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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安市城 싸움
안시성 싸움 전 피차의 교섭과 충돌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수(隋)와 당(唐)과의 두 번 싸움의 사실이 거의 수서(隋書)와 당서(唐書)를 추려 기록한 것이고, 그 두 싸움에 관한 수서ㆍ당서의 기록이 거의 거짓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수서는 수가 그 싸움 뒤에 곧 멸망하고, 그 싸움을 기록한 자가 수의 사람이 아니요 당의 사람이므로 거짓이 오히려 적거니와, 당서는 당의 연대가 오래 계속되어 고구려와 싸운 기록은 곧 당 때의 사관(史官)이 적은것이기 때문에 시(是)와 비(非)와 이기고 짐을 뒤집어 꾸며서 거짓이 얼마인지를 알 수 없다. 이제 신구 당서ㆍ자치통감(資治通鑑)ㆍ책부원귀(冊府元龜) 등에 보인 두 나라의 교섭ㆍ충돌의 경과를 대강 기록하여 그 진위(眞僞)를 분별한 다음 당시의 실정을 논술하려고 한다.
1) “정관(貞觀) 17년 6월……태상승(太常丞) 등소(鄧素)가 고려(고구려)에 사신갔다가 돌아와서 회원진(懷遠鎭)에 수비병을 더 두어 고구려를 압박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먼 곳의 사람이 복종하지 아니하면 문덕(文德)을 닦아서 오게 할 것이요, 1,2백 명의 수비병으로 능히 멀리 떨어져 있는 자를 위복(威服)시켰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소.(貞觀十七年六月……太常丞鄧素 使高麗還 請於懷遠鎭 增置戍兵 以逼高麗 上曰 遠人不服 則修文德以來之 未聞 一二百戍兵 能威絶域者也)”하였다. 등소가 고구려를 보고 온 결과 고구려의 강석함을 두려워하여 수비병을 증가시키기를 청한 것인데 그 수가 단 몇백을 청한 것이 아닐 것이니 이는 한갓 업신여겨 쓴 것이지 실제가 아니다.
2) 윤(閏) 6월 양제(煬帝)가 방현령(房玄齡)에게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독단하니 진정 참을 수 없는 일이오. 지금의 우리 병력으로 쳐서 빼앗기가 어렵지 아니할 것이나 다만 백성들을 수고롭게 할 수 없어 우선 글안[契丹]과 말갈(靺鞨)로 하여금 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閏六月 煬帝渭房玄齡曰 蓋蘇文 弑其君 而專國定誠不可以忍 以令日兵力 取之不難 但不欲勞百姓 吾欲且使契丹靺鞨 擾之 何如)” 하였는데 말갈은 곧 예(濊)이니 고구려에 복속(服屬)한 지가 이미 여러 백 년이요, 글안도 장수태왕(長壽太王) 이후에 고구려에 속하였으니 당태종이 어찌 예와 글안을 시켜 고구려를 침노하게 할 수 있으랴? 당태종이 비록 망령이 들었더라면 이 따위 실제에 맞지 아니하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도 대개 사관의 망령된 기록이다.
3)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고려(고구려)를 치기를 권하였으나 황제는 상 중(喪中 : 영류왕의 죽음)이라 하여 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或勸帝 可遂討高麗 帝不欲因喪伐之)”라고 하였는데, 당태종이 연개소문을 임금을 죽인 적이라 하여 이를 치려고 하였다면 춘추의 의리로 보더라도 상 중에 치는 것이 옳을 것인데, 당태종이 도리어 상 중이라 하여 치려 하지 않았다고 함이 무슨 말인가. 대개 당태종이 이때에는 아직 동침(東侵)의 방략을 완전히 정하지 못하여 군사를 일으키지 못한 것이니 사관의 해설은 당치도 않은 것이다.
4) “신라가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고려가 백제와 동맹하여 장차 신라를 치려고 합니다……하여 당제(唐帝 : 태종)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에게 명하여 국서를 가지고 가서 고구려를 타이르기를, 신라는 우리에게 나라를 맡겼으니 너희와 백제는 각기 군사를 거둘 것이다. 만약 다시 공격하면 내년에 군사를 일으켜서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라고 하게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현장이 평양에 이르니 막리지(연개소문)는 이미 군사를 내어 신라를 쳐서 그 두 성을 깨뜨렸었다. 현장의 요구로 고구려 왕이 막리지를 불러 돌아오자 현장이 그를 타일러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하니, 막리지가 말하기를 옛날 수(隋)가 우리 나라를 침노하자 신라는 우리의 허를 틈타 우리 땅 5백 리를 빼앗았으니 원래 우리가 땅을 침노하였다고 할 것이 아니다. 군사를 일으키기가 두려워서 아직까지 못했을 뿐이다.(新羅遺使言 高麗百濟聯和 將見討……唐帝 命司農承相里玄獎 齎璽書 諭高麗曰 新羅委質國家 爾與百濟 各宜戢兵 若更攻之 明年發兵 擊爾國矣翌年正月 玄獎至平壤 寞離支已發兵 擊新羅 破其兩城 高麗王使召之 乃還 玄奬諭使勿攻新羅莫離支曰 昔隋人入寇 新羅乘虛 奪我地五百里 白非歸我侵地恐兵未能已)”고 하였는데, 상리현장이 이와 같이 오만한 국서를 가지고 왔다면 훗날 장엄(莊儼 : 아래 글에 보임)과 같이 잡혀서 옥에 갇혔을 것인데 어찌 무사히 돌아갔으랴? 또 연개소문이 이때 신라 정벌 중에 있었다면 어찌 당의 사신 현장의 청에 의해 소환될 수 있었으랴? 신라 본기에 의하면 수가 침노해왔을 때 허를 타 5백 리 땅을 빼앗은 일도 없고 또 연개소문이 두 성을 격파한 일도 없었으니, 이것은 대개 당태종이 현장의 사신갔다 돌아온 것으로 인하여 출병의 구실을 만들어 나라 안에 선포하려고 조작한 말일 것이다.
5) “황제가 고구려를 치고자 고구려를 속일 사자(使者)를 모으는데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니, 장엄(蔣儼)이 분연히 나서서 천자의 위무(威武)에 사이(四夷)가 다 두려워하는데 어느 나라가 감히 명을 받들고 간 사람을 도모하겠느냐? 만약 불행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진실로 내가 죽을 곳이다 하고 마침내 자기가 가기를 청하여 갔다가 막리지에게 구금되었다.(帝將伐高句麗 募僞使者 人皆憚行 蔣儼奮曰 以天子威武 四夷畏威 蕞爾國 敢圖王人 如有不幸 固吾死所也 遂請行 僞莫離支所囚)”고 하였는데 장엄이 무슨 사명을 띠고 갔는지 역사에 기록되지 아니하였으나 만일 그 전에 연개소문에게 잡혀서 죽은 당의 사신이 없었다면 어찌하여 모두 가기를 꺼려하기에 이르렀으랴? 이로써 당의 사관(史官)들이 그 나라의 치욕을 숨기기 위하여 교섭의 전말을 많이 빼버렸음을 볼 수 있다.
고구려와 당은 서로 강약을 다투는 양립(兩立)할 수 없는 나라요, 연개소문과 당태종은 너 나의 우열을 내기하는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인데, 이같은 두 인물이 두 나라의 정권을 잡았으니 두 나라 전쟁의 폭발은 조만간 필연적으로 일어날 사실이었다. 만일 연개소문의 집권이 몇 해만 더 일렀더라면 당태종이 동침하기 전에 이미 연개소문의 서정(西征)이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다만 당태종이 지나를 통일한 지 30년, 또 제왕이 되어 모든 시설을 재지(才智)껏 정비한 지 20년, 또 돌궐ㆍ토곡혼 등의 나라를 정복한 지 10년이 된 뒤에야 연개소문은 겨우 혁명을 성공하고 ‘신크말치’의 자리에 올랐으므로 당태종이 먼저 침입한 것이다. 연개소문은 자기가 고구려 내정과 외교의 모든 큰 사건을 다 정리한 뒤에 전쟁을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지마는 이는 사세(事勢)가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둘러서 남으로 백제와 동맹을 맺고 서북으로 설연타(薛延陀) 등을 선동하여 여당(與黨)을 만들 뿐이었다. 당태종은 수의 양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망했음이 징계되었으나 또한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에 있음을 자각했으므로 연개소문의 내부세력이 아직 완전히 굳어지기 전에 이를 꺾으려고 서둘러서 군사를 동원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양편의 형세였으니 이 밖의 저네의 역사의 춘추필법적 기재와 우리의 역사의 노예 근성적 편집은 거의 믿을 수 없는 망령된 말일 뿐이다.
