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차례 언급했던 것 처럼 당의 군사제도 특히 핵심이라고 할수 있는 부병제는 수의 제도를 명칭만 변경한 채 그대로 계승하였다고 볼수 있다.
636년 지방에 처음 설치되기 시작한 절충부(折衝府)가 병력의 징집과 공급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수나라때와 마찬가지로 절충부는 지방 행정체제의 관할 하에 있지 않았다.
절충부는 전국에 약 6백여개가 존재했으며 그 중 약 3분의 2가 장안 및 낙양을 중심으로 인구집중 지역에 설치되었으며 절충부가 설치되어 있는 지역에서 절충부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지역으로의 이주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수나라때의 응양부병과 마찬가지로 당의 부병들은 20세부터 60세까지의 장정들로 구성되었으며 병농일치의 원칙에 따라서 농번기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농한기에는 집중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수나라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순서가 되면 조를 짜서 장안과 낙양으로 상경을 해서 번상을 해야 했다. 『군방령』의 기록을 보면 “5백리 안에서는 5번(番)으로 나누고 5백리 밖에서는 7번(番)으로 나누어서 각각 1개월씩 올라온다.”라고 되어 있다.
도읍으로 올라온 부병들은 12위 6솔부 휘하에 편성되어서 외국사신의 영접 및 호송 황제의 행렬을 호위하는 등의 일을 맡았으며 이때 소비되는 식량과 비용 그리고 필요한 장비는 원칙적으로 부병의 개인부담이다.
또한 도읍까지 이동하는 시일과 이동시 들어가는 비용역시 부병의 개인부담으로 만약 도읍에서 5백리 안에 있는 절충부에 속해있는 부병이라면 5월에 번상을 했다면 10월에 번상을 다시 해야 했다. 여기에 도읍과 거주지에 사이를 왕복하는데 걸리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산술적으로 30일의 번상기간과 10일 정도의 이동기간까지 포함해서 일년에 최소한 60일에서 80일 만약 도읍에서 5백리 가까이 떨어져 있다면 90일에서 심하면 백일을 넘길수도 있었다.
또한 부병들은 20세부터 60세 사이에 반드시 한번은 3년 동안 국경지방의 경비를 담당해야 했다.
국경경비는 진(鎭)과 수(戍)서 담당했으며 진과 수는 병력의 규모에 따라서 상, 중, 하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상진은 5백명, 중진은 3백명, 하진은 3백명 이하의 규모로 편성되었으며 수는 진에 비하여 약 10분의 1규모로 알려지고 있다.
진과 수의 숫자는 각 시기마다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약 245진과 332수가 존재했었고, 진장(鎭長)과 수주(戍主)가 절충부에서 파견되는 부병인 방인(防人)을 통솔하여 국경방어를 담당했으며 이 때 국경을 수비하는 부병의 경비를 분담하고 그 가정의 생업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3명의 방인을 한 조로 짜서 1명이 국경으로 파견되어 있으면 나머지 2명이 파견된 부병과 그 가정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또한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부병들에게는 일률적으로 17결의 토지가 원칙적으로 지급되었으며 변경에 파병된 방인의 토지에 대한 면세혜택과 조세의 면제와 같은 혜택을 부여함으로 인해서 부병제의 안정을 꾀하였다.
그 외에 부병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대외전쟁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이때에는 수나라때와 같이 행군(行軍)이 편성되어 행군대총관이 이를 통솔하였다. 하지만 당나라의 지속적인 대외원정은 약 60만명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부병들로만 감당할수는 없었으며 이 때에는 원칙적으로는 절충부가 편성되어 있지 않은 지역에서 모병을 하여 충원하였다. 이것을 병모(兵募)라고 불렀으며 실제로는 절충부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병사들을 모병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의 군사조직와 체제
당은 건국 직후 최초로 설치되었떤 군사조직은 관중을 12도로 분할하여 설치한 군부(軍府)였다.
