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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문예공모 생활수기 당선작 -
- 끝에서 시작하는 삶 !
2013-08-0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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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좀 깁니다!
덕산 선배님은 읽지 마십시요! 눈 침침해 지십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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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이스 김
골프에 미친 남편은 새벽 다섯 시에 어김없이 골프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왠지 그날따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남편은 며칠 째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독한 진통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은 생각을 하는데 어느 사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침대에서 뒤척거리다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어 거실로 나왔다.
이상했다. 보이지 않는 묘한 기운이 집안 가득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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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광인 남편은 평일에도 매일 골프를 연습하러 나갔다.
아홉시 반까지는 집에 돌아와 아이 학교도 데려다주고 일하는 장소도 가야 하는데
오지 않았다.
나는 남편을 기다리다 출근시간이 늦어질 것 같아 다급히 직장으로 향했다.
밖에 나가면 조금만 늦어도 전화하는 사람이 하루 종일 연락이 없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빨리 집에 가보고 싶었다.
집에 가면 무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은 더디 갔고 입안이 바작바작 타들어갔다.
머릿속에는 상반되는 생각들이 서로 뒤 엉키며 ‘혹시’ ‘아닐거야!’를 외쳐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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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마치고 허둥지둥 아이를 데리러 갔다.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하며 집에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제일 먼저 전화기로 눈길이 갔다. 음성 메시지를 알리는 빨간 불빛이 깜박였다.
버튼을 누르기가 두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간호사가 남긴 남편의 교통사고 소식이었다.
남편은 중환자실에 있다고 했다. 혼자 오지 말고 가족과 함께 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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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떨려서 운전을 할 수 없어 택시를 탔다.
LA에 사는 동생에게 알리고 급한 대로 나 혼자 병원에 도착했다.
혼자 왔다고 하니까 봉사원으로 일하는 갈색 머리의 여자가 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어깨를 감싸주며 자꾸 위로의 말을 했다.
남편은 수술중이라고 했다.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리니 병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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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병상위의 남편을 바라보니 몸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듯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자세히 다가가 보니 남편은 왼쪽 이마가 터져 핏자국이 흥건했다.
한쪽 다리의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쇳덩어리 같은 것을 박아 고정시켜 놓았다.
척추 뼈는 물론 갈비뼈가 모두 함께 부러지며 허파를 쳐서 큰 구멍이 났다고 한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안 다친 곳이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온몸을 흔들어대며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경을 헤매고 있는 남편의 허물어진 육체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반응해야 하는 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나의 표정을 살피는 의사들과 간호사 사이에서 나는 보았다.
삶과 죽음의 실체를. 인간의 나약함에 울었고 절대자의 주권 앞에 두 손 들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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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나에게 오늘 밤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일주일이 고비라고 했다.
살아도 척추손상으로 다시는 걷지 못 할 거라고 냉정하리만큼 단호하게 말했다.
남편은 차가 전복되면서 안전벨트를 하지 않아 몸이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고 한다.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모두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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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부터 남편은 목에 구멍을 뚫어 연결한 산소 호흡기를 쓰고 죽은 듯한 자세로
코마상태에 들어갔다. 멍하니 서서 그런 남편을 보고 있었다.
너무 탈진한 것 같은 내 모습이 안 돼 보였는지 담당 의사는 의자를 갖다 주며
앉으라고 했다.
온갖 전선이 남편의 몸과 모니터를 연결하며 삐 삑 소리를 내고 있었다.
조심스레 줄을 피해 남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참고 있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조용히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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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나 어떻게 해. 제이미와 나는 이제 어떻게 하라 구?”
흐느끼던 희뿌연 눈가위로 물안개처럼 아련히 남편을 처음 만나던 때가 떠올랐다.
한때 나는 사진에 대한 열정을 갖고 산타모니카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또한 사진 취미를 살려 멜로즈에 위치한 사진관에서 팟 타임으로 일을 하였다.
이론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경험을 쌓아 능력 있는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런 어느 날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한 남자가 사진관에 들어섰다.
운명은 그렇게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주인 되는 제프와 하와이에서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죽마고우였다.
자주 놀러오는 남편과 나는 자연스레 교제를 시작했다.
남편은 순수했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운동을 좋아했는데
특별히 골프는 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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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깊어지며 드디어 우리는 장래를 약속했다.
하지만 부모님과 언니 오빠들은 왜 하필 그런 사람이냐며 탐탁해 하지 않았다.
남편을 가족들에게 소개하던 날, 아버지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었다.
그래도 남편은 자주 부모님을 찾아와 인사를 했고,
남편의 몇 마디 할 줄 아는 어눌한 한국어 발음이 아버지의 굳은 표정을 녹이며
그 입가에 웃음을 짓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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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아버지가 프랑스계 미국인이고 어머니는 우연하게도 한국 사람이었다.
