等之罪也。 且其兒素多疾病, 故常欲率來京中, 而適緣事多拘忌, 不果如意。 欲待齎咨官之回, 聞彼中形勢, 然後從容處之耳。” 鼎重曰: “聞其兒, 亦是未成人。 若或一朝觸傷風露, 死於島中, 則恐非殿下推恩之道也。” 上曰: “予亦念之。 自當善處矣。” 鼎重曰: “其壻則時無職名, 有同常人。 國法雖儀親子孫, 例有補官之規, 此卽昭顯之壻也。 王家血屬, 不可與鄕里凡人比等, 似當授職給俸矣。” 上曰: “此等事, 朝廷當商量而處之矣。” 上又曰: “耽羅漂漢, 雖無爾言, 予亦惻然。 大義不須言, 求之人理, 實所不忍。 前日我國之人不能善處, 束縛天朝赤子, 投諸虎狼之口, 竟至斬殺無遺, 予常痛恨。 今又以此輩驅送彼中, 予豈忍此乎? 但念旣不能善處, 則雖以煦煦少仁, 掩置不送, 其在國家之計, 漏洩之患, 亦不可不慮。 漏洩之後, 彼雖致責於國家, 其患必不至於覆亡, 不須關念, 而每以此等事, 歸咎於任事之臣, 恐嚇操縱, 侵辱萬端。 如李景奭及李敬輿, 俱以倚任大臣, 幾陷不測, 尙在廢棄中, 使予不得任意用之, 實恐復有如此之患矣。 方今不無怨國之奸, 必欲乘釁售計, 而國家固難辨察, 雖或可疑, 豈敢曰汝必陰賊而加之罪乎? 到此地頭, 不如彌縫, 故徒自慨然。 予旣無才, 在廷諸臣, 亦無倚仗之人, 時勢至此, 事多苟簡。 古人云: ‘未聞以千里而畏人。’ 今以數千里疆域, 縮伏而不能振發, 尤可恨也。” 鼎重曰: “時運不幸, 値此艱厄, 而機事宣露, 未有密勿之謀, 豈非可憂之大者乎? 漂漢輩, 今若具船還送, 則意外之患, 不可不念。 濟州則乃是絶島, 凡事可以秘密, 姑令接置島中, 官給廩料, 以終天年, 豈不可乎?” 上曰: “爾言可謂善思之矣。 但若致不密, 畢竟爲彼人所詰責, 則不如當初直送之爲愈。 今難用爾言, 而此後則言于備局, 分付邊臣, 如或復有如此之事, 不必煩報帥臣, 直通于備局, 以爲稟處之地, 而如其所乘之船, 完固可載者, 則自其處善護以送, 其敗船者, 亦卽馳啓, 以待朝廷處置, 而俾不至煩人聽聞可矣。” 上又曰: “頃年召用之臣, 皆以山林讀書之人, 有篤信自修之功, 若置諸朝端, 豈不爲一世矜式, 而使人有所敬憚也哉? 其時兇賊輩以爲, 將不利於渠輩, 飛語虜中, 使彼遂疑斥和之擧, 復出於山野之人, 卒致恐嚇之患。 時勢至此, 不得復用, 予豈相忘而然也? 實恐貽禍於玆二三臣故也。” 鼎重曰: “其時宋時烈等, 作事不密, 竟致狼狽, 臣實恨之。” 上曰: “凡人之才, 豈可以判其能否於數月之內乎? 人言時烈無才, 而予則以爲, 未及試其有才無才耳。 向者時烈之疏, 予批以雖在山野, 凡有所懷, 悉陳無隱, 以補予闕失, 如在左右云者, 予實有意。 第拘於時勢, 今不能用, 故思聞其言耳。” 鼎重曰: “聖敎至此, 實是臣民之幸。 儒者闊於世情, 則雖或有之, 置諸左右, 出入啓沃, 上以裨補聖德, 下以矜式一世, 則非儒者莫可。 前日召用之臣, 則雖以致煩於淸人爲嫌, 此外亦豈無可用之賢才乎?” 上曰: “雖山林之人, 無所拘忌者, 則予可以用之矣。 果指誰歟?” 鼎重曰: “今世如尹鑴、尹宣擧等, 俱以儒學, 爲時屬望。 殿下特命白衣召見如古事, 使之各陳所懷, 其才可用則用之, 不可用則遣還可也。 鑴及宣擧, 俱是世臣, 而若論其人品, 則鑴才識超邁, 宣擧器局堅確矣。” 上曰: “用儒之道, 從容循序可矣, 而每欲汲汲進用, 世人又從而責望太過, 以致狼狽, 是可歎也。” 鼎重曰: “今世之人, 絶無留心世務者, 實無可用之才。 若此人等, 雖在山野, 亦非忘世之人, 殿下以誠求之, 豈不出而爲殿下之用哉? 其人才學, 爲世所推, 問于諸臣則, 亦可知矣。” 上命承旨, 書其姓名以進。 上又曰: “爾疏中論兪棨事以爲, 無乃別有三至之讒云者, 有由然矣。 非獨爾言, 自前已有此說矣。 所謂優容者, 似指當初玉堂上箚時優答, 而此所以答於多官, 豈爲棨也? 棨陳疏之後, 不卽治其罪者, 欲待卒哭, 從容處之故也。 予豈聽人讒言而罪之也?” 鼎重曰: “臣所謂優容者, 以其陳疏之後, 累除近班故也。 所謂三至之讒者, 臣非謂必有是事, 初以無情之事, 天怒轉激, 故求其由而不得, 慮或有此, 蓋設辭也。” 上曰: “棨於當初, 只上疏而已, 則有何可怒? 至欲論啓, 必伸己志, 是可惡也。” 鼎重曰: “此事臣所詳知, 故累陳其可恕之狀, 今當畢其說焉。 其時殿下新卽位, 優容言者, 故只以宗祖及疊謚爲未安, 欲陳典禮之不合。 副提學呂爾徵首發其論, 會議者再, 而竟不得上箚。 