이후 몇 차례의 변화 끝에 636년 통군을 절충도위로 별장을 과의도위로 변경하면서 각 지방에 설치되어 있던 군부를 절충부라고 호칭하였다.
이리하여 당나라에는 약 630개의 절충부가 설치되었고 이 630개의 절충부를 다시 40 ~ 60개씩 편성해서 16위(衛)를 구성하였다.
각 위는 상장군과 대장군 1인 그리고 장군이 2인씩 존재했으며 그 아래에는 절충부에 소속된 부병들을 직접 지휘하는 절충도위가 있었다.
절충부가 편제되어 있던 16개의 상위에는 총사령부 격인 총부(總部)가 존재해서 중앙은 물론 지방의 군령권을 총괄하였다.
이 부병제의 특징은 지방병과 중앙병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과 병농일치를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60만명이 넘는 부병들이 전부 군역에 종사했던 것은 아니었다. 약 10만에서 15만명으로 추정되는 방인들과 전체 부병의 약 5분의 1정도인 번상병(위사라고도 불리워졌다)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는 생업에 종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절충부의 구성
320여개 주 가운데 설치된 90개 주에 설치된 630개의 절충부는 소속 병력의 규모에 따라 상부(上府)와 중부(中府) 그리고 하부(下府)로 구분되었다
상부는 1천2백명, 중부는 1천명, 하부는 8백명으로 편성되었으며 절충도위가 통괄하는 절충부의 예하 조직으로는 2백명으로 조직된 단(團)을 교위가 지휘하였고, 그 밑으로는 1백명 규모의 여(旅)가 두개씩 편제되어 있었다. 여의 지휘관은 여수라고 불리워졌다.
여의 예하에는 50명 규모의 대(隊)가 있었으며 그 대정이 지휘하였다. 각각의 대는 10명으로 편성된 5개의 화(火)가 편성되어 있었고 화의 지휘관은 화장이라고 불리워졌다.
편성된 부병들 중 기사(驥騎)에 능한 부병은 월기(越騎)라고 불리우는 기병으로 선발되었으나 나머지는 무장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보병으로 편성되었다.
절충부의 지휘관인 절충도위 휘하에는 좌과위도위와 우과위도위 각각 1명씩을 두어서 참모격인 장사와 병조, 별장이 보좌해 주었다.
절충부에 소속된 부병들은 활 1개, 화살 30개. 횡도등과 같은 장비와 식량은 모두 개인이 부담해야 했다. 규정된 장비와 식량을 평상시에는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번상할 때나 혹은 대외 출정시에는 장비와 식량을 모두 반출하여 이것을 사용하였다.
개인 장비 외에도 10명으로 구성된 화에서는 천막과 삽과 같은 장비를 구비해야 했고, 각 화에서는 6필씩의 군마를 확보해야 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당나라가 부병제로 확보한 병력은 60만에서 70만명으로 추정할수 있다. 이중 10만에서 15만명은 국경경비와 역시 10만에서 15만명은 번상을 하였기 때문에 대외 원정시에 동원할수 있는 병력수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30만명에서 40만명선을 넘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당은 동쪽의 고구려와 북쪽의 유목민족 그리고 서쪽의 토번까지 항상 군사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했으며 두 정면 전쟁을 강요당한 적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병력부족을 보충하기 위해서 병력을 추가로 모집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고, 적지 않은 경우에는 실제로는 강제적인 징집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북주에서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 시기까지 시기별로 각 국가의 징집제도와 군사제도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였다.
수와 당의 군사제도를 언급하고 살펴본 이유는 대략 두가지이다.
하나는 고구려의 군사제도를 추정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고구려의 군사제도는 처음에 언급한대로 쉽게 얘기하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할수 있을 정도로 미궁속에 빠져 있고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당사자인 고구려인들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구려 특히 후기의 군사제도는 병력동원 규모로 추정하건데 당나라에 뒤지지 않았지만 아무 기록도 남지 않은 바람에 그냥 사서에 있는 “몇 만명을 동원했다”라는 짧은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인류는 초창기 부족사회를 거치면서 점차 거대해진 사회체제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발 맞추어서 인류의 탄생과 함께 겪고 있던 전쟁의 규모와 목적도 점점 거대해 졌고, 그에 맞추어서 전쟁도 더 복잡해져가기 시작했다.
