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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트루스
(Post-truth)
· 이 글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2019년 7월 11일(목요일) 오후 7시 30분부터 9시 반까지 웹진 <좋은나무> 1주년 기념강연회에서 강영안 교수님(미국 칼빈신학교)께서 하신 강연과 질의 응답의 녹취록을 토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좋은나무> 발간 일 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에 대하여 축하를 드립니다. 우리 사회가 의견이 양쪽으로 너무 많이 나눠지고 있고 교회 안에서도 편이 심하게 갈라지고 있는 오늘의 양극화 상황에서 <좋은나무>가 말씀에 좀 더 가까운 생각을 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오후 4시에 기자 간담회를 할 때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한국 사회에서 그냥 단순히 기독교 신앙을 퍼트리고 신앙인으로 그렇게 살아갈 뿐 아니라 공동선을 추구하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좋은 나무>가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공동선을 추구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의식입니다. 공동체를 형성하는 의식은 영어로 말하면 common sense, 곧 ‘상식’입니다. 누구나 ‘공통으로 가진 의식’입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공통으로 누구나 가진 의식’을 the sense of community 라고 이야기 합니다. ‘공동체 의식’, ‘공동체 지각 능력’이란 의미이지요. <좋은 나무>가 바로 이러한 ‘공동체 의식’ 또는 ‘상식’을 퍼뜨려서 우리 사회에 몸담고 있는 분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의 삶의 질서를 세우고 공동의 행복과 복지를 지향하는 공동선을 이루는 데 기여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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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 선생님과 관련된 일화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은 공자 선생님이 아니라 공(孔) 선생님이죠. 왜냐하면 여기서 자(子)는 ‘선생님’이란 뜻이니까요. 영어로는 Master Kong이라 쓰지요. 공 선생님에게 제자 자공(子貢)이 한번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정치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정치라는 것은 첫 번째로 사람들이 잘 먹고 살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즉, 먹는 것이 풍부하도록 하는 것, 족히 먹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두 번째로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로는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강조한 것이죠.
자공이 다시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중에 혹시라도 하나 없어도 될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공 선생님은 “군대가 없어도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또 하나가 없어도 된다면 무엇이겠냐고 자공이 물었습니다. 공 선생님은 “식량이 없어도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믿음은 없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군대가 쳐들어와서 혹은 굶어서 수많은 백성들이 죽는 경우에도 나라가 완전히 망하지는 않을 수는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안보와 경제가 설사 무너져도 사람들 사이에 믿음은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사자성어가 생겼습니다. 믿지 않으면 설 수 없다는 뜻이지요. 구약성경 이사야 7장 9절의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는 말씀도 동일한 성격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아하스왕에게 가서 이야기하라고 하신 말씀이 ‘믿지 않으면 굳게 서지 못한다’는 이 말씀입니다.
우리 한국 사회나 다른 나라 상황을 보면 믿음이 너무 약화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거의 막말에 가까운 수준의 심한 말을 하고 있는 그런 상황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아마 카카오톡을 통해 돌아다니는 수많은 ‘가짜뉴스’가 불신의 씨를 온갖 곳에 뿌리고 다니지 않나 생각합니다. 유튜브를 통해 돌아다니고 있는 거짓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 하는 방송을 보면 거짓말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공영방송이나 종편이라는 방송들도 오십보백보일지도 모릅니다. 사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명백한 거짓말인데 그런데도 수많은 거짓말이 유포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우리 사회에 불신의 골이 너무 깊게 파여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작년 고려대에서 열린 베리타스 포럼 강연 원고를 준비하다가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Truth is what my peers may let me get away with me saying.” 아마 여러분들도 이 문장이 무엇을 말하는지 확 들어오지는 않을 겁니다. 이 문장을 읽다가 책을 덮어 두고 제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칼빈신학교 교무처장을 맡고 있는 로널드 핀스트라(Ronald Feenstra)라는 친구 방에 갔습니다. 조직신학이 전공인 학자입니다. 그의 사무실 에 들어서자마자 제가 이 문장을 외웠습니다. 그랬더니 곧장 “도널드 트럼프!”라고 그 친구가 소리치던군요. 트럼프가 그런 사람이고, 트럼프가 그런 식으로 말하고, 그런 식으로 살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 문장은 대충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진리는 나의 동료들이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옳다고 받아주는 것이다”. “내 동료들이 내가 말하는 편에 서서 그게 옳다고 해 주면 그게 진리가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진리’ 혹은 ‘진실’, ‘참’과 ‘거짓’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말을 많은 사람들이 동조해주고, 옳다고 박수를 쳐주면 그것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엄격한 의미에서 객관적인 진리나 보편적인 진리, 객관적인 ‘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여기에 깔려 있습니다.
