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DC(오전)
하루의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반가웠던 것 가운데 하나는 오늘은 짐을 싸서 가방을 들고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뭐 얼마나 여행을 했다고 그러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단 하루라도 보따리를 싸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넉넉한 마음의 여유를 주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인에 따라서 보따리 싸는 훈련을 했었던 것을 생각하니 나그네의 삶이란 고단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출40:36-38절에 이렇게 기록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도착 하던 날에는 밤늦게 호텔에 들어가 일찍 일어나서 짐을 다시 꾸려 차를 타야 했었기 때문에 너무 힘든 기억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비가 그치고 맑은 날씨 속에서 여행을 하게 돼서 참 감사했다. 이 맑은 날씨 속에 워싱턴 시내로 접근하면서 나는 이번 여행에서 내가 경험하게 될 놀라운 감동 가운데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버스는 포토맥강을 건너서 워싱턴으로 향하여 가고 있었고 창으로는 유명한 펜타곤(미국국방성)의 5각형 건물이 보였다. 911테러 때에 건물의 일부가 추락한 비행기에 의해서 파괴되어 복구를 끝냈는데 최근에 복구된 곳의 돌 색깔이 다르고 가이드는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보니 돌 색깔이 주변보다 더 흰 부부분이 분명하게 눈에 띄었다. 아무리 미국이 가진 기술이 좋아서 깜쪽 같이 복구를 한다고 해도 전과 동일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문화재를 소홀히 관리해서 잃어버리고 난 다음 복구를 위해서 힘쓰는 편인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 말고 문화재의 보존을 위해서 더욱 힘써야 하리라 생각했다.
포토맥강은 원주민들의 말로는 ‘사랑’이라고 했다. 인디언들도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은가? Potomac 강은 버지니아주와 웨스트버지니아주 두 곳을 발원지로 해서 워싱턴DC를 거쳐 메릴랜드 주에서 대서양으로 들어가는 총 길이 665km의 강으로서 남북전쟁의 격전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창 저편으로 멀리에 우뚝 선 높은 탑 하나가 보였다. 가이드는 그 탑이 오벨리스크라고 했고, 그 탑 앞으로 둥근 지붕으로 지어진 하얀 건물은 제퍼슨 기념관이라고 했다.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본 따서 지은 것으로서 높이가 168미터인 돌로 지어진 탑으로서 1884년에 완공되었고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으며 주변에는 미국의 50개 주를 상징하는 미국 국기 50개가 게양되어 있다. 우리 일행은 이 오벨리스크에는 올라가보지 못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전망대에 서면 고층빌딩이 없는 워싱턴DC의 전망이 한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국회의사당과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포토맥강과 제퍼슨 기념관이 보인다. 특히 워싱턴의 야경이 아름다워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으로 늘 붐비는 곳이라고 한다. 전망대를 오르는 엘리베이터가 있고 내려올 때는 897개의 계단을 이용할 수도 있다고 한다. 드디어 워싱턴 DC에 들어섰다. 상점이 없는 거리는 좀 삭막해 보였지만 미국의 행정수도답게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홀로코스트(Holocaust) 기념관
버스가 우리를 내려준 곳은 ‘홀로코스트 기념관 맞은 편’이었다. 미국에서는 버스가 잠시 정차해서 관광객들을 내려줄 수 있는 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버스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도록 되어 있다. 반드시 그 버스는 버스가 정차할 수 있는 곳으로 갔다가 가이드가 우리의 관광이 끝났다고 알려주면 우리를 태울 수 있는 지역으로 와야 했다. 복잡한 교통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한 조치였고, 만약 그 조치를 어겼을 경우에는 엄청난 페널티가 주어진다고 했다. 도로를 점거한 채 움직일 줄 모르는 우리나라의 몇몇 버스들을 생각해 보면서 선진국이란 경제력이 아니라 시민의식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본다.
