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달수 池達洙(1909 ~ 1969)】 "1941년 광복군 제2지대 제2구대장"
1909년 8월 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아버지 백산(白山) 지청천(池靑天)과 어머니 윤용자(尹龍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아명은 청룡(靑龍)이다. 이명은 이경옥(李慶玉)·이달수(李達洙)이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와 제2지대 등에서 활동하였다.
1924년 겨울 서울에서 어머니, 여동생 지복영(池復榮)과 함께 지린성(吉林省)으로 가서 아버지와 합류하였다. 이후 여준(呂準)이 교장으로 있는 어무현(額穆縣)의 검성중학(儉成中學)에서 공부하였다.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아버지와 떨어져 가족들은 충하진(沖河鎭)·황지강자(荒地崗子)·주하현(珠河縣) 등지를 옮겨 다녔다. 1930년 아버지 지청천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난 이후, 한국독립군 병사 및 한중연합군 분대장으로 솽청푸(雙城堡)·징보후(鏡泊湖)·우린쯔(武林子)·주자툰(朱家屯) 전투 등 20여 회의 한중 연합 대일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괴뢰 만주국 수립과 관동군의 공세 강화로 항일무장투쟁의 환경이 악화되었다. 이에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중국 관내지역 이동이 결정됨에 따라, 1933년 11월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 베이징(北京)을 경유 난징(南京)으로 이동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김구가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34년 2월 중국 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 내에 설립한 한인특별반(韓人特別班)에 입교하였다. 한국독립군 출신 대원을 비롯하여 김구 및 김원봉 계열의 92명 입교생과 정치훈련과 일반 군사교양 및 마술훈련(馬術訓練), 각종 포와 기관총 조작법 등을 교육받았다. 이때 지청천과 전 한국독립군 간부인 오광선·조경한 등도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졸업 후 지청천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활동에 참여하였다. 1935년 중반 이후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으로 쑤이위안성(綏遠省, 현 중국 내몽고자치구에 해당되는 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쑤이위안성 파견은 당시 민족혁명당 내에서 벌어지고 있던 당권 경쟁 사실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김원봉 및 의열단계열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 상황이었던 지청천은 당내 위상과 독자적인 항일투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영향력 안에 있는 만주지부 활동을 점검하는 한편, 중국 반만(反滿) 항일운동 세력과의 연대 형성을 통해 독자적인 기반을 확충하고자 하였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건된 이후, 총사령부 주계(主計) 및 시안(西安) 총사령부 경리로 근무하였다.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가 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되자, 제2지대 간부로 배속되어 쑤이위안성 지구에 파견되어 적후공작(敵後工作)을 펼쳤다. 이후 제2지대 제2구대 부관, 제3구대장 난징 잠편지대(暫編支隊) 부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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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 직원 일동(중국 시안, 1940. 12. 26, 1열 맨왼쪽이 지달수) [판형3] |
첫댓글 아버지 백산(白山) 지청천(池靑天)과 어머니 윤용자(尹龍慈)의 장남,
장군의 아들이 바로 池達洙 독립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