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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의 5공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심상치 않았다. 국민들은 당시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게다가 2월의 박종철고문치사사건과 이른바 4.13 호헌조치는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학생시위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시민단체들은 학생들과 연합해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6월10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로 했다. 당시 연세대 2학년생이던 이군은 이 대회의 일환으로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교문앞에서 벌이진 시위에 참가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군 사건은 도시 중산층과 샐러리맨들을 학생시위에 가세토록 하는데 결정적인 촉매제가 됐다. 그때까지 학생시위대를 ‘비난하지 않는 정도’의 소극적 호응으로 대하던 중산층이 적극적으로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정권은 결국 6.29선언이란 항복문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조선
[1981년] 프랑스 의회, 산업국유화 계획 등 포함 미테랑 대통령의 사회개혁안 승인
미테랑은 1971년 사회당 제1서기로 선출되었으며 1974년 대통령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1981년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는 현직 대통령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을 물리쳤다. 미테랑은 재임기간 동안 금융과 주요 산업체에 대한 국유화를 단행했으며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사회보장의 혜택을 확대했다. 외교에 있어서는 소련에 상대적으로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는 반면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힘썼다. 미테랑의 사회주의 경제정책은 인플레이션의 심화와 기타 문제들을 야기했던 까닭에 1983년부터는 정부 지출을 삭감하기 시작했고, 첫 임기가 끝날 무렵 프랑스 사회당은 사실상 자유시장경제체제로 돌아섰다. 1986년 총선 결과 우익이 다수 의석을 점유하자 미테랑은 자크 시라크를 총리로 영입하게 되었다. 역사상 유례가 드문 권력분담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미테랑은 대통령으로서 외교를 담당했다. 미테랑은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 여유 있는 표차로 시라크를 압도하고 당내 온건파인 미셸 로카르를 총리로 기용해 집권 제2기를 맞게 되었다.
[1971년] 키신저 극비 중국 방문
← 헨리 키신저
1949년 이후 20여년에 걸친 미·중 간 적대관계가 해빙무드로 돌아선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북베트남과 휴전교섭을 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베트남으로부터 명예롭게 퇴진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필요했고, 중국 역시 1969년 3월 진보도에서 소련과 무력충돌을 벌인 후 미국이라는 카드를 갖고 싶어했다.
1971년 4월, 미국 탁구대표의 중국 방문은 화해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첫 시도였다. 그리고 3개월 뒤 닉슨 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아시아 순방길에 올랐다. 키신저는 7월 3일에 남베트남을 방문한 뒤 8일에는 인도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갑자기 심한 복통이 있어 영빈관에서 쉬겠다며 모습을 감추고 일주일이 지난 7월 15일 오후 10시30분, 닉슨은 라디오·TV를 통해 중대발표를 했다. “중국이 나를 초대했고 나도 세계 평화를 위해 베이징을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다. 전후 사정을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복통을 핑계로 잠행한 키신저가 7월 9일 몰래 베이징을 방문, 저우언라이와 닉슨 방중을 타진한 성과물이었다.
[1966년] 한미행정협정(SOFA) 조인
← 1966년 7월 9일 서울 중앙청(舊 중앙박물관) 메인홀에서 한미 행정협정(SOFA)이 조인됐다.
한국 이동원 외무장관과 미국 러스크 국무장관이 1966년 7월 9일 서울에서 한미행정협정(SOFA)에 조인했다. 이 협정은 이듬해 1967년 2월 9일에 발효됐다. SOFA는 ‘Status of forces Agreement’를 줄인 말이다. 정식명칭은 ‘대한민국과 미국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이다.
