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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선인 남강 이승훈 선생
남강이 세상을 떠난 것은 1930년 5월 9일이었다. 1930년 6월 <성서조선> 17호는 이승훈 선생 기념호로 간행되었다. 속표지에 이승훈 선생의 사진을 수록하였다. 정상훈은 추도의 뜻으로 '사주를 넘어서며'라는 테니슨의 시를 번역하여 실었고, 김교신은 남강의 삶과 죽음을 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톤과 비교하면서 리빙스톤이 낭독했던 시편 121편을 해설하였으며, 함석헌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라는 제목으로 긴 추모글을 실었다.
<성서조선> 17호는 지금껏 6인 동인 체제로 이어오던 것을 끝내고 김교신이 단독으로 편집의 일을 맡기로 한 후 처음으로 간행한 것이었는데, 남강 기념호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여기에 몇 달 전 작고한 우치무라 간조에 대한 추모글이 수록되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남강은 누구였던가? 1864년 평북 정주의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그는 생후 칠 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에 아버지마저 죽자 놋그릇가게 심부름꾼 노릇을 하면서 돈을 모아 사십 세에 이르러 큰 부자가 되었다. 44세 되던 해 평양에서 도산의 연설을 듣고 크게 깨우쳐 공적 생애를 시작,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작고하기까지 24년간 지극한 희생으로 오산학교를 운영하였다. 105인 사건, 3.1운동 등으로 옥고를 치르는 동안 신구약 성서를 읽어, 성서에서 진리를 찾고 의를 사모하고 자기를 이길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조선에 나서 조선을 위해 살고 조선을 위해 죽은 ‘참조선사람’이었다.
진정한 조선사람을 고른다면 그는 제일 먼저 뽑혀야 할 사람이다. 그는 지난 5월 16일 그의 영결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애사를 말하던 조만식 씨의 말과 같이 ‘조선에 났고 조선을 위하여 울고 웃고 조선을 위하여 죽었다.’ 그는 참조선사람이었다. 참조선사람이었던 고로 참사람이었다. 혹은 참 사람이었는 고로 참조선사람이었다. 조선을 참사랑한 고로 그에게 참사랑이 있었고 지성至誠이 있었고 희생이 있었다.
<성서조선> 17호, 1930. 6. 6-7쪽.
함석헌이 오산학교 학생이 된 것은 1921년의 일이었고 이 무렵 남강은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남강이 다시 오산으로 돌아온 것은 함석헌이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함석헌은 1923년 오산학교의 지원을 받아 도쿄 유학길에 올랐고, 1928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오산에서 함석헌과 남강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오산은 무엇이었던가? 후에 함석헌이 쓴 글에 따르면 오산은 상투 튼 학생 여덟으로 옛날 서당 집에서 시작하였으나 그 속 정신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단순히 글만을 가르치자는 것이 아니라 산 정신의 샘이 되어 썩은 사회를 맑혀보자는 것, 혁명의 보금자리가 되자는 것이 오산의 정신이었다. 오산학교를 이루는 세 가지 정신은 청산맹호의 민중정신, 자립자존의 민족정신, 참과 사랑의 기독정신이었다.
상상을 맑힐 샘물 한 줄기 / 다섯 뫼 그늘에 흘러 나네 (중략)
네 손이 솔갑고 힘도 크구나 / 불길도 만지고 돌도 주물러
새로운 누리를 짓고 말련다 / 네가 참 다섯 뫼의 아이로구나 (중략)
저 하늘의 해와 달도 돌아다니며 / 이 땅 위에 물과 바람 또한 뛰노니
천지 사이 목숨불을 타고난 우리 / 열센 힘을 뻔득이어 빛을 내이자
함석헌, 「남강, 도산, 고당」, <함석헌 저작집 6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성서조선>은 함석헌을 매개로 오산과 이어져 있었다. 만년의 남강이 공덕리에 있던 성서조선사를 찾은 일도 있다. 1929년 늦가을의 어느 저녁이었다. 남강이 예고 없이 성서조선사를 방문했을 때 김교신과 류석동은 출타하였고 정상훈이 혼자 노지사老志士를 맞았다. 며칠 후 김교신과 정상훈, 류석동 3인은 남강이 머물던 안국동 숙소를 찾았다. 김교신으로서는 이 만남이 남강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이 일을 <성서조선> 17호 「성서통신」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 후 며칠이 지난 1929년 11월 10일(일요일) 오후 6시, 우리는 정형, 류형과 함께 안국동 모 여관에 있는 남강 선생을 방문하였다. 그저 방문하여 주신 예에 답하였다기보다 울적했던 회포를 풀어 버리고 말았다. 선생은 우리를 마지막 전차로 귀가하게 하셨다. 내금강에서 십여 일을 보내다가 외금강을 향할 때는 산봉우리에서 동해의 맑은 바람을 한입에 삼킨 것 같은 부푼 가슴을 가지고 누룩 만드는 공덕리로 돌아왔었다.
