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계절기에 공부와 병행하여 사회봉사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학생여러분 들에게 호소의 글을 드리게 됨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본인은 금번 6월 25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 규명 위원회에서 국민에게 발표한 청송교도소 재소자 고 박영두군의 법정투쟁 고발인으로 17여년의 장기적 법정 투쟁을 통해 교도관의 집단 구타에 의해 사망한 박영두 군의 죽음을 사회에 알리게 되었으며 위원회의 6개월 간의 조사에 의해 박영두씨의 죽음은 교도관에 의한 타살 가혹행위 죄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자들은 공소유지의 기간이 지난 관계로 다시 고발되지 않는다는 결정으로 끝이 났습니다.
1984.10.13 청송교도소 엄중독방에 유치 되어있던 박영두 군은 교도관의 잔인한 구타에 의해 숨져갔으며 그 후 동료 재소자들의 피눈물나는 투쟁 1984.10.13 교도관 8명 인질난동을 실시하여 사회에 알리고져 했으나 이를 묵살당하고 그 동료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문과 구타를 당하였고 철저하게 엄중독방에 수용되었습니다.
그 후 1988.3.22, 4.5일 두 차례의 교도관 인질난동을 실시하여 동료재소자 이상훈 외5명은 교도관들의 무차별 진압에 의하여 피투성이가 되어 안동교도소로 이송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의 폭력적인 행정에 의해 이들은 쇠사슬 혁수갑 시갑 포승 등으로 온 몸이 포박 당하여 다시 죽음을 건 사후 15cm 칫솔을 먹고 죽음을 건 투쟁에 임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교도소 당국의 가혹한 형벌뿐이었습니다. 그 해 교도관 인질난동으로 추가형 1년6개월을 씩을 선고받고 결국 박영두의 사건을 검찰에 고발하게 되었으나 교정당국은 박영두 진상규명 법정투쟁인 이상훈에게 혹독한 독방생활을 가하게 하여 고발의 의지를 반하게 하였으나 결국 이 사건은 검찰의 혐의 없음과 고등법원의 재정신청 기각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상훈은 92년 검찰을 상대로 하는 헌법소원을 실시하였고 1993년 13년 6개월 만에 사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끊임없는 진실규명을 위해 노력하던 중 본 사건이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에 접수되어 6개월의 조사끝에 고 박영두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으나 조직적으로 위 사실을 사이버 광장을 통해 위원회를 비난하며 참고인들의 진술이 허위라는 등 교도관들의 집단적 대응을 바라보면서 조직이 없는 국민은 이 억울한 사실을 어떻게 국민 모두에게 알릴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에 접수된 83건의 사건이 매회 해결될 때마다 자신들이 관련된 군 경찰 교정국등이 이렇게 집단적으로 진실을 왜곡되게 싸이버 광장을 통해 공박한다면 국민은 누구를 의지해야 하겠습니까?
박영두씨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땅에서 다시는 이러한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학생여러분들이 사회의 감시자가 되어 주시기를 바라며 7월 14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관람하시고 여러분들의 공정한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대통령직속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 사이버 광장 6월 29일 이상훈의 박영두 진상 법정 투장 고발인의 통곡 1~2편을 열람하여 보시고 냉정하게 폭력 교도관들에 대한 비판을 바랍니다.
민주투사. 여 야 정치인에게 그리고... 인권단체 및 학생여러분
국민의 입과 눈과 귀를 대변하는 언론인들에게 드림.
혹독한 가뭄이 들어 농작물의 피해가 심했던 것이 엇그젠가 싶더니 몇 일간 쏟아졌던 폭우로 수해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늘 상 보도되는 언론기사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TV 사극의 한 장면에 출연하는 고정된 탤런트의 모습마냥 늘상 거듭되는 실속도 없어 보이는 화두를 가지고 정치적 논쟁을 일삼는 여.야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그들이 과연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는 뜻 깊은 마음을 가지고 저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인가 하고 한번쯤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가끔 목소리를 높이는 의원들 중 몇 명의 정치인들의 프로필을 들추어 보면 정말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486세대 586세대 민주운동가 등. 권위주의 시대에 한 목소리를 높여 얻어진 프로필인지 모르나 이 땅에서 이루어진 민주주의 모든 근원이 그들에 의해 이루어 진 것마냥 떠벌리고 있는 모습들을 볼 때 과연 그들이 이 땅에 민주주의 뿌리와 열매를 심는데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가!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남에게 보이기위해 민주주의 운동을 했던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떠벌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슬픈 비애를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땅에서 민주화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 채 소리없이 숨져 간 수많은 열사와 투사들의 참다운 희생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겠지요.
