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양어선 참치잡이에서 GE 후계자 양성과정까지 월가의 전설적인 주식투자가로 불리는 워렌 버핏은 “경영권 세습은 2020년 올림픽 대표팀을 2000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자식들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만큼 경영권 세습은 오너의 입장에선 기업의 생존을 가름할 만큼 중요한 숙제다. 과거 국내 재벌가의 경영승계는 재산을 넘겨주거나, 해외 유학이나 고속 승진을 통한 내부입지 강화 정도에 국한된 경우가 많았다. 이렇다 보니 “경영자로서의 자질이나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우려 섞인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최근 3, 4세의 경영수업을 보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밀하고 조직적이며 체계적인 시스템 속에서 이뤄지고있다. 모 그룹의 한 관계자는 “본인이 경영일선에 나서고 싶어도 선뜻 ‘아버지, 제가 맡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처지가 못 된다”며 “주주의 입김과 사회적 감시가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에서 후계자 교육은 그만큼 체계적이며 은밀하게 전개된다”고 강조했다. ◆경영 수업 어떻게 진행되나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윤홍씨는 한때 LG칼텍스 정유소의 ‘총잡이(주유원)’로 활약했었다. 충분한 현장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허 회장의 지시에 따른 것. 이어 영업전략팀과 강남 지사, 경영분석팀을 거치며 정유사업을 배웠다. 올해 초엔 LG건설(GS건설로 바뀔 예정)에 입사했다. 재계는 윤홍씨가 GS의 핵심 자회사인 LG정유에 이어 계열사인 LG건설로 자리(재경팀 대리)를 옮긴 것은 그룹 내 자회사와 계열사를 두루 돌며 실무경험을 쌓아 가는 경영수업의 일환으로 해석하고 있다. LG건설은 허 회장이 최대주주로 대표이사 회장직을 겸직하고 있으며 윤홍씨는 0.14%의 개인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의 큰아들인 동원금융지주 김남구 사장은 동원산업 신입사원이던 1986년 원양어선을 탔다. 4개월 남짓 남태평양과 베링해로 참치잡이에 나선 것. 당시 김 사장은 하루 16시간씩 중노동을 했지만 ‘로열 패밀리’라는 사실을 숨긴 일화는 업계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된다. 위의 두 사례처럼 최근 ‘현장을 뚫어라(On the job training)’식의 후계자 경영수업이 대세다. 기업의 주력 사업군의 말단에서 현장경험을 쌓길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 때문. 사실 ‘OJT’는 후계자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수업은 아니다. 이미 기업 내의 종업원 교육 훈련방법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피교육자가 해당 직무에 종사하면서 지도교육을 받기 때문에 따로 교육시간을 낼 필요도 없고 작업장 분위기는 물론 구성원들간의 친밀감을 높일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 역시 현장 수업을 착실히 받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지방에 있는 공장에 내려가 현장 분위기를 익히고 식당에 가서 밥도 같이 먹으며 종업원들과의 친밀도를 높이고 있다. 기아차의 한 임원은 “정 사장은 지난 99년 현대차 구매담당 이사로 입사한 이후 자재, 구매, AS, 영업, 차량정보산업, 기획 등을 두루 거치며 경영수업을 착실하게 받아 왔다”면서 “뚝심 경영이 특징인 현대가의 후손답게 경영공부도 공격적인 스타일로 전개해왔다”고 덧붙였다. 이는 현장의 목소리를 중요시하는 정몽구 회장의 가르침 때문. 종업원들과의 ‘스킨십’ 수업은 삼성전자의 이재용 상무도 마찬가지. 수원, 탕정, 천안 등 삼성전자 지방 공장을 돌면서 빼놓지 않는 의례가 직원들과 함께하는 점심이다. 직원식당에서 식사를 같이하면서 얼굴 익히기에 주력하고 있다. 이때면 평상시와 달리 식당 메뉴가 상당히 좋아진다고 한다. 사실 이재용 상무의 경영수업은 시스템을 중요시 여기는 삼성의 문화답게 상당히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언론에 공개된 이 상무의 경영 수업은 지난 2002년 미국 GE그룹에서 실시하는 최고경영자 양성과정(EDC; Executive Development Course)의 연수에 참가했던 것이다. 이 연수에 이 상무가 참가하게 된 것은 제프리 이멜트 GE 회장의 특별초청 덕분이었다. 이멜트 회장은 GE그룹 회장으로 선임된 직후인 2001년 10월 한국을 방문, 이건희 회장과 한남동 승지원에서 만나 이 상무의 최고경영자 연수과정 참가를 제안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이뤄졌다. 이 연수과정을 통해 이 상무는 글로벌 비즈니스 리더가 되는 법, 최고 경영자가 되는 법을 배웠다. 사실 중요한 것은 교육내용이 아니다. 이 과정은 일종의 글로벌 리더간 네트워크 구축의 장소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이 교육과정을 통해 횡적으로 연수 동기생들간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되며 끈끈한 인간관계 형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재용 상무는 23살에 삼성에 입사하여 30대 초반인 33살에 임원이 됐다. 정의선 사장은 30세에 임원이 되어 35세에 사장으로 발령 났다. 김승연 한화 회장은 무려 29살에 사장이 됐다. 