당태종의 전략과 侵入 路線
당태종의 고구려 침입은 일조일석(一朝一夕)의 일이지마는 그 경영의 거의 20년 동안의 일이었다. 진(秦)ㆍ한(漢) 이후에 흉노(匈奴)가 쇠하고, 위(魏)ㆍ진(晋) 이후도 오호(五胡)는 다 지나에 잡거(雜居)하였으며, 그 밖에 돌궐ㆍ토곡혼이 가끔 지나의 서북에서 일어났으나 다 오래지 않아 잔약해지고, 오직 고구려만이 동남ㆍ동북에서 지나에 대치하여 척발씨(拓跋氏)의 주(周)와 겨루고 수(隋)에 이르러는 양제(煬帝)의 수백만 군사를 전멸시켜서 위무(威武)가 일세를 진동하여 놀라게 하는 동시에 지나와 맞서서 ‘신수도’의 교의(敎議)며 이두자(吏讀字)의 시문(詩文)이며, 그 밖에 음악ㆍ미술 등이 다 그 고유의 국풍(國風)으로 발달하여 정치상뿐 아니라 엄연한 일대 제국을 형성하였으므로, 당태종이 지나 이외에 또 고구려가 있음을 시기하여 정관(貞觀)의 치(治) 20년 동안에 겉으로는 편안하고 한가롭게 여러 신하들과 도를 닦는 길을 강론하였지마는 그의 머릿속에는 유악(帷幄)의 모신(謀臣)인 방현령(房玄齡) 등도 알지 못하게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한 계획이 오락가락하였던 것이다. 그는 고구려를 치려면 먼저 수의 양제가 패한 원인을 구명하여 그와 반대되는 전략을 짜야겠다고 하여 이에 다음과 같은 초안을 작성하였다.
1) 수의 양제가 패한 첫째 원인은 정병(精兵)을 가리지 않고 군사를 취하여 숫자상의 군사는 비록 4백만에 이르렀으나 전투를 감당할 만한 자는 수십만에도 차지 못한 때문이라 하여, 10년 양성한 군사 중에서 특별히 정예한 군사 20만을 골라내고,
2) 수의 양제가 패한 둘째 원인은 고구려의 변경(邊境)부터 잠식(蠶食)해 들어가지 아니하고 대뜸 대군으로 평양에 침하였다가 양식길이 끊어지고 후원군이 없었던 때문이라 하여 평양에 침입하지 않고 먼저 요동이 각 고을을 정복하려 하였고,
3) 수의 양제가 패한 셋째 원인은 수백만 육군이 제각기 먹을 양식을 스스로 지고 가 도중의 군량을 삼고 따로 수군으로 하여금 배로 각지 창고에 있는 양식을 물로 운반해서 목적지에 가져다가 머물러 있는 군사의 양식으로 삼게 하였다가 양식 실은 배가 고구려의 수군에게 모두 격침된 때문이라 하여 배로 운반하는 양식의 위험을 보충하기 위해 국내에 소ㆍ말ㆍ양 등의 목축을 장려해서, 전사(戰士) 한 사람에 대해 타는 말과 양식 실은 소 각 한 마리와 양 몇 마리씩을 분배해주어 양식을 군사가 직접 지고 가지 않고 소로 운반하게 하여, 도착한 뒤에는 배로 운반해오는 양식을 기다릴 것 없어 양식이 충족하게 하고 또 소ㆍ양ㆍ말 등의 고기를 먹게 하려 하였다.
4) 수의 양제가 패한 넷째 원인은 다른 여러 나라의 원조가 없이 오직 혼자의 힘으로 고구려와 싸운 때문이라 하여, 신라 김춘추가 구원을 청하자 공수동맹의 의를 맺어 고구려의 뒤쪽을 교란시키게 하려 하였다.
이상과 같은 방략을 주도면밀하게 작성한 뒤 기원 644년 7월에 각 군대를 낙양(洛陽)에 집결시키고, 군량은 영주(營州)의 대인성(大人城 : 지금의 泰皇道)에 모으게 하고,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에게 명하여 유(幽)ㆍ영(營) 두 주(州)의 군사를 인솔하고 요동 부근을 유격(遊擊)하여 고구려의 형세를 더듬어 알아보게 하고,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에게 명하여 군량을 대인성으로 운반하게 하였다.
그 해 10월에 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으로 평안도 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을 삼고, 상하(常何)ㆍ좌난당(左難當)으로 부총관(副總管)으로 삼고, 방효태(龐孝泰)ㆍ정명진(程名振)ㆍ염인덕(冉仁德)ㆍ유영행(劉英行)ㆍ장문간(張文幹)으로 총관(總管)을 삼아서 강(江)ㆍ회(淮)ㆍ영(嶺)ㆍ협(峽)의 정병 4만 명과 장안(長安)ㆍ낙양(洛陽)의 용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떠나 말로는 평양으로 향한다고 하고 실은 요하(遼河)로 향하였다. 또 이적(李勣)으로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을 삼고 강하왕(江夏王) 왕도종(王道宗)으로 부총관을 삼고, 장사귀(張士貴)ㆍ장검(張儉)ㆍ집실사력(執失思力)ㆍ계필하력(契苾何力)ㆍ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ㆍ강덕본(姜德本)ㆍ오흑달(吳黑闥)로 총관을 삼아서 육로로 요동으로 향하여 두 군사가 요동에서 합세하게 하고 당태종은 친히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뒤따르기로 하였다.
연개소문의 방어 겸 進攻의 전략
당의 군사가 침입해온다는 기별이 이르니 연개소문은 여러 장수들을 모아 대항할 계책을 강구하는데, 혹은 평원왕(平原王) 때에 온달(溫達)이 주(周)와 싸웠을 때와 같이 기병으로 마구 무찔러서 요동 평야에서 격전을 벌여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옳다고 하고, 혹은 영양왕(嬰陽王) 때에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隋)와 싸웠을 때와 같이 마을과 들의 백성과 곡식을 죄다 성으로 옮겨 지키게 한 뒤에 평양으로 꾀어들여 양식길을 끊어서 굶주려 피곤해졌을 때를 타서 쳐 깨뜨리는 것이 옳다고 하여 여러 사람의 의론이 분분하였다. 연개소문이 말하였다. “전략은 형서에 따라 정하는 것이오.
오늘날의 형세가 평원왕 때나 영양왕 때와 다른데 어찌 그때의 형세와 같이 여겨 전략을 정한단 말이오. 오늘에 있어서는 위치를 골라 방어하고 기회를 따라 진공해야 할 것이니 옛날 사람의 규정한 것을 그대로 지켜서는 아니되오.” 그리고 그는 명령을 내려 건안(建安)ㆍ안시(安市)ㆍ가시(加尸)ㆍ횡악(橫岳) 등 몇몇 성읍(城邑)만 굳게 지키게 하고, 그 나머지는 곡식과 말먹이를 혹은 옮겨놓고 혹은 태워버려 적으로 하여금 노략질할 것이 없게 하고, 오골성(烏骨城) - 지금의 연산관(連山關)으로 방어선을 삼아 용감한 장수와 군사를 배치해놓고, 따로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과 오골성주(烏骨城主) 추정국(鄒定國)에게 비밀히 일러 “지금 당나라 사람들이 수나라의 패전한 것을 징계삼아 양식에 특별히 유의해서 장래 군량이 모자랄 때 보충하려고 군중에 소ㆍ말ㆍ양을 수없이 가져왔는데,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어 풀들이 다 마르고 강물도 얼어버리면 그 가축들을 무엇으로 먹이겠소. 저들도 이것을 알기 때문에 빨리 싸워 결판을 내려고 할 것이오. 그러나 저네가 수나라의 패전을 징계삼아 평양으로 바로 나오지 않고 안시성을 먼저 공격할 것이니, 양공(楊公 : 萬春)은 나가 싸우지 말고 성을 굳게 지키다가 저네가 굶주리고 피곤해지기를 기다려 양공은 안에서 나와 공격하고, 추공(鄒公 : 定國)은 밖에서 진격하오. 나는 뒤에서 당의 군사를 뒤를 습격하여 아주 돌아갈 길이 없게 해서 이세민(李世民 : 唐太宗)을 사로 잡으려 하오.”하였다.
