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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라이제이션 - 니얼 퍼거슨
1장 경쟁
1415년 영락제 시대
- 두 줄기 강 ; 중국의 명왕조는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속한 중국의 통일왕조였다. 100명의 일꾼, 방방곡곡에서 동원된 자재, 1000채의 건물로 만들어진 자금성은 베이징 중심에 동양문명의 상징이었다. 난징부터 베이징까지 남으로는 항저우까지 이어지는 1,6000km(올림픽 대로; 강일IC~개화IC 총연장 41.8km)의 대운하는 매년 1만 2,000척의 바지선이 운행되었고 우하의 유지보수를 위해 5만 명이 고용(고용안정)되었다. 황실은 운하를 통한 교역의 원활한 유통으로 곡물을 쌀 때 사 쌓아두고 귀할 때 팔며 곡물 가격 안정(민생안정)에 도모할 수 있었다. 1420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는 난징은 50만에서 100만의 인구에 배움의 도시였다(65-68).
반면, 15세기 기준으로 영국 런던은 난징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규모이며 템스강(334km)은 유럽 대륙과 벌이는 모든 무역의 중심지였으나 양쯔강과 비교하면 침체의 늪이었다(69). 하수도 시설이 없어 전염병 도시였고 그칠 줄 모르는 전쟁과 끊임없는 왕위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외 서유럽 왕국보다는 좀 덜한 편이었다(71).
- 환관과 유니콘(외국의 기린 선물을 환상의 동물로 간주) ; 동양의 정교한 쌀 재배 시스템은 생산성이 높았다-동양은 한 가족당 0.4헥타르가 영국은 8헥타르가 필요했다(74).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75) 문화에 초점을 둔 주장대로라면 명나라 시대 전에는 중국도 기술 개혁으로 세상을 지배 지배하려고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여러 증거와 부합하지 않는다(1086년 소송는 세계 최초의 기계식 시계를 만들었다. 활판 인쇄기는 11세기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었다. 1313년 완전이 쓴 「농업에 관한 논문」은 당시 서양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농기구로 가득했다. 용광로가 최초로 세워진 것은 기원전 200년 중국이었다. 직물 생산에 물레나 비단 얼레 같은 도구를 처음 도입한 것도 중국이었다. 화약은 14세기 후반 초옥과 유기의 『화룡경』을 보면 지뢰, 수뢰, 로켓, 포탄 등이 설명되어있다. 그 밖의 화학 살충제, 낚시 릴, 성냥, 자석 나침반, 놀이용 카드, 칫솔, 일륜차, 골프 게임이 있다.)(76-77)
1405년부터 1424년까지 이어지는 정화 장군의 여섯 차례 원정을 살펴보면(78) 명목은 홀연히 자취를 감춘 선대 황제와 그의 옥새를 찾는 것이었으나 그들의 진정한 목표가 상업이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22미터의 배(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 호의 5배)에 도자기, 강철 가마솥, 선물, 무기, 종이, 기름, 밀랍 등을 싣고 출항하여 인도양 상인들에게는 후추, 진주, 보석, 상아, 코뿔소 뿔 등을 가져오고자 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야만인의 나라를 방문하여 ’선물‘을 전달하고 우리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그들을 변모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영락제(명나라 3대 황제)가 원한 것은 이웃 국가들처럼 외국의 통치자들도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그의 위대함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다(78-79). 그림 80쪽.
1424년 영락제가 숨을 거두고 정화의 항해는 즉각 중단된다. 얼마 후 ‘해금’법령으로 완전히 금지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중국이 해외에 관심을 접은 결과는 명확했다. 1416년 중국의 한 환관이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 상륙한 것은 여러 면에서 1969년 미국의 우주비행사가 달에 착륙한 것과 견줄만 한 업적이었다. 이후 이러한 업적이 가져다줄 경제적 혜택이 거의 차단되었다(82-83).
- 향신료 경쟁 ; 몇 세기 동안 향신료 수입경로는 인도양에서 홍해로 가는 항로와 아라비아와 아나톨리아를 통과하는 육로였다. 15세기 중반에 포르투갈은 항로 통제의 반동으로 새 항로 개척이(83) 짭짤한 사업(경쟁)을 차지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서양 우위를 본격적으로 가속한 것은 바로 항해 시대를 초발한 치열한 경쟁(사업)이었다. 15세기 그들의 목표는 경쟁자보다 경제적‧정치적으로 앞서가는 것이었다. 조공이 아닌 무역이었다(84). 포르투갈은 항해에서 무차별 포격으로 배를 탈취하고 선원들을 본보기로 잔인하게 살해했다. 저항하는 세력과 맞닥뜨릴 것이 뻔하기에 본보기로 선수 치는 것이 중요했다(85). 마찬가지였던 스페인은 멕시코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은을 중국에 수출할 수 있었다(87).
