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뉴욕 할렘을 무대로 흑인들의 예술과 문화가 부흥했던 ‘할렘 르네상스’에는 문학을 주축으로 음악, 회화, 무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진 흑인 예술가들이 등장해 인종적 자각으로 무장한 새로운 흑인상을 제시했다.
한편 ‘패싱’은 백인과 유사한 신체적 특징을 지닌 흑인들이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 행세하는 것을 뜻한다. 즉 흑백 인종 간의 경계에서 백인으로 넘어간다는 것인데, 이는 경제 호황에 따라 흑인 중산층이 증가하고 검은 피부, 가난한 흑인이라는 등식이 깨졌음에도 여전히 ‘흰색’이 상징적이고 현실적인 우위를 점했음을 보여 주는 사회적 증후라고 볼 수 있다.
넬라 라슨의 『패싱』은 백인 피부를 지닌 두 흑인 여성 클레어와 아이린을 통해 할렘 르네상스 시기 신여성들의 ‘패싱’에 주목했다. 사회적 차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백인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흰색이 주는 사회적 보호와 이익을 욕망하고 인종 정체성의 경계를 탐색하는 여성 인물들의 주체적인 행보는 근 백 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날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이 소설은 리베카 홀 감독의 영화로 각색되어 2021 선댄스 영화제에서 큰 화제를 모았으며 곧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 흰색을 향한 위험한 욕망, 패싱
“그래, 정말로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라면 난 무슨 일이든 하고 누구든지 상처 입히고 어떤 것도 던져 버릴 수 있어. 정말이야, 난 위험해.”
‘매혹적인’, ‘모서리에 서 있는’, ‘고양이 같은’……. 클레어를 설명하는 단어는 하나같이 위태롭다. 그녀는 가난한 고아라는 절망적인 신분에서 탈출하기 위해 밝은 피부색과 아름다운 외모를 무기로 백인 사업가와 결혼해 상류층에 편입한다. 하지만 ‘검둥이’에 대한 혐오와 무지로 가득 찬 인종차별주의자와의 결혼 생활은 단 한시도 백인 행세를 그만둘 수 없는 감옥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백인 전용 호텔의 루프탑 카페에서 클레어는 십이 년 만에 동창생 아이린을 만난다. 흑인이지만 클레어처럼 밝은 피부색을 가진 아이린은 흑인 남편과 결혼한 뒤 흑인들의 권리 향상에 앞장서 왔다. 하지만 그녀 역시 종종 패싱을 한다. 백인 전용 호텔이나 헤어숍을 이용할 때, 그러니까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는 작고 사소한 이익을 위해서다.
“이렇게 다시 돌아오는 건 위험해. 그랬다가 끝이 안 좋은 경우를 여러 번 봤어.”
이 두 여성의 이야기는 백인 상류층의 삶을 누리던 클레어가 아이린을 통해 할렘 사회를 엿보고 그 아슬아슬한 활기를 그리워하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지고 할렘으로 돌아오겠다는 클레어, 그리고 이를 만류하는 아이린 사이에 운명적 연대뿐 아니라 알 수 없는, 불길한 긴장이 공존한다.
■ 할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 넬라 라슨
1920년대 뉴욕 맨해튼의 빈곤 지역인 할렘에서 흑인들이 주도했던 문예부흥운동을 일컫는 ‘할렘 르네상스’는 신흑인 르네상스(New Negro Renaissance)라고도 불린다. 전후 경제 호황에 따른 소비 만능주의가 사회 분위기를 지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헤밍웨이의 ‘길 잃은 세대’로 대변되는 허무감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팽배하던 시기. 문명에 억눌렸던 원시에 대한 향수, 무의식과 본능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이는 흑인 문화에 대한 폭발적인 예찬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가 넬라 라슨은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두운 피부색으로 인해 일찍 인종 차별에 눈뜨게 된 그는 당대 여성들의 ‘패싱’이라는 첨예한 문제를 다루며 단숨에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혼에 따른 생활고와 출판사와의 갈등으로 후속작을 출간하지 못한 채 서서히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비운을 겪는다. 그러다 1980년대 이르러 흑인 여성 최초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앨리스 워커 등이 앞장서서 넬라 라슨의 작품들을 재발굴했고, 인종과 젠더를 넘나들며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는 그의 작품은 오늘날 문학사 속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 2021년 선댄스 영화제 화제작 「패싱」, 넷플릭스 방영 확정
“다른 무엇보다도 인종 정체성이라는 문제에 천착한 아름다운 이야기.” ―《타임》
배우로도 잘 알려진 리베카 홀 감독의 데뷔작이자 테사 톰프슨, 루스 네가가 주연을 맡은 영화 「패싱」이 2021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이 영화는 넬라 라슨의 원작 소설 『패싱』에서 두 여성 주인공이 백인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 밝은 피부색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것과 달리 고유한 피부색을 자랑하는 두 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파격을 더했다. 외신의 힌트에 따르면, 흑백 영화로 제작하여 1920년대 발표된 원작의 클래식함을 살리되 등장인물의 피부색과 관련된 시각적 편견을 한 번 더 비튼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1,500만 달러에 넷플릭스와 계약하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