이제 전쟁의 승패는 개인의 용기나 혹은 집단에 속한 개개인의 능력보다는 얼마나 많은 병력을 전쟁터에 내보낼수 있고 얼마나 많은 병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할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시점에 도달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전쟁의 승패를 가늠할수 있는 무게가 개인에서 집단으로 옮겨지는 과정이 곧 국가의 완성으로 보고 있으며 그 정점에는 바로 수와 당이 존재하고 있다.
수나라는 백만명이 넘는 전투 병력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절반 혹은 절반에 가까운 병력의 손실을 입은 상태에서도 그 다음해와 또 그 다음해 고구려 원정을 실행에 옮겼다.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 역시 645년의 원정실패에도 불구하고 결코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고 실제로 668년 마침내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당나라에 대해 가지는 두 가지 환상 중 하나는 당은 군사적으로 대단한 국가였다는 것이다.
물론 당은 건국초기의 혼란을 벗어나고 당 태종이라는 뛰어난 지도자 아래에서 그 이전 어느 왕조도 경험하지 못했던 지속적인 대외원정을 통한 팽창정책을 실시했고, 일정부분에서 효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당 태종과 그를 뒤이은 당고종 그리고 측천무후 시대에 이루어 놓은 군사적인 성과는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로마가 어느 지역을 점령하고 군단기지를 설치한 이후 효율적인 통치체제를 심어놓음으로서 점령지역의 대다수를 자국의 속주로 유지할수 있었던데 비해서 당의 기미정책은 해당 민족이 분열하고 서로 내분을 일으켰던 시기에는 비교적 잘 유지되었지만 결국 해당되는 민족이 외부의 억압을 인식하는 순간 무너지기 시작했다.
막대한 물자와 인원을 동원해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지만 고구려의 영토였던 요동지역을 완전히 손에 넣지도 못했고 발해의 건국을 막지도 못했다.
토번을 정벌하는데에도 실패해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당 태종 시기에 평정했던 돌궐역시 얼마 못 가서 다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지만 그것을 저지하는데에도 실패한다.
당나라가 특정시기에 보인 군사적인 성과와 역량은 당연히 높이 평가 받아야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되며 그 군사적인 성과를 얻기위해 투입한 인원과 물자를 생각해 보면 실제로는 비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실제로 로마제국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시절 팽창정책을 포기한 이후 리메스(방벽)을 설치해서 외부의 침입에 대비했고, 이 방벽은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황제시기 까지 제대로 작동했다.
반면 당나라는 벌써 7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팽창주의 정책이 가져온 한계를 경험했지만 그것을 극복하지도 제대로 이겨내지도 못했다.
(660년 백제의 멸망이후 676년 기벌포 해전을 끝으로 당은 신라와 점령지역을 놓고 무력분쟁을 벌인다. 물론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당과 신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하지만 결국 당은 기벌포 해전을 끝으로 한륙도에 대한 군사적인 개입을 중지해야만 했다. 또한 많은 인명과 물자를 투입하면서 점령한 고구려에 대해서도 완전한 지배에 실패하고 만다. 이것은 같은 시기 당에 대해서 실질적인 위험세력으로 등장한 토번과 돌궐세력 때문 이기도 했지만 결국 당나라의 무리한 팽창정책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676년의 기벌포 해전 이후에도 당은 신라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이 때 당의 재상이 올린 표문에서는 “신라는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지만 토번은 그렇지 않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결국 당은 스스로 펼쳐놓은 함정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일단 점령한 지역을 유지할려면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했고, 당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고구려는 발해와 신라에게 백제역시 신라에게 넘겨주어야 했고, 제2제국을 건설한 돌궐은 당에게는 악몽 그 자체였다.)