내 편에 선 사람들이 옳다고 동조해 주는 것만이 참이고 옳은 것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객관적인 사실이니 객관적인 진실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그럴까요? 모든 사람들이 암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동조한다고 합시다. “암은 존재하지 않아, 암과 같은 건 없어!” 여기서 더 나아가서 “암은 없어. 의사들이 공포를 조장하기 위해서 지어낸 병이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게 옳아, 옳아!”라고 말하면서 이 말을 따른다면 그게 진리가 된다는 말인데요,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고 암이라는 것이 사라질까요? 또 하나 예를 들어 보지요. 2차 대전 때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수많은 유태인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음모론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같은 것은 없었다!”고 말이지요. 심지어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한 일도 없었다는 이야기도 떠돌고, 2001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사건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음모라는 것이지요. 있었던 일, 있는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 사람들 편을 드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있었던 일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 정말 사라질까요? 지금까지 든 예는 존재와 관련된 것입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 곧 윤리와 관련된 문제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죽여 놓고도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내 편에 속한 사람이라면 사람을 죽여도 괜찮다, 그건 나쁜 일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내 편에 속한 사람들이 말한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도 될까요? 만일 이러한 방식의 사고와 행동이 통용된다면 참과 거짓뿐만 아니라 이제는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별은 사라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규합하고 동조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옳다하고 무엇을 그르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이런 일들이 벌써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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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배후의 철학 이론을 알지 못하면서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는 시대가 오늘 제목으로 내세운 말 포스트트루스(post-truth)와 관련됩니다. 이때 포스트라는 말은 예를 들어서 Post-War, 전쟁이 끝난 뒤라고 시간적 의미에서 말하는 경우와는 구별됩니다. 이전에는 진리나 진실이 있었는데 이제는 진리나 진실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진리나 진실과 그것과 반대되는 것 사이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때로는 거짓이 진실로 오인되는 그런 현상과 관련있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고 할 때의 ‘포스트’와 비슷합니다. ‘포스트모던’이 근대를 벗어난 시대라 이야기 되지만 그럼에도 근대가 훨씬 더 강화된 형태로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근대의 틀로 포착할 수 없는 시대의 특징을 부르는 말로 사용되듯이 ‘포스트트루스’도 진리와 진실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살아 남아 있으면서도 사실은 진리/진실과 허위/거짓의 구별이 모호해 지고 때로는 거짓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통용되는 시대 상황을 일컫는다고 하겠습니다.
‘포스트트루스’(Post-truth)는 옥스포드 사전이 ‘2017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단어입니다. 옥스포드 사전은 2016년에 사용 빈도수가 가장 많은 단어를 조사했고 앞의 해에 비해 근 2,000 배나 사용회수가 늘어난 단어가 포스트트루스(post-truth)라고 발표했습니다. 2016년에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을 때였거든요. 트럼프가 대통령 될 때였어요. 그리고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빠져나오는 ‘브렉시트’(Brexit)가 있었던 해 입니다. 이 때 ‘포스트트루스’란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이지요.
옥스포드 사전은 포스트트루스를 “어떤 공공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 사실보다 오히려 감정에 대한 호소와 개인적 신념이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이 공식적인 사전적 의미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어떤 공적인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기보다는 오히려 개인이 가진 주관적인 신념과 감정에 따라 하는 판단이 훨씬 더 잘 받아들여지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황을 ‘포스트트루스’라는 말로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오늘 한국의 사회와 정치 상황과 사람들이 가진 생각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 유포되고 있는 여러 의견들에 이 정의를 적용해 보면 우리도 그런 상황에 처해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왜 말도 안 되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렇게 유포가 될까요? 유튜브를 통해서 또는 카카오톡을 통해서, 심지어는 논문 형식을 통해서 사실의 근거가 없는 소식과 주장들이 유통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믿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일 아무도 그걸 믿어주지 않는다면 가짜뉴스가 유통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가짜 뉴스이고 가짜 주장인데도 믿게 될까요? 믿게 되는 이유가 뭘까요? 답은 아주 뻔합니다. 그것이 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만일 조금이라도 거짓이거나 거짓이 섞여 있거나 전체가 거짓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믿지 않을 테고, 만일 믿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읽어보라고 전달하는 일은 없겠지요. 자신이 믿지 않는 가짜 뉴스를 남에게 보낼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아, 이게 참이야”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고, 받은 사람도 “아, 이게 참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에게 참에 대한 의식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참에 대한 의식만 있을 뿐 아니라 참이라면, 그리고 그 참이 혼자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나 타인에게 참을 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엇이 참인줄 안다면 그것을 혼자 쥐고 있을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그것이 혼자 자신의 독점적 소유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가짜뉴스도 그것을 참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뉴스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퍼지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퍼진 가짜뉴스는 하나의 여론이 되어 버리고 여론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가짜뉴스를 생산한 편에 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정당과 언론, 가짜 종교와 가짜 과학에 수없이 속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 식사하는 자리에서 정현구 목사님이 유튜브를 통해서 떠도는 가짜뉴스를 하나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손봉호 선생님이 고정간첩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우리는 오늘 저녁 고정간첩과 식사 자리를 함께 한 셈이 되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뵌지가 46년이 넘었는데요, 선생님이 북한을 옹호하거나 공산주의 사상을 찬성하거나 그렇게 사시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북한을 공식으로 여러 인사들과 함께 방문한 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거지요. 얼마전 한기총 전광훈목사를 비판했기 때문에 나온 소리입니다. 그런데 전혀 손봉호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 이게 참인가 보다!”하고 또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영상을 보라고 전하겠지요. 그러면서 전혀 말도 안되는 것이 마치 참인 것처럼 굳어지는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 말도 안되는데도 사람들이 참이라고 믿게 될까요? 이때 말하는 참이 무엇일까요? 참이 무엇이냐, 진리가 무엇인가, 무엇을 일컬어 우리가 진실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런 물음은 오래 전부터 철학이 다루어 온 물음입니다. 참에 대한 오래된 정의를 말해 보라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의를 들 수 있을겁니다. ‘참’은 라틴 말로는 베리타스(veritas)입니다. 우리말로는 ‘진리’라고 번역해서 쓰지요. 