원래 Holocaust란 말은 교유명사가 아니다. 독일 베를린에도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있고 올해 2월에는 헝가리에도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세워졌다. 물론 현재의 이스라엘에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Yad Vashem Holocaust History Museum’이 있다.
홀로코스트란 말은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행위를 총칭하지만, 고유명사로 쓸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한다. 특히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등 유대인 포로수용소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나치스에 의해 학살되었는데, 인간의 폭력성, 잔인성, 배타성,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20세기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리스트’는 나치의 대표적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을 다루고 있다.
결국 전 세계적으로 이런 기념관이 세워진다는 것은 다시는 인류의 역사 가운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6.25 전쟁 가운데도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과 포로로 잡힌 군인들이 죽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도 이런 기념관이 세워져서 앞으로 이 민족을 이끌어갈 젊은이들이 전쟁의 참상과 폭력이 가져오는 비극에 대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 앞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 각지에서 찾아온 학생들(중고등학생들)과 교사들이 그 앞에서 대략적인 설명을 선생님으로부터 듣고 차례를 기다려 홀로코스트 안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가이드가 표를 사는 동안 길게 늘어선 줄의 마지막으로 갔고 줄은 대략 50미터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웅장하게 지어진 이 기념관은 2차 대전에서 희생당한 유대인들의 참상을 고발하고 있는 기념관이었다.
“미국이란 사회가 유대인들의 재력과 정치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것을 지었을까?” 순간적으로 정치적인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미국은 2차 대전의 직접적인 참전국이긴 하지만 미국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고, 또한 유대인의 직접적인 학살을 경험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유대인 학살의 의미가 유럽에서와는 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이런 기념관을 지어서 인권에 대해서 최고의 관심과 가치를 부여하는 나라라는 명성이나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봤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기념관 벽에 새겨진 미국 대통령들의 연설을 읽어보면서 그런 의구심을 지울 수 있었다. 우리가 표를 사는 동안 기다렸던 광장에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Dwight David Eisenhower Plaza. 미국의 34대 대통령으로서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재임했던 사람으로서 1943년에 연합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어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이젠하워 광장 한 편에는 벽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지미 카터 대통령, 도널드 레이건대통령의 글과 함께 대통령이 아닌 2차 대전의 연합군 사령관으로서의 하이젠하워가 1945년 4월15일에 Ohrdruf(오르드루프는 독일의 지명으로서 요한 세바스찬 바하가 머물던 고장이기도 하다.) concentration camp를 방문하여 처형된 유대인들의 시신을 보고 난 후 행한 연설이 글로 함께 새겨져 있었다.
The things I saw beggar description... THe visual Evidence The verbal testimony of stavation, cruelty and beastility were so overpowring...
I made visit deliverately, in order to be in a position to give first-hand evidence of these things If ever, in the future, there develops a tendency to charge these allegations to propaganda. (해석은 각자 알아서^^*)
지미 카터 대통령은 두 번 다시 이런 일에 대해서 인류가 침묵해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연설문을 남겼고, 레이건 대통령은 너무나 확고하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연설문에서 말했다. 한 벽면은 줄을 매단 청소부들이 청소하고 있었고, 다른 벽면은 글이 새겨져 있을 줄 몰랐는데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니 글이 새겨져 있어서 누구의 글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이기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속내를 감추고 있다는 미국에 대한 인상을 씻어내고 미국이 인류에 대해서 갖고 있는 지극히 인류애적인 책임감을 나타내는 기념관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광장의 한 편에는 조엘 샤피로(Joel Shaprio)의 조각상이 놓여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조각의 작품명(LOSS AND REGENERATION, 1993)이 새겨진 동판이 있었는데 작품명 아래에는 1945년에 테레진(Terezin) 게토(Ghetto)에서 발견된 한 유대인 어린아이의 시 한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그 짧은 시 구절은 “나는 살고 싶고, 나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일곱 살짜리 동주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울컥 목이 매었다. 만약에 이런 어린 아이가 이유도 모른 채 두 번 다시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사랑이 가득한 가정을 잃어버리고 낯선 곳에 던져진다면 얼마나 큰 불행일까?