한미행정협정은 1948년 정부수립후 주한미군의 법적인 지위문제를 규정한 협정인 ‘군사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러나 이 협정은 우리의 권리 일체를 사실상 포기했다는 비난 여론으로 1949년 미군 철수와 함께 자동 종료됐다. 6.25 발발로 미군이 다시 주둔하게 되자 미국의 요구로 전시라는 급박한 상황을 반영, 미군에게 일체의 재판권을 부여하는 이른바 ‘대전협정’이 1950년 7월 12일 대전에서 체결됐다. 정식명칭은 ‘재한 미국군대의 관할권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국간의 협정’이다. 1950~60년대에 주한미군에 의한 한국인 살인·상해·폭행·강간 등의 만행이 잇따르고 반미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1962년부터 한미행정협정 실무회담이 시작되었다. 이날 체결된 한미행정협정은 이 대전협정을 대체한 것이다. 한미행정협정은 전문과 31조로 된 본문 그리고 합의의사록, 합의양해사항, 교환서한 등 3개 부속문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형사재판권이었다.
이 형사재판권을 둘러싸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주권침해라는 여론이 높자 우리 정부측의 문제제기로 1988년 12월부터 한미양국이 개정작업에 들어가 1991년 1월 형사재판권과 관련, 재판권 자동포기조항을 삭제하는 등 8개 조항을 개정했다./조선
[1965년] 남정현, 소설 ‘분지’로 구속
← 1967년 6월28일 소설 ‘분지’의 작가 남정현씨가 서울 형사지방법원 선고공판에서 반공법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있다.
1965년 7월9일, 중앙정보부가 소설가 남정현(南廷賢)씨를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단편소설 ‘분지(糞地)’가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현대문학 1965년 3월호에 처음 실렸을 때만해도 특별히 주목받지 않았던 소설이 갑자기 문제가 된 것은 북한의 ‘통일전선’ 5월8일자에 실리면서였다.
그리고 5월 어느날 남정현은 정보기관에 끌려가 상상할 수 없는 심문을 당한 끝에 7월7일 구속된다.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북한은 남정현이 구속된 다음날 ‘조국통일’ 7월8일자에 또 ‘분지’를 실어 부아를 돋우었다.
문인들과 언론기관이 다투어 ‘분지’의 무죄를 강조하는 과정에서도 곤욕을 치른 사람이 있었다. 조선일보 7월13일자에 남씨의 구속을 항의하는 글을 쓴 백낙청과 원고를 청탁한 당시 조선일보 문화부장 남재희가 정보부에 끌려간 것이다.
남정현은 7월24일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나긴 했으나 이듬해 7월23일 불구속기소돼 결국 반공법으로 법정에 선 첫 작가가 됐다. ‘분지’는 1967년 6월28일 1심 판결에서 선고유예판결을 받았다. 남정현의 이름이 ‘현대문학’에 다시 등장하는 데는 33년의 세월이 흘렀다. 현대문학이 1998년 10월호에 다시 ‘분지’를 실었기 때문이다./조선
[1956년] 미국의 영화배우, 제작자, 감독 톰 행크스(Hanks, Tom, 1956~ ) 출생
아카데미를 2년 연속으로 수상한 몇 안되는 배우. 95년 [포레스트 검프]로 남우주연상을 타면서 얻게 된 그의 또 다른 명칭이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에서 뽑은 '2천만 달러 값어치를 하는 유일한 배우'로 선정된 그는 80년 슬래셔 스릴러 [히 노즈 유아 어론]으로 영화 데뷔를 하였다.
[총각파티], [스플래쉬]등의 영화에 출연, 코미디 배우로서 활동을 하던 그는 1988년 페니 마샬의 영화 [빅]에서 드디어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노미네이션에 오른 그는 92년, [그들만의 리그]에서 여자 야구팀 매니저 역할을 맡아 맛깔나는 연기를 잘 소화해 내 이 영화의 미국내 흥행 주역으로 떠오르며 93년에는 로맨틱 코미디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에서 맥 라이언과 연기를 하여 연이은 흥행 대성공을 이루었다. 그리고 바로 180도 연기 변신을 하여 같은 해인 93년 에이즈에 걸린 변호사 연기를 한 [필라델피아]로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수상하게 된것이다. 90년대 '톰 행크스의 세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사이 TV프로에서 틈틈이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보이던 그는 94년 로버트 저멕키스 감독과 만나 [포레스트 검프]에서 연기를 하였고 두번째 오스카를 수상하게 되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아폴로 13], [라이언 일병 구하기], [그린 마일]등의 작품성 있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각각의 진중한 연기변신, [토이 스토리] 시리즈에서의 감칠맛나는 목소리 연기, 그리고 [유브 갓 메일]에서의 로맨틱 연기, 그리고 [댓 씽 유두]로 감독 데뷔까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2001년 오늘까지 왔다.