그런데 사실 ‘진리’(眞理)는 19세기 중후반 영어의 truth를 번역하면서 ‘참된 도리’, ‘참된 이치’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말인데요, 저는 그렇게 썩 좋은 번역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성경책이다” 라고 하면 “그게 참이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진리다” 라고 하는 건 이상하죠. 왜냐하면 우리가 ‘진리’라고 할 때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은 어떤 궁극적인 이치, 어떤 궁극적인 사물의 진상을 늘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우선 베리타스를 ‘진리’라고 번역하는 것은 잊어 버리고 그냥 ‘참’이라고 이해하고 말을 계속 해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참에 대한 정의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Veritas est adaequatio rei et intellectus.” 베리타스(veritas), 즉 “참은 레이(res), 곧 사물과 인텔렉투스(intellectus), 곧 지성의 아다이쿠아치오(adaequatio), 곧 일치이다” 라는 뜻입니다. ‘참은 사물과 지성의 일치이다.’ 이것을 현대식으로 번역하면 ‘참이라는 것은 사실과 진술의 일치이다’라고 옮겨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고전적인 방식과 현대적인 방식에는 존재에 대한 이해에서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전제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이것은 마이크다”라고 제가 말을 했다면 “이게 마이크다”라고 하는 제 진술을 참이게 만드는 것이 뭡니까? “이게 마이크”라고 하는 ‘사실’이죠. 이때 ‘팩트’, 곧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마이크”라고 하는 제 진술이 참이 되게 만들어 주는 기능을 합니다. 영어로는 ‘truth maker’, ‘참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그러죠. 버트란드 라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사실’을 정의할 때 이런 방식으로 했습니다. “나의 진술이 참이 되게 만드는 것, 즉 truth maker가 팩트, 사실 ”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참과 관련해서 ‘사실’이 무척 중요합니다. 사실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면 온갖 거짓이 만들어지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중세로 올라가면 사정이 다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참이란 “사물과 지성의 일치”라고 했지요. 여기에는 신학적 근거가 있습니다. 모든 사물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가운데는 지성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지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지성을 얻은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물을 인식할 때 인간은 하나님의 지성에 참여하게 되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지성에 참여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지성으로 만든 세계를 이해하고 파악할 있다는 것이지요. 사물과 지성이 일치할 수 있는 근거는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지으시고 인간과 미약하게나마 공유하는 지성, 곧 로고스가 됩니다. 우리가 뭘 알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의 로고스를 물러 받았고 로고스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진술이 참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단순히 사실도 아니고 우리의 지각 능력도 아닙니다. 사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것에 부여한 인식 가능한 구조(로고스)를 바탕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지성(로고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우리는 사물을 알 수 있고 사물에 관한 참된 진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참은 단지 사실과 진술의 관계,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주관과 객관, 주관과 객관을 이어주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 진리를 깨닫게 하는 성령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과 역할이 여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 와서 진리라고 할 때는 이런 형이상학적, 신학적 배경은 밀쳐내 버리고 방금 제가 라셀을 이야기한 것처럼 나의 진술과 사실의 일치에만 관심을 두게 된 것이지요. 물론 이 정의에는 사물과 관련된 참이 단순히 나의 주관적 생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내용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결국 그것이 팩트냐 팩트가 아니냐, 곧 사실이냐 아니냐에 달려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포스트트루스는 객관적 사실(objective fact)이 내가 가진 생각이나 내가 믿는 믿음의 참과 거짓을 결정하는 힘을 잃어버린 상황을 그려줍니다. 포스트트루스를 옥스포드 사전에서 어떻게 정의한다고 했습니까? 두 가지, 곧 하나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나의 개인적 신념 또는 확신에 호소해서 여론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팩트, 곧 사실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편이 그렇게 되어주기를 바라거나 원하는 바가 나의 의견이나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보증해주는 것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사실 이런 생각이 형성된 것은 단지 최근에 와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객관적 지식이나 객관적 사실이 없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저 그리스 시대의 이른바 ‘소피스트들’이 이미 주장했던 것이니까요.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어떤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것은 내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나 자신이 참과 거짓의 척도가 되는 것이지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이런 사람들에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소피스트의 생각을 현대에 와서 아마도 가장 잘 대변하는 사람이 니체일 겁니다.
니체가 그런 생각을 할 이유가 전혀 없지는 않았죠. 니체의 사상을 흔히 관점주의(Perspectivism)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 때 항상 어떤 한 측면이나 어떤 한 관점에서 보는 건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이 테이블을 보실 때 이쪽에 앉아있는 분과 저쪽에 앉아있는 분이 사실 동일한 테이블을 보고 있다고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같지가 않습니다. 이쪽에 앉은 분은 지금 이 면을 이렇게 보고 있죠. 저는 지금 이 테이블을 제가 보려고 하지만 이 테이블 다리는 보지 못하고 테이블 위쪽에 있는 이 판만 지금 보고 있습니다. 조그만 모래알을 하나를 본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래알을 제 손에 얹으면 제가 모래알 전체를 보지 못합니다. 제 쪽에서 보이는 것만 볼 수 있고 뒷면은 뒤집어 봐야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본다고 할 때 그 사물을 보는 것은 항상 이런 방식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와 사물이 놓여 있는 배경을 통해서 우리는 뭘 볼 수 있습니다. 사물 전체를 보려면 둘러서 봐야 되고 돌아서 봐야 되고 이 경우는 또 뒤집어서 봐야 됩니다. 우리의 지각은 항상 어떤 관점을 가지고 혹은 어떤 한 입장에 서서 사물을 보는 방식으로 발생합니다.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죠. 우리는 늘 어떤 관점, 어떤 퍼스펙티브를 가지고 사물과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전체를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돌려서 보고, 둘러 보는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장소도 필요합니다. 시간과 공간안에서 이렇게 우리 앞에 주어진 것들을 종합하는 작용이 우리의 의식 활동입니다. 칸트 같은 사람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수용하는 것들을 전체로 종합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그는 라이니츠가 사용했던 용어를 빌려 통각(apperception)이라 불렀습니다. ‘자기의식’이라고도 부릅니다. 칸트는 우리가 주어진 것들을 볼 때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배후에, 곧 우리에게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 배후에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소위 ‘사물 자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우리가 볼 때 두 가지 조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이 주어질 수 있도록 뒤에서 배경을 형성해 주고, 사물이 우리에게 주어지도록하는 ‘사물 자체’라는 것이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어진 것들을 단순히 그냥 단편적으로 또는 파편적인 방식으로만 놔두지 않고 그것을 종합하는 우리 ‘통각의 종합활동’이죠. 그런데 니체는 이 둘을 모두 배제했습니다. 사물 자체도 없고 통각의 작용도 없고 그냥 남아있는 것은 파편화된 나의 지각활동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 중요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해석에 영향 주는 것이 ‘힘을 향한 의지’라고 니체는 보았습니다.