왜 유럽인들이 중국인들보다 더 강한 상업적 열의를 보였는가? 단순한 답은 지리적 조건이다(88). 유럽은 국가 간 충돌로 유럽 전역을 황폐시켰다. 그러나 전투는 의도하지 않게 군사기술 혁신이 선박 기술혁신으로 이어졌고(89) 전쟁 비용 충당을 위해 징세 방식이 점점 발달했으며(90) 마지막으로 유럽 왕실들은 다른 국가와 경쟁하는 방법의 하나로 무역과 상업, 정복과 식민지 건설(예를 들면 항해시 달과 조수, 천체의 움직임을 보여줬던 기계식 시계의 빠른 보급과 발전은 여러 계층에 걸친 국가 간, 국가 내, 도시 내 경쟁(성당 탑시계)의 공이 컸다(94))을 장려했다(91). 역설적으로 유럽인 스스로가 분열함으로써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다(92).
유럽은 국가 개념보다는 영지, 귀족, 성직자, 도시거주민들로 이루어졌다. 런던시 자치체가 설립‧조직된 때는 12세기다. 시장, 주 장관, 행정 장관, 시의회, 동업 조합원, 자유 시민 등의 역사가 800년이 넘는다. 이 자치체는 최초의 자치적인 상업 조직 중 하나로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 법인의 모태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민주주의의 선조격이기도 하다. 대출과 선물(물건을 사고팔겠다는 계약을 미리 하는 것이고 일정한 시점에 미리 정한 가격으로 매매할 것을 현재 시점에서 약정'하는 거래이다)은 도시가 자치권(왕실이나 다른 권력기관의 간섭없이 법적‧재정적 문제를 관리할 권리)을 획득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도시가 부유해질수록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자본력이 정치력을 행사하게 되었다(92-94). 반면 힘들고 엄격한 시험을 거쳐 선발된 중국의 관료들은 수직적 통치체제에서(97). 사회의 변화를 위한 욕구나 혁신을 장려하는 분위기의 경쟁이 될 수 없었다(98). 물시계를 왕과 천문학자들만 독점했듯이(95)
- 2류 왕국 ; 중국 명나라는 1368년 건국되었다. 하지만 17세기 중반 은의 구매력이 떨어지면서 세수의 가치가 줄고 가뭄과 전염병으로 내부의 반락과 외부의 침입을 불러왔다. 1644년 베이징도 반란군 지도자 이자성의 손에 넘어갔다. 1580년부터 1650년까지 싸움과 전염병은 중국 인구 40퍼센트 가까이 줄여놓았다. 혁신이 정체된 사회(생산성 저하 야기)는 100쪽의 <1000~2008년 영국 대 중국 1인당 GDP 비율>을 보듯이 1인당 국민소득은 정체되었고 총자본금은 실제로 줄어들었다. 내부 문제에만 집중하다가 국제 무역과 이민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고스란히 놓치고 말았다. 쌀 재배 강화정책만은 인구수는 늘었지만, 소득은 줄었고 영양 상태 저하와 생산성 저하의 결과를 낳았다. 흉작과 경작 활동의 문제시 바로 대재앙으로 이어졌다(98-101).
영국은 대서양 횡단 무역으로 영양이 풍부한 청어, 감자, 설탕 등의 농산물이 전래 되었고 식민지 개척으로 본국의 과잉 인구가 빠져나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산성, 소득, 영양 상태 개선으로 이어졌다(100).
1793년 제1대 매카트니 백작이 문호개방을 목적으로 건륭제(청나라의 제6대 황제, 재위 1735년 ~ 1796년)를 찾아갔다. 실패로 돌아간 매카트니의 시도는 1500년 이후 일어난 동양에서 서양으로의 힘의 이동을 완벽히 보여주는 상징이다. 중국은 이제 2류 왕국이 되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룩한 혁신에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했다(102-103). 중국의 폐쇄정책은 발전을 저해했고 경쟁은 서구 유럽에 역동적인 효과를 가져왔다(104-105).
