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피디아 설립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다
© Larry Sanger via Wikimedia Commons; edited by Jennifer Ehle
2001년 위키피디아를 시작한 래리 샌저가 지난주에 회의주의에서 기독교로의 여정을 설명하는 긴 에세이를 발표했다. 샌저는 분석 철학을 전공한 열렬한 회의론자였다. 분석 철학은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가 지배하는 분야이다. 그는 35년을 무신론자로 보냈지만, 자신을 신앙에 적대적인 사람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고, 단지 확신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합리적이고 열린 사고방식을 가진 회의주의자를 대상으로 자기 이야기를 썼다.
샌저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다음 몇 가지 사실 때문에 놀랐다.
1. 선의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때, 그건 불신앙의 촉매재가 될 수 있다.
샌저는 어린 시절 루터교 미주리 시노드(Lutheran Church—Missouri Synod) 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녔지만, 10대 중반에 이르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사라졌다. 그가 신앙에서 벗어난 건 다음에 소개하는 어느 목사와의 대화 때문이었다.
10대 후반 어느 시점에 나는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어 회의적인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 목사님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10대 아이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단지 반항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당시 내게는 정말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목사님은 명확하고 확신 있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나를 무시하고 심지어 경멸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 질문에는 아예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고, 마치 나 때문에 자신이 무슨 위협이라도 받는다는 인상마저 풍겼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로 인한 피해는 즉각적이었다. 내가 목회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확인한 적대적인 무관심은 나의 불신을 확증했다.
돌이켜보면, 질문을 많이 하지 말라고 들은 게 내 믿음에 큰 상처를 입혔다.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끔찍한 일이다. 내가 그랬듯,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라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호기심 없고 어려운 질문에 답할 수 없는 독단적인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추론할 테니까 말이다. 결국 믿음은 비이성적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게 내 생각이었다. 내가 얼마나 틀렸는지, 그리고 그 실수를 깨닫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이 이야기를 읽는 목사는 누구라도 예외 없이 기독교에 관한 질문이나 반대에 대해서 충분히 답할 정도의 변증 지식을 갖추겠다는 강한 도전과 함께 열정을 되살려야 한다. 또한 질문하는 사람들을 성가심이나 경멸이 아니라 연민과 목자의 보살핌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도 상기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여러 개의 논증이 합쳐져 힘을 발휘할 때 단지 하나의 논증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감동을 주는 가장 설득력 있는 사례로 샌저가 꼽는 건 설계 논증의 한 버전인 미세 조정 논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 논증을 포함해서 다른 전통적인 논증이 논리적으로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고전적 논증을 공부하고 가르친 경험은 내게 그 주장에 대한 어느 정도의 존경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내게 그런 논증의 논리에 구멍을 뚫는 일, 심지어 최종 결론의 보류를 정당화할 정도로까지 큰 구멍을 뚫는 것도 사소한 일로 보였다. 내가 그런 논증에 대해서 가진 가장 큰 불평은 이것이다. 그것들 중 그 어떤 것도 신의 존재, 특히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부분적으로는 진전을 이루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에게 부분적으로나마 진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으로 인한 부분적인 진전은 샌저가 더 많이 공부할수록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누적된 논증의 힘이 그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력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한 논증을 놓고 내가 가장 많이 숙고한 부분이 이점이다. 다양한 논증들을 합칠 때 애초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개별적으로 보면 논증 하나하나가 약해 보일 수 있다. 언젠가 말했듯, 우연성 논증이 보여주는 건 단지 필연적인 존재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 뿐이다. 인과성 논증의 경우에는 우주가 그 자체 외부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설계 논증은 어떤가? 우주가 어떤 종류의 설계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도덕성 논증은 설계자가 어느 정도까지는 어떤 면에서 자비로워야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인격적인 존재일 필요까지는 없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논증을 합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통합된 사례를 만들면 어떻게 될까? 나는 과거에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생생하게는 말이다.
샌저의 결론이다.