또 하나의 환상은 618년부터 907년까지 3백년 가까이 유지되었던 당이 항상 강력했고 항상 번영했고 안정되었다는 것이다.
당나라의 군사적인 역량은 이미 측천무후 시절에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 이전 시기에도 당은 외부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적지않은 패배와 실패를 경험했었다.
당나라의 전체 유지기간을 살펴보면 당나라의 군사적인 역량이 존재했던 기간은 당 태종의 즉위 초기인 630년대부터 불과 30년을 넘기지 못했다. 676년 신라와의 기벌포 해전에서의 패배를 끝으로 당은 더 이상의 대외적인 팽창을 접어야만 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돌궐의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는 등 표면적인 정책에서는 변화가 없었지만 당 태종 시기를 끝으로 더 이상의 환상적인 승리는 존재하지 못했다.
측천무후의 시대를 지나서 현종의 즉위는 두번째 안정기를 가져왔지만 짧은 안정기 이후에는 755년 안록산의 난이 시작되었고, 비슷한 시기 당나라의 부병제는 실질적으로 붕괴되었고, 안록산과 그를 뒤이은 사사명의 난은 당으로 하여금 조용조 정책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조용조 정책의 포기는 단순히 조세정책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시기 백성들을 강력하게 규제하고 통제함으로 인해서 유지되었던 힘의 상실을 의미했고, 안사의 난을 평정한 이후에도 독자적인 정권을 유지했던 번진과의 대립과 손실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실시한 소금의 전매제도 때문에 발생한 황소의 난으로 당은 마침내 그 운명을 다하고 말았다.
학자들은 안사의 난 이후 당은 실질적으로 멸망했다고 보고있다. 당이 안사의 난 이후에도 약 1백5십년간 유지될수 있었던 것은 대운하의 개통으로 인해서 개발된 강남의 경제력 덕분으로 보고있다.
당나라가 세계제국이라고 불리워 질수 있었던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다. 대운하의 개통을 바탕으로 한 활발한 상업활동과 네르토리우스 교, 마니교와 같은 다양한 외래 종교의 번영과 이민족 출신을 고위 직급에 올리는 등 내면적인 문제를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당 태종에서 현종 말기 안사의 난 이전의 당은 분명히 다른 제국과는 다른 활동성과 다양성을 포용할수 있는 능력과 힘을 가질수 있었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이러한 포용력의 배경에는 “힘의 우위”가 존재했다고 믿고있다. 북주 말기에도 선비족은 호한융합정책을 포기하고 일종의 국수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민족 우선주의 정책은 자신감이 없어졌거나 혹은 외부의 충격에 극심한 충격을 받았을 때에 드러내는 모습으로 스스로의 힘에 자신감을 가졌을 때에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모습이라고 할수 있다.
당나라의 부병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당의 병농일치의 부병제가 붕괴된 시기를 보통 8세기 중반 더 정확하게는 755년 일어난 안록산의 난 이전인 747년(당 현종 천보 6년)에 완전히 붕괴된 것으로 보고있다.
당 현종시기는 당 태종의 집권기간과 더불어 “개원의 치”라고 불리우는 전성기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전 측천무후의 재위기간에도 정치적인 혼란은 계속되었지만 그 여파가 일반 백성들이나 대외정책에도 심각하게 미치지는 않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런 시기에 왜 당의 군사적인 업적을 이룩하게 만든 밑바탕이 되었고, 당을 세계제국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안겨주었던 주춧돌이 되었던 부병제가 붕괴되었을까? 636년 시행되었던 부병제가 왜 백년이 조금 지나서 당의 전성기라고 불리워졌던 시기에 사라져버린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외부적인 요인은 지속적인 대외팽창에 따른 농민들의 부담과 위험이 가중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 군단이 술라와 마리우스 시절 부병제와 동일한 개념이었던 시민병 제도가 무너지고 직업군인제 일명 “마리우스의 노새들”로 변형되었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본래 시민들의 참여로 편성되었던 로마 군단이 지속적인 대외원정으로 인하여 징집된 시민들을 생업에 종사할수 없을 정도로 계속 붙잡아 두었고, 생업이었던 농업에 종사할 틈이 없었던 시민병들은 결국 파산해서 도시로 흘러들게 되었다.