[캐스트 어웨이]로 2001년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며 활기찬 2001년을 맞이한 톰 행크스. 21세기에도 그의 화려한 행보는 계속될 것이다.
[1955년] 러셀, 아인슈타인 등 세계의 저명한 지식인 11명 퍼그워시 성명 발표
← 과학자들이 1955년 7월 9일 런던 캑스턴 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1955년 7월 9일 철학자 러셀과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등 세계의 저명한 지식인 11명이 캐나다의 작은 어촌 퍼그워시에 모여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핵무기 폐기 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차대전 이후 반핵 평화운동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이른바 '퍼그워시 성명'은 이렇게 발표됐다. 문건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캐나다 6개 나라의 국가 정부 수반에게 보내졌다.
1957년 7월 7일 이 성명에 동조하는 10개국 22명의 핵물리학자들이 퍼그워시에 다시 모여 '핵무기없는 세계, 전쟁없는 세계'를 주창하는 첫 회의를 열었다. '퍼그워시 회의'의 출발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과학과 국제문제에 관한 퍼그워시 회의'이다. 창립 회의에서는 방사능의 분석을 토대로 핵실험의 중지를 요청했다. 그뒤 매년 한두 차례 여러나라를 순회하며 열리고 있는 이 회의는 어디서 열리든 모두 '퍼그워시 회의'라 부른다. 창립되던 해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로 촉발된 미소경쟁의 와중에 양측 과학자들의 비공식 대화를 주선한 것을 시발로 핵확산 금지조약(NPT) 제안(1958년), 쿠바위기 중재(1961년), 핵실험 금지조약 체결(1963년), 화학무기 협상(1969년) 등 이들의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1975년의 제25차 회의에서는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유카와 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1990년대 북한 핵위기 때 북한과 미국간의 대화를 중재하고 제네바 합의와 경수로 제공의 길을 터놓은 것도 퍼그워시 회의였다.
퍼그워시 회의는 1995년 창립 멤버인 롯 블라트와 노벨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하며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회의는 창립 당시부터 고수하고 있는 몇가지 원칙 즉 회원제를 배격하고 오직 초청에 의해서만 회의 참석자들을 선정한다든지, 모든 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한다는 고집 등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조선
[1951년] 영국 최초의 상용컴퓨터 ‘마크I’ 출시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는 유니백(UNIVAC)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페란티 마크Ⅰ이 먼저다. 최근에는 레오Ⅰ이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유니백과 페란티 마크Ⅰ, 레오Ⅰ은 모두 1951년 선보였으나 일부 자료에는 유니백이 1950년 발표된 것으로 기록돼 있어 논란의 불씨가 되고 있는 것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페란티 마크Ⅰ은 1951년부터 1957년까지 모두 9대를 팔았는데, 그 중 1∼2대는 정부기관에, 3대는 외국(네덜란드, 이탈리아, 캐나다)에 공급됐다고 한다.
한편 업무용 컴퓨터인 레오는 개발은 T. 레이먼드 톰슨(T. Raymond Thompson)과 존 시몬스(John Simmons)가, 판매는 J.리온스앤컴퍼니가 맡았다.
[1910년] 시인·소설가 김광주(金光洲) 출생
1910. 7. 9 경기 수원 ~ 1973. 12. 17.