게토란 이태리어에서 유래했는데 역사적으로는 1179년 제3회 라테라노공의회에서 그리스도 교도와 유대교도와의 교류를 금지한 데서 발단하여 12세기 후반 이후 먼저 독일에서 유대교도의 강제 격리가 행해졌다. 이래저래 독일인들의 사고 속에는 유대인들에 대한 역사속에서 오래 쌓여진 차별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홀로코스트 안에서 시청한 비디오에서도 이와 같은 유럽에서의 유대인들의 삶에 대한 상황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는 자료가 있어서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이 더욱 강화된 것은 14세기에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을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페스트의 원인인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유대인 거주지역은 그리스도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하게 하였고,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하였지만 시민권은 부인되었다.
게토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1516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설치된 유대인 거주지역에 처음으로 사용되고 1555년 로마에 게토가 설치된 후 일반화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런 차별주의는 붕괴되었으나, 러시아·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20세기에까지 존속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40년 이후에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 등 그들의 점령지 곳곳에 게토를 설치하고 유대인들을 강제로 수용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바르샤바의 게토는 유명하다. 이 유대인 거주 지역은 보통 벽이 둘러지고 그 바깥 지역으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외출할 때는 특정한 모자 또는 두건을 쓰고 윗저고리에는 황색의 표지를 하였다. 인생은 아름다워란 영화를 보신 분들은 게토의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표를 받는 입구를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 우리는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한 대의 엘리베이터를 보내면서 사람들로 가득한 엘리베이터 사진을 찍으면서 유대인들의 끔찍한 학살의 한 장면이 연상됐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고 우리는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홀로코스트 기념관안으로 들어섰다. 안타깝게도 홀로코스트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 있었다. 누구나 한 두번쯤은 보았을 2차 대전 당시의 유대인들이 겪었던 고난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전시물과 함께 비디오 자료를 동시에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사진 한 장 한 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사람들 가운데는 눈시울이 붉게 물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Opening floor에는 1933-1939년까지의 나치의 공격에 대해서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관에는 나치가 종족에 대한 이상주의 때문에 과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종족별로 두개골의 모양을 구분하는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독일과 독일의 점령지의 유대인들이 분리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사진도 함께 전시 되었다. 그리고 한쪽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였던 노벨평화상(1986) 수상자인 엘리 위젤의 글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결코 그 날을-내가 캠프에 들어가던 그 첫날밤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 날, 나의 삶은 하나의 긴 어두운 밤으로 변해버렸다. (중략) 나는 결코 그 연기를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몸이 침묵하는 파란 하늘 아래로 한줌의 연기가 되어 소용돌이치며 사라져가던 어린아이들의 작은 얼굴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신앙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린 그 화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부모와 두 누나 잃었다.
1956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1959년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고발한 소설 ‘그 날밤’으로 유명해졌으며 인종차별 철폐와 인권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그의 글 가운데 ‘나의 하나님을 죽이고, 나의 영혼을 죽이고, 나의 꿈을 먼지로 만든 그 순간들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과연 그 현장에 있었다면 나의 신앙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우리 교우들에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거든 신뢰하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그런 신앙의 태도가 과연 아우슈비츠 안에서도 견고하게 설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욥기를 묵상하면서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던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욥기 40:6-8절까지 하나님은 욥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그리고 욥은 42:1-6절까지 이렇게 대답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한다. 우리가 다 알 수 있다면 하나님이 아니실테니까 말이다. 우리가 다 확인하고 믿는다면 그것이 우리들의 믿음의 전부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놀라운 선물인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가장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나도 욥과 같이 고백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다음 middle floor는 마지막 붕괴(final solution)라는 부제를 달고 1940년에서 1945년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독일의 영토확장과 곳곳에 세원진 게토의 모습들, 그리고 그안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생활상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독일의 패전과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며 생존한 유대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사진에 찍힌 그들의 죄수복처럼 입혀진 옷의 가슴에는 유대인의 별이 달려 있었는데 그 별이 주고 있는 의미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뭔가 특별하게 저주받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유대인들이 몸을 눕혔을 나무로 만든 침대들을 보았고 유대인들을 싣고 달렸을 기차를 타 보았다. 그 구석 어디에선가 죽음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했다. 동주가 기차안에 있는 것이 무섭다며 얼른 반대편으로 나가버렸다. 그 녀석도 뭔가 느낀 것일까?