그 빈자리를 정복전쟁의 전리품으로 얻어진 노예들로 구성된 대농장들이 차지하였고, 그 대농장들의 실질적인 주인은 물론 대부분 원로원 의원들이었다.
로마군단을 로마군단답게 만들었던 시민들이 사라지자 로마군은 허약해졌고, 누미디아에서 벌어졌던 유구르타 전쟁에서 그 허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끝으로 시민군단은 로마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 당의 부병제는 토지를 분배받기는 했지만 소농민들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웠던 제도였었다.
부병으로 등록되어서 절충부에 속하게되면 약 40년간 일년에 석달 넘게 도읍으로 번상을 해야 했고,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과 장비는 모두 개인부담이었다.
거기다 반드시 3년은 국경에 있는 진과 수에 나가서 경계를 서야 했는데 만약 여기서 죽거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들에게 상당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거기다 당은 고구려만 해도 645년, 647년, 648년, 659년과 661년 그리고 668년까지 계속된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거기다 비록 단기간에 끝나기는 했지만 660년 백제 멸망 이후에도 약 3년간 백제 부흥군과 지속적인 전투를 치루어야 했고, 마지막에는 왜의 원군과도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668년 고구려의 멸망이후에도 역시 약 3년정도 고구려 부흥군의 저항을 분쇄해야 했고, 고구려인들 제압한 시점 이후에는 다시 신라와 점령지역에 대한 분배 문제를 놓고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중국의 사서에서는 645년의 원정에서 당군이 얻은 인명피해를 2천명 정도로 잡고 있지만 그 숫자를 글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으며 그 외에도 설연타와 돌궐, 토번과도 지속적인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특히 토번은 여러 차례 당군을 격파해서 결국 당은 흑치상지 같은 이민족 장수들을 급히 투입해야 할 지경까지 이르러야 했다.
이 기간동안 부병으로 동원되었건 병모로 참여했건 전투에 종군한 병사들의 계속적인 소모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으며 자영 소농민이 대외원정에 종군하는 동안에는 생업은 거의 포기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시민으로 구성되었던 로마군단의 붕괴과정과 상당히 흡사하다고 볼수 있지만 싸움에서 얻은 전리품과 장비구입비 정도 밖에 안되는 급료를 받았던 로마군단병과는 달리 당나라의 부병들은 개인당 17결의 토지를 지급받을수 있었다. 다만 이 토지를 제대로 경작할수 있었는지 여부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의 호구수는 755년의 8백9십만여호가 최대였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정남으로 분류되는 20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비율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낮았다.
당나라가 조사하는 호구수에는 포함되지만 조세와 병역을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호구를 당에서는 불과호(不課戶)라고 불렀고, 조세와 병역을 부담을 지지 않은 사람들을 불과구(不課口)라고 하였다.
당나라에서의 공식적인 불과구는 물론 20세 이하의 연소자나 60세 이상의 노약자, 신체장애자와 노예신분에 속해있던 사람들과 관료들이었다.
하지만 755년의 호구조사에서 파악되었던 8백9십여만호 가운데 불과호는 무려 40%에 달하는 3백 5십여만 호에 달했고, 불과구 역시 80%가 넘었다.
이 부자연스러운 수치는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한 장정의 전사와 부상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이 부자연스러운 숫자는 아마 병역과 조세를 기피하기 위해서 호적에 남성을 여성으로 기입하거나 혹은 태어난 남자아이를 아예 호적에 올리지 않은 상황을 제외하고는 설명을 할 수가 없다고 보고있다.