上谷의 횃불과 당태종의 敗走
해상잡록(海上雜錄)에 이런 기록이 있다. “당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일찍이 당의 첫째가는 명장 이정(李靖)으로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을 삼으려고 하니까 이정이 사양하며 “임금의 은혜도 무겁거니와 스승의 은혜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일직이 태원(太原)에 있을 때에 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웠는데 그 뒤에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한 것이 다 그의 병법에 힘입은 것이니, 오늘에 와서 신이 어찌 감히 전일에 스승으로 섬기던 개소문을 치겠습니까?”하였다. 태종이 다시 “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사람 중의 누구와 견줄 만하오?”하고 물으니, 이정은 “옛날 사람은 알 수 없거니와 오늘날 폐하의 여러 장수들 가운데는 그의 적수가 없고, 비록 천자의 위엄으로 임하시더라도 이기시기 어려울까 합니다.”하고 대답하였다. 태종은 못마땅해 하면서 “중국과 넓은땅과 많은 백성과 강한 병력으로 어찌 한낱 개소문을 두려워 한단 말이오?”하였다. 이정이 다시 말했다. “개소문이 비록 한 사람이지마는 그의 재주와 지혜가 만 사람에 뛰어납니다.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겠습니까?”
이 기록이 사실이라 하면 당태종은 이때 일찍이 누이동생 때문에 연개소문을 죽이지 못하였음을 후회했을 것이다.
기원 645년 2월에 당태종이 낙양(洛陽)에 이르러 수(隋)의 우무후장군(右武候將軍)으로 양제(煬帝)를 따라 살수(薩水)의 싸움에 참가하고, 수가 망한 뒤에 벼슬하여 선주자사(宣州刺史)가 되었다가 이때 나이가 많아 퇴직한 정원도(鄭元璹)를 불러 고구려의 사정을 물어보았다. 그는 “요동은 길이 멀어 양식의 운반이 곤란하고 고구려가 성을 지키는 데 능하여 성을 함락시키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신은 이번 길을 매우 위태롭게 봅니다.”라고 하였다. 당태종은 좋아하지 않고 “오늘의 우리 국력이 수나라와 비교할 바 아니니 공은 다만 결과나 보오.”하였다. 그러나 만일을 염려하여 태자와 이정(李靖)에게 후방을 엄중히 지키라 명하고 마침내 출발하였다.
“요택(遼澤 : 지금의 渤錯水)에 이르니 200리 진구렁에 사람과 말이 지날 수 없어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에게 명하여 나무와 돌을 운반해다가 길을 만드는데 수나라 때 장사들의 해골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당태종이 제문(祭文)을 지어 울며 제사 지내고,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며 “오늘날 중국의 젊은이들이 거의 이 해골들의 자손이니 어찌 복수를 하지 않겠소?”하였다. 당태종은 요택을 지나자 “누가 연개소문더러 병법을 안다고 하느냐? 병법을 안다면 어찌 이 요택을 지키지 않는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요하(遼河)를 건넌 다음에는 싸움이 순조로워서 요동 곧 오열홀(烏列忽)ㆍ백암(白巖)ㆍ개평(蓋平)ㆍ횡악(橫岳)ㆍ은산(銀山)ㆍ후황성(後黃城)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다시 이적(李勣) 등 여러 장수들을 불러 군사회의를 열고 새로 나아갈 길을 의논하는데,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은 오골성을 쳐 함락시켰으니 바로 평양을 공격하자고 하였고, 이적과 장손 무기(長孫無忌)는 안시성을 치자고 하였다.
수의 양제가 일찍이 우문술(宇文述) 등으로 하여금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 평양을 공격하다가 전군이 패한 것을 당태종도 경계하는 바였으므로 도종의 의견을 쓰지 않고, 이적의 의견을 따라 안시성을 침노하였다.연개소문이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서주 추정국에게 요동의 싸움을 위임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안시성은 곧 ‘아리티’ 혹은 환도성(丸都城)이라 혹은 북평양(北平壤)이라 일컬었는데, 태조왕(太祖王)이 일찍이 서부 방면을 경영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발기(發岐)의 난에 이곳을 지나에게 빼앗겼다가 고국양왕(故國壤王)이 이를 회복한 이래로 바다와 육지의 수십만 섬의 양식을 쌓아두었다. 공격하기 어렵고 함락시킬 수 없는 요새로 일컬어 온 지 오래였다. 그 해 6월에 당태종이 이적 등과 함께 수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성안을 향하여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성이 함락되는 날에 모조리 죽일 것이다.”하고 외치게 하였다. 그러니까 양만춘이 성 위에서 역시 통역자를 시켜 당의 군사에게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성에서 나가는 날에 모조리 죽일 것이다.”하였다.
당의 군사가 접근하면 성안의 군사가 이를 쏘아 죽이되 헛쏘는 화살이 없으므로 당태종은 성을 겹겹이 엄중 포위하여 성 안을 굶주리게 하려고 했지만, 성 안에는 양식의 저장이 넉넉하고 당의 군사는 비록 가져온 양식이 많았으나 몇 달을 지내니 차차 떨어져가고, 요동의 몇 성을 얻기는 하였으나 아무 저축이 없는 빈 성이었으며 수로로 오는 배들은 모두 고구려의 수군에게 격파당해 양식 운반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요동은 날씨가 일찍 추워지므로 만일 가을바람에 풀이 마르면 소ㆍ말ㆍ양들을 먹일 수가 없어 굶어 죽을 것이었다.
당태종은 크게 당황하여 강하왕 도종에게 명하여 안시성의 동남쪽에 토정을 쌓게 하였다. 흙으로 나뭇가지를 싸서 층층이 쌓아올리고 중간에 길 다섯을 내어 왕래케 해서 10일 동안의 품과 50만의 돈을 들이고 군사 수만 명이 날마다 6,7번을 번갈아 교전하여 죽고 상하는 자가 적지 아니하였다. 토산이 이루어지자 산 위에서 포석(抛石 : 돌을 던지는 기구)과 당거(撞車 : 냅다 질러 파괴하는 수레)를 굴려 성을 무너뜨리니 성 안에서는 무너진 곳에 목책(木柵)을 세워서 막았으나 당할 수가 없는지라 양만춘이 결사대 100명을 뽑아 성이 무너진 곳으로 갑자기 내달아 당의 군사를 쳐 물리치고 토산을 빼앗아 산 위의 포석과 당거를 차지하여 이것으로 도리어 산 위의 당의 군사를 치니 당태종이 달리 계책이 없어 군사를 철퇴시키려고 하였다.
연개소문은 요동의 싸움을 양만춘ㆍ추정국 두 사람에게 맡기고 정병 3만으로 적봉진(赤峰鎭) - 지금의 열하(熱河) 부근으로 나가 다시 남으로 나아가 장성(長城)을 넘어 상곡(上谷) - 지금의 하간(河間) 등지를 습격하니 당의 태자 치(治)가 어양(漁陽)에 머물러 있다가 크게 놀라 급함을 알리는 봉화를 들어 횃불이 하룻밤에 안시성까지 연락되었다. 당태종은 곧 임유관(臨渝關) 안에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고 곧 군사를 돌이키려고 하였다. 오골섲우 추정국과 안시성주 양만춘은 그 봉화로 연개소문이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음과 당태종이 장차 도망할 것을 짐작하고 추정국은 전군을 거느리고 안시성 동남쪽 좁은 골짜기로 몰려나와서 당의 군사를 돌격하고, 양만춘은 성문을 열고 급히 내달아 공격하였다. 당의 군사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사람과 말이 서로 짓밟으며 도망했다. 당태종은 헌우란(蓒芋灤)에 이르러 말이 수렁에 빠져서 꼼짝을 못하고, 양만춘의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아 거의 사로 잡히게 되었는데, 당의 용장 설인귀(薛仁貴)가 달려와서 당태종을 구하여 말을 갈아태우고, 전군(前軍)의 선봉 유홍기(劉弘基)가 뒤를 끊고 혈전을 벌여서 당태종은 가까스로 달아났다. 성경통지(盛京通志) 해성고적고(海城古蹟考)의 ‘당태종의 말이 빠지 곳(唐太宗陷馬處)’이란 것이 곧 그곳이니, 지금까지도 그곳 사람들에게 “말이 수렁에 빠지고 눈에 화살을 맞아 당태종이 사로잡힐 뻔하였다.”하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양만춘 등이 당태종을 추격하여 요수(遼水)에 이르러 허다한 당의 장사를 목베고 사로잡으니 요택에 이르러 당태종은 말을 몰아 수렁에 처넣어 다리를 삼아서 밟고 건너갔다. 10월에 임유관에 이르러서는 연개소문이 당군의 돌아갈 길을 끊고, 뒤에서는 양만춘이 몹시 급히 추격하니 당태종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마침 눈바람이 크게 일어 천지가 아득해져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이 되어 양편 사람과 말이 서로 엎드러지고 자빠지고 하여 크게 혼란해지니 당태종이 이 기회에 도망하여 돌아갔다.