<성서조선> 17호, 23-24쪽.
함석헌은 후에 쓴 글에서 이 일을 남강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일화로 기억하고 있다. 남강은 젊은 사람들의 말이라도 옳은 말은 다 들으려 하고 될성부른 것은 어떻게든 길러주려 애썼다고 한다. 유학을 마치고 오산에 온 함석헌이 성서연구회를 시작하자 이를 눈여겨 보던 남강이, 서울 가는 길에 <성서조선>하는 이들을 만나볼 테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고, 과연 얼마 후 동인들을 만나고 와서 그 뒤로 성서연구회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남강의 죽음을 맞은 함석헌이 <성서조선>에 긴 추모글을 발표한 것은 그럴 만한 일이었다. 이 글에서 함석헌은 남강을 ‘조선의 위인’이요, 무엇보다도 ‘신앙의 사람’으로 받들면서 그의 마지막 행적과 장례식 풍경을 생생하게 전한다.
남강이 서거하기 불과 며칠 전인 1930년 5월 3일 오산학교 동문들이 그의 기념동상을 모교 교정에 세우고 제막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남강은 순서에도 없는 말을 청하여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신이 이렇게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였다. 다음 날인 5월 4일 일요일 오산성경연구회에 참석한 남강은 재차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고 한다.
자기는 본래 무식한 사람으로 아무것도 할 만한 힘이 없었다. 자기가 오늘까지 온 것을 자기 자신도 어찌하여 그렇게 하여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아는 것이 있다. 즉 자기가 진리를 찾고 의를 사모하고 그 의를 위하여 자기를 이기고 일하여 나가고자 하는 힘은 성경을 보는 가운데서 생겨나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고로 자기는 이를 생각하기를 신이 그렇게 하시었다고 믿는다.
<성서조선> 17호, 11쪽.
이 말을 한 지 불과 닷새 후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게 되었으니 함석헌을 비롯한 오산인들로서는 너무나도 갑작스런 죽음이었으리라. 유해는 표본으로 제작하여 학교에 두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5월 16일 밤 9시 30분 오산을 출발하는 열차에 실어 경성제대병원으로 보내졌는데, 남강 선생의 유해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역두에 나와 있던 오백 명의 학생들은 기차가 소리를 내고 출발하자 일시에 통곡하였다.
모든 준비가 다 필畢하고 기차가 한 소리 높이 호적呼笛을 울릴 때 오백 명의 건아는 일시에 ‘선생님’하고 통곡하였다. 기차를 벌써 가버리고 초여름 밤하늘에 별만이 깜박거리는 역두에는 돌아갈 생각도 못하는 그들의 통곡성만이 계속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부형들의 위로로 간신히 발길을 돌렸으나 통곡은 그칠 줄도 없고 5리 넘는 교정까지를 허방지방 울음으로 들어가서 새로 세운 은사의 동상 앞에 쓰러져 엎디어 호천호지呼天呼地하는 그 광경은 조선 역사가 있은 이래의 대사실大事實이었다.
<성서조선> 17호, 9쪽.