시어머니는 우리가 하와이에 와서 자리를 잡고 살기를 원했다.
내게 자식이라고는 아들 하나이니 너도 딸처럼 생각 할 테니 오라고 하였다.
마침 콘도에 세준 사람이 계약 기간이 다 끝나가니 너희가 들어와 살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시어머니는 시댁에서 오 분 정도 떨어진 곳에 아파트를 얻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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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는 영어는 물론 일본어까지 3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그 화술과 인맥이 대단했다.
오아후 컨츄리 클럽의 멤버로 늘 골프를 즐겼다.
친구들도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등 다양했다. 인정도 많았고 호탕한 성격이었다.
시어머니는 세련된 머리스타일과 화장으로 나이보다 십년은 젊어보였다.
고상한 블라우스에 손과 목에는 다이아몬드와 각종 보석으로 항상 번쩍거렸다.
집안에서도 갈색과 분홍빛이 어우러진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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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어머니가 나와 둘이 있으면 어슴치레이 눈을 뜨고 늘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깔아 내리는 말로 아주 힘들게 했다.
요리를 못한다고 불평하였고 아는 것이 없다고 불만이었다.
말을 안 하면 말이 없다고 야단치고 말을 하면 함부로 한다고 했다.
듣다 못 해 내가 대꾸하면 가난한집 딸년이 자존심은 세다며 윽박질렀다.
변덕이 심했고 버럭 소리를 지르기가 일쑤였다.
조용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나로서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수시로 남편을 불러내어 내 욕과 흠집을 잡았다.
나중에는 친구와 친지들까지 동원해 나의 험담을 해댔다.
어머니의 그런 행동에 괴로워하던 남편도 차츰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강물 흐르듯 잔잔하던 우리의 관계가 조금씩 서먹서먹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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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으신 시아버지는 은행장을 퇴직했다.
은행일이 스트레스가 많았는지 내가 남편을 만나기 전, 몇 번의 수술을 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나를 힘들게 할 때마다 내 편에 서서 두둔해 주었지만
병약한 시아버지는 나에게 그리 큰 보호막이 되어주진 못했다.
그러던 중에 나는 임신을 했다.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졌는데 시어머니는 반가워하지 않았다.
아이가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하였다.
친정식구도 아는 이도 하나 없는 곳에서 입덧이 아주 심했다.
한 달이 넘게 물만 먹어도 뱉아 냈다. 그런 나에게 아이도 유달 스럽게 갖는다며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삼 개월 즘 지나 몸을 추스르자 또다시 오라 가라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때마다 놀란 아기의 심장이 심하게 박동했다.
이곳에서 도저히 아이를 낳아 키울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대로 가다가는 남편과 이혼하게 될 것 같았다.
나는 LA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나의 뜻을 남편에게 전하니 순순히 응했다.
짐을 정리했다. 차를 배로 붙였다. 그리고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가려면 너나 혼자 가지 내 아들은 왜 데리고 가냐며 노발대발 했다.
마치 북한을 탈출하는 탈북자의 심정으로 그렇게 도망치듯 하와이를 떠나왔다.
LA로 온지 6개월 후 나는 딸 제이미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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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나기 한 주일 전이다.
LA를 다녀오던 늦은 밤, 차안에서 남편은 나의 손을 꼬 옥 잡고 말했다.
그 동안 아이 키우고 일만 열심히 하느라 우리 사이가 소홀해진 것 같다며
앞으로는 둘만의 시간도 갖고 우리 관계를 회복하자고 했다.
골프도 배워서 같이 치러 다니자고 하며 나의 골프 클럽을 사가지고 들어오기도 했다.
남편은 알고 있었나 보다. 이렇게 오랫동안 잠을 자야 하는 것을,
그래서 미안할까봐 미리 잘해주고 싶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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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목이 메어와 병실을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병원 밖으로 나오니 오월의 햇살이 따사로웠다.
아픈 이들을 방문하는 사람에게 위로라도 하듯이 담 밑으로는
노랑과 연분홍빛이 섞인 장미꽃들이 밝게 피어있었다.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긴 심호흡을 했다. 살아 숨을 쉴 수 있고 자연을 누릴 수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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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난지 닷새 만에 하와이에서 시어머니가 왔다.
화사하게 화장을 하고 짙 푸른색 바탕의 은빛무늬가 어우러진 실크 블라우스에
귀걸이까지 한 모습은 자식이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는 어머니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들이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시어머니는 붕대로 휘감긴 아들을 보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도 많이 안 다치고 괜찮은 것 같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원망을 털어놓았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줬으면 내 아들이 이렇게 되었냐고 했다.
내 아들 데리고 와서 이게 뭐냐고 추궁했다.
남편의 사고로 인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날카로운 칼에 심장이 찔리는 심정이었다.
혼자 다치고 위축되는 내 여린 가슴이 아파와 견딜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 앞에서 나는 언제나 죄 없는 죄인이었다.