이 모든 논증을 어느 수준으로까지 엄밀하게 전개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자문했다. 그 결과는 최상의 설명을 위한 하나의 논증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논증 각각의 전제를 설명에 필요한 개별 데이터로 간주해 보자. 그 경우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게 과연 최상의 설명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겠다고 나는 인정했다
(이것은 개빈 오틀런드가 그의 왜 하나님은 말이 되는가에서 제시한 접근 방식과 비슷하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누적적 사례를 제시한다. 철학적 추론, 우주의 아름다움, 인간의 깊은 실존적 갈망 등 여러 증거가 모일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단지 그럴듯한 정도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3. 그리스도인의 인격, 특히 온라인에서 접하는 모습은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도 또는 밀어낼 수도 있다.
샌저는 개인적으로 또는 온라인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들의 방식을 언급하며, 그들이 기독교의 믿음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대상임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애로운 태도와 신무신론자들의 사악한 태도를 비교한다. 오히려 회의주의 측면에서는 신무신론자들과 그가 더 공유하는 게 많은데도 말이다. 그가 온라인에서 만난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진지하고도 친절하게 토론에 참여하는 태도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인의 의견을 더 신뢰할 수 있었다.
신무신론을 접할 때면 불쾌감이 극에 달해서 ’아니, 나도 저 사람들이랑 비슷했던 적이 있었나?‘ 자문까지 할 정도였다. 뭐, 나는 거의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리스도인 가정과 친구들에 대한 나의 존경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소셜 미디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항상은 아니지만) 종종 성숙하고 우아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기독교 비판자들은 종종 사악한 괴물처럼 행동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 중 일부도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매우 지적이었다. 이상했다. 점점 더 커지는 반기독교 정서 속의 불쾌감은 오히려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을 옹호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우리는 이 교훈이 주는 다른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온라인에서 불쾌하고 트롤 괴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의 신뢰성을 손상시킨다는 점이다.
4. 성경은 기독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자료이자 변화를 가져오는 좋은 도구이다.
기독교를 향한 샌저의 따뜻함은 심층적인 성경 연구로 불타올랐다. 호기심이 많고 단호한 그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도구, 즉 학습 계획, 해설, 성경 앱, 지도를 활용하여 한때 철학에 적용했던 바로 그 세심한 분석 방식으로 성경에 접근했다.
정말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했을 때, 정말 충격과 당혹감을 느낄 정도로 나는 크게 놀랐다. 성경이 예상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일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찾은 문제들을 이전에 생각한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하나하나 답을 찾아나갔다. 나는 틀렸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내가 찾은 모든 문제를 이전해 다 생각했을 뿐 아니라,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들까지도 계산해 놓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 모든 문제에 대해서 잘 정리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답을 믿지 않았다. 어떤 답은 조작되거나 있을 법하지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어떤 답들은 충격적일 정도로 그럴듯했다. 성경은 나의 치밀한 조사를 거뜬히 견뎌냈다. 정말 그럴 거라고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무려 2천 년이 된 신학 전통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철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다는 데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신학은 성경에 담긴 수많은 사상을 체계화하고, 조화시키고, 설명하고, 어느 정도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다. 합리적인 사람들이 성경 속 모든 풍부함을 이해하려고 할 때 하는 작업이 바로 신학이다. 성경이 실제로 흥미롭고 또 그럴듯한, 신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낸다는 건 내 머릿속에 떠오른 적이 없는 명제였다.
요즘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호기심을 표현한다. 성경 판매가 증가하고, 다양한 철학자와 해설가가 성경에 대한 견해를 표현한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우리는 성경을 당혹스러움의 원천이 아니라 끝없는 보물 창고로 여겨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을 주셨다!
래리 샌저을 위한 기도
래리 샌저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읽고, 쓰고, 생각한다. 지금 그는 다른 교파의 주장을 조사 중이다. 그는 교회 출석뿐 아니라 신자들과의 교제가 중요하다는 점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가 새롭게 찾은 믿음 속에서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그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이야기에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더 잘 다가갈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첫댓글 이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봅니다.
질문에 적절한 답을 해야 한다는 중요성과 온라인에서 보여지는 인격의 중요성,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중요성~^♡^
그의 믿음과 더불어 나의 믿음의 행함을 위해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