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 〈동방박사의 경배〉, 1504년, 99×113.5cm, 우피치 미술관
별을 관측해 권력의 향배를 살피는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음을 축하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러나 헤롯 궁전에는 그들이 찾는, 왕으로 태어난 아기가 없었다. 자신의 왕권을 위해 아들들도 죽였던 헤롯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으니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을 떠다니는 별의 운행을 해석해도, 어지러운 땅의 정세까지 밝히 아는 것은 아니다. 마태는 동방박사들의 방문으로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했다고 적는다(마 2:2-3). 하여간 별의 운행을 통해 하나님은 헤롯이 정통성 없는 왕인 것을 하늘 아래 공표하신 것이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는 어디 있는가. 헤롯은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아기의 소재를 찾았다. 성경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해 선지자 미가가 베들레헴에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음을 확인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을 먼저 베들레헴으로 보낸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헤롯도 믿었단 말이다. 그는 믿었지만, 하나님 뜻에 따르지 않았다. 나도 그렇다. 신앙이 있고 성경에 적힌 예언을 믿는다 해서 헤롯의 믿음보다 큰 믿음을 지닌 것이 아니다. 그분의 뜻을 따라, 예수가 나신 자리에 있어야만, 참 믿음이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가 성서의 예언을 따라 예수의 자리를 찾는 참 믿음의 사람들을 초대한다. 뒤러는 아기 예수를 만나려는 사람을 폐허 속으로 이끈다. 동방박사들이 서 있는 마을은 오래전에 파괴되어, 건물 벽과 기둥 여기저기에 나무가 뿌리내리기도 하고 풀이 자랐다. 황폐한 땅으로, 아기 예수가 오신 것이다. 전통적인 도상을 따라 청색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동방박사들이 선물을 들고 아기 예수를 알현한다. 황금 상자를 들고 온 박사가 먼저 앉은 자세로 예수를 뵙고, 화면 중앙에 유황을 들고 선 박사가 차례를 기다린다. 유황을 들고 선 박사는 화가 최초로 자화상을 그린 뒤러 자신을 닮았는데, 엉거주춤 몰약을 든 흑인 박사를 쳐다본다. 엉거주춤 서 있지 말고, 가까이 다가오라는 눈빛이다. 폐허에 있는 이가 진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맞는지 의심하는 듯한 동료 박사를 바짝 잡아당긴다. 어쩌면 파괴된 현장을 어서 떠나고 싶어 하는 듯한 동료를 힐난하는 것도 같다.
멀리 요새가 보인다. 예수는 안전하고 높은 요새가 아니라, 허물어져 폐허가 된 땅으로 오셨다. 파괴된 땅으로, 무너진 마음으로, 병든 몸으로 예수께서는 찾아오신다. 1월은 주현절이 있는 달이다. 파괴된 땅에, 무너진 마음에, 병든 몸 앞에 서 있어야 아기 예수를 뵐 수 있다. 별을 보고 길을 나섰더라도 엉거주춤 말고, 뒤러처럼 당당하게 한 중앙에 서 있겠다. 대왕 헤롯보다는 큰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