참고로 8세기 후반의 학자였던 두우가 편찬한 『통전』에서는 당의 실제인구수를 약 1천3백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호적에 잡히지 않은 이 사람들은 고향에서 도망친 백성들과 자기땅을 상실한채 소작농으로 전락한 백성들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당의 부병제가 붕괴된 또 다른 원인은 지속적인 대외원정 외에도 또 다른 측면에서 확인할수 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펠리오와 영국의 존 스타인 벡에 의해 발견된 돈황(감숙성 돈황현)의 호적은 그에 대한 연구를 따로 『돈황학』이라고 부를 정도로 당나라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마치 일본에서 발견된 신라의 촌락문서가 후기 신라의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에 비교할수 있을 것 같다.
돈황에서 발견된 자료중에는 기주에 소속된 9현 가운데 하나인 미현(眉懸 : 협서성 미현)의 서리였던 송지에 관한 기록을 볼수있다.
노리 즉 노련한 서리라고 불리우며 조선시대의 아전들과 같이 지방행정의 실무를 담당했던 송지는 공공연하게 여비보태기라는 관행적인 부담을 거부한다. 이것은 농촌에서 일반적으로 실시되었던 관습에 어긋나는 것으로 송지가 그 부담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당의 균전제와 부병제는 농업활동을 하는 소규모 자영농민들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일괄적으로 같은 크기의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도 영업전이외에는 원칙적으로 대규모토지의 습득을 허용하지 않는 정책의 이면에는 피지배층을 경제적으로 동등한 상태로 만들어놓고 그에 따른 통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들어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런 근본지배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그 지배체제를 지탱하고 유지시켜야할 관리에 의해서 말이다.
같은 상태 혹은 같은 조건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서 구성원간에 경제적인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사유재산제가 실시되는 이상 고대사회건 현대사회건 피할수 없는 일이다.
대운하의 개통으로 인한 강남의 개발과 상업의 발달은 농민들 간에도 경제적인 격차를 나타내게 하였고, 당 왕조가 가장 균질적이고 평등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노력했던 농촌역시 대토지 소유자와 공권력과 결탁한 신흥 권력층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다른 성원들보다 더 많은 경제적인 여유를 가졌던 이들은 자신들에게 지워질 병역과 국경으로 나간 병사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 같은 것들을 거부하거나 다른 힘없는 농민들에게 떠 넘겼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고, 이것은 빈부격차를 늘리는 악순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불합리한 부담에 맞서서 몰락한 농민들이 선택한 수단은 “도망”이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 절충부가 설치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특히 조세와 병역의 부담을 지는 과호의 도망은 엄격한 처벌의 대상이었지만, 과호들의 도주는 중지되지는 않았다.
마침낸 당의 조정은 처벌에 의한 금지정책으로는 이 과호들의 도주 – 이들은 도호라고 불리워졌다 – 를 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는 태평성대로 알려져 있던 당 현종의 재위초기인 723년 재상 우문융의 주도로 소위 『괄호 정책』을 실시한다.
도망친 도호를 처벌하는 대신 회유하는 한편 도망친 곳으로 정착하는 등 파격적인 정책을 실시해서 약 80여만호의 도호를 괄호하는데 성공한다. 이는 전체 호구의 약 10분의 1에 육박하는 숫자로 다소간의 과장이 들어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적지않은 숫자였었다.
이들에게는 처벌대신 회유와 설득으로 다시 당의 행정권 안으로 편입시키고 가벼운 조세를 부담하게 하는등의 정책을 펴지만 결국 당의 근본적인 통치체제의 심각한 균열의 조짐이라고 할수있겠다.
새로운 군대의 등장
앞에서 살펴본대로 차과부(부병으로 등록되는 호적)에 들어가서 부병으로 등록되면 농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군역의 종류는 전시에 동원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도읍으로의 번상과 국경경비로 나눌수 있겠다.