2장 과학
아바스 왕조 시대
공성전 ; 동양과 서양의 충돌은 7세기 아라비아 사막에 이슬람교 탄생 이후 끊임없이 반복되었다(109).
아바스 왕조(750년부터 1517년까지 존재한 이슬람 제국. '아바스 칼리파조', 혹은 '압바스 왕조'라고도 부른다)는 과학의 전성기였다. 최초의 대수학(‘이항하다‘) 교과서 『인도숫자를 이용한 계산』, 『광학서』 일곱 권은 사물을 볼 수 있는 광학 원리를 처음으로 서술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슬람 세계는 과학 분야에서 서양 세력에 밀리게 되었을까? 그리고 과학혁명은 서양이 학문뿐 아니라 군사적으로 세계를 제패하는데 정확히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111)
1683년 오스만제국의 두 번째 빈 공성전 실패는 단순히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관계 전환이 아니고 서구 세력이 부상하는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했다(118). 17세기 후반은 자연철학(뉴턴 『프린키피아』)과 정치이론(존 로크『정부론』)의 변화로 정부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오스만제국(신이 내린 율법의 불가분성과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한 권력구조의 통일성 강조)의 쇠락을 단순히 서양 군사력 성장의 결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서양 군사력의 기반은 전쟁과 정부의 합리성에 과학을 적용한 결과였다. 18세기 동양과 비교해 서양의 강점은 화력 문제이기도 했지만 지력의 문제이기도 했다(119).
유럽의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는 교회와 국가가 반드시 분리(정교분리-세속과 영적 구분)되어야 한다는 기독교의 기본교리에 따라 로마 교황이 정치적 요구에 저항할 수 있었다(122). 전환점은 종교개혁과 1517년 이후 잇따른 기독교의 분열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인쇄기 발명이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중국의 것보다 더 편리했고 경제적이었다. 1500년에는 이미 독일에만 200군데 이상의 인쇄소가 있었고 1518년 발행 인쇄물은 총 150종, 1519년에는 260종, 1520년에는 570종, 1524년에는 990종으로 늘어났다(123).
카돌릭 교회를 향한 루터의 「’죄를 속죄하는 한 형태로서‘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조 반박문」의 복사본이 나돌기까지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루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인쇄기 덕분이었다(124).
인쇄 분야에서도 상업적 경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쇄기는 가르침을 퍼뜨렸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도 라틴어가 아닌 토착어로 쓴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이외에도 고대 철학자들의 작품이 현대식 번역으로 출판되었다. 1500년경에는 1,000여 권 이상의 과학, 수학 연구 인쇄물이 등장했다. 상인들에게 유용한 산술과 회계 기술을 퍼뜨리는데 이탈리아의 인쇄업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126). 반대로 파괴적이었던 것은 1487년과 1669년 사이에 『마녀의 망치』의 등장으로 일어난 마녀사냥 광기도 있다(127).
1665년 로버트 훅은 과학적 실증주의의 기념비라 할 수 있는 『미크로크라피아』를 출판했다(127). 망원경이 발명되면서 우주의 형이상학적 본질은 곧 사라지고, 확고한 역사, 실험, 연구가 그 자리를 대신해 갔다. 훅이 발명한 현미경은 과학을 완전히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았다. 마법과는 거리가 먼 세상을 위한 선언, 과학혁명이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에서 시작된 체계적인 실험과 수학적 관계 확인이 핵심이 되어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각각 미적분학과 미분학을 도입하면서 수학의 가능성이 확대되었다. 마지막으로 과학혁명은 직관과 이성에 관한 전통 이론을 뒤집은 르네 데카르트와 바루흐 스피노자처럼 철학의(129) 혁명으로 이어졌다.
패러다임, 즉 사유의 틀이 바뀔 때 으레 지적 반발이 있으나 과학혁명은 혁신적 지적 혁명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133). 과학혁명이 ’유럽 중심주의‘ 일 수밖에 없는 것은 전체 업적의 약 80퍼센트가 글래스코, 코펜하겐, 크라쿠프, 나폴리, 마르세요, 플리머스로 둘러싸인 육각형 안에서 발생했다.