경영권 승계의 경우 대부분 이처럼 초고속 승진이 보통이다. 그만큼 재벌가의 경영수업도 훨씬 일찍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후계자들은 경영에 참가하기 전에 보통 ‘아버지의 밥상머리’에서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선대부터 내려온 경영철학이나 리더십을 곁에서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히는 기회를 가진다. 특히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나 선대에서 겪었던 실패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그 동안 쌓았던 다양한 정·관계의 인맥 등 눈에 보이지 않은 노하우를 고스란히 전수받게 된다. 미국 통으로 유명한 김승연 한화 회장이 미국 정계에 탄탄한 인맥을 갖추게 된 것은 부친인 고 김종희 전 회장이 1990년부터 한미친선협회 이사로 활약하면서 구축한 인맥을 이어받아 발전시켰기 때문. 김 회장은 한미교류협회를 만들어 미국인맥을 더욱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거 고 이병철 회장은 사람을 다루는 기술인 소위 ‘황제학’을 이건희 회장에게 전수했고 손자인 이재용 상무에게 ‘내 생각을 말하기 전에 남의 말을 먼저 들으라’는 ‘경청(傾聽)’을 가르치기도 했다. 2, 3, 4세와 함께 일하는 임원들은 “총수인 아버지와 동행하는 것 자체가 훌륭한 경영 수업”이라고 입을 모은다. 밀착 동행하며 아버지의 경영철학과 리더십을 배우는 것 자체가 강도 높은 훈련인 셈이다. 최태원 SK 회장과 동생인 최재원 SK엔론 부회장은 모두가 학부에서 과학을 전공했다. 선친인 고 최종현 회장의 강력한 권고였기 때문. 최종현 전 회장은 “경제의 기본원칙은 ‘합리(合理)’다. 따라서 경제를 잘 알려면 ‘理’, 즉 물리나 화학, 생물 가운데 하나를 공부해야 한다”고 아들에게 가르쳤다. 그래서 최태원 회장은 고려대 물리학과를, 최재원 부회장은 고려대 물리학과에 들어간 후 재료공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이처럼 경영에 입문하기 전에 대부분의 후계자들은 어려서부터 철저한 학력 및 커리어 관리를 통해 경영자 자질을 키운다. 대부분이 일류대 졸업 후 미국 명문대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거치며 글로벌 감각을 키운다. 같은 맥락으로 해외에서 1~2년 근무하기도 한다.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나온 이재용 상무는 日 게이오대 석사, 美 하버드대 박사과정을 거치면서 이론적 베이스를 강화했다. 이는 부친인 이건희 회장도 마찬가지. 일본 와세다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학부를 나왔다. 정의선 사장은 고려대 경영학과, 美 샌프란시스코대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동원 금융지주 김남구 사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대에서 경영관리 석사학위를 받았다. 회사에 들어와서는 영업, 마케팅, 재무 등 회사 전반을 체험할 수 있도록 여러 분야를 두루 거친다. 이런 시기는 짧게는 5년 내외이다.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의 아들인 조현준 부사장 등 3형제는 미국 변호사와 컨설턴트 등으로 활동하면서 경영 수업을 쌓았다. 조석래 회장의 3남 모두 그룹의 중장기 경영전략을 모색하는 전략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사이좋게 장남 조현준 부사장과 둘째인 조현문 전무, 삼남인 조현상 상무가 각각 신규 사업발굴, 법률과 경영전략, 마케팅 전략수립 등 그룹 내 각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경영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물론 예외는 있다. LG칼텍스정유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허동수 회장은 미국에서 화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지난 73년 과장으로 입사한 뒤 임원이 되는 데만 9년이 걸렸다. 그 뒤 94년 당시 호남석유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됐으니 최고 경영자에 오르는 데 무려 2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분야별 ‘맛보기’가 끝나면 대다수가 경영기획실이나 기획총괄본부로 배치된다. 전반적인 회사 흐름을 꿰뚫고 핵심 사업을 추진할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다. 최태원 회장은 91년 그룹 미주 경영기획실에서 경영수업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SK상사 사업개발팀장(이사), 상무를 거치면서 신규사업과 기획업무를 맡아 그룹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유학시절 미국에서 부상하고 있던 정보통신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고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에는 아예 실리콘밸리의 한 정보통신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정보통신을 SK의 주력사업으로 설정하고 제2 이동통신사업 수주전에 깊숙이 관여했으며, SK텔레콤을 인수한 뒤에는 SK상사와 SK에 몸담고서도 그룹 정보통신사업을 직접 챙기며 경영자로서 성공적인 안착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은 94년 SKC 사업개발팀장으로 출발, SKC해외사업담당 이사, SKC 구조조정본부 전무, SK텔레콤으로 옮겨와 전략지원부문장(부사장), SK텔레콤의 전략기획실, 재무관리실, 법무실, IR 등을 총괄하면서 경영 전반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2차 교육도 이뤄진다. 