안시성 싸움은 또한 동양 고사상(古史上)의 큰 전쟁이라, 비록 숫자상의 군사는 살수 싸움에 미치지 못하지마는 그러나 피차의 방략이 용의주도함과 군대의 정예(精銳)함과 물자의 소모는 살수 싸움보다 더 했으며 싸움을 한 시일도 그보다 갑절이었다. 이 싸움이 곧 두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게 한 전쟁이었는데 당사(唐史)의 기록은 거의가 사리에 모순된다. 이를테면
① 백제는 고구려의 동맹국이었는데도 당사에는 “백제가 금휴개(金髹鎧 : 검게 옻칠한 갑옷)을 바쳐서 전군이 이것을 입고 출전하니 갑옷이 햇빛에 찬란하게 빛났다.”고 하였으니, 고구려의 동맹국인 백제가 도리어 적국인 당의 군사에게 무장을 제공한 것이 아닌가? ② 당군의 패망은 곧 양식의 결핍에 원인이 있었는데 당의 역사에는 당태종이 백암성(白巖城) 등을 깨뜨리고 양식 10만 섬 혹은 50만 섬을 얻었다고 하였으니 그들이 운반해온 양식 이외에 얻은 양식이 또한 적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③ 연개소문이 영류왕(營留王)과 수많은 호족(豪族)들을 죽이고는 연씨(淵氏)네 무리를 써서 중요한 직위에 두어 오래 전부터 시행되어오던 벌족정치(閥族政治)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하였는데, “당태종이 안시성에 이르니 북부누살(北部耨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이 고구려ㆍ말갈(靺鞨 : 濊)의 군사 15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안시성을 구원하였다.”고 했으니, 왕족 고씨(高氏)가 오히려 남북 두 부(部)를 근거지로 하여 살이(薩伊)의 중요한 임무를 맡아 군사 수십만을 가졌다니 연개소문의 혁명 이후에 고구려의 상황이 어찌 그러하였을 것인가? ④ 안시성은 곧 환도성(丸都城)으로 고구려 삼경(三京)의 하나로써 해륙(海陸)의 요충이니 개소문이 혁명한 뒤에 이 땅을 다른 파에게 줄 수 없을 것인데, 당의 역사에 “안시성주(양만춘)가 재주와 용기가 있고 성이 험하고 양식이 풍족하므로 막리지(연개소문)의 난에 웅거해 지켜서 항복하지 아니하므로 막리지가 그 성을 주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그때에 고구려가 몇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인데 어찌 하나로 단결하여 수십만의 당군을 막았을까? 평양 공격의 계책은 수의 양제가 패해 망한 것인데, 당의 역사에 “이정(李靖)이 기 계책이 쓰이지 아니한 것을 패전의 첫째 원인으로 삼고, 당태종도 또한 이를 후회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오래지 않은 양제의 일을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이와같이 사실에 모순되는 기록이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방의 모든 나라를 다 당의 속국으로 보는 주관적 자존심에 몰리어 사관(史官)들이 항상 높은 이를 위해 숨기고, 친한 이를 위해 숨기고 중국을 위해 숨기는 이른바 춘추필법으로 기록한 때문이니 백제가 고구려의 동맹국임이 객관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첫째 조항의 망발을 하였고,
2) 요동성ㆍ개평성 등을 차례로 점령하게 한 것이 연개소문의 예정한 전략에 빠진 것임을 숨기기 위하여 그 노획품이 많았음을 과장하다가 둘째 조항의 위증(僞證)을 하게 된 것이고,
3) 당태종이 패해 달아난 것을 승리한 것으로 뒤집어 꾸미다가 고씨(高氏)의 천하가 이미 연씨(淵氏)의 천하가 된 것을 잊고 문득 15만 대군을 가진 고연수ㆍ고혜진 두 누살이(耨薩伊)가 투항했다는 셋째 조항의 망령된 조작이 있게 된 것이고,
4) 당태종이 수십만 대군으로 4,5달에 한낱 안시의 외로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수치를 가려 숨기기 위해 “안시성은 곧 당태종이 공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본국 고구려의 대권(大權)을 잡은 연개소문도 어찌하지 못하였다.”는 넷째 조항의 기록을 남겼고,
5) 당이 고구려에게 패한 것은 여러 가지 계책이나 사람이 모자람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어떠한 기묘한 계책이 있어도 쓸 수 없었던 때문이라 하여 “이도종(李道宗 : 江夏王)이 평양의 허를 찔러 공격하자고 하였다.”하는 다섯째 조항의 어리석은 말이 있게 된 것이다.
이상은 대강을 말한 것이거니와 자세히 상고해보면 거의가 다 이러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제 당의 역사를 좇지 않고 해상잡록ㆍ성경통지(盛京通志) 및 동삼성(東三省) 사람들의 전설 등을 자료로 하여 기록하였다.
당태종이 화살의 독에 죽고 연개소문이 당을 침
당태종이 양만춘의 화살에 눈이 빠졌음은 모든 인사들의 전설이 되고 시인의 음영(吟詠)에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에 올라 “이는 주머니 속의 물건이라더니만 눈이 화살에 떨어질 줄 뉘 알았으랴.(謂是囊中一物耳那知玄花落白羽)”라고 하였고, 노가재(老稼齎)ㆍ김창흡(金昌翕)의 천산시(千山詩)에는 ‘천추의 대담한 양만춘이 규염(虯髥)의 눈동자 쏘아 떨어뜨렸네(千秋大膽楊萬春 箭射虯髥落眸子)“라 하였으며 그 밖에도 이런 시가 많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삼국사기 동국통감(東國通鑑) 등 역사책에는 당시의 전황에 관해 당서(唐書)에서 뽑아 기록하였을 뿐 이러한 말이 없다. 이는 사대주의파 사학자들이 고대 우리 나라의 외국에 대한 승리의 기록을 모두 삭제해버린 때문이다.