며칠 후 시어머니는 나와 심한 언쟁을 하고 하와이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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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한 달 안으로 척추수술을 하기를 원했다. 뼈가 굳기 전에 해야 한다고 했다.
나사를 집어넣어 뼈와 뼈 사이를 연결하는 6시간이 걸리는 대수술이었다.
하지만 사고 당시의 부상으로 피 속에 감염된 균이 많고 또 구멍 난 허파에 균이
들어갈까 봐 자꾸 수술이 지연되었다.
수술을 해야만 휠체어에 앉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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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남편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또 두 달반 정도가 지나갈 무렵의 어느 날,
놀랍게도 남편이 눈을 떴다. 동공이 풀려있었다.
나를 알아보느냐고 물어봐도 아무 반응이 없다.
움푹 들어가 더 커 보이는 두 눈만 씀벅 씀벅이다 이내 잠이 들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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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침 병실에 들어서니 남편의 눈동자에 생기가 있음을 발견했다.
눈길이 마주치자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나는 얼른 남편의 손에 종이와 펜을 쥐어주었다. 팔에 힘이 없어 덜덜 떨었다.
병실 침대의 모서리를 의지해 오랫동안 아주 힘들게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나에게 건네주는 종이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었다.
글을 모르는 아이가 장난을 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어느 나라 말인지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잘했다고 말해주며 환하게 웃으니 남편도 조금 웃는 것 같았다.
그 다음날도 종이와 펜을 주었다. 이번에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세 째 날, 남편은 또다시 어렵게 아주 한참 동안이나 무어라고 적고 있었다.
한 줄기 희망을 걸고 종이를 받아 들여다보던 나는 울컥 목이 메이며
쏟아지는 눈물을 남편에게 보이지 않으려 얼른 뒤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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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불꼬불하고 희미하게 쓴 그 속에서 딸아이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J-A-I-M-E 제이미라고 정확한 스펠링을 썼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신이 있다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분명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섭리가 우리를 돕고 있었다.
그 다음 날 남편은 더 많은 것을 기억해냈다.
나의 이름과 남편의 이름 주소 등. 그 이후로 남편은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몇 달 동안 차고 있던 오줌주머니와 산소 호흡기를 떼어냈다.
중환자실의 장기 환자라는 기록을 세우고 일반 병실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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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을 옮긴 후에도 대소변을 받아내며 한동안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리고 MRI를 찍은 결과가 나왔다.
척추 뼈가 모두 제자리로 아물어 수술 없이도 휠체어에 앉게 되는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남편이 처음 휠체어에 앉던 그 아침,
최악의 시간과 최고의 시간이 백지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지옥처럼 끔찍했던 순간은 언제였냐, 는 듯
벅차오르는 가슴에 세상이 온통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물수건을 적셔다 남편의 얼굴과 귀 등을 닦아 주었다.
아이처럼 좋아하며 신기한 듯 양손으로 휠체어의 바퀴를 어루만졌다.
남편은 재활시설이 있는 병동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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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나 보던 재활치유 과정들이 현실로 펼쳐졌다.
남편은 몸무게가 37파운드나 빠져서 비쩍 마르고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척추를 보호하기 위해 등과 가슴으로 이어지는 딱딱한 의료용 조끼를 입은 모습이
꼭 거북이 같았다. 허리에는 두껍고 단단한 벨트를 맸다.
오른쪽 다리에는 발에서 무릎까지 오는 보조기를 신었다.
치료사의 부축을 받아 휠체어에서 간신히 내렸다.
마치 철봉을 아래로 내려놓은 것 같은 두 줄의 파이프를 잡고
바닥을 향해 한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남편은 다음 한발을 내딛다 풀 석 주저앉고 만다.
이마에 땀이 비 오 듯 흐른다. 지켜보는 사람이 더 애처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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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혹독한 재활에도 별 진전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병원생활에 지친 남편은 의사에게 퇴원을 하게 해달라고 자꾸만 재촉했다.
아직은 병원에 더 있어야 한다는 나와 의사의 뜻을 만류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휠체어에 앉던 날의 기쁨도 잠시,
우리는 새로운 환경으로 인해 힘든 싸움을 해야 했다.
남편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정상이 아니었다.
짜증을 자주 냈고 말투가 거칠었다.
이전의 다정하고 미소 짓는 아빠가 아니었다.
아빠를 그토록 기다렸던 딸아이도 슬슬 눈치를 보며 겉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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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간단한 외출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남편이 휠체어에서 떨어져 내려와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밤에 자는 동안 소변을 가리지 못해 침대 여기저기가 얼룩지고 개미가 들끓었다.
욕조에 의자를 놓고 남편을 목욕시킨 후 나의 몸에 의지해 한발 한발 딛고
침대로 데리고 오면 나는 곧 기진맥진하고 만다.