칸트를 현대 관점주의의 선구자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칸트를 엄밀하게 읽으면 그를 관점주의자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주어지는 것’이 있고 그것을 종합하는 ‘통각’(자기의식)이라는게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것을 제거해버리고 나면 결국 니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관점주의로 진행될 수 밖에 없습니다.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와 같은 현대철학자들이 니체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만일 이런 방식을 가지고 온다면 우리가 뭘 보고, 말하고, 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은 결국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에 불과하게 되겠죠. 과거에 지식을 권력과 연관해서 본 사람으로는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었습니다. 그는 “앎은 곧 힘”이라고 했죠. ‘스킨엔치아 에스트 포텐치아’(Scientia est potentia), 우리말로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앎이 곧 권력이라는 말입니다. 미쉘 푸코는 우리의 앎의 추구가 사물에 대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오히려 사물을 통제하고 관리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의지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현실을 접근한다면 ‘진리’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 실재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정치와 언론과 삶을 본다고 해 보십시오. 그러면 결국에는 진정한 ‘참’과 진정한 ‘옳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포스트트루스가 만들어질 수 있는 상황은 이런 방식으로 이미 만들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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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트루스의 상황은 여러 영역에서 감지할 수 있습니다. 정치 영역이나 종교 영역이 아무래도 대표적일텐데요, 놀랍게도 과학의 영역과 관련해서도 포스트트루스가 생산되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상황입니다. 예를 찾아 보자면 아마 첫 번째 들 수 있는 것이 담배와 암의 관련성에 관한 문제를 먼저 들어볼 수 있겠습니다. 담배가 암을 유발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논쟁은 이미 1950년대부터 있었습니다. 담배가 폐암을 유발한다는 주장을 의학계에서 하기 시작하자 담배회사 사람들이 연구자들을 동원하여 담배와 폐암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는 식의 연구 결과를 60년대, 70년대에 학계에 퍼뜨렸습니다. 두 번째 예로는 백신, 곧 예뱡접종과 관련된 것이 있습니다. 예방접종은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주장을 앤드루 웨이크필드(Andrew Wakefield) 같은 사람이 했는데요, 이런 사람들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백신을 맞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고, 그래서 다 사라진 줄로 알았던 홍역이 다시 번지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 번째 예는 지구의 기후변화와 이산화탄소의 배출의 인과관계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연구 결과를 내는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사람이죠. 백신을 거부하는 것이나 이산화탄소 배출과 지구온난화가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는 정치가들을 지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인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반과학적이라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기도 했습니다. 경제적인 동기나 종교적인 동기 또는 종교적 동기가 포스트트루스를 만들어내는 동기일 수 있음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한걸음 물러나 생각해 보면 무엇이 참이라고 할 때 어떤 현실, 어떤 삶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가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사실의 문제인지, 논리의 문제인지, 느낌이나 감정의 문제인지, 삶의 의미와 관련된 문제인지, 어떤 영역, 어떤 성격의 문제인지에 따라 참의 성격이 다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담배가 폐암의 원인인가 아닌가, 탄산가스 배출과 지구온난화와 관계되는가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은 사실의 문제이고, 이러한 사실의 문제는 과학연구를 통해서 밝혀질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논리학에서 배우는 규칙 가운데는 가령 ‘긍정 논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P는 Q이다. P이다. 그러므로 Q이다.” ‘부정논법’은 이렇게 표현됩니다. “P이면 Q이다. Q가 아니다(Not Q). 따라서 P가 아니다(Not P).” 이러한 논법은 형식으로 인해서 참이거나 거짓이 되는 논법입니다. “만일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 고 해 봅시다.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 비가 온다. 그러므로 땅이 젖는다” 또는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 땅이 젖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가 오지 않았다.”라고 참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 때의 참은 논리적인 형식 때문에 언제나 참인 그런 성격의 참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지요. “이 책상은 네모나다” 라는 명제를 생각해 봅시다. 이 명제는 “이 책상이 네모나다”는 사실은 서술하는 명제이죠. 그래서 “이 책상은 네모나다”라는 저의 진술은 이 책상이 네모나다는 사실을 통해서 참임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모든 책상이 네모나야 될 이유는 없습니다. 어떤 책상은 둥글 수 있고 드물기는 하지만 세모난 책상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주어진 사실이 제가 지금 “이 책상이 네모나다”라고 이야기하는 저의 진술을 참되게 만드는 트루스 메이커(truth maker) 역할을 합니다. 사실과 관련된 진술의 참과 거짓을 실제로 서술된 내용이 사실인가, 사실이 아닌가, 다시 말하자면, 들어맞는가, 맞지 않는가 확인해 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 참은 이와는 약간 다릅니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이 이야기가 세종대왕이 한글을 자기 혼자 실제로 만들었다는 것은 아니죠. 집현전 학자들에게 지시해서 수년간 연구한 결과 한글이라고 하는 문자 체계가 나오고 그것을 나중에 발표를 하게 된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것을 거짓이라고 말하진 않겠죠. 역사적 의미의 참은 사실과 연관되지만 지금 제가 “이 책상은 네모나다”라고 진술하는 예와는 분명히 구별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문헌의 뒷받침도 있고 문헌이 이야기하는 사건이 실제로 있어야 그와 관련된 진술이 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참에 대한 또 다른 예로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십니다” 라는 말씀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십니다” 라고 이야기 한다면 이 진술은 여호와께서 나의 반석, 곧 내가 의지하고 기댈 곳이 되신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 분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포함된 진술이 될 것입니다. 이 때의 참을 “그게 사실인가?”라는 물음으로만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속에는 그렇다는 사실에 대한 진술과 감사와 참양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연인들끼리 “내가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때의 진술이 지닌 참은 사실에 대한 표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서로의 사랑과 신뢰를 표현하는 의미에서의 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보자면 “내가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이야기할 때, 이 표현속에는 단순한 사랑의 감정에 대한 고백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계에 머물러 있기를 원함과 다짐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현재의 상태의 서술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한 약속이 곁들이진 진술이 사랑의 고백에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때의 ‘참’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와 관련해서 미래에도 그러하리라는 다짐과 관련된다고 하겠지요. 여기에는 분명히 그렇지 않을 수 있는 위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거나 참이 아니라거나 할 수는 없겠지요. 참은 이처럼 다양한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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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으로부터 포스트트루스가 통용되는 우리 시대에 무엇을 우리가 생각해야 할까요? 첫 번째는 실재론의 중요성이라 생각합니다. 