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여느 때나 같이 마을은 장사꾼들과 흥정하는 사람, 그리고 물건을 세세히 관찰하며 사는 사람들로 가득 이루어 알아들을 수없는 북적거림이 자연스럽게 들려왔었다. 하지만 판은 알 수없었다. 문을 열고 나올 때부터 자꾸만 들리고 있었다. 소리가...낯선 누군가의 소리가....
"이럴 때가 아냐"급히 그가 뭔가가 생각난 듯 멍해졌던 얼굴을 돌렸다."휠츤..휠츤.."
중얼거리며 바삐 뛰어가는 판의 모습은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모습이었다. 아니, 문을 활짝 열고 나오고선 잠시 멍해져있다가 발을 돌려 어딘가로 뛰어가는 모습은 그 누구나가 보아도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까 싶다.
"끼익-."집의 문이 열렸다.
판의 집은 아니었다. 하지만 판은 괜찮다는 듯이 남의 집문을 활짝 열었다.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어두운 그 집에 마치 해방놓기라도 한 듯 환한 햇살이 문을 타고 스며들어왔다.
"휠츤."
그는 나직히 이름을 불렀다. 그의 눈빛이 응시하고 있는 곳엔 방 안 구석에 서 있는 어떤 나이들어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마치 어둠을 피하기라도 하는 듯, 그는 판의 부름을 외면하였다.
"휠츤."같은 톤으로 다시 들려오는 부름.
"........."
이번에도 반응이 없자 판은 못참겠다는 듯 휠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가 휠츤에게 다가가자 왠지 나이어린 소년과 짧지만 거친 수염을 지닌 늙은이를 보는 것같았다. 사실 휠츤은 그리 늙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판의 그 아이같아 보이는 우유빛 피부와 훤칠한 키, 그럼에도 마른 몸때문에 그렇게 착각되는 것 뿐.
"휠츤..."
이번엔 부르는 톤이 달라졌다. 아까의 두가지의 부름은 모두 같은 톤의 다소 화난 듯한 인상을 주었었는데 이번에 부르는 감정실린 목소리는 상당히 인정섞이고 부드럽지만 힘없는 감정이었다.
"보고싶었어..."스르륵 말을 흘리며 판은 휠츤의 두꺼운 코트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곧 휠츤의 까칠까칠한 손이 그를 만류하였다. 판은 그를 마냥 응시하였다.
"오랜만이야."휠츤 역시 인사를 전했다.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어두운 그늘에 가려져서 이목구비도 분간하기 어려웠었으니까.
"대체 어디 갔다 온거야?"판이 여전히 그를 응시하며 아기처럼 심통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휠츤은 서슴없이 답했다.
"잠시 나를 관리하기 위해서."그러곤 말을 이었다."하지만 다시 떠나야 해."
".....!!!"
순간 판이 이해할 수없다는 눈초리로 크게 눈을 뜨고 휠츤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에서는 절대 그럴 수없다는 감정이 아주 역력하였다. 하지만 휠츤은 냉정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그저 남은 짐을 정리하고 온 거야."그러고보니 휠츤은 작은 배낭을 들고 있었다."물론 짐이랄 것도 별로 없지만."
"안돼!!!"
터져나오는 목메인 목소리로 판이 그를 말렸다. 그러곤 문을 닫고는 문 앞에 서서 그를 가로막았다. 덕분에 방은 한층 더 어둡게 변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상관하지 않았다.
"왜 가려는거야? 왜 가려는 거냐구!! 모험을 해서는 안돼, 위험하단 말야!!"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휠츤은 모험을 상당히 즐겼었고, 유명한 마법사로 손색이 없는 마법사였다.
"다시 왔잖아...가지 말란 말야!!"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판에게 휠츤은 나직히 대답을 전했다.
"여기서 살다간 난 죽어..."자조적인 웃음이었다."난 여기서 살 수 없어."
"왜?"갈망하는 듯한 목소리로 판이 재촉하였다.
"너도 내가 여기서 당한 일을 알잖아.."얄팍하게 웃으며 휠츤은 말했지만 판은 큰 충격을 먹은 듯이 몸이 뻣뻣해졌다."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것도 있고..또 다른 이유도 있고."