금년 6월 25일 의문사 진상 규명위원회에서 밝힌 1984. 10. 14 청송교도소 재소자 고 박영두 군의 죽음은 가혹행위를 가한 교도관들에 의해 타살되었다는 언론의 보도를 접할 때 이 땅에는 아직도 인간의 고귀한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양심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구나 하는 일말의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 일입니까? 아직도 소수의 교도관들은 17년 전 자기의 선배교도관들이 저지른 과오를 정당한 행위로 호도 하고자 사이버 시위를 일삼고 있는 모습들을 볼 때 (진정하게 진실을 밝혀 화해와 용서의 문을 열려고 하는 위원회의 깊은 의지를 엿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교도관들은 조직적으로 국민들을 우롱하며 자성하고 뉘우치는 빛없이 사이버 조직을 형성하여 위원회결정에 대한 부당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의사개진에 자유가 있을 수 있으나 범죄적 사실이 드러난 교정체제에서 삼삼오오 단체를 이루어 비겁한 행위를 호도하려고 하는 모습을 볼 때 이 땅위에서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다는 386. 486. 586 투사님들은 이대로 고 박영두 열사의 죽음에 대해 침묵만 하고 있을 것입니까?
형소법상 유죄판결 이전에는 죄인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법조항을 우리는 존중합니다.
그러나, 특수한 교정 시설에서 그것도 교정시설의 가장 엄중한 독방에 갖혀 사회에 이 사실을 알릴 수 있는 모든 채널이 차단당한 구속기간 중에 고발인 이상훈이 벌인 10년 6개월 간의 엄중 독방에서의 법정투쟁이 이제는 형소법상의 이유를 들어 공소시효 만료로 인하여 유력한 증인들의 진술과 새로운 증거사실이 교도관들의 진술에 의해 밝혀 졌음에도 이대로 공소시효 만료로 끝나야 하는 저 악독스러운 범죄집단에 대하여 힘이 없는 국민들은 어떠한 자세로 그들의 과오를 반성케 해야 합니까?
아직도 자신의 조직의 특수성을 주장하며 고 박영두군 의 죽음을 합법적인 조취를 취하는 중 일어난 사고라고 떠벌리며 국민모두를 우롱하는 인터넷 사이버 시위를 일삼고 있습니다.
(여.야 의 정치인에게 묻고싶습니다.)
국제법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반 인륜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없다고 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이 땅에서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생명을 숨지게 한 가해자들이 공소시효만 넘기게 된다면 처벌받지 않는다는 선례를 남기게 된다면 이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그때 그때마다 집권한 권력자의 생각에 의해 좌우되는 군주주의 경찰국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여.야의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반 인권 범죄에 대하여 공소시효에 관계없이 처벌 할 수 있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질 수 있는 법 조항을 제정하거나 국회에 건의 할 용기를 가진 의원은 없습니까? 여.야의 총수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국가를 국민모두가 인권의 침해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민주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고 박영두 열사의 죽음에 대해 형소법상의 이유를 들어 공소시효가 지난 관계로 그 관계자들을 고발 조치할 수 없이 종결된다고 한다면 이 국가는 그리고,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모든 이들은 철저하게 위장된 이중 구조의 가면의 탈을 쓴 사람들 이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검찰은 고 박영두 사건의 현장조사 및 참고인 조사 등을 충분히 취하지 못했던 점을 인식하고 국민이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인권보호 기관으로써 본연의 의무를 다하여 최종 박영두 진상규명 고발인 이상훈에 재심고발을 검토하여 주었으면 합니다.
또한 사법당국은 박영두 사건의 재정신청 기각 이후 교도 당국의 철저한 탄압을 받게되어 92년 헌법소원을 마지막으로 옥중에서의 10년6개월 걸친 박영두 진상규명을 접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모든 이들에게 본 고발인 이상훈은 책임있는 교정공무원과 공개토론을 요청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