같은 기간 오스만제국의 과학적 진보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슬람권에서는 성직자의 영향력으로 책은 불태워졌고 자유사상가들은 박해를 받았다(134). 점차 배타적이며 신학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이슬람교 최고 성직자 카디자드는 하늘의 비밀을 엿본 알딘(1521년 시리아에서 태어나 다마스쿠스와 카이로에서 수학한 알딘은 과학자로서 재능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천문학, 수학, 광학에 관하여 많은 논문을 남겼다(135))의 행실을 사마르칸트 천문학자 울루그 베그(비슷한 행실로 참수당함)의 행성 도표만큼 불경하다고 술탄에게 탄원했다. 이런 식으로 이슬람의 과학적 진보의 불씨를 꺼뜨렸다(136).
프랑스왕립과학원, 영국왕립학회 등은 과학 공통체로서 왕실의 전폭적인 후원뿐만 아니라 과학은 국가의 이익이 걸린 문제였으며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경쟁을 통하여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곳의 분위기 때문에 훅의 연구 기반 위에 중력의 법칙이 탄생할 수 있었다. 새로운 발견을 했을 경우 반드시 학계에 발표해야만 하는 의무 때문에 과학적 지식은 실험을 통한 수정과 끊기는 관찰과 기술적 진보는 점차 누적‧발전했다(137-138).
- 오스만 대 프로이센 ; 빈 공성전이 끝나고 70년 뒤,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로이센 왕국을 ’군대의 효율성과 행정의 합리성‘의 대명사로 탈바꿈할 개혁을 단행하는 동안 술탄 오스만 3세는 이스탄불에서 타락한 오스만제국을 나태하게 다스리고 있었다. 지출이 세수를 넘어서고 통화가치의 하락으로 인플레이션에(139). 관료의 선출과 승진은 뇌물과 편파주의에 휘둘렸다. 심각한 문제는(140) 술탄의 자질이었다. 이스탄불의 술탄은 수많은 아들 중 한 명만 술탄 자리를 물려받고 나머지 형제들은 반드시 죽임을 당했다. 그러다가 1607년 장자 상속법이 생기면서 죽지 않는 대신 할렘(’금지된 장소‘)에서만 살아야 했다. 57세에 술탄에 오른 오스만 3세는 51년 동안 죄수나 다름없이 갇혀 지냈다. 지식은 거의 없는 백지상태로 왕국을 다스렸다(141). 발칸반도 북쪽 왕실의 삶은 완전히 달랐다(142). 냉혹한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유형의 권력이었다(146).
자유와 외국인들로 활기를 띤 프로이센은 독서회, 토론 집단, 서점, 신문, 과학 사회 건설 같은 단어로 대표되는 문화 부흥기를 경험했다. 그 시기는 바야흐로 출판의 시대였다(147). 계몽주의는 과학혁명의 확대와 관련이 깊다. 첫째, 철학이 범주가 과학의 범주보다 더 넓었다. 눈에 띄게 주는 문맹, 개신교 학교와 가톨릭 학교 사이의 경쟁, 높은 도시화 비율, 운송 시스템의 향상 등이 결합하여 유럽인들은 더 잘 읽고 쓰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 18세기에 급격히 증가한 프리메이슨 지부 같은 문화 공동체와 당시 사회에 복잡한 그물망을 형성했던 사교 집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예약제 콘서트(1784년 빈에서 열린 모짜르트 연주회가 대표적), 공공극장, 전시회 등으로 형성된 공론의 장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148). 둘째,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주요 관심사는 ’인간학‘이라고 불렀던 사회과학이었다(149). 이 시대 최고의 성취는 시민사회(『도덕감정론』)와 시장경제(『국부론』)의 서로 맞물린 제도들을 분석한 스미스의 연구일 것이다(150). 아이러니는 계몽주의가 그 자체로 매우 귀족적 속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신분이 비천한 철학자들은 모두 왕족이나 귀족의 후원에 기대고 있었다(151).
프리드리히는 대중의 하인을 자처한 군주로서 군주의 역할을 집요하게 탐구한 『반마키아벨리론』은 대단히 혁신적인 논문이었다(152). 프로이센의 계몽주의는 국력 향상이 주된 목적으로 사고의 자유이지 행동의 자유는 아니었다(154). 학술연구로 얻은 지식은 자연의 신비를 벗겨 전략상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리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프로이센은 군대를 거느린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거느린 군대라고 할 수 있다”에서 알 수 있듯이 군대는 왕권의 수단이 아니라 프로이센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였다. 지주들은 군대 지휘관으로 활동하였고 건강한 소작농들은(155) 사병으로 용병을 대신했다. 군대가 곧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 군대의 성공 비결은 집중적인 군사 훈련과 엄격한 규율이었다(156).