그동안 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고 병원을 다니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지칠 대로 지친 내가 이러다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병원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남편을 설득했다.
우리는 윈웨이라는 사설 재활원을 소개받고 찾아갔다.
체계적이고 시설이 잘 되어있는 그곳에서 남편은 닷새를 지냈고 주말에는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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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웨이를 찾아간 것은 행운이었다.
여러 환자들을 경험한 전문치료사들의 사랑과 도움으로
남편은 휠체어에서 워커를 잡고 걷게 된다.
그런 얼마 후 물리 치료사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는 걸을 수 없다던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걷게 되었다.
윈웨이에서 남편은 운전연습도 했다.
담당자와 함께 차량 국으로 가서 시험을 보았는데 합격이었다.
모든 과정을 수료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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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잃을 번 한, 사고를 겪고 그렇게도 빨리 운전이 하고 싶을까!
남편은 중고차를 한대 구입했다.
사고 당시 척추신경을 다친 남편은 오른쪽 무릎이 잘 굽혀지지 않는다.
발도 뒤꿈치가 뭉그러졌다.
다리에 힘이 없어 플라스틱으로 된 보조기를 착용해야 하기에
신발 치수도 왼쪽보다 크다.
운전을 할 때 의자에 먼저 앉고 두 손으로 오른쪽 다리를 끌어 올린다.
왼쪽 다리는 정상이다. 그래서 남편은 왼발로 운전을 한다.
이런 모든 상황들이 생소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와 딸아이는
그 악몽 같은 시간들을 겪은 후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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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그 큰 교통사고의 후우증과 오랜 시간의 약물투여 때문인지
조그만 일에도 깜짝 놀라며 당황하기가 일쑤였다.
또한 무엇이든지 자기 고집대로만 하려고 했다.
밤에는 잠을 자지 않고 집안을 돌아 다녀 플라스틱 보조기를 한 발이
마루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딱딱, 소리를 내어 나까지 수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정신뿐 아니라 얼굴도 일그러지고 육체도 변해있어
어느 때는 낯선 남자를 대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가끔씩 사고전의 그 자상하고 배려해주던 남편,
언제나 ‘예스 달링’으로 대답해 주며 웃던 그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초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가슴 한 구석을 할퀴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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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부정적인 생각과 말들은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 까지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지 시어머니를 통해 익히 보아왔기에
가능하면 모든 것을 긍정의 눈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남편의 기억력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도,
휠체어에 앉지 않고 지팡이에 의지해서라도 걸을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살아있어 아이가 아빠라고 부를 수 있고 만질 수 있어 아빠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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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딸아이가 미술 대회에서 상을 받게 되어 시상식에 같이 참석해
사진도 찍고 즐거움을 나누었다.
또 사고가 나기 전에 자주 갔던 뉴포트 비치의 도서관과 그 옆에 있는 제과점에 가서
아이가 좋아하는 컵 케익을 먹으며 지난날을 회상하기도 했다.
바닷가에서는 아빠가 전처럼 아이와 놀아 줄 수는 없어도,
하얀 모래위에서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물장구를 치며 유리알 같이 투명한 웃음소리를
자아내는 딸아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이었다.
그렇게 남편과 우리 모두는 조금씩 낯선 상황에 적응해가며
가족의 사랑을 엮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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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가정을 집어 삼키려 혀를 낼름거리며 공격해 오는 무리들은
아직도 저 뒤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이 집을 비우기 시작했다.
한번 나가면 일주일도 좋고 열흘이 넘을 때도 있었다.
알고 보니 남편은 라스베가스를 드나들고 있었다. 놀음을 시작한 것이다.
차를 구입했을 때 마켓이나 약국 병원 등 아주 가까운 곳만 운전하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건만, 산을 넘고 끝도, 끝도 없는 사막인 라스베가스,
그 먼 길을 운전을 하며 다니고 있었다.
건강한 사람도 한번 다녀오면 힘이 들어 지치는데 그 몸을 해가지고
몰 핀과 그 독한 약들을 복용하면서 말이다.
아니 어떻게 살아나고 회복되어 오늘까지 왔는데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런 인간이 정말 나의 남편이었던 가!
그렇게 사랑하던 어린 딸아이가 ‘아빠 가지마!’ 라고 붙잡아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남편은 골프에서 이젠 도박으로 미쳐가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남편은 저축되어 있던 얼마간의 금액을 모두 탕진해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스포츠 바에서 만난 사기꾼들에게 속아 동업에 싸인을 하면서
계약금을 이미 건네준 상태였다.
그리고 나머지 잔여금에 대한 심한 독촉을 받고 있었다.
신용 카드 몇 개도 꺼내 쓸 만큼 모두를 써버렸다.
한번 씩 집에 들어오면 두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고 발등은 퉁퉁 부어있어
바라보기가 안타까웠다. 간신히 며칠을 지내고, 무엇에 쫓기는 도망자처럼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황급히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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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남편은 집을 떠나기 전
내가 보관하고 있던 금목걸이와 금붙이 조각을 내놓으라고 했다.