부병제가 붕괴될 무렵 기존의 국경 경비체제인 진수제에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흔히 당의 국경경비는 제정 로마의 국경경비 체제와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리메스(방벽)이라고 불리우는 수비체제는 주로 보조병으로 편성된 소규모 병력을 국경선을 따라 배치하고 야만족의 침입을 감지하면 약간 후방에 군단병으로 편성된 예비부대가 출동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수비체제는 전 국경선을 수비할수 있고, 후방이 적의 침입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줄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길어진 국경선에 배치된 소규모 병력이 감당할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침공에는 무력했다. 실제로 제정 로마의 오현제시대(같은 시대 로마인들은 황금시대라고 불렀다)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때에는 벌써 이 리메스가 여러 차례 돌파되기 시작했고, 이것에 대비하기 위해서 황제는 2개군단을 따로 창설해야만 했다.
즉 소규모 적의 반복적인 침입에는 나름대로의 능력을 발휘하는 방어체제였지만 적이 대규모로 결집하고 전력을 집중시킨다면 막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로마나 당나라 모두 이러한 소규모 진지를 이용한 방어체제가 제 기능을 발휘한 것은 국경선을 마주한 상대방의 군사적 역량이 결집되지 못한 시기였었다. 로마의 리메스나 당의 경계선 모두 국경선 너머에 있던 게르만족과 돌궐족이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국경선을 넘어서 공격을 해야할 목적이 발생하고 전력을 집중할 능력, 그리고 공격시 발생할 피해를 감당할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로마가 후방에 예비대를 편성하는 것으로 대처했다면 당나라는 이민족을 분열시켰던 기미정책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고 돌궐의 제 2제국이 성립되던 7세기 후반부터 국경의 방어요충지에 진수(鎭戍)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방어부대를 주둔시킨다. 이것을 군진(軍鎭)이라고 불렀는데 당나라가 부병에 의한 징병제를 포기하고 모병제를 도입하는 것과 발을 맞추어서 점점 규모가 커져가기 시작했으며 결국 군진을 지휘하는 번진을 설치하게 되었다.
710년 최초로 설치된 안서번진을 시작으로 이어진 번진의 탄생은 당나라 후기의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던 절도사의 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물론 부병제의 붕괴가 곧바로 완전한 모병제의 등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당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모병제를 실시한 것은 737년으로 군진병을 모병으로 충원하는 조칙이 내려졌다..
보통 장정건아라고 불리웠던 이 병사들은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변경의 군진에서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 부병들과 마찬가지로 조세를 면제해주고 급료를 지급하는 모병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는 군진 인근지역에 경지를 지급받았으므로 둔전병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지만, 완전한 형태의 병농일치의 부병제는 붕괴되었다.
이러한 장정건아는 주로 객호라고 불리우는 도망농민들이나 전객이나 장객이라고 불리우는 소작농들로 충당되었다.
한편 측천무후가 정권을 잡고 있던 7세기 말 산동지방을 중심으로 단결병(團結兵)이라고 불리우는 병종이 태어났다.
단결병이라고 불리우는 병종은 일종의 지역 방위부대로 급증하기 시작한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고향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졌으며 장정건아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군사체제의 균열과 혼돈속에서 탄생되었다.
150호마다 병사 15명과 말 1필로 징병된 단결병은 주로 지방의 치안을 담당했으며 단련사라고 불리우는 무관이 지휘하였다. 초기에는 지방에서 파견되었지만 현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지방의 주장관인 자사가 겸임하면서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흔히 지방행정의 책임자가 민정권과 군 지휘권을 동시에 장악했던 경우는 전쟁이 빈번했던 시기 혹은 외적의 침입이 빈발했던 시대로 단결병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설치가 확대되었다.
이 단결병은 모병이 아니라 징병이었고, 원칙적으로는 부유한 농민을 우선적으로 징병하게 되어있지만 이미 동등함이 사라진 농촌의 부유층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관리들과 결탁해서 소작농들이나 빈농들에게 전가시켰다.
한편 부병들의 주요임무였던 도읍으로의 번상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 조정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읍의 경비만을 전담하는 확기(擴騎)라는 새로운 병제를 창설하였다.