"말해줘."
휠츤의 말이 끝나자마자 판이 무섭게 노려보며 반강제적으로 부탁했다. 휠츤은 한숨을 하번 쉬더니 잠시 벽에 기대었다. 하지만 판은 휠츤이 벽에 기대어있는지 잘 알수 없었다.
"판....난 며칠 동안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판은 그의 말에 집중하였다.
"소리..소리라 할 것같으면 아주 많은 종류가 있지. 나의 경우로선 아침에 열린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과 밖으로 나가면 늘 마을을 가득 메우는 흥정하는 장사꾼들의 걸걸한 목소리와 여기저기 수다를 떨고 다니는 아주머니들, 그리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또 말들의 채찍소리와 말굽 소리도 있고 여러 가축들의 목소리도 내 귓가를 메우곤 하지."휠츤은 판을 힐끗 다시 쳐다보았다."물론 판의 목소리 역시 예외는 아니야."
휠츤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판은 잠시 혼란스럽던 마음에 위안을 얻었다. 하지만 아직 흥분을 가라앉힌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그런데 얼마 전부터 다른 목소리가 내 귓가를 침범했어."판은 퍼뜩 귀를 기울였다."뭔지 모를..정말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목소리가 자꾸 나를 부르는 거야..처음엔 나도 내 귀를 의심했지. 하지만...정말 낯설기만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자꾸 나를 부르고 있었어. 하늘에 맹세코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인데 말야.."판은 침을 꿀꺽 삼켰다. 휠츤 역시 얘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서 긴장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를 떠나려는 거야. 그 목소리는 나를 부르고 있었으니까."단조로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끝맺었다."끝이야."
"바보짓이야. 갈 곳도 없잖아!!"다시 판이 부정했지만 휠츤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갈 곳은 이미 정했어. 그걸 알아보기 위해 며칠 간 오지 않았던 것이고."
"나도 갈래!!"판이 외쳤지만 휠츤은 고개를 저었다."안돼. 넌 갈 수없어. 판이 가기엔 너무 힘든 여행이 될 거야."
"괜찮아."
"나는 안돼."그렇게 짤막히 인사를 하고 문을 열어제끼더니 작은 배낭을 어깨에 들쳐메었다. 그러더니 휠츤은 잽싸게 마차에 올라탔다. 판도 급히 휠츤을 따라나갔으나 휠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판은 급한 마음에 길게 그를 불러보았다.
"휠츠으으은-----!!!"
하지만 곧 그 목소리는 여러 사람들의 북적거림에 묻혀지게 되었다. 하지만 휠츤이 지나간 자리에는 작지만 하얀 쪽지가 적혀있었다. 판은 그것을 주워들었다.
『나중에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 그 때까지 살아있어 줘. -네버스』
네버스..그의 이름이었다. 판은 답답한 듯 그 쪽지를 찢더니 크게 한숨을 쉬었다. 휠츤....대체 어디를 간 것일까..혹시 나는 오늘 유령을 만난 것은 아니었을까? 이미 여행 중에 죽어버려 싸늘한 시체가 된 그의 혼령을 만나서 잠시 미쳐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의심마저 들었지만 판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혼령이든 어떻든 중요한 건 휠츤이었다. 그를 어떻게든지 따라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역시 여기서 죽고 말거야..휠츤이 당했던 것처럼..휠츤의 가족들처럼...'
휠츤이 마차를 끌고 지나간 자리엔 이미 마을사람들로 가득 메어져 있었고, 판이 찢어버린 쪽지는 누군가에 의해서 먼지바람과 함께 저 멀리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판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의문점이 있었다. 소리라....소리...자신은 알지도 못하는데 자신을 알아보는 누군가의 부름....판은 오늘 아침 일을 회상했다. 비록 짧은 때였지만..분명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혹시..나도 휠츤과 같은 운명에 묶여있다면....'
왠지 까닭모를 두려움들이 엄습하였다. 뭔가가 순조롭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일상은 순조로왔다. 휠츤은 다시 왔고, 다시 떠났다.......그리고 판 역시, 다음 날 아침에는 그 누구도 그를 볼 수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