전쟁이 막바지로 다다를수록 나치의 잔혹함도 더해갔고 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잔혹했다. 곳곳에 설치된 컴퓨터를 통해서 학생들은 벽면에 걸린 사진들에 대한 해설을 듣고 있었고, 몇 명의 학생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메모를 하고 있었다. 미국내에서 2차대전중에 유대인들이 독일 나치에 대항하는 데모와 미국국회의 경제제제등의 조치들이 소개되었고, 나치의 만행이 자행되기 전에 유럽지역을 벗어나 자유를 찾아 무조건 떠난 사람들의 기사도 소개되었다. 그중에 하나는 네델란드에서 중남미의 쿠바까지 항해하는 배도 있었다.
희생자들의 신발만 잔뜩 모아져 있는 사진, 그리고 아래층부터 위층까지 2차대전 전의 평범했던 유대인들의 가족사진이 전시되어 있어서 학살의 사진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겼었을 극심한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나치가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죽이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밀랍 모형을 보면서 인간이,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다뤄진 현장을 생생하게 보는 듯 했다.
전시관을 다 빠져 나오기 전 한 작은 홀에는 많은 학생들이 비디오를 통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어떻게 애절하게 그들의 자녀를 죽음의 현장으로 보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증언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미 그 비디오 자체가 오래 전에 제작되었을지 모르겠지만 화면속의 어머니는 여전히 자신의 잃어버린 자식을 향한 안타까움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애절한 마음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자 이제 전시관을 다 돌아서 나오나보다 했는데 나의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Hall of Rememberance 였다. 정면 벽에 한 말씀이 기록되어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 단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구약시대 지성소 안에 불을 꺼뜨리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하나님을 영원히 기념하는 엄숙한 의식을 제사장들이 행하였던 것처럼, 꺼지지 않은 불을 사진 찍고 싶었지만 한국인 전체에게 욕을 먹일까봐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뭐라고 그러면 ‘암 재팬’ 그럴껄^^* 왜 이렇게 일본 사람들은 미운거지?
기록된 말씀은 신명기 4:9절 “Only be careful, and watch yourselves closely so that you do not forget the things your eyes have seen or let them slip from your heart as long as you live. Teach them to your children and to their children after them.”(NIV)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이었다.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후손들에게 알게 할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말씀이었다.
그 좌우 편으로도 성경말씀이 한 구절씩 새겨져 있었는데 중앙 좌측으로는 창세기 4:10절 말씀 “The LORD said, "What have you done? Listen! Your brother's blood cries out to me from the ground.”“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으로서 유대인들이 인류의 형제임을 말하고 있고 우측으로는 신명기30:19절의 말씀 “This day I call heaven and earth as witnesses against you that I have set before you life and death, blessings and curses. Now choose life, so that you and your children may live”“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이 기록되어 있어서 이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무엇을 위한 기념관인지를 기억하게 하고 있었다.