줄 수 없다며 옥신각신 하였다. 그러자 찌그러진 인상으로 목에 붉은 심줄을 드러내며
나를 두들겨 팰 듯이 덤벼들어서 나는 그냥 내어주고 말았다.
그런 남편을 지켜보는 날들은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목구멍으로 가시를 삼키는 것 같이 비참했다.
나는 왜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빼 꼼이 열린 방문 사이로 인형 놀이를 하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가슴 속에서 검은 연기가 꾸역꾸역 밀려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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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팠다. 산다는 것이, 살아서 호흡하고 있다는 것이 아파 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에 대한 원망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미워할 기력조차 없었다.
다만 사십년 살아온 내 삶의 무게를 지탱하기에는 너무도 여리고 여린 내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통증이었다.
팔월이었다. 그 한낮의 폭염보다 더 뜨거운 액체가 선글라스 안으로 흘러내렸다.
주체할 수 없이 흘러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차를 길가 한 모퉁이에 세웠다.
그리고 얼굴을 운전대에 파묻고, 어깨를 들먹이며 터져 나오는 오열을
한참 동안이나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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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인지 서너 주가 지나가도록 남편이 집에만 눌러 앉아 있었다.
슬슬 내 눈치를 살피며 집안일도 도왔다.
나에게 말도 부드럽게 하고 행동도 선선하게 대해서 이제 조금씩 제 정신이
돌아오려나?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오후에, 남편은 은행에서 융자를 담당한다는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려면 나의 싸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등줄기에 전기가 흐르는 듯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와
바닥에 주저앉을 뻔 했다.
나의 행동에 영문을 몰라 어리벙벙해하는 은행 여자를 조용히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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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 사이에 잠시 동굴 속 같이 어두운 침묵이 흘렀다.
남편이 말문을 열었다. 대출을 받아 급한 대로 빚을 갚고 나면 형편이 원만히 풀릴 텐데,
왜 반대하느냐며 언성을 높였다.
안경 너머로 두 눈알을 뱅글뱅글 돌리며 허기진 이리처럼 으르렁거렸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것이 왜 안 되는지를 설명하자 갑자기 나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남편은 정상적인 판단과 이성을 모두 잃고 있었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지막지한 욕지거리는 배신감과 절망을 넘어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분노를 치밀어 올렸다.
나도 이미 내 정신이 아니었다.
남편을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마주 내뱉으며 광란의 몸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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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때 인간이 아니었다. 미쳐버린 두 마리의 짐승이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서로를 물어뜯었다.
그 모습을 이제 겨우 초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이층으로 연결된 계단 난간을 붙잡고 힘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흐윽 흐윽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흐느낌은 쥐어짜듯 한 통곡으로 변해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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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뇌에 경련이 일어나며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이건 아닌데, 이건 정말 아닌데’내가 다치는 건 얼마든지 괜찮아도
아이가 상처를 받는 모습은 뼈를 분해하는 고통이었다.
나는 죄책감으로 인해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잠들었는지 차마 방문을 열어 볼 수도 없었다.
그날 밤,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때려와 한 잠도 이룰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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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물론 가까운 친구와 교인들까지도 모두들 그만큼 했으면 됐다고 말했다.
이제는 그만 남편과 깨끗이 정리할 것을 종용했다.
그 후로 자주 복통이 일어났다. 명치끝이 답답하고 헛구역질이 나왔다.
한밤중에도 위장이 뒤틀리며 쥐어뜯는 고통에 응급실을 찾았다.
신경성 위경련이라고 할 뿐 이렇다 할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끓인 밥으로 조금씩 위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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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마켓에 갔다. 무엇을 사러 왔는지 머리 속이 까마득해지고
진열된 식품 하나하나가 어느 순간 뿌옇게 흐려지며 시야로 밀려들었다.
나는 그렇게 울고 서 있었다.
주위를 의식하지 않은 채, 아무나 붙잡고 아무 곳에서나 울었다.
집안에서는 편안한 식탁 의자를 두고도 딱딱한 마룻바닥의 귀퉁이에 쭈구리고 앉았다.
허공을 응시했다. 아무 의미 없고 무기력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지치면 양 팔꿈치를 무릎에 괴고 머리를 아래로 박고
밤이 깊도록 무작정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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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도 이웃도, 그 누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족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에도 언니의 편이 되어 나의 결정을 믿어 주었던
동생, 언니의 늦은 결혼에 누구보다도 행복하기를 빌어주었던 그 동생,
그리고 언니의 불행 앞에 같이 울어주며 마음 아파하던 동생의 어떤 말도
더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실어증 환자처럼 말수가 적어졌다.