725년 만들어진 이 병제는 초기 모병제를 염두에 둔 것과는 반대로 국경경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기존의 부병제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물론 이 확기들도 단결병들과 마찬가지로 부유한 농민들을 우선적으로 징병한다는 원칙이 있었지만 결국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당나라가 시행했던 부병제의 붕괴과정을 살펴보았다. 간단히 요약하면 636년 시행되었던 부병제는 747년에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부병제가 붕괴된 가장 큰 원인은 계속된 팽창정책으로 인해 빈번해진 전쟁에 동원되었던 부병들이 전쟁을 기피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같은 크기의 토지를 나누어주고 그 반대급부로 동일한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농민들을 통제하려고 했던 통치제제가 농촌의 계층분화에 따른 변화로 인해서 통제에 실패했다는 점을 들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왜 부병제의 붕괴가 확실해진 상황에서도 당의 지도층들은 부병제를 고집했는지 하는 것이다.
우선 들수 있는 이유는 비용의 증가였었다. 실제로 현종 시대에 점차 대규모로 커지기 시작한 변경의 번진은 막대한 유지비용이 들어갔고, 양세법으로 거두어들인 거의 모든 세입이 변경의 군진을 유지하는데 소모되었다.
부족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실시한 소금의 전매제도가 결국 당의 완전한 소멸을 불러온 황소의 난의 발생원인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의 고집스러운 태도가 약간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인은 이들 지배층들이 병농일치의 부병제를 가장 이상적인 군사제도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지도층들은 이들 소농민들을 국가의 하부단위로 이해했고, 이들에게 같은 크기의 토지를 분배해서 동등한 상태로 만들어 놓은 후에 이들을 징집해서 군대를 이룬다는 것은 주대의 정전법에서부터 그 전통이 이어져 온 것으로 당시의 상황으로는 가장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징병체제였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동감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당이 이러한 부병제를 포기하게 된 것은 더 이상 부병제를 시행할수 없게 된 체제적인 문제도 있지만 병농일치의 부병제를 가장 이상적인 군사제도로 이해했던 기존의 귀족들 대신 과거제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관료들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부터였다.
이들은 기존 지배층인 귀족들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었고, 부병제를 고집한다면 결국 소농민들의 이탈을 가져올것이라는 예측도 했었다.
8세기 중반 완전히 사라진 부병제는 모병제로 대체되었고, 그것은 토지를 분배를 기초로 한 당나라의 행정지배 체제가 후퇴하게 된 것을 의미했으며, 당 현종말기에 발생한 안록산의 난을 기점으로 당은 자랑스럽게 불리워졌던 - 세계제국 - 이라는 명칭과는 어울리지 않은 모습들을 보여주어야 했다.
부병제의 붕괴는 결국 거대한 번진의 출현과 절도사라는 직책을 탄생시켰고, 당을 멸망시키는 열쇠가 되었다.
개인이건 국가건 초기의 성장동력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필연적으로 노쇠화 현상이 발생한다. 로마가 위대한 제국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이러한 상태에서 치열한 내부개혁으로 체제를 유지시켰다는 점이다.
또한 한 국가나 혹은 민족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정책의 변경과 소멸은 해당 국가나 민족의 존립기반을 흔들어버릴수도 있으며 특히 고대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다.
financier 블레이드님, 글좀 퍼가도 되겠습니까?^^ 2005-01-06 23:53:15 financier 블레이드 저도 여기저기에서 짜깁기하고 약간의 살을 붙인것에 불과합니다. 부담같지 마시고 대신 디코에서 가져갔다는 것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5-01-07 00:11:27 210.124.57.245 비도(승우) 좋은글입니다^^정말잘읽었습니다.블레이드님^^근데 참아이러니하지안습니까?진수가 국경방어를 감당키러여워 배치한 번진들이 나중에번진할거하여 당이무너진다는게.-- 절도사들의 지방분권화-안녹산의난이 그시발점이었고 나중엔 거의 독립된각각의 세력이 되어5대10국 2005-01-07 15:58:10 218.153.90.215 비도(승우) 의 결과를 낳죠.그리고 단련사는 송대에도 그제도가 유지되죠.물론 당만큼 이민족을 막아내지못하고 무너집니다만--;아무는 젛은글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