이것을 지나의 역사책에 상고해보건대 구당서(舊唐書) 태종본기(太宗本紀)ㆍ신당서(新唐書)ㆍ자치통감(資治通鑑) 이 세 가지에 당태종의 병에 대한 진단 기록이 서로 달라서, 하나는 당태종이 내종(內腫)으로 죽었다고 했고 또 하나는 한질(寒疾)로 또 하나는 이질로 죽었다고 하여 일대에 전 지나에 군림한 만승황제(萬乘皇帝)가 죽은 병이 늑막염인지 장티푸스인지 모르도록 모호하게 기록한 것은 대게 고구려인의 독화살에 죽은 치욕을 숨기려다가 이같은 모순된 기록을 남긴것이다. 그러나 요동에서 얻은 병이라 함은 모든 기록이 일치하니 양만춘의 화살 독으로 인하여 죽은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송(宋)의 태종(太宗)이 태원(太原)에서의 화살의 상처로 인하여 그 독이 해마다 재발하다가 3년 만에 죽은 것을 송사(宋史)에 숨겼음과 같은 것이니, (陳霆의 兩山墨談에 보임) 이 뒤 신라와 당의 동맹이 더욱 공고하였음과 당의 안녹산(安祿山)ㆍ사사명(史思明)의 난과 번진(藩鎭)의 발호(跋扈)가 어느 것이고 당태종이 고구려의 독한 화살에 맞아 죽은 사건과 관계없는데, 이제 이를 가려 숨겨서 역사적 사실의 기인(起因)을 모르게 하였으니 춘추필법의 해독이 또한 심하다 하겠다. 연개소문이 지나에 침입한 사실도 기록에는 보이지 아니하지마는 지금의 북경(北京) 조양문(朝陽門) 밖 7리 되는 황량대(謊糧臺)를 비롯하여 산해관(山海關)까지 이르는 사이에 황량대라 일컫는 지명이 10여 군데인데, 전설에 황량대란 당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식 저장해놓은 것이라고 속여 고구려 사람이 습격해오면 복병으로 맞아 공격한 곳이라 하니 이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북경까지 추격한 유적이고, 산동(山東)ㆍ직예(直匠) 등지에 드문드문 고려(高麗) 두 글자를 위에 붙인 지명이 있어 전설로는 그것이 다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곳이라고 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북경 안정문(安定門) 밖 60리쯤에 있는 고려진(高麗鎭)과 하간현(河間縣) 서북쪽 12리쯤에 있는 고려성(高麗城)이다. 당나라 사람 번한(樊漢)의 고려성 회고시(高麗城懷古詩)에 “외딴 곳 성문은 활짝 열렸는데(僻地城門啓) 흰 구름이 성가퀴에 걸렸어라(雲林雉堞長), 물이 맑아지고 해 잠겨 있고(水明留晩照), 모래는 어슴푸레 별빛이어라(沙暗燭星光). 북소리 구름 밖에 퍼져나가고(疊鼓連雲起) 갓 핀 꽃들이 땅을 장식했으려니(新花拂地粧) 문득 세상은 변하여(居然朝市變) 다시는 풍악 소리 울리지 않네(無復管絃鏘).
가시덤불 먼지 가운데(荊棘黃塵裏) 길가엔 쑥대만 우북(蒿蓬古道傍). 먼지 속엔 비취가 묻혔는데(輕塵埋翡翠), 거친 무덤 위엔 소돌이 오가누나(荒壠上牛羊). 당년의 일을 이제 와 무어라 하랴(無柰當年事), 소조한 가을 기러기 줄지었구나(秋聲肅鴈行)”라고 하였는데, 이 시로 보건대 연개소문이 한 때 당의 땅에 드나들며 침략하였을 뿐 아니라 성을 쌓고 백성을 이주시켜서 북소리가 구름 밖에까지 울려퍼지고, 땅은 온통 꽃밭인데 거리가 번화하고 음악 소리 유량하며 비취와 보옥 등이 넘쳐나서 새로 점령한 땅의 풍성함을 자랑하던 것을 읊은 실록(實錄)으로 볼 수 있겠다.
당의 역사책을 보면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도망해 돌아간 뒤에 거의 해마다 달마다 고구려 침략의 군사를 일으켜서 “아무 해 아무 달에 우진달(牛進達)을 보내서 고구려를 정벌하여 어느 성을 깨뜨렸다.” “어느 해 어느 달에 정명진(程名振)을 보내서 고구려를 쳐 아무성을 깨뜨렸다.”하는 따위의 기록이 수없이 있지마는 이것은 당태종이 고구려 때문에 눈이 빠지고 그의 백성들의 아들들이 많이 죽거나 상하여 천신(天神) 같은 제왕의 위엄이 땅에 떨어진데다가 고구려에 대한 복수의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더욱 안팎의 웃음거리가 되겠고, 또한 만일 다시 대거해서 공격하자면 수의 양제의 꼴이 될 것이므로 이제 교활한 술책을 생각해내서 다달이 여러 장수를 시켜 고구려의 어느 곳을 침략하였다. 고구려의 무슨 성을 점령하였다
하는 거짓 보고를 올리게 하여 그 실상 없는 무위(武威)를 국내에 보인 것이다. 당태종이 죽을 때에 유조(遺詔)로 요동의 싸움을 그만두게 한 것은 한편으로 아들 고종(高宗)의 아버지의 원수 갚지 못하는 책임을 가볍게 하고 한편으로 백성을 사랑한다는 명성을 얻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본래 요동의 전쟁이 없었는데 이제 무슨 전쟁을 그만둔단 말인가? 당태종의 일생은 허위뿐이니 역사가나 역사를 읽는 사람은 그 기록을 상세히 구명해보아야 할 것이다.
연개소문은 무엇으로 이와같이 외정(外征)에 성공하였는가? 그 근거는 둘이었다. 발해사(渤海史)에 “대문예(大門藝)가 말하기를 ‘옛날 고구려가 성시(盛時)에는 강병(强兵) 30만으로 당나라에 대항하였다.’고 했다.(大門藝曰 昔高句麗全盛之時 强兵三十萬 抗敵唐家)”하였고, 당서(唐書)에도 “고려(고구려)가 신성(新城)과 국내성의 보병ㆍ기병 4만 명을 일으켰다.
(高麗 發新城ㆍ國內城步騎四萬).” “신성(新城)과 건안(建安)에는 군사가 오히려 10만 명이었다.(新城建安之虜 猶十萬)” “고구려와 말갈의 군사가 합하여 15만 명이었다.(高麗靺鞨之衆十五萬)”이라 하였으니 이상의 말에 의하면 고구려의 정규군이 30만 명이 넘었고, 그 밖의 산병(散兵)도 적지 아니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최영전(崔塋傳)에 “당태종이 30만의 무리로 고구려를 침노하니 고구려는 승군(僧軍) 3만 명을 내어 이를 격파하였다.(唐太宗 以三十萬衆 侵高句麗 高句麗 發僧軍三萬 擊破之)”고 하였고,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재가화상(在家和尙)……조백(皀帛)으로 허리를 동이고……전쟁이 있으면 스스로 단결하여 한 단체를 만들어서 전장에 나아갔다.(在家和尙……以皀帛束腰……有戰事 則自結爲一團 以赴戰場)”고 하였으며 해상잡록(海上雜錄)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와 개소문은 다 조의 선인(帛衣先人)의 출신이다.(明臨答夫 蓋蘇文此皆帛衣先人出身)”라고 하였으니 이상의 글에 의하면 승군(僧軍)이란 불교의 중으로 편성된 군사가 아니라 곧 ‘신수두’ 단전(壇前)의 조의(皀衣) 무사요, 연개소문은 조의의 우두머리[首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수십만의 군대와 그 중심인 3만의 조의군(皀衣軍)은 연개소문의 외정(外征)을 성공시킨 첫째 근거였다.미수(眉叟) 허목(許穆)은 “싸움을 좋아하는 나라로 백제만한 나라가 없다.(好戰之國 莫如百齊)”고 하고,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은 “세 나라(신라ㆍ백제ㆍ고구려) 중에서 백제가 가장 전쟁을 좋아한다고 일컬어진다.(三國之中 百濟最以好戰稱)”고 하였으니, 백제는 날래고 사나워서 싸움을 잘하는 나라로서 고구려와 동맹을 하였으니 그것도 연개소문이 외정을 하게 된 근거의 하나였다.
최치원(崔致遠)이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 명이라, 북으로 유(幽)ㆍ계(薊)ㆍ제(齊)ㆍ노(魯) 등지를 소란하게 하였고, 남으로 오(吳)ㆍ월(越)을 침략하였다.(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北撓幽燕齊魯 南侵吳越)”고 한 것은 연개소문이 백제와 합작한 결과를 말한 것인데 북쪽을 토평했다(北平) 남쪽을 평정했다(南定) 하지 않고 북쪽을 소란하게 했다. 남쪽을 침략했다고 한 것은 이 글이 당을 존숭하는 최치원이 당의 어느 재상에게 올린 글이기 때문에 이같이 춘추필법적 말을 쓴 것이요, 실은 이때에 유(幽)ㆍ계(薊) - 지금의 직예성(直匠省)과 제(齊)ㆍ노(魯) - 지금의 산동성(山東省)과 오(吳)ㆍ월(越)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ㆍ절강성(浙江省)이 다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 아래 있었던 것이다. 연개소문이 백제와 관계된 사실은 다음 편에서 자세히 서술하고자 한다.