실재론은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제가 저의 어떤 인격적 표현을 하는 경우, ‘내가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이야기할 때 그 사랑한다는 것이 단순히 저의 어떤 감정의 표현, 단순히 저의 느낌의 표현이 아니라 제가 사랑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 사실을 일차적으로 진술하는 것이라 그렇게 볼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내가 사랑한다’는 그 사실을 언어 속에 그렇게 담아서 표현할 수가 있겠죠.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내가 당신을 사랑해’라고 한다면 그건 속이는 것이죠. 그런 속임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 진실된 마음을 그 사실을 언어 속에 담아서 표현하는 경우를 말로 옮겨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이것이 그냥 예를 들어서 ‘이것은 책상이다’라고 하거나 ‘이 책상은 네모나다’라고 사실을 서술하는 차원과는 다르죠. 훨씬 더 인격적인 개입과 인격적 참여가 들어간 방식의 서술이고 인격적 관계에서 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죠. 즉, 팩트에 근거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재론(realism)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 실재론은 단순한 나이브한 실재론과는 구별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책상이다”, “이 책상은 네모나다”라고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사랑의 느낌,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사실을 그냥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신실하겠다는 약속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나의 주관, 나의 느낌,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도 연관시켜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실재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격적 실재론’의 입장을 취할 수 있습니다.
저의 말이 좀 어렵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다른 예를 더 들어보죠. 역사적 사실과 같은 경우도 단순히 그냥 어떤 지나간 사실에 대해 혹은 지나간 사건에 대해 나의 감정과 나의 느낌, 내가 원하는 것을 그냥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렇게 할 수 있는 밑바탕, 그 근거 자체는 이미 주어진 사실이겠죠. 그러니까 사실 없는 진실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되 그 사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는 그런 방식의 진리 추구가 역사와 연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와 관련된 진리는 그러므로 단순히 내 앞에 있는 책상을 말하는 것과는 연관은 되지만, 다른 차원의 진리, 다른 차원의 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진리 또는 참에는 단순히 과학적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 진리도 있을 수 있고 종교적 진리도 있을 수 있고, 심지어 미적, 예술적 진리도 있을 수 있고, 인격적 진리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진리의 다양성에 대한 수용과 그 바탕에는 역시 팩트가 깔려 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의미의 실재론은 저는 ‘비판적 실재론’이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진술이 참인가 거짓인가, 그러니까 지금 유통되고 있는 가짜뉴스의 경우, 이걸 참으로 받아들여야 되냐 아니냐 할 때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그것이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를 찾아보고 확인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일주일 전인가요? 미국인의 30%가 넘는, 한 3분의 1 정도가 북한의 핵을 제재하기 위해서 핵무기를 사용하고 그럴 때 백 만 명 이상이 죽어도 괜찮다고 동의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는 우리말 뉴스를 보고 저도 깜짝 놀라서 실제 그 내용들을 계속 체크해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워싱턴 포스트>에 실제로 그런 조사 결과가 보도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보고 나서야 이런 조사가 거짓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놀랐지요. 미국 사람들은 도대체 한반도를 어떻게 생각하기에 백만 명이나 죽어도 핵무기를 저지할 수 있으면, 핵무기를 써서 저지하는 게 옳다 여기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받은 문자 메시지나 우리가 보는 유튜브나 이런 것들이 정말 신뢰할 수 있는지 우선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낫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말 이것이 참일까 거짓일까 하고 물어볼 필요가 있고 보도한 매체가 믿을 만한 매체인가 아니면 개인이 자신의 신념을 선전하는 매체인가 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일 경우에는 판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언론 보도일 경우에는 보도한 매체가 신뢰할 수 있는 매체인지, 심지어 신뢰할 수 있는 매체라도 또 다른 매체와 비교해 보고 또 확인해 보는 것을 통해서 판단에 이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하자면 모든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비판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비판적(critical)이라는 말은 원래 “가려낸다”, “참과 거짓을 가려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가려내는, 가려내려고 하는 비판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가짜뉴스로 의심되는 소식을 접했을 때 물어보아야 할 것은 만일 그것이 참일 경우,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하는 것도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누구를 위한 뉴스이고 누구를 위한 소식인지.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어떤 한 개이나 그룹, 또는 어떤 지역이나 정당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낸 뉴스일 가능성이 없는지를 고려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짜 뉴스, 거짓 뉴스와 소식이 워낙 많이 돌아다니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은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분이나 모두 어렵지 않게 적용되리라 믿습니다.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 특별히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에 이어 세 번째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포스트트루스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공의로운 태도, 공정한 태도, 공평과 정의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평과 공정은 무엇보다 사실을 그대로,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참과 거짓을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인 것을 무엇이라고 말하고 무엇이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것이 참이고, 무엇이 아닌 것을 무엇이라 말하고 무엇인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거짓이다.” 아주 상식적인 표현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생에게 물어봐도 “그렇지요, 그렇습니다”라고 답할 내용입니다. 위대한 철학자가 이야기했지만 너무나 상식적인 관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인 것을 무엇이라고 이야기해도 믿지 않고 무엇이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는 것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인 것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무엇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사실 그대로 정직하게 보고, 정직하고 말하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이 점에서 하나님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사실을 대할 때 그리고 어떤 사람을 대할 때 외모로 취하거나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 말고 공정하고 정직하게 보려고 애쓸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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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끝으로 물어봅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이야기한 세 가지 노력을 해야 할까닭이 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도 어느 한 쪽 편에 서서 다른 한 쪽을 공박하고 배척해야 하지 않을까요? 강의 모두(冒頭)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뢰 없이는, 믿음 없이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건강하게 될 수 없고 건강하고 굳건하게 설 수가 없습니다. 신뢰받는 사회, 신뢰가 있는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참과 거짓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거짓이 진실을 뒤덮는 일이 없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4장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엡4:13-14) 그리스도의 정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성숙한 정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라는 권유를 사도 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이 뭐냐 하면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란 것이죠. 