깊은 잠을 자고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사방이 캄캄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환청이 들렸고 검은 물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거친 비 비람, 휘몰아치는 폭우 속에서 나의 영혼마저도 깊이 폐쇄되어
침몰해 가고 있었다.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엄습해왔다.
죽고 싶었다. 죽는 것만이 오직 길인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죽음을 생각했다.
가장 간단하고 정확히 죽을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유서를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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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변명 아닌 변명이었다. 죽는 것은 모진 삶보다 더 힘들다고 누가 말했던가!
이모 집에 맡겨 놓았던 아이가 돌아오는 날까지 엉크러진 가시덤불 같은 모습으로
나는 살아 있었다.
올해는 유난히도
앞마당의 레몬 나무에 노랗다 못해 진노랑 빛인 레몬이 주렁주렁 열렸다.
그 옆으로 당귀 꽃과 줄기 장미 넝쿨이 푸릇푸릇 어우러져 있었다.
딸아이는 이모가 사준 베이지색 바탕에 빨간 꽃무늬가 밑단에 수놓아진 원피스를 입고
같은 색의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가을 햇살 아래서 강아지 미스티와 나풀거리며 놀고 있는 아이는 마치 작은 요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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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내게 주신 선물, 나의 분신 나의 딸.
나는 또 다시 끄 억, 끄 억 올라오는 서러움 덩어리를 삼키며 그런 딸아이를 보면서
한 줄기 실 날 같은 희망을 움켜잡는다.
이웃집 여자는 나에게 술과 담배를 권했다. 맥주를 따라주며 마시라고 했다.
다 잊으라며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쓰라린 위장에 괴로움만 더했다. 병원에 갔다. 의사는 나에게 우울증이라고 했다.
이 약을 삼 개월 만 복용하면 깨끗이 나을 거라고 하며 처방전을 주었다.
그러나 쏟아져 오는 졸음에 일주일도 먹을 수가 없었다. 정신과 의사를 찾았다.
희미한 오렌지색 조명 아래서 온 몸이 폭 둘러싸이는 듯한, 의자에 앉아 나누는 대화는
그리 큰 도움은 되지 못했고 나서는 발걸음은 허탈하기만 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삶을 추스리려 애쓰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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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병원에서 본 것을 마지막으로 나와 일체의 통화를 거부하던 시어머니가
2년7개월 만에 우리가 살고 있는 터스틴에 왔다.
한국과 일본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동안 지병으로 앓고 있던 시아버지가 합병증과 암으로까지 전이되어 세상을 떠난 후,
유산을 모두 물려받은 시어머니는 한층 기세등등하였다.
칠십이 넘은 연세에도 주름살 하나 없는 백옥 같은 피부에 분홍색 스웨터를 입은 모습이
새색시 같았다.
나는 각종 병원비와 남편의 도박으로 인한 경제적인 문제를 의논하고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그건 언제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나의 생각일 뿐이었다.
시어머니는 나와는 정반대인 길을 가고 있었다. 아들을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구실을 찾느라 눈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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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얼음판을 내딛는 듯한, 아슬 함과 냉랭한 기운이 집안을 감돌았다.
시어머니는 며칠을 겉돌며 틈만 나면 시비 거리를 찾았다.
사소한 일로 나와 말다툼을 한 후 기다렸다는 듯 그 불똥을 아들에게 모두 쏟아 부었다.
그리고 나는 이층에서 듣지 말았으면 좋을 이야기들을 모두 듣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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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말했다.
아이의 엄마이며 내가 죽음 속을 헤메 일 때 나의 곁을 지킨 여자라고.
그러나 시어머니는 의사와 간호사가 돌보았지 그 여자가 한 일이 뭐가 있냐고 하였다.
재수 없는 여자라고 했다. 저 여자 때문에 네 다리가 병신이 되었다고 했다.
저 여자는 너의 인생을 망쳐 놓았다고 하며 이혼을 강요했다.
평생 아들의 인생을 쥐고 흔들기 원하는 시어머니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직장도 없고 빚더미에 몸까지 그렇게 되어 버린 남편의 목을 그 잘난 돈의 위력으로
꼭꼭 조여오고 있었다.
이 집에서 당장 나오지 않으면 페니 하나도 도와줄 수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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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반하장이라더니 정말 억울하다 못해 원통하기 짝이 없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이 가정을 지키려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이혼이라니,
아니 이혼이 변기통의 배설물을 눌러 버리듯 그렇게 간단한 것인가!
어떻게 살아 돌아온 아빠인데 왜 아이가 아빠와 같이 살수 없다는 건가.
그러나 힘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처럼 철저하게 당하고 고통을 감수 하는 것 뿐.
집안에 다시 사하라 사막에 부는 거친 모래 바람보다
더 사나운 모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내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결코 시어머니를 용서할 날이 있을까?
원한이 붉게 물들며 가슴 깊은 곳 저 밑바닥에 대못이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미안하다는 한 마디만 남기고 그렇게 또 다시 나와 딸아이 곁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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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시어머니가 원하는 것처럼 이혼을 해야 하는 건가?