연개소문의 事蹟에 관한 거짓 기록
신라 때에는 연개소문을 백제의 원조자라 하여 후에는 그를 유교의 윤리상 임금을 죽인 적신(賊臣)이라 하여 또 사대주의에 위반한 죄인이라 하여 늘 박대해서 그에 관한 전설이나 사적을 아주 없애버리기를 일삼았고, 오직 도교(道敎)의 수입과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조를 그가 한 일이라 하지마는 실은 당서(唐書)에서 부연(敷演)해온 거짓 기록이고 사실이 아니다. 이제 삼국유사 본문을 실어 그것이 거짓 기록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삼국유사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살피건대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이보다 앞서 수(隋)의 양제(煬帝)가 요동을 정벌할 때, 비장(裨將) 양명(羊皿)이 싸움이 불리하여 죽게되자 맹세하기를, 기어코 총신(寵臣)이 되어 저 나라(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였는데, 개씨(盖氏)가 조정을 독단하게 되자 성을 개씨라 하니, 곧 양명의 말이 이에 들어맞은 것이다.(두 글자를 합쳐 盖가 되니 그가 죽어서 蓋蘇文이 되었다는 뜻) 또 살피건대 고려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수의 양제가 대업(大業) 8년 임신(壬申)에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공격해왔다……
10년 갑술(甲戌)에 황제가 퇴군하려고 좌우를 돌아보며,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조그만 나라를 치다가 이롭지 못하였으니 만대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니, 이때 우상(右相) 양명이 아뢰기를, 신이 죽어서 고려의 대신이 되어 기어코 나라를 멸망시켜 황제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돌아가고 그는 고려에 태어났는데 나이 15살에 총명하고 용감하였으므로 이때의 무양왕(武陽王 : 營留王)이 그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불러들여 신하를 삼았다. 그는 스스로 성을 개(盖) 이름을 금(金)이라 하였다. 벼슬이 소문(蘇文)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곧 시중(侍中)과 같은 직위였다. 개금이 왕에게 아뢰기를 솥에는 발이 셋이 있고 나라에는 세 가지 교(敎)가 있어야 하는데, 신이 보건대 나라 안에는 다만 유교와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하니, 왕이 옳게 여기고 당에 아뢰어 도교를 청하였으므로 태종이 숙달(叔達)등 도사(道士) 여덟 사람을 보내주었다. 왕은 기뻐하고 절로 도관(道觀 : 도교의 寺院)을 만들고 도사를 높여 유사(儒士)의 위에 앉혔다.……개금은 또 동북과 서남에 장성을 쌓기를 청하여 남자는 성을 쌓고, 여자는 농사를 짓기 16년 만에 역사를 마치었는데, 보장왕(寶藏王) 때에 당태종이 친히 육군(六軍, 곧 모든 군사)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按唐書云 先是 隋煬帝征遼東 有裨將羊皿 不利於軍 將死有誓曰 必爲寵臣 滅彼國矣 及蓋氏擅朝 以盖爲氏 乃以羊皿是之應也 又按高麗古期云 隋煬帝 以大業八年壬申 領三十萬兵 渡海來征 十年甲戌……帝將旋師 謂左右曰 朕爲天下之主 親征小國而不利 萬代之所嗤 時右相羊皿奏曰 臣死爲高麗大臣 必滅國 報帝王之讎 帝崩後 生於高麗 十五聰明神武 時武陽王聞其賢 徵入爲臣 自稱姓盖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 金奏曰 鼎有三足 國有三敎 臣見國中 唯有儒釋 無道敎故國危矣 王然之 奏唐請之 太宗遣敍達等道士八人 王喜 以佛寺爲道館 尊道士 坐儒士之上……盖金又奏 築長城東北西南時男 役女耕 亦至十六年乃畢 及寶藏王之世 唐太宗 親統以六軍來征)
양명의 후신(後身)이 개씨가 되었다는 것은 요망한 말이고, 연개소문을 “성을 개, 이름을 금이라 하였고, 벼슬이 소문에 이르렀다.”고 한 것도 망령된 말이니 변론할 것도 없거니와 그 밖에 도교를 수입했다느니 장성 쌓기를 청했다느니 한 것도 또한 거짓 기록이다. 수의 양제는 기원 617년에 죽고 영류왕 곧 무양왕이 노자교(老子敎 : 道敎)를 수입한 것은 당서에 분명히 당고조(唐高祖) 무덕(無德) 7년(기원 624년)으로 겨우 8살이니, 이제 “나이 15살에……신하가 되어……당에 아뢰어 청하였다.”고 함이 무슨 말인가? 장성의 축조는 영류왕 14년에 시작하였으니 16년 만에 준공하였으면 곧 보장왕 5년, 당태종이 침략해온 이듬해에 마친 것인데 이제 “16년 만에 역사를 마치고……당태종이 친히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와 공격하였다.”고 함은 어떻게 된 것인가?
영류왕은 북수남진(北守南進) 주의를 써서 당과는 화친하고 신라와 백제를 공략하려고 한 사람이고, 연개소문은 남수북진(南守北進) 주의를 써서 백제로 신라를 견제하고 당을 공략하려고 한 사람이니 당의 황제가 성이 이(李)요, 도교의 시조 노자(老子)도 성이 이씨이기 때문에 당대(唐代)에는 노자를 그 선조라고 위증하여 극진히 높여 받들었으므로 영류왕이 당과 화친하려고 당의 조상 노자의 교와 그 교도인 도사를 맞아온 것일 것이다. 그런데 종교로는 신수두를 신봉하면서 정책으로는 당을 공략하려는 연개소문이 국교(國敎)를 버리고 적국인 당의 조상 노자의 교인 도교를 맞아들였을 리가 있겠는가? 장성은 나가서 치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지켜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북쪽을 막아 지키려는 영류왕이 쌓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날마다 북쪽 공략을 주장한 또 그 주장을 실행한 연개소문이 그같은 국력을 들여 백성의 원한을 살 방어용 장성을 쌓았을 리가 있겠는가? 이렇게 연조가 맞지 아니하고 이치에도 맞지 아니하니 이 두 가지 사실이 다 거짓 기록임이 의심없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삼국사기를 보면 연개소문이 유ㆍ불ㆍ도 세교는 솥발과 같아서 하나로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왕에게 아뢰어 도교를 당에 구하였다고 한 것이 보장왕 2년의 일이니 삼국유사에 개금(盖金)의 도교 청래(請來) 운운한 것이 다만 그 연대가 틀렸을 뿐 사실은 확실히 있은 것이 아니냐?”고 하지마는 삼국사기에는 이것을 고려고기(高麗古記)에서 인용하였다고 했으니, 삼국사기도 고려고기에서 인용하였음이 분명하고, 고려고기에는 “개금이 무양왕 곧 영류왕에게 아뢰어 도교를 당에서 들여왔다.”고 하였으니 삼국사기의 저작자 김부식이 그 연조를 옮겨 보장왕 2년의 일로 기록하였음이 또한 분명하다. 김부식이 각종 고기와 지나사의 사실을 마구 끌어다가 그 사기를 지었는데 가끔 연조가 모호한 일이면 그 사실의 있고 없었음을 자세히 구명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연월을 고쳐넣은 것이 허다하니, 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도교의 수입을 청했다고 하는 것도 한 예이다.
그러니 연개소문이 도교를 들여오고 장성 쌓기를 청했다는 두 사건은 물을 것 없는 거짓 기록이다. 그러니깐 그 거짓 기록의 근거가 된 것은 고려고기이니, 고려고기는 어찌하여 이같은 거짓 기록을 썼는가? 고려고기는 대개 신라말의 불교승이 지은 것인데 지나 위(魏) 세조(世祖)와 당의 무종(武宗)이 도교를 위해 나라 안의 모든 불교의 절을 파괴하고 모든 불교승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당시 어느 나라의 불교승이나 다 도교에 대하여 이를 갈며 분하게 여겼고, 연개소문은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한 인물이므로 신라 당시의 사회가 연개소문을 극구 헐뜯고 욕하는 판이라 고려고기의 작자가 고기를 지을 때 당시의 “영류왕이 도교를 수입하였다.”고 한 것과 “장성을 쌓았다.”고 한 것을 보고, 이에 그 도교를 몹시 원망하는 마음으로 당서에 부회(府會)하여 방편(方便)의 법라(法螺 : 소라고둥, 허풍떤다는 뜻)를 크게 불어대고 “도교를 믿지 말아라.