성숙함의 표시가 사람들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지느냐 빠지지 않느냐 (제가 설명드린 방식으로 이야기 하면) 비판적인 사고 또는 회의적인 사고를 통해서 참인지 거짓인지 가려내고자 하는 자리에 이르느냐, 이르지 않느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5)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참된 것을 하여”는 “참된 것을 말하여” 아니면 “참된 것을 행하여”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참된 것을 말하되” 아니면 “참된 것을 행하되” “사랑 안에서” 행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는 말씀이죠.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숙한 정도에까지 자라가야 하는데 그 기준이, 또는 그 표시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행하는데 있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참된 것을 말하되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지 말고 사람과 공동체를 세우고 사람과 공동체를 살리는 방식으로 하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우리가 자라가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의견이 분열되고 편가르기가 심한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어느 편에 서서 좌파냐 우파냐 편가르기에 편승하는 것보다 무엇이 참인가 무엇이 사실인가를 가려내고 또 그 참된 것에 따라 살고자 하는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을 통해서 좀 더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Q&A
질문 1. 요즘 이정훈 교수가 한국교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철학자로서 그의 주장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는지요? 기독지식인이 침묵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요?
답: 이정훈 교수가 누군지는 이름을 들어서 압니다만 그의 주장이 무엇인지,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그렇게 깊이 살펴 보지는 않았습니다. 관련된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사회에서, 특히 한국 기독교에 필요한 것은 미국 상황과 마찬가지로 저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가 하나의 세계관 또는 하나의 사상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사실상 여러 사상, 여러 세계관, 여러 삶의 방식이 통용되는 사회라는 사실의 인식입니다. 20세기 이전에는 서양 사람들은 서양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았고, 그 외 다른 지역은 그 지역의 방식으로 따라 살았습니다. 지금은 여러 삶의 방식들이 다양하게 시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 가운데 물론 지배적인것, 대중들이 따르는 세계관과 삶의 방식이 있지만 어느 하나가 전체를 이끌어 가는 방식은 아닙니다. 종교의 경우에도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이슬람 등 여러 종교가 통용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원적 상황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인식이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기독교가 어떤 방식으로 이러한 다원 상황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지를 숙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서 3장 15~16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의 가슴 속에서 거룩하게 하고, 소망을 둔 이유, 근거를 묻는 사람들에게는 대답할 준비를 하되, 항상 온유와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당시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권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베드로전서의 이 교훈이 특별히 한국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그 확신에 거하되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두고 있는 소망의 근거를 묻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능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온유와 존경의 마음으로 할 수 있는 태도를 오늘 같이 다원화되고 있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질문 2. 다문화사회는 다원주의로 갈수밖에 없지 않나요? 절대 합의할 수 없는 영역도 평화를 위해서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또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트루스가 날카롭게 구분되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강연내용을 들으면서 서로 겹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답: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트루스는 서로 깊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투르스가 나오는 이유는 결국은 절대 진리에 대한 신념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인 신앙이 강하게 영향을 줄 때는 상대주의자들이 있다고는 해도 절대적으로 변할 수 없는 진리는 있다는 확신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거든요. 절대진리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면서 사실상 포스트모더니즘도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포스트트루스를 한번도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도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기준이나 근거를 객관적 사실이나 증거에 두지 않고 자기가 속한 편과 선호에 두는 방식에 너무 익숙해 졌다는 것이겠지요. 포스트모더니즘은 물론 포스트트루스보다는 개념의 내포와 외연이 훨씬 넓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방금 다원성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지만 의미의 해체 문제입니다. 오늘만큼 아마 말이 팽창된 시대도 없지만 동시에 오늘만큼 말의 의미를 잃은 시대도 없습니다. 어떤 주장이 있을 때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무엇보다 사실에 부합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 가운데는 물론 논리적 정합성이 있어야지요.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눈으로 목도하는 현상은 어떤 말이나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사실을 통하여 확인하려는 의지와 열망이 약화되거나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최근 현상은 아닙니다. 고대 희랍의 소피스트와 플라톤의 투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말의 힘’을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말은 ‘힘의 말’이 되고 맙니다. 소피스트들은 말을 사람들 사이에 주고 받는 인위적인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말의 의미는 사물의 본성과 연관된다고 보았습니다. 삼각형을 ‘삼각형’이라고 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약속했기 때문이 아니라 삼각형이라는 사물의 본성과 연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지식이 사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반면, 소피스트들은 그것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했지요. 똑같은 현실을 오늘 우리가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에 관심을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하나는, 말의 가치가 많이 떨어지고 의미가 해체된다고 해도 말은 계속 해야지요. 복음을 전하고 무엇이 참인지 알고자 애쓰고 말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두 번째로 말 못지 않게, 말에 부응하는, 말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내어야 합니다. 만일 삶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이 하는 말은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진실 가운데 말하고 진실한 삶을 사는 겁니다. 아까 제가 언급한 에베소서 4장의 구절은 사랑 가운데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행하는 것, 이 둘을 모두 포함합니다. ‘명실상부’라는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이름과 실재가 하나 되는 삶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질문 3. 교수님께서 강의해주신 대로 풍조에 휩쓸리기 너무 쉬운 사회인 것 같습니다. 친척들 모임에 가면 가짜뉴스에 휩쓸려 현정부를 좌파정권이라고 외치는 큰아버지가 계십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라는 권유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답: 저도 사실 겪는 일입니다. 진실을 말해야 하는 데, 중요한 것은 ‘엔 아가페’,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행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 안에서’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드는 생각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들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적을 대하듯이, 무시하듯이 하면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되지 않겠지요. 