沈大孚以爲, 論禮之擧, 不可中止, 遂先投疏, 而兪棨之疏繼之矣。 棨爲諫官時, 避辭措語, 果是失着, 以此爲罪, 渠亦甘心, 此不過言語之失耳。 若其貶薄先王之敎, 則臣明知其不然。 其後趙贇爲司諫, 棨爲獻納, 贇以爲, 此是莫大典禮, 不可不更論, 棨以爲, 臺諫啓辭, 事體殊別, 近於議君, 不如陳箚爭之, 贇亦然之, 欲聯名上箚, 旣已搆草, 因事見遞而不果。 於此可見棨等之本情無他矣。” 上曰: “古人則有忠厚之風。 宋仁宗以微細之過, 用尙美人及呂夷簡之讒, 至有廢后之擧, 而當時不爲深非, 廟號仁宗。 未知今人論議, 出於宋儒幾等, 而必欲伸己志耶?” 鼎重曰: “臣之所達, 陳其本情之實無他也。 設令棨等, 有誹謗之罪, 豈可錮於聖明之世, 不示含垢之德也?” 上曰: “雖非求言之敎, 近侍之臣, 固當有懷必達。 矧予旣求言, 而爾亦悉陳無隱, 予不以爲過矣。 不下批敎者, 慮煩聽聞, 故召見而諭之矣。”
숙종 61권, 44년(1718 무술/청강희(康熙) 57년) 4월 11일 기축 4번째기사
고 상신 강석기의 부인 신씨를 복작 강문영등을 복관시키고, 상신에게 치제케 하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강석기(姜碩期)의 부인 신씨(申氏)를 복작(復爵)시키고 상신에게는 치제(致祭)하게 하라. 강문명(姜文明)등도 모두 복관(復官)시키라.”하였다.
○上下敎曰: “故相臣姜碩期夫人申氏復爵, 相臣處致祭。 姜文明等竝復官。
정조 22권, 10년(1786 병오/청건륭(乾隆) 51년) 8월 10일(경술) 1번째기사
민회묘의 수리를 명하다
민회묘(愍懷墓)4274)를 수리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민회(愍懷)의 친척에게 들었는데, 국내(局內)에 있는 묘소에 나무를 베지못하도록 금지한 바람에 소나무와 잣나무들이 얽히고 설켜서 보기에 매우 참혹하다고 하였다. 이번 민회묘를 수리한 일은 영릉(寧陵)4275)께서 형제간에 우애하였던 성덕을 본받은 것이다. 더구나 숙종 무술년4276)에 빈(嬪)의 작위(爵位)를 회복하고 이어 민회의 묘소에 합장(合葬)을 하면서 사실을 기록한 시(詩)까지 지으시고, 특별히 국내의 묘소에 제사지내는 것을 금지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또 선왕조 갑오년4277)에 민회의 선영묘소에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또 수교(受敎)를 따르지 않아 이처럼 황폐해져 버렸다고 한다. 본 고을과 묘소 밑에 살고 있는 옛 정승의 자손들에게 지시하여 같이 수리하게끔 하라. 또 숙종께서 지으신 글을 보건대, ‘강문명(姜文明)등의 묘소에 모두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금지하지 말라.’는 분부가 있었으니, 지금 역시 이 분부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얼마 안되어 문정공(文貞公) 강석기(姜碩期)의 후손 강명달(姜命達)을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註4274]민회묘(愍懷墓):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강씨(姜氏)의 묘.註 427 5]영릉(寧陵): 효종(孝宗).註4276]무술년: 1718 숙종 44년.註4277]갑오년: 1774 영조 50년.
○庚戌/命修愍懷墓。 敎曰: “聞本墓私親墳塋之在局內者, 以禁代之故, 松杉盤(亘)〔桓〕, 所見甚慘然云。 今番本墓修改之擧, 仰體寧陵友于之盛德也。 況在肅廟戊戌, 復嬪爵位, 仍擧合奉之儀於本墓, 至有御製紀實之詩, 而局內墳墓, 特命勿禁設祭。 又於先朝甲午, 本墓先塋, 勿禁伐木。 近又不遵受敎, 如是蕪翳云。 分付本縣與故相子孫之在墓下者, 眼同修治。 且考肅廟御製, 有姜文明等墓, 竝勿禁祭之敎。 今亦依此遵行。” 未幾, 命調用文貞公姜碩期後孫姜命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