정래동과 함께 중국문학을 국내에 알리는 데 힘썼다. 필명은 평(萍). 1933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남양의학대학을 중퇴한 뒤, 1945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한때 백범 김구(金九)를 돕기도 했다. 1947년 잡지 〈문화시보〉·〈예술조선〉을 창간하는 데 관계했고, 경향신문사 문화부장으로 있으면서 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시 〈우후 雨後〉(신생, 1932. 4)를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으나 주로 소설을 썼다. 시는 1936년까지 20여 편을 썼다. 해방 후에 발표한 단편소설은 소설집 〈결혼도박〉(1952)·〈연애 제100장〉(1954)·〈혼혈아〉(1960)에 실려 있다. 대표작인 단편 〈악야 惡夜〉(백민, 1950. 2)는 사회혼란으로 인한 애정윤리의 타락과 그 희생양인 양공주의 이야기이며, 반공소설에 속하는 장편 〈석방인〉(경향신문, 1953. 7~12)은 자유를 찾은 반공포로의 이야기이다. 〈삼국지〉(1954)·〈풍운검〉(1969) 등 중국작품을 번역하기도 했으며, 경향신문에 〈정협지 情俠誌〉(1961. 6~1963. 11)를 연재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1970년 〈아방궁〉(월간문학, 1~6)을 발표한 후, 주로 중국 무협소설을 번역했다. 수필집으로 〈고국의 봄〉(1952), 소설집으로 〈장미의 침실〉(1973)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07년] 헤이그 밀사, 일제 침략 규탄
← 헤이그에 파견된 3명의 특사(왼쪽부터 이준·이상설·이위종)
1907년 7월 9일 국제협회의 회합에서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해 큰 호응을 얻었다. 1905년 일본 제국주의는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의 보호국화를 승인받은 뒤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고종은 헐버트를 미국에 보내고 각국 공사들을 상대로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가 없자,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전(前)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전 의정부참판 이상설, 전 평리원검사 이준 등 3명을 밀사로 파견해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열강의 후원을 얻으려 했다. 헤이그에 도착한 밀사들은 7월 9일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에게 한국의 공식 대표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날 이위종의 연설 후 각국의 신문을 통해 한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각국 대표들에게 외면당해 결국 본회 참석은 좌절되었다. 이준은 7월 14일 유숙한 호텔에서 병사했으며,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완용 내각에 의해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받아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브리태니커
[1887년] 독립운동가 이교재(李敎載) 출생
1887. 7. 9 경남 창원 ~ 1933. 2. 14.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경두(敬斗), 호는 죽헌(竹軒).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북도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진주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했다.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상남북도상주대표로 활동하던 중, 군자금 모집의 임무를 띠고 다시 입국해 활동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출옥 후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려다 신의주에서 붙잡혀 2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뒤 상하이로 망명했다. 다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약하다 김구(金九)의 위임장을 가지고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던 중 또다시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879년] 이탈리아의 작곡가 레스피기(Respighi, Ottorino, 1879~1936.4.18) 출생
볼로냐 출생. 어렸을 때 음악가인 아버지로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우고, 볼로냐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비올라·작곡을 배웠다. 1900년 학교를 나온 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오페라극장의 비올라 연주자로 있었는데, 이때 N.A.림스키코르사코프, M.브루흐를 알게 되어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1902년 베를린으로 옮긴 뒤는 브루흐에게 작곡을 사사하는 한편, 무젤리니(Muge11ini) 5중주단에 들어가 실내악 연주활동을 하였고, 그 동안 작곡을 계속하여 작곡가로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1913년 로마의 산타체칠리아음악원의 작곡교사, 10년 후인 1923년에는 원장에 취임하였으나 1925년 그 직을 물러난 뒤는 오직 작곡에만 주력하는 한편, 피아노 연주자 ·지휘자로서 유럽과 미국 등지를 연주여행하였다. 작품으로는 교향시 《로마의 분수 Fontane di Roma》(1924) 《로마의 소나무 Pini di Roma》(1924) 《로마의 축제 Feste Roma》(1928)의 3부작, 《류트를 위한 고풍적 무곡과 아리아 Antiche dance e arie per liuts》(1917∼1924), 《새 Gliuccelli》(1927) 《그레고리오풍의 협주곡 Concerto gregoriano》(1922) 등이 잘 알려졌으며, 기악분야에서는 이탈리아의 전통과 근대적인 관현악법에 알맞는 이탈리아 악기의 부흥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1858년] 독일 태생 미국의 인류학자 보아스 Franz Boas 출생
1858년 7월 9일 태어남 / 1942년 12월 22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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