한편 이튿날 아침 김교신과 정상훈은 서대문 형무소를 지나고 효창원 솔밭을 가로질러 경성역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경성으로 들어오는 남강의 유해에 마지막 예를 갖추기 위함이었다. 이 일을 김교신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30년 5월 17일 아침에 정형과 나는 활인동 제염소 모퉁이를 지나 인간지옥을 상징하는 형무소 대문 앞을 거쳐, 10분 이내에 보장步杖을 끌 수 있는 효창원 솔밭에 이슬을 차면서 경성역으로 달음박질하였다. 백골표본으로 제작되기 위해 대학병원으로 운반되는 남강 선생의 유골에 최후의 경례를 하기 위함이었다. 기관차 뒤에 연한 영구열차가 백기를 날리면서 역 구내로 돌입할 때에는 경례하기보다도 나의 가슴을 정제靜制하기에 전력하지 아니치 못했다. 저 표본을 지적하면서 교수할 선생과 그 단하壇下에서 쳐다보면서 필기할 생도들의 광경을 추상하면서, 남산이 무하霧霞의 조복弔服을 두르고, 장마霖雨 쓸쓸한 바람에 실려 수심을 깊게 하는 장안의 길로 선생의 영구차는 해부실을 향하여 떠났다.
<성서조선> 17호, 24쪽.
남강의 마지막 뜻은 일제 당국의 방해로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있어 더 중요한 것은 죽은 남강보다 산 남강, 살 남강이었다. 함석헌은 남강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와 같은 이였다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의 눈을 남강이 아닌 남강을 조선에 있게 한 하나님께로 돌린다. 놋그릇가게 심부름꾼이었던 한 아이에게 하나님의 영이 내리자 그는 의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은 큰 사람이 되었다는 것, 여기에서 함석헌은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보고 있었다.
조선에 이런 위인이 있었음을 조선은 아는가, 모르는가. 그보다도 이런 위대한 혼을 통하여 조선 위에 일하는 전능자의 섭리를 조선의 자녀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오백 명의 소년을 밤새도록 통곡시킨 그는 자기가 죽지 않고 산 자인 것도 증명하였거니와 이 조선 위에 오히려 생명의 일선一線이 남아 있음을 이 위에 쉬지 않는 섭리의 일함이 있음을 힘있게 증명하였다. ‘믿는 자는 영생한다’, ‘의인은 신앙으로 산다’라는 진리가 조선의 제일인第一人인 그를 통하여 실증되는 동시에 이 백성 위에는 크고 감사한 위로가 내렸다. 그의 부음을 듣고 사백여 통의 조전弔電을 보내기보다도 백여 단체가 합하여 사회장社會葬을 지내기보다도 수백 틀의 만장輓章 조사弔辭와 수천 원의 부의금을 보내기보다도 일만一萬의 회장자會葬者가 천리역로에 연連하기보다도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섭리를 깨달음이다. 죽은 남강보다도 산 남강, 살 남강을 통하여 산 하나님의 경륜을 앎이다.
<성서조선> 17호, 13쪽.
김교신이 책임 편집을 시작한 <성서조선> 17호를 이승훈 선생 기념호로 간행하고, 여기에 우치무라 간조 추모글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성서조선> 동인들의 조선적 기독교 기획에서 '조선'은 오산과 남강의 민족주의에서 비로소 그 내용을 얻게 되었다. <성서조선> 초기 선지자 연구에서 섭리 사관으로 이어지는 함석헌의 고민이 한갓 추상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남강의 존재 때문이었다. '참조선사람' 남강이 곧 선지자였다는 데서, 남강에게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있었다는 데서, 함석헌에게 있어 남강의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드러난다.
이 점은 김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김교신이 <성서조선> 창간사에서 ‘<성서조선>아, 조선혼을 가진 조선사람에게 가라’고 외쳤지만, 실상 ‘조선혼’이란 우치무라에게서 배운 애국을 조선에 옮겨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성서조선> 편집 책임을 혼자 감당하겠다고 나선 김교신으로서는 자기 정립을 위해 우치무라와 정면으로 대면해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조선혼’에 의미를 채우는 과정이 필요했다. 김교신이 「우치무라 간조론에 답하야」(<성서조선> 19-20호)에서 자신을 우치무라의 제자로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데서 그가 이 무렵 바야흐로 이 과정을 통과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