도교를 믿다가는 고구려처럼 나라가 망할 것이다. 도교를 들여와서 우리의 정신상 생명을 없애려고 하고, 장성 쌓는 역사를 일으켜서 우리의 육체상 생명을 없애려 한 자는 곧 연개소문이다.”하여 연개소문을 미워하는 사회의 심리를 이용해서 도교를 배척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연대와 사리(事理)가 맞지 아니하니 거짓 기록임이 스스로 밝혀지는 것이다.
본국에 전해지고 있는 연개소문은 모든 명사(名詞)와 사실을 거의다 바꾸어 전한 《갓쉰동전》 이외에는 모두 이러한 거짓말뿐인가? 내가 20년 전 서울 명동(明洞)에서 노상운(盧象雲) 선생이란 노인을 만났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자(字)가 김해(金海)이고, 병법이 고금에 뛰어났었다. 그의 저서 김해병서(金海兵書)가 있어 송도(松都) 때(고려 때)에도 늘 각 방면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부임할 때에 한 벌씩을 하사하였는데 지금은 그 병서가 아주 없어졌다. 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의 이정(李靖)을 가르쳐 이정이 당의 가장 뛰어난 명장이 되고, 그 이정이 지은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로 치는 것인데 그 원본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상한 문구가 많았으므로, 당(唐)ㆍ송(宋) 사람들이 연개소문과 같이 외국인을 스승으로 하여 병법을 배워서 명장이 된 것은 실로 중국의 큰 수치라 하여 드디어 그 병법을 없애버렸고, 지금 유행하는 이위공병서는 후세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그 첫머리에서부터 막리지는 스스로 병법을 안다고 하였다는 연개소문을 헐뜯는 말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원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선생이 이런 말을 어디에 근거하여 한 것인지 내가 당시 사학에 어두워서 자세히 물어보지 못하였다.요양(遼陽)ㆍ금주(金州)ㆍ복주(復州) 등지에 연개소문의 고적과 전설이 많고, 연해주(沿海州)의 개소산(盖蘇山)에는 연개소문의 기념비가 서 있어서 해삼위(海參威 : 우라디보스톡)에서 배를 타고 블라고베시첸스크로 가려면 바다 가운데서 그 산을 바라보게 된다고 하니, 후일에 혹 그 비석을 발견하여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을 변증(辨證)하고 떨어져 나간 기록을 보충할 날이 있을까 한다.
연개소문이 죽은 해의 誤差 10년
삼국사기의 연개소문의 사적은 신구 당서(新舊唐書)ㆍ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서 뽑아 쓴 것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등에 다 연개소문의 죽은 해를 당의 고종(高宗) 건봉(乾封) 원년이라고 하였는데 건봉 원년은 보장왕 25년(기원 666년)에 해당하므로 삼국사기에도 보장왕 25년에 연개소문이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만일 연개소문이 보장왕 25년인 기원 666년에 죽었다면 연개소문이 죽기 전에 고구려의 동맹국 백제가 이미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서울인 평양도 소정방(蘇定方)에게 포위를 당했을 것이니 무엇 때문에 당태종ㆍ이정 등이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꺼렸으며, 소동파(蘇東坡 : 蘇軾)ㆍ왕안석(王安石) 등이 연개소문을 영웅으로 허락하였을 것인가? 그래서 나는 연개소문을 적어도 백제가 멸망하기 몇 해전에 죽었다고 가정하였다. 이 가정을 가지고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찾은 지 오래였으나 확증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근일에 이른바 천남생(泉男生)의 묘지(墓志)란 것이 하남(河南) 낙양(洛陽)의 땅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묘지에 의하면 남생 형제의 다툼이 건봉(乾封) 원년 곧 기원 666년 이전임이 분명함을 알았다. 그 묘지에는 연개소문이 어느 해에 죽었다는 말은 없으나 남생이 “24살에 막리지에 임명되고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하였으며, 32살에 태막리지 총록군국아형원도(太寞離支總錄軍國阿衡元道)의 벼슬이 더해졌다.(二十四 任寞離支 兼授三軍大將軍 三十二 加太寞離支 總錄軍國 阿衡元道)”고 하였으며 “의봉(儀鳳) 4년 정월 19일에 병이 들어 안동부(安東府)의 관사(官舍)에서 죽으니 나이 46이었다.
(以儀鳳四年正月十九日 遭疾 遷於安東府之官舍 春秋四十有六)”고 하였다. 당의 고종 의봉 4년은 기원 679년이요 기원 679년에는 남생이 46살이고, 그의 24살 때는 기원 657년이다. 기원 657년 24살 때 막리지 겸 삼군대장이 되어 병권을 잡았으니 기원 654년에 연개소문이 이미 죽어서 그 직위를 남생이 대신 하였음이 확증된 것이다. 혹은 남생이 32살에 대막리지가 되던 해 기원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어서 그 직위를 남생이 대신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마는 삼국사기 본기나 연개소문전에는 다 연개소문이 막리지가 되었다고 했고, 삼국사기 김유신전이나 천남생의 묘지에는 다 연개소문을 태대대로(太大對盧)라 하였으며, 개소문전에는 아버지 서부대인(西部大人) 대대로가 죽어 연개소문이 그 직위를 이어 받았다고 하고, 천남생의 묘지에는 증조부 자유(子遊 :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조부 태조(太祚 :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다 막리지에 임명되었다고 하여 어느 책의 막리지를 다른 책에는 태대대로 혹은 대대로라 하였고, 또 다른 책에는 태대대로 혹은 대대로를 막리지라 하였는데, 대로의 대(對)는 뜻이 ‘마주’이니 대개 이두문으로 대(對)는 뜻으로 읽으면 ‘마’가 되고 막리지의 막(莫)은 음으로 읽어 ‘마’가 되며, 막리지의 리(離)와 대로의 로(盧)는 다 음으로 읽어 ‘ㄹ’이 되어 막리나 대로는 다 ‘말’로 읽을 것이다. 고구려 말년의 관제(官制)에 ‘말치’가 장상(將相)의 임무를 겸하여 마치 그 초대의 ‘신가’와 같았으니, ‘말치’를 이두문으로 대로(對盧) 혹은 막리지(寞離支)라고 썼다. 대로지(對盧支)라 쓰지 않고 대로(對盧)라고만 쓴 것은 생략한 것이고, ‘말치’에 임명된 지 몇 해가 되면 태대(太大)의 호를 더하여 태대대로지(太大對盧之) 혹은 태막리지(太寞離支)라 썼다.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라 쓰지 않고 대막리지라고만 쓴 것은 역시 생략한 것이다. ‘말치’ - 대로지 혹은 태대막리지가 그 직위는 같으나 ‘신크’ - ‘태대(太大)’는 곧 공훈과 덕을 상 주는 품질(品秩)이니 삼국사기 직관(職官)에 각간(角干) 김유신의 큰 공로를 상 주어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 하여 태대(太大) 두 자를 각간 위에 더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남생이 24살 때 곧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이 된 해, 기원 657년이 남생이 정권과 병권을 다 잡은 확증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같은 해에 연개소문이 죽은 확증이 된다. 만일 대로와 막리지가 같은 ‘말치’의 이두자라면 어찌하여 남생의 묘지에 “증조부 자유, 조부 태조, 아버지 개금이 다 막리지에 임명되었다.(曾祖子遊 祖太祚 父盖金 並任寞離支)”고 하거나 아니면 “증조부 자유, 조부 태조, 아버지 개금이 다 태대대로에 임명되었다.(曾祖子遊 祖太祚 父盖金 並任太大對盧)”고 하지 않고, “증조부 자유, 조부 태조가 다 막리지에 임명되고, 아버지 개금은 태대대로에 임명되었다.(曾祖子遊 祖太祚 並任寞離支 父盖金 並任太大對盧)”고 하여 막리지와 대대로를 구별하여 썼는가?