1757년 12월 유럽의 세 열강(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연합)일으킨 로이텐 전투에서 프리드리히가 고안하고 선보인 기마 포병대는 유럽 표준이 됐고 군대의 빠르고 집약적인 배치는 훗날 나폴레옹이 차용, 승리의 열쇠가 되었다. 이것이 서양과 나머지 세력의 격차를 짧은 시간 안에 크게 벌여 놓은 경쟁, 혁신, 진보의 과정이었다(157). 예를 들면 1740년대 초 로빈스는 미분방정식을 이용해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발사체의 탄도에 영향을 미치는 공기저항을 최초로 정확히 설명하여 뉴턴 물리학을 대포에 적용했다. 또한 영국왕립학회에 발표된 논문 「선조를 새긴 총신의 특성과 이득」에서 총알을 달걀형으로 제작하고 총신에 선조를 새겨야 권고했다. 그것을 발전시켜 구조를 완성하고, 군대에 도입...(158). 포술 아카데미 등등.
- 탄지마트(개편), 이스탄불에서 예루살렘까지 ; 메시지는 분명하다. 오스만제국도 과학혁명과 계몽운동 둘 다 수용해야 했다(162). 그러나 과거 유럽을 둘러본 오스만의 만성적인 우월감, 정치적 반대가 장해물이었다(163). 결국 내부 반란에도 오스만 군대가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자 개혁 단행을 시작했다(164). 술탄은 신식 군대, 신식군복, 새로운 국가, 어마어마한 규모의 궁전을 지었지만, 효과적인 조세제도가 없어서 런던에서 빌려야 했고(166) 이자 부담으로 무너져가는 제국의 방어에 쓸 돈이 줄었다. 서양 기술을 단순히 도입만으로 현대화할 수 없었다. 오스만제국은 새로운 헌법, 새로운 문자 체계 등, 사실상의 새로운 국가가 필요했다(167).
케말 아타튀르크_위키피아, (터키 국회는 1934년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 경칭을 수여하였고 공공건물이나 거리의 이름을 이 명칭으로 바꿨다) ; 1차 세계대전 후 터키 공화국 수립,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1922년 8월 30일을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8] 1923년 케말은 자신을 지지하는 청년 장교들과 함께 앙카라를 장악, 오스만제국을 무혈혁명으로 멸망시켰다. 1922년 11월에는 술탄제를 폐지하고, 메흐메트 6세를 폐위했다. 1923년 7월 연합국과 새로운 조약(로잔 조약)을 체결하였다. 10월에는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천도하고 공화제를 선포하였으며, 대통령에 취임했다 1923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뒤 본격적으로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1924년에는 632년 이래 1300년 동안 이어져 오던 칼리프제를 폐지하였고, 터키 공화국의 기본 정신인 세속주의를 법으로 제정했다. 1925년에는 복장 개혁을 시행하여 여성들의 복장을 해방시키고, 과거에 금지되었던 여성의 교육권을 보장해 남녀평등교육을 시행하였으며, 이슬람력을 폐지하여 유럽식 그레고리력으로 대체했다. 1926년에는 민법을 개정해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일부일처제를 확립하였으며, 1928년에 튀르키예어의 아랍 문자 표기법을 폐기하고 로마자 표기법으로 변경하였다. 1930년에는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터키를 모든 종교적 권위로부터 상당히 독립된 비종교 국가로 탈바꿈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터키의 과학혁명과 계몽주의에 찬물을 끼얹는다. 당시 영국은 술탄에 반대하는 내부의 적들을 동원하고자 했다. 아랍인들에게는 독립왕국을 약속하고 유대인들에게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을 위한 새로운 국가‘를 약속했다. 양립할 수 없는 약속이다(171).
1948년 세워진 이스라엘이 서양의 전초기지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과학과 기술혁신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 2008년 이스라엘의 발명특허는 9,591건, 이란은 50건, 이슬람권 총합은 5,657건. 오늘날 과학과 안보의 상관관계를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함을 알고 있다. 빈 공성전 이후 3세기, 비서양 국가들이 앞으로도 계속 과학 이외의 핵심적인 성공 공식, 즉 사유재산권, 법치주의, 대의제를 거부하면서도 성장이라는 혜택을 얻을 수 있을까?(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