아니 마음속으로는 열두 번도 더 이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빠의 교통사고도 모자라서 이제 부모의 이혼이라는 깊은 상처를
그 어린 가슴에 어떻게 안겨야 한단 말인가.
끝없이 추락할 것만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두려움도 잠시, 힘차게 비상하는 독수리의 날개 짓처럼 살아야겠다는 오기가
가슴속에서 불붙듯 용솟음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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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서는 나에게 빚쟁이가 들이닥치기 전에 얼른 집을 팔아
어린것이랑 살 생각을 하라고 충고했다. 그랬다. 집을 팔아야 했다.
그런데 경기가 침체되며 큰 은행들이 부도를 맞고 집값이 떨어진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달력을 보니 12월도 몇 일 남지 않았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끝자락에서 오색의 영롱한 불빛들이 거리를 장식하고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할 준비에 온통 축제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내게는 춥기만 하고 스산한 그 겨울 날, 나는 짐을 정리하며
집이 팔리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인간이라고 남편은 떠나기 전 집을 나의 명의로 이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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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픈 하우스를 하던 날 40여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잠잠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에 그 중의 한명이 관심을 보였고 뜻밖에도 집이 팔렸다.
작은 구원의 여신이 나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이삿짐을 싸야 하는데 뼈 속에 있는 골수까지도 모두 빠져 나간 듯 힘이 없었다. 그
래도 이를 악물고 박스를 만들었다.
무슨 짐이 그리도 많은지 싸도, 싸도 끝이 없었다.
버릴 것은 버리고 기부할 것은 기부하며 조그마한 아파트에 들어갈 물건들만 챙겼다.
나는 강아지를 산타모니카에 사는 친지에게 주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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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하던 날 LA에서 동생 부부가 왔다.
이삿짐센터 사람들과 함께 비지땀을 흘리며 도와주었다.
마지막 쓰레기까지 다 버려주었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까지 따라와 모든 짐을 정리해주고 갔다.
낮에는 사촌 오빠와 장난을 치며 밝게 놀던 아이가 저녁이 되어 어둑어둑 해오자
내 품을 파고들며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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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여기 싫어,”
“예쁜 집에서 엄마와 아빠랑 미스티와 같이 살거야. 여기 싫어 싫어.”
“제이미, 미안해 엄마가 정말 미안하다”.
아빠가 “괜찮아지면 제이미가 좋아하는 집으로 우리 다시 이사할거야.”
칭얼대던 아이가 엄마의 모습이 너무 슬퍼 보였는지 슬며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슴이 미어져 내렸다.
어느 부모인들 자식을 좋은 집에서 좋은 것 먹이며 키우고 싶지 않으랴!
하지만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역행하는 삶 앞에 낸들 어찌하랴.
그래 이 밤, 환난 날에 욥이 그 어미의 모태를 저주했듯
이 못난 엄마를 마음껏 원망 하려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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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와 둘이 지내는 날들은 평온하다 못해 가끔씩 정적이 깃들었다.
아이는 학교에 다니며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하며 또한 아빠의 빈자리까지 채우려 애를 썼지만
밤이 되면 아이는 아빠가 언제 오냐며 아빠를 찾았다.
그런 딸아이에게 엄마하고 둘이 있으니 많이 외로우니까 LA로 가서 살자고 했다.
네가 좋아하는 이모도 있고 할머니와 사촌 언니 오빠도 있고.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여기에 살아야 아빠가 온단다.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아빠는 제이미를 보러 반드시 돌아온다고 한다.
딸아이는 터스틴을 떠나면 아빠를 영영 볼 수 없다고 생각하나 보다.
나는 그런 아이를 안고 서럽게 울었다.
아이는 광고지를 돌리는 사람이 문을 두드리거나 스쳐가는 바람 소리에도
‘대디 대디야’ 하면서 귀를 쫑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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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이 다가오는 어느 금요일 저녁이었다.
딸아이와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는데 열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에
누군가 똑똑하고 문을 두드렸다.
나와 아이는 깜짝 놀라서 동그래진 두 눈을 서로 마주 보았다.
나는 아이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며 문가로 다가갔다.
그때 갑자기 딸아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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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디! 대디야?”
“제이미!”놀랍게도 허스키한 남편의 흥분된 목소리가 넘어왔다.
문이 열리고 아이가 아빠를 부르며 남편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대디! 대디!”
남편은 아이의 뺨과 이마에 키스를 하고 얼굴을 부비며 반가움에 눈물을 흘렸다.
아이도 제 아빠의 목을 끌어안고 연신 대디 대디 불렀다.
남편은 아이와 떨어져 몸을 일으킨 후 나를 볼 면목이 없었던지 겸연쩍게 웃으며
‘하이 허니’ 했다. 그런 남편을 나는 가볍게 포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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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쇼핑백을 네 개나 들고 왔다.