묘지의 윗부분에는 남생의 직책을 중리위진대형(中裡位鎭大兄)이라 태막리지(太寞離支)라 쓰고, 아랫부분에는 남생이 당에 항복한 뒤에도 여전히 태대형(跆大兄)이란 옛작위에 임명되었다고 하였으니, 태대형은 중리위(中裡位)의 진대형(鎭大兄)을 가리킨 것이거나 태막리지를 가리킨 것일 터인데 이같이 다른 글자로 썼으니 묘지에 쓰인 벼슬 이름은 거의 구별할 수 없을뿐더러 또한 “다 막리지에 임명되고……태대대로에 임명되었다.”고 한 아랫 구절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양야(良冶)ㆍ양궁(良弓)으로 다 병권을 잡고 나라의 정치를 오로지 하였다.(乃祖乃父 良冶良弓 並執兵靲 咸專國柄)”고 한 것이니, 막리지와 태대대로가 다같이 병권과 정권을 독차지한 유일한 수석 대신임을 볼 것이고, 당서 고려전에는 “대대로는 모든 국사를 맡아 처리하였다.(大對盧 總知國事)”고 하였고, 동 개소문전에도 “막리지는 당의 중서령(中書令) 병부상서(兵部尙書)의 직위와 같다.(寞離支獪唐中書令兵部尙書職)”고 하였으니, 더욱 그 두 가지가 똑같이 장상(將相)의 직책을 겸한 유일한 대관임을 볼 것이다.그러므로 기원 657년에 ‘신크말치’ 연개소문이 죽고 맏아들 남생(男生)이 ‘말치’가 되어 아버지 연개소문의 직위를 상속하였다가 9년 후에 ‘신크’의 호를 더하여 ‘신크말치’라 일컬었음이 의심없으니, 구사(舊史)에 의거하여 기원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었다고 함은 물론 큰 착오이거니와 묘지에 남생이 대막리지가 되었다는 해를 의거하여 기원 665년에 개소문이 죽었다고 하는 것도 큰 잘못이다. 연개소문이 죽은 해는 분명히 기원 657년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ㆍ구당서에 다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늘려 기원 666년이라 하였고, 천남생의 묘지에 또한 아버지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쓰지 아니하였음이 다 무슨 까닭인가?”했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당태종이 눈알이 빠져 죽은 것이 곧 연개소문 때문이고, 당의 땅 일부도 연개소문에게 빼앗겼으니 춘추의 의(春秋之義)로 말하면 당의 여러 신하들이 마땅히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보수를 강구함이 옳겠는데, 이제 세월을 천연(遷延)하여 연개소문의 생전에는 다만 고구려의 침략만 당하고 고구려에는 한 발자국도 침입하지 못했음은 곧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꺼리어 군부(君父)의 원수를 잊었으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냐? 이 수치를 가리기 위해 연개소문의 생전에도 당의 군사가 평양을 포위한 일이 있었다는 표시를 하기 위해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10년이나 늘려 역사에 올린 것이니, 곧 다음 편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여복신(扶餘福信)이 죽은 달을 늘린 것과 같은 수단이다. 고대에는 교통이 불편하고 역사적 서류가 많지 못하여 이웃나라 이름난 이의 생사를 민간에서는 거의 관청의 선포에 의해 서로 전할 뿐이므로 이같이 연개소문의 죽은 해에 대한 거짓 기록이 드디어 지나 안에서는 실록(實錄)으로 유행된 것이었다.
연개소문의 공적에 대한 略評
옛날부터 역사가들은 성패(成敗) 흥망(興亡)으로 그 사람의 낫고 못함을 정하고, 또 유가(儒家)의 윤리관으로도 남의 잘잘못을 논란하는데, 연개소문은 성공하였지만 못난 아들들이 그가 끼친 업적을 지키지 못하였으므로 춘추필법을 본받는 자의 배척을 받고 흉악한 적이라 하여 헐뜯고 욕함을 당해왔다. 그러나 어떠한 것이 혁명인가 하면 반드시 역사상 진화(進化)의 의의를 가진 변하가 그것이다. 역사란 것이 어느 날 어느 때에 변하의 과정으로 나아가지 않는 때가 없으니 또한 어느 날 어느 때에 혁명없는 때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역사 전부를 혁명이라고 일컫는 것이 옳겠지마는 역사가들이 특히 혁명이라는 명사를 귀중히 여겨 문화상 혹은 정치상 두드러지게 시대를 구분할 만한 진화의 의의를 가진 인위적(人爲的) 대변혁을 가리켜 혁명이라 일컬은 것이니, 이런 의미로 정치사상의 혁명을 구하자면 우리 조선 수천 년의 역사에 몇이 못 될 것이다.
한양(漢陽)의 이씨(李氏)로 송도(松都)의 왕씨(王氏)를 대신한 것이나 이조(李朝)의 이시애(李施愛)ㆍ이괄(李适) 등의 반란이 그 성패는 다르지마는 실상은 다 정권 쟁탈의 행동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것은 내란이라 역대(易代)라 일컫는 것은 옳지마는 혁명이라 일컬음은 옳지 않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그렇지 아니하여 봉건세습(封建世襲)의 호족공치제(豪族共治制)의 정치를 타파하여 정권을 한 곳에 집중시켰으니 이는 분립의 대국(大局)을 통일로 돌리는 동시에 그 반대자는 군주나 호족을 묻지 않고 한꺼번에 소탕하여 영류왕 이하 수백 명 대관을 죽이고, 침노해온 당태종을 격파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당을 진격하여 지나 전국을 놀라 떨게 하였으니 그는 다만 혁명가의 기백(氣魄)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한 혁명가의 재능과 지략을 갖추었다고 함이 옳겠다.다만 그가 죽을 때에 따로 어진 이를 골라 지기의 뒤를 이어 조선인 만대의 행복을 꾀하지 못하고 불초한 자식 형제에게 대권(大勸)을 맡겨 마침내 이룬 공업(功業)을 뒤엎어버렸으니 대개 야심이 많고 덕이 적은 인물이었던가 싶다. 그러나 그 역사가 아주 없어져서 오직 적국 사람들의 붓으로 전한 기록을 가지고 그를 논술하게 되어 사실의 전말을 환히 알아볼 수 없으니 경솔하게 그 일부를 들어 그의 전모를 논란함이 옳지 못할뿐더러 수백 년 사대(事大)의 용렬한 종이 된 역사가들이 그 좁쌀만한 주관적 눈에 보인 대로 연개소문을 가혹하게 평하여 “신하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긴다.(臣事君以忠)”하는 불구(不具)의 도덕률로 그의 행위를 규탄하며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以小事大者 畏天)”하는 노예적 심리로 그 업적을 부인하여 시대적 대표 인물의 유체(遺體)를 거의 한 점도 살도 남지 않도록 씹어대는 것은 내가 크게 원통하여 여긴는 바이다. 이제 이를 위해 대략 몇 마디의 평을 더하였다.
첫댓글 제11편 고구려와 唐의 전쟁,
제3장 安市城 싸움에 대한
조선상고사를 공부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좋은 자료를 올려 주셨네요. 여기에서 이 글을 대할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통일신라 이후 모든 자주적인 기록이 말살되어, 현존하는 기록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나온 역사서란 것이 모두 중국역사서를 모태로 하여 작성된 것이라 모두 정상적인 역사서라 볼 수 없습니다. 통일신라이후 중국의 관제등 을 도입하여 쓰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신라시대 진덕여왕시대(?)에는 당나라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주의 포석정도 왕희지가 쓴 난정서에 나오는 유상곡수를 본따 만든 것이지요. 그 이후 우리나라는 사대주의사상에 몰입하기 시작하여 고려를 거쳐 이조시대에는 국가의 이념이 되었지요.
이에 따라 이조시대 내내 유학이념에 따른 해석을 두고 국론이 분열되는 양상으로 흘렀으며 급기야는 동인, 서인으로 갈리고 치열한 당쟁으로 국기가 동요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당쟁의 여파로 일제 36년을 겪었으며 그 이후 친일, 친미사대주의와 각성된 민족민주세력간의 대결의 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일찌기 역사의 중요성을 깨닫고 불멸의 저서를 남기겼는데 요절하시므로써 그 깊이가 더해질 수 없었다는 것이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요컨대 우리나라의 역사는 처음부터 정확하게 다시 씌여져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