그리고 말을 하더라도 상대방을 비판하거나 배제기 위한 의도로 하지 않고 상대방을 세워 주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역시 두 가지가 중요하겠지요.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행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들어주고 그 분을 세워드리는 방식으로 대화를 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화를 하자면 그 가운데 사실은 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정보와 무논리로 할 수 없는것이지요. 아까 잠시 이야기한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보면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대답할 준비를 늘 하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 때 ‘이유’가 다름 아니라 ‘로고스’입니다. 이유, 근거, 심지어는 이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이지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정당한 로고스, 올바른 논리적 사고입니다. 교회에서는 이성적 사고를 별로 강조하지 않는데요, 저는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시점에서는 이성을 좀 강조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성이 뭡니까? 이성(理性)은 ‘추리(推理)하는 능력’ 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렇게 추리하여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이성입니다. 저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때보다 기초적인 논리적 사고, 기초적인 사고능력부터 좀 키워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야 성경도 제대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이 논리 없이, 말도 되지 않게 쓰이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기본적인 사고 훈련과 더불어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태도는 ‘듣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우선 들어주고 그 다음에 내 생각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시원한 답은 아니죠?
질문 4.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기독교 진리를 옹호하는 방식으로 “가치 중립적인 것은 없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진리를 수호하는 방법이겠지만 동시에 같은 논리로 성경의 진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투르스 시대에도 이러한 논리가 여전히 유효한가요? 참을 여러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고 하셨는데 포스트트루스 시대에 성경이 참이라는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답: 저는 성경에서 말하는 참은,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참된 포도나무라 할 때의 참은, 포도나무가 식물학적으로 순종이라는 의미보다 농부가 열심히 포도나무를 가꾸고 애를 쓰면 때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는 그런 포도나무를 참된 포도나무라고 부르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때의 참은 신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것, 믿을 수 있는 것이 참입니다. 열매맺는 나무의 경우, 열매가 부실하지 않고 제대로 단단하게 제대로 익어야지요. 우리말의 ‘참’이라는 말도 빈 것과 구별되는 참이거든요. 빈 열매, 빈 죽정이가 아니라 꽉찼다는 의미의, ‘실(實)하다’는 의미의 ‘참’입니다. 참, 진실, 진리를 일컫는 히브리어의 ‘에메트’는 ‘아멘’, ‘아만’, ‘에무나’와 이어져 있는 말인데요, 원래는 ‘단단하다’, ‘견고하다’, 그래서 ‘믿을만하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나무의 참이 어디서 증명됩니까? 성경의 관심은 그것이 순종이냐 잡종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열매를 맺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좋은 나무여야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열매는 열매를 맺은 나무가 좋은 나무임을 증명합니다. 그런 나무가 참된 나무이지요. 참된 삶, 참된 말, 참된 말이라고 할 때 그러므로 열매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무척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참이다”, “성경이 참이다”라는 말은 그 속에 영원한 무슨 대단한 원리나 법칙이 담겨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따라 살게 되면 생명을 얻게 되고 참된 삶의 길을 따라 걸을 뿐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의미에서 참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오늘의 문화는 명제적 진리를 싫어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명제적 진리를 말해야지요. 그럼에도 잊어서 안될 것은, 진리는 그것이 가르치지는 것과 결과가 부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과 사물이 들어 맞아야 하고, 말과 삶에는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더구나 말이 힘을 잃은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자기 중심보다는 이웃을 생각하고 타자를 돌보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물질 중심의 삶보다는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의 중요성을 따라 사는 삶이어야 하겠지요. 개인의 삶도 중요하지만 공동체를 세우고 공동체와 함께 하는 개인의 삶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좌절과 절망에 빠진 삶이 아니라 희망을 보여주는 공동체가 오늘도 가능함을 교회가 보여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질문 5. 공평과 정의의 가치로 판단했다고 해도 그렇게 선택하며 사는 것이 어렵습니다. 머리로 안다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재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공평과 정의를 따르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답: 토마스 아퀴나스는 “행동은 존재를 따른다”(Agere sequitur esse)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지요. 방금 제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나오는 말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과 사실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1주년 기념행사를 하는 우리 웹진 이름이 ‘좋은나무’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자는 의도로 이렇게 붙인거지요.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나무여야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철학의 언어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다 보면 어느 새 좋은 나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의지가 없는 나무에게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겠지요. 사람의 경우는 그렇게 애써 볼 수가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게레 세쿠이투르 에세”는 “행위가 존재를 따른다”고 번역되지만 “존재가 행위를 따른다”고 번역하더라도 문법상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느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어떤 존재가 되느냐, 어떤 인간이냐 하는 것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존재의 변화가 삶의 변화에 선행한다는 생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 여기 참석하신 분 가운데 크리스천이 아닌 분들도 계실테지만 제가 기독교적으로 이야기 하도록 허용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에베소서 5장 8절과 9절을 보면 존재 변화를 먼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너희가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어두움에서 빛의 존재 변화, 다시 말해 그리스도 밖의 존재에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의” 존재로 존재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어두움에 속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빛의 자녀로 살아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빛의 열매는 선함과 의와 진실함”이라고 말합니다. 존재 변화로부터 빛의 열매를 맺는 행위가 뒤따라 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윤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존재가 바뀌고 존재가 바뀜으로 삶의 열매가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공평과 정의로운 삶의 열매는 그리스도안에 속한 존재로 나의 존재 변화가 일어났는가, 일어났다면 나의 삶 속에 이 열매가 맺히는가, 물어보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일 나에게 빛의 자녀의 존재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선함과 의와 진실함’ 그리고 ‘공평과 정의’의 열매가 맺힐 수 없는 것이지요. 열매를 보고 내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겠지요.
