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한다, 하지마라! 이것도 죄, 저것도 죄!’라는 것에 지쳐 지금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단다. ‘사랑하라’보다 ‘죄짓지 마라’는 부정적 교훈이, 기쁨과 행복보다 근엄함과 엄격함이 마치 신앙의 본질인 듯 가르친 사람들의 영향을 떨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웠다.
그 말을 들으며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린 하느님의 자비로우심 보다는 죄와 규칙들의 엄격함을 배운 것처럼 느껴졌다.
형식과 제도가 신앙인가?-성탄과 부활 판공, 교적 정리, 교무금, 미사 참례, 영성체 때의 손 모양, 9일 기도 순서, 기도문 외우기 등 전례와 신앙생활의 형식이 복음의 본질 보다 더 강조될 때마다 사람들은 기쁘지 않고 경직되는 것 같다.
신자들 중 형식과 제도를 더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공부와 복음 나누기보다 신부들과의 친교가 더 큰 일이고 자랑거리다. “제가 하는 일이 복음이나 교회의 사회 가르침에 합당한가요?”라는 이야기를 나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9일 기도 하루 빼먹었는데 어쩌지요?”라는 질문을 받기 일쑤다.
제도와 전례의 근엄함과 비장함, 엄격하게 느껴지는 규칙들-사실 엄격한 규칙보다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더 엄격했다-은 내 어릴 적 우울한 분위기와 맞아 청소년기와 신학교 시절, 그리고 신부가 되어서도 언제나 나는 진지하다 못해 과도하게 심각했다.
사랑이신 하느님,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은 머릿속 신학이었을 뿐 마음속엔 자책과 죄책, 자기연민과 우울로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상이 서질 못했다.
그러다 예수마음 배움터 주관 피정을 통해 드디어 하느님을 인격적인 분, 대화할 수 있는 분으로 받아들였고 이전의 경직된 생각에서 조금씩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신학 안에 있던 하느님, 윤리와 죄의식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던 하느님,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신념 안에서만 있던 하느님이 그제야 인격적인 분으로 다가왔다.
기도는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하는 것임을 배웠고 윤리교과서처럼 “용서하게 해 주십시오. 다 저의 잘못입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 자애로 제 원수들을 멸하시고 제 영혼을 괴롭히는 자들을 모두 없애소서”(시편 143)라고 분노와 미움마저도 기도할 수 있는 솔직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었다.
윤리 강령이 신앙인 줄 알았고 내 앞의 한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이라는 신념과 이상을 더 사랑했던 내게 시편기도는 설명하기 어렵고 곤란한 문제였다.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할 결정적 순간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치워주십시오”라는 기도도,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는 기도도 그랬다.
아빠 아버지를 신뢰하며 종알대는 어린아이처럼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도는 걱정 고민 미움 분노까지 모든 마음의 감정을 숨김없이 말씀드리고 감정을 보듬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 힘겹고 아픈 일들이 잇달아 겹칠 때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다. 손해를 끼친 사람이 미워 죽겠고 용서한다고 기도하는데 용서도 안 되고, 하느님이 원망스러운데 원망 섞인 기도는 못하고 이래저래 혼자 속 끓이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사실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원망할 수 있고 떼를 쓰고 푸념하다 결국 승복하고 마는 것인데 그 과정은 다 생략되고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용서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내 안의 억압된 감정은 오히려 일그러져 다른 출구를 찾는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싶으면 원망하십시오”라고 하면 “에이, 어떻게 그래요. 죄잖아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러나 하느님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것이다. 아주 충~분히 원망하고 나서야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며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탕자의 비유 둘째아들처럼 얼마나 바보 같고 죄 많은 사람이었는지 생각하며 가슴 치는 것보다, 끝까지 화해하지 못하고 어둑한 한편에서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는 첫째 아들처럼 엄격함에 스스로를 묶어 놓는 것보다 기쁘게 받아주는 아버지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
주인공은 두 아들을 모두 품어 안는 아버지다. 신부 생활이 오래될수록 더 엄격한 사람보다는 너그럽고 인자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최재철 신부(분당정자청소년수련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