회사 내 고급두뇌들이 후계자들의 선생을 자처하게 된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SK경영연구소, 정 사장은 현대차 소속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를 통해 중요 현안과 연구보고서를 수시로 브리핑 받는다. 이 상무는 삼성경제연구소 박사들과 함께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과외 수업을 받는다. 삼성그룹 관계자에 따르면 이 상무는 지난해부터 박사급 인력으로 구성된 학습 동아리를 만들어 매달 1차례씩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정기모임을 갖고 있다. 이 모임은 통신, 정보기술(IT), 생명공학 분야 박사 20여 명으로 구성돼 있으며, 주요 대학 현직 교수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관계자는 “친목의 성격도 있지만 참여하고 있는 구성원의 면면을 따져볼 때 일종의 ‘스터디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일정한 과제를 내고 이를 제출하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경영 수업이 곧 경영권 승계로 이어지나 = 후계자들은 전문경영인 못지않은 능력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생활한다. 업계 관계자 및 시장의 투자자들은 “적법한 후계자 승계를 문제삼을 수는 없지만 자질을 갖춘 리더인지 스스로 검증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너는 전문경영인과 달리 잘못을 견제할 장치가 적어 실력이 입증되지 않은 후계자의 대권 승계는 리스크가 클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구멍가게를 경영하다가 망하면 자기 혼자 고달프고 말지만 재벌기업 경영에 실패하면 그룹 차원에 머물지 않고 경제 전체가 결딴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확실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특히 2, 3, 4세 경영인들은 대체적으로 어려서부터 귀족수업을 받아서인지 우선 자존심이 매우 세다는 것이 재계 사람들의 얘기다. 부친의 후광(後光)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2세 이상 경영인들이 자신만의 사업을 일으켜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최근 경영에 막 참여한 재벌 3,4세들 가운데 일부가 벤처 바람 속에서 e비즈니스를 경쟁적으로 벌였다가 실패한 것도 이와 같은 사례가 될 것이다. 다행히 이들의 사업은 실험적 성격이 강해서 그룹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적었지만 경영 대물림이 얼마나 위험한지 다시 한번 돌이켜 볼 수 있는 좋은 사례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은 대부분 초고속 경영승계를 통해 대권을 물려받고 있다는 것이다. 재벌 총수 일가들은 20대 후반에 처음 입사해서 30대 초·중반에 임원에 올라서고 30대 후반이 되면 최고경영자의 반열에 올라선다. 모 그룹의 한 간부는 “총수 일가의 경영승계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회사 내 금기”라고 귀띔했다. 초고속 경영승계의 문제점은 우선 최고경영자까지 이르는 경영수업 기간이 너무 짧아 자질을 키우거나 검증까지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참여연대의 한 관계자는 “최고경영자의 선택이 이사회의 권한인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모든 의사 결정권이 총수에게 집중돼 있는 1인 지배체제라서, 총수 자녀가 처음부터 유일한 후계자로 인식되는 현실에서는 객관적인 능력 검증이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최고경영자의 안목과 판단이 기업의 성패를 결정하는 글로벌 경쟁시대에서 능력에 대한 검증 없이 총수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자동 승계하는 관행은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외환위기 당시 국내 30대 재벌 중 부도로 쓰러진 16개 그룹 최고경영자의 상당수가 재벌 2세였다.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인 포드의 경우 1903년 창업한 이후 아들인 애드셀 포드가 32년부터 경영을 시작했으나 43년에 아들이 죽은 후 헨리 포드가 다시 사장으로 복귀했다가 45년엔 포드2세(손자)가 사장으로 경영을 맡았다. 이후 76년에 포드2세가 가족경영포기를 선언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돌입했다. 98년에 창업자의 증손자인 윌리엄 포드가 경영권을 다시 맡으면서 능력과 자질에 따라 세습과 전문경영인의 혼합경영체제를 유지하며 성공적인 길을 걷고 있다. 이처럼 가족경영을 하는 글로벌 기업들은 가족들의 경영 참여에 엄격한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다. 오너의 가족일 경우에도 사장이 될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경쟁에서 탈락하는 것이 글로벌 기업의 변함없는 불문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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