질문 6. 뉴스의 원천을 찾아 <워싱턴포스트>를 찾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가짜뉴스를 직접 언론을 찾아 참과 거짓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오히려 언론보다 시민제보의 SNS가 더 정확할 때가 있지 않을까요? 의심해 볼 필요에 대해 동의합니다. 오늘날 거짓뉴스의 확산이 오히려 기존 사실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고 음모론에 출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은 과거에 은폐되어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많이 노출된 상황입니다. 과거에는 힘을 행사했던 관공서나 국정원의 은폐가 이제는 많이 노출되면서 정부의 신뢰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이 점에서는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론도 불신 대상이 되었습니다. 직접 관련된 시민의 제보가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SNS를 통해 가짜뉴스가 많이 생산되지만 시민들이 자신의 주변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SNS를 통해서 진실을 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훨씬 더 커졌습니다. 제가 강의할 때 ‘회의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회의적 태도란 뉴스나 소문을 곧장 수용하기보다는 일단 판단 유보를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회의적’이란 말이 영어로는 스컵티컬(skeptical)인데요, 이 말은 희랍어 스켑시스(skepsis)에서 왔습니다. 이 말의 동사 스켑토마이(skeptomai)는 ‘회의한다’, ‘의심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실은 ‘찾는다’, ‘모색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단정해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옳은지 그른지를 찾아보고 더듬어 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이 태도가 필요합니다.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보다 일단 잠정적으로 유보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중요한 문제라면 좀 더 찾아보고 알아보고 따져 보이야지요. 이러한 태도를 고대 회의론자들은 ‘에포케’(epoche), 곧 ‘판단중지’라고 불렀습니다. 극단적으로 이쪽이나 저쪽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물론 이 속에 오래 머물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판단을 내려야지요. 길을 걸어갈 때는 더욱 그렇지요. 데카르트는 “길 위에서는 회의론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켑시스의 태도, 에포케의 태도는 좌이든 우이든 어느 쪽에 기울여져 독단에 빠질 때 좋은 해독제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정치 상황이나 사회 상황 속에서 이런 해독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7. 베드로전서 3장을 인용하면서 언제나, 누구에게나 답변할 준비를 하라고 하셨는데 실질적으로 우리의 생활에서 어떤 준비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태도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답: 우선 공부해야죠. 물론 책을 들고 책을 읽으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편안하지 않은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양극화가 심하고, 점점 더 다원화되어 가고 있고 사실상 많은 것들이 헤체되는 상황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전통도 해체되고, 권위도 해체되고, 기독교든 불교든 전통종교도 해체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참된 것에 대한 갈증, 진정한 것에 대한 갈증이 우리 사회와 문화 속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오늘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단어 중 하나가 ‘진정성’일텐데요, 영어로는 오텐티시티(Authenticity)라고 하지요. 독일어로는 아이겐틀리히카이트(Eigentlichkeit)라고 합니다. 철학자 하이데거(1889-1976)가 1927년에 쓴 <존재와 시간>에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 일과 연관시켜 보았습니다. 대중들의 평균적인 사고와 삶의 방식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삶의 방식을 일컫는 것이지요. 최근에는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1931-)가 ‘진정성’을 중요한 개념으로 다시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이데거적 의미든 테일러적인 의미든간에 진정성에 대한 요구는 분명 이제 하나의 시대적 요구로 주어져 있다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저는 이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시킨다면 아까 이야기한 베드로전서 3장 15절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생각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심장, 우리의 가슴(kardia),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의 중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을 때 우리는 자유인이 됩니다. 자유인으로 우리는 섬기는 이로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 가운데 섬김의 삶을 살 때 우리는 가장 우리 자신에 가까운 삶, 자유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진정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두 번째,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답할 준비를 하라고거지요.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 삶이 가슴으로 한다면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우리가 그런 물음을 받을 때, 답할 준비를 하는 삶은 머리로 하는 것이지요. 그러자면 다른 종교도, 다른 사상과 생각도 알아야 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는지, 믿음의 내용에 관해서도 깊고 넓게 공부해야 합니다. 세 번째 삶의 태도는 온유와 두려움, 온유와 존경의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건 손발로, 몸으로 하는 것이지요. 타인을 대할 때 나의 눈빛이 어떠하고, 나의 낯빛이 어떠한지, 내미는 나의 손이 어떠한지도 우리의 삶에 중요합니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대할 때도 우리는 온유와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무엇이 참인지 알면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가운데 섬기는 자세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을 온유와 존경하는 마음으로 넉넉하게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진리 가운데서 자유를 얻지 못한거지요. 여러분이나 저나 이렇게 사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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