그 안에 딸아이의 티셔츠와 모자가 달린 자켓, 잠옷과 학용품 나의 운동복등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리고 남편은 나와 아이 앞에서 당당하게 선언했다.
“내가 두 번 다시 라스베가스를 가면 사람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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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사고가 난 지도 어느덧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상처를 잘 다루면 상처 입은 사람들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딸아이는 학교에서 부모가 이혼한 친구들,
아빠가 간암으로 죽고 혹은 감옥에 있는 집의 아이,
따돌림 받는 친구 등의 아픔을 만져주었다.
공부는 제쳐두고 친구에게 전화가 오면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리고 어느 때는 재워주면서까지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하는 모습이
아이러니 하면서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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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사고로 평범한 많은 것들을 잃었다.
한 때는 삶의 끝자락에서 원치 않는 쓴 뿌리와 절제되지 않았던 분노로 치를 떨었지만
마음의 상처가 잘 치유되어 이전의 삶에서 얻을 수 없는 값진 보배를 발견하고 소유했다.
나는 그곳에서 이제 인생이라는 것을 조금 알 것 같다.
한겨울의 설한에도 땅속에서는 봄의 싹이 움터 오듯, 그렇게 삶의 끝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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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을 이야기들을 꺼내 글로 써…
익어가는 매실 향처럼 상큼히 날아든 당선 소식은,
지난날의 상흔마저도 말끔히 씻어주는 낭보였다.
어쩌면 가슴속 깊이 영 묻어 두었을 이야기들을 꺼내어 글로 쓰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고 치유를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온누리 교회 글동무들, 그리고 지도를 아끼지 않으신 이용우 선생님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한국일보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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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회 문예공모전 생활수기 심사평
심사위원 배정웅 <시인>
올해 한국일보의 문예공모 생활수기 부문에 응모해온 수기들을 세심하게 읽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이 부문의 글들도 상당히 발전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문장의 형식면에서 소설식의 플롯기법을 구사한 글이 있었는가 하면
에세이 식의 서술체 그리고 서간체의 장점을 살린 글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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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분들이 무색하리만치 미학적 문장력을 구사한 수기들도
여러 편 있어서 더 이상 글은 문인작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고 할까,
아시다시피 생활 수기는 테마가 분명한 장르이다.
때문에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가가 아니라 경험적 사실을 어떻게 문장으로 서술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사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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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작들의 내용면에 있어서는 간병 기, 투병기, 부부문제, 자식얘기, 애견이야기,
이민생활 정착기, 성공담, 헤어진 친구며 노숙자얘기, 전원생활기, 등등 다양했지만
다소 애틋한 글들이 많았다.
내 개인적으로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긴 그런 글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 중에서
앤 김의 ‘끝에서 시작하는 삶’
전금숙의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김사비나의 ‘이민 풍광기’ 세편을 당선작, 가작, 장려상 등으로 각각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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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끝에서 시작하는 삶’은 뜻하지 않던 남편의 교통사고 이후
돌변한 남편의 상습도박, 부부별거에 따르는 아이와 함께 하는 기다림의 애타는 시간,
뜻밖의 남편의 귀가 등의 얘기가 사실적으로 잘 직조되어 있어 호소력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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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는 앞서 언급했듯 원고지 위에 서간체로 쓴 수기다.
지극히 평이한 문장으로 먼저 이승을 떠나 이 세상에 없는 언니에게 말을 건네는 식의
독백조의 형식으로 이민생활의 이방인적인 아픔과 아들의 간병기등이
실감있게 잘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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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이민 풍광기’는 사모아 그리고 하와이에서의 이민생활의 애환 등이
다소 장황한 느낌이 들지만 여성다운 세심한 시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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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선에 넣었으면 하는 글들이 여럿 있었지만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중희의 바닥에서 상승까지의 이민생활을 소상하게 다룬 입지전적인 수기를
선에 넣지 못해 아쉬웠다.
육춘강의 ‘희망의 다리’라는 제목 속에 담아놓은 크리스찬적 희망,
한은진의 ‘아버지의 연인’에서 서술한 새엄마얘기,
김인순의 ‘결혼생활에 동반된 먹구름외’ 한정희의 남다르게 파란이 많았던
과거를 고백조로 쓴 ‘나’ 등의 수기들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입상하신 분들에게 깊이 축하드리며 앞으로의 문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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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 읽어 봅니다.
숨이 막히도록 힘든 삶..
그래도 놓지 않은 희망.
감사합니다^^
예~! 경희님~!
보편적으로 남자들은 철이 늦게 든답니다~!
좀 애들 같지요~!ㅋㅋㅋ
하하하하하하하! 아이구! 눈이야!
너무 길어 읽지를 못했습니다. 용서바랍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예! 선배님!
잘 하셨습니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