Rememberance Hall을 빠져나와 건물 내부로 나오면서 기념관안의 철골구조물이 인상적으로 보였는데 마치 큰 강위에 놓여진 철도를 위한 시설을 연상하게 하였다. 많은 학생들로 붐비는 입구에 앉아 있다가 그래도 보지 못한 부분이 있을까 싶어 지하 1층으로 내려가 보았다. 한 쪽 벽면에 이곳을 다녀간 아이들이 글과 그림을 남긴 것을 타일로 만들어 한 벽면 전체를 장식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결코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희망’,‘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우리는 히틀러와 싸워야 한다.’는 등의 글이 쓰여진 타일을 보면서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찾는 어린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있는 소중한 가치관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올라와서 검은 대리석 벽면 위쪽으로 새겨진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YOU ARE MY WITNESS" 이사야서 43:10절 말씀이었다. "You are my witnesses," declares the LORD, "and my servant whom I have chosen, so that you may know and believe me and understand that I am he. Before me no god was formed, nor will there be one after me.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나는‘너는 나의 증인’이라는 이 말씀을 깊이 간직하며 묵상했다.
이렇게 오전시간이 다 지나갔다. 점심식사를 위해서 이동하면서 우리는 위싱턴DC의 탄생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1776년 당시의 수도는 필라델피아였으나 그후 의회에서 천도(遷都)론이 제기됨에 따라 초대 대통령인 조지워싱턴 시절 영토 남북단의 중간지점인 포토맥 강변이 새 수도로 결정했고, 1790년 국회의 동의를 얻어 미국의 수도로 지정되었다. 워싱턴DC의 면적은 179㎢로서 포토맥강 연안의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에서 토지를 내놓음으로서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처음에 내어 줄때는 이 땅에 늪지와 같은 별로 쓸모없는 땅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워싱턴 DC는 우리나라의 대구와 같은 분지로서 주변의 도시들보다 덥다고 했는데 사실이었다. 상주하는 인구는 약60만명 정도로서 거의 2/3 정도가 흑인이며 정식 명칭은 '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 (District of Columbia)이며, 워싱턴 D.C.로 약칭된다. DC는 연방직할지이며, 어느 주에도 속해 있지 않다. 프랑스인 피에르 샤를 랑팡이란 사람의 설계로 건설된 계획도시라 도시 자체가 하나의 정원과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시가지는 국회의사당과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을 중심으로 넓은 도로들이 방사상으로 뻗어 있으며, 도로들은 바둑판 모양으로 교차되어 있다.
1878년 조지타운이 워싱턴의 일부가 된 이래 새로운 국가의 영구 행정부 소재지로 선정된 컬럼비아 특별구와 공존하고 있다. 메릴랜드주 북쪽에 있는 볼티모어시(市)와 함께 700만명에 가까운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 입법·행정·사법부의 중심이며, 산업활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경제의 중심은 주로 관공서 관련업무고, 교통시설은 지하철이 외곽지역과 연결되어 있어 이웃한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에서 통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DC안에서는 상가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내식당을 이용하거나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거리 곳곳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조깅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가이드는 워싱턴DC라는 도시가 하루 아침에 완성된 것은 아니고 약100년에 걸쳐서 조금씩 형성되어 왔다고 했다. 도시는 단순한 건축물의 집합체가 아니라 시민들의 철학이 담기고 역사적인 전통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천을 어떻게? 좀 골치가 아팠다.
버스는 DC를 약간 벗어나 우리를 점심식사 장소로 안내했다. 워싱턴에는 주인백 목사님의 아버님이 거주하고 계셨다. 주 목사님 아버님(장로님)께서 우리 일행을 위해서 점심식사를 대접하시겠다고 하셨고, 그래서 우리 일행은 한 뷔페음식점에서 장로님 내외분과 섬기시는 교회의 목사님과 인사를 나누며 즐거운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당 안에는 제법 많은 한국인들이 있었고 생일을 축하하는 모임을 위해 어떤 목사님이 간절하게 축복하며 기도하셨고, 다른 테이블에서는 심방을 마치고 교우들과 식사 기도를 하시는 목사님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래저래 이민 생활에서 교회는 이민자들의 삶의 중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