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한명희
무가당無加糖한 사람 외
요즘 당류 무첨가라는 제품을
한참씩 들여다본다
빵, 요플레, 소스, 음료 등
지나치게 친절한 단맛이 사라지자
비로소 곡물의 결이나
천천히 발효된 시간의 냄새 같은 것이 살아났다
입안은 처음엔 허전했으나
자꾸 먹다 보니, 사람의 혀는
너무 많은 위로에 길들여져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너는 그런 친구였다
과장된 다정함으로 상대를 달래지 않았고
불행을 설탕처럼 녹여 건네지도 않았다
대신 오래 씹히는 말
한 번 삼키고 나면
늦게 체온으로 번지는 말들을 건네주곤 했다
함께 걷는 동안에도
우리는 서로를 지나치게 포장하지 않았고
침묵은 침묵대로 쓸쓸함은 쓸쓸함대로
억지로 맛을 바꾸지 않은 채 곁에 두었다
그래서였을까
너와 마주 앉아 있으면
나는 본래의 농도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달콤해야 살아남는다고 말하지만
지나친 당분은
오히려 마음의 감각을 무디게 한다는 걸
늦게서야 알았다
한 사람을 오래 좋아한다는 것은
화려한 첨가물보다
쉽게 질리지 않는 미세한 결을 알아보는 일인지도 몰라
너는 지금도 무가당 제품처럼
처음엔 조금 심심하고
나중엔 자꾸 생각나는 사람으로
내 곁에 남아 있다
-----------------------------------
마법의 성
-비룡담 저수지의 루미나리에를 바라보며
비룡담飛龍潭 가장자리에는
밤마다 물의 문을 여는 성이 있다
낮에는 숲 그림자 속에 숨었다가
노을이 호수에 천천히 불을 켜면
은빛 첨탑 하나둘 물속에서 먼저 깨어나는 성
아이들이 오래전부터 이름 붙인 이곳은
길 잃은 새들 쉬어 가는 곳
무거운 구름 잠시 내려와 울음 씻고 가는 곳
성으로 가는 길은 꿈의 가장자리 같았다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다가
마음을 가볍게 비워낸 사람에게 모습을 내주었다
어떤 밤은
물고기들이 별빛을 물고 헤엄쳤고
어떤 밤은
나무들이 잎새 부딪는 숨결로 서로를 위로했다
창문마다 작은 불빛 흔들리면
비룡담은 거대한 거울이 되어
세상에서 사라진 꿈들 하나씩 되비춘다
데크 길 끝에 오래 서 있었다
혹시라도 어릴 적 잃어버린 마음 하나
저 성 발코니 어디쯤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봐
멀리서 음악 같은 안개가 흩뿌리고
푸른 산맥 너머 가장 늦은 별 하나 떠오를 때
루미나리에 흰 첨탑 위로
잠들지 못한 동화들이
새 떼처럼 천천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
한명희|2022년 《시와사람》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참, 미안한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