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군...현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이다..
그는 얼마전에 프로야구선수로서 은퇴경기를 같기도 했다..배번 18번, 연봉 5500만원..아마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나이 사십이 먹도록 야구를 하는 그저그런 구질구질한 선수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 훨씬 뛰어난 기량과 가치가 있는 선수이기에 본인이 그에 관해 몇자 적고자 한다.
이상군..그는 1962년 4월21일에 출생..우리나이로 40인 올해까지 선수생활을 했으니 우선 그 끈기와 의지를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정말 화려한 아마야구 경력을 가지고 있다. 얼마나 화려했으면 86년 당시 한화의 스카우터가 현금3000만원을 007가방에 싸들고 이선수 부친을 꼬셔서 한화(당시 빙그레)의 창단멤버로서 영입을 했다고 한다.
1986년 신인투수 이상군은 12승 17패 1세이브, 방어율 2.63 그리고 무려 243과 1/3이닝을 던지는 무시무시한 철완을 과시하며 프로야구 무대에 화려한 데뷔를 한다. 사실 이 243이닝 이라는 수치..대단하면서도 한편으론 정말 말도 안되는 숫자다. 얼마나 말도 안되는 숫자인지 본인이 간략히 설명을 하겠다. 86년 당시 한국프로야구는 팀당 108경기를 치뤘다..그러므로 5인 선발로테이션하에서 한 선발투수는 약 22경기를 던지게 된다. 그럼 투수가 매경기 선발투수의 적정 투구이닝인 6이닝을 던진다고 가정하면 22*6=132, 약 130-150이닝 정도가 86년 당시 선발투수의 적정 수치로 보면 무리가 없다. 근데 이상군은 프로 초년 시절부터 무려 그평균치보다 두배가까이 던지는 "혹사"를 당한것이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구?? 이 숫자놀음이 실감이 안온다면 잔디밭에 나가서 야구공을 한 30번만 힘껏 던져봐라..
이후 3년간 이상군은 잠수함 한희민과 더불어 빙그레 이글스의 에이스로서 활약한다..
1987년 33경기 18승 11패 2세이브 방어율 2.55 246과 2/3이닝(!)
1988년 38경기 10승 3패 16세이브 방어율 2.40 135 이닝
1989년 27경기 16승 5패 3세이브 방어율 2.57 140 1/3 이닝
참고로 87년 리그MVP 김시진의 성적( 23승 6패 193 1/3 이닝, 3.12)
과연 이상군의 이 기록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우선 이닝수가 얼마나 많았던 것인지에 대해선 앞에서 얘기했구, 이상군은 프로 처음3년 동안 2점대 중반의 방어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특급의 수치다..9이닝을 던질경우 팀의 공격진에서 3점만 내도 이긴다는 소리가 되므로...그리고 16승, 18승이란 수치는, 작년에 박찬호가 우리보다 경기수가 30경기 이상 많은 미국서 18승을 올렸을때 언론에서 얼마나 난리 법석을 떨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알것이다. 참고로 작년 우리 프로리그 공동 다승왕이었던 김수경, 임선동의 승수도 18승이었다..
아무튼 이상군은 고무팔(던져도 던져도 지치지 않는다는...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이라는 별명과 그리고 이른바 "면돗날 콘트롤"을 앞세워 빙그레 야구의 초기 주역으로 활약한다. 하지만 90년대로 접어들며 이상군은 프로초기의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데 그이유는 초창기에 당한 어마어마한 혹사때문이다. 현대야구에서는 선발투수가 한게임에서 약 100개의 공을 던진후 5일을 푹 쉬는게 정석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80년대 한국야구에서는 그런 선발로테이션, 투수분업화의 개념이 전무했으며, 열약한 선수층으로 인해, 이상군같은 수준급의 투수들은 감독이 부르기만 하면 나가야 하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 처해야만 했다. 실제로 프로 초창기 240이닝 이상을 던지던 빙그레의 18번 고무팔은 89년 시즌이후 단 한시즌도 130이닝 이상 던지지를 못했다.
그런 야구인들의 무지로 그는90년대 이후 그저그런 투수로 전락하며, 송진우, 한용덕, 이강돈 같은 빙그레전성기의 주역들의 그늘에 물히게 된고, 1996년 시즌후 쓸쓸한 은퇴를 하게된다.
그런 그가 1999년 38세의 노구를 이끌고,"팀 우승을 위해뛰겠다"며 복귀를 한다. 사실 그의 복귀 소식을 처음 접하고 본인은 "미친놈 꼴깝하네", "한화가 돈이 없긴 없구나" 같은 생각으로 가득했었다. 그러나 그의 녹슬지 않은 구위와 투혼은 1999년 프로야구를 감동의 레이스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예전보다 더 날카로와진 면돗날 컨트롤을 선보이며 한화의 허약한 중간계투의 보루로써 성공적인 99시즌을 보낸다. 그뿐 아니라 그의, 한화의, 또 본인의 필생의 한이였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어 낸다.
여기서 그의 99년 성적을 보면,
30경기, 5승 5패 1세이브, 방어율 4.42, 투구이닝 57으로 나이와 극심했던 타고투저를 감안할때 보통이상의 성적이다.
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이후 이상군은 투수코치로써만 전념할 뜻을 밝혔으나, 2000년 에이스 정민철의 일본진출, 이상목의 부상등으로 한화 마운드에 빵꾸가 나자, 이희수 당시 한화감독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현장으로 복귀 1승 2패 방어율 4.75의 성적과 함께 통산 100승의 대업을 이루어낸다. (참고로 통산 100승은 현재까지 국내에선 15명(?)만이 이루어낸 대기록으로 기량과 꾸준함이 동시에 있어야만 이루어낼 수 있는 기록이다. 현재 은퇴한 선동렬씨가 142승으로 최다승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현역중에선 한화의 송진우가 130승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역대 통산 100승이상 이루어낸 선수들의 면모를 보면 최동원 한화코치, 김시진 현대코치, 엘지 김용수,롯데 윤학길, 삼성 이강철, 한화의 정민철, 한용덕등 모두 국내프로야구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한 선수들이다)
통산 100승을 이룬이후 그는 다시한번 은퇴의사를 밝히지만 신임 이광한 감독의 간곡한 요청으로 다시 마운드에 선다. 비록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지난 5월 은퇴를 했지만, 그의 선수인생은 정말 값진 것이였다. 초창기에는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로, 후에는 노련함을 겸비한 불펜의 기둥으로 팀 우승까지 이끌어 냈으니 말이다.
비록 무식한 초창기 감독들에 의해 그 전성기가 길진 못했지만, 그 기량에 있어선 최동원,김시진에 못지 않았으며, 그 꾸준함에 있어서는 노송 김용수 다음가는 평가를 받아야 할 선수가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