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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스크랩 [人+間] 23. 전포동 만화방 집 장남… 만화에 대한 지독한 편견에 울다 / 박재동
목소리박 추천 0 조회 106 11.08.19 22: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人+間]

 

촌철살인의 시사만평과 달리 단박에 인물의 특징을 파악하고 그림을 완성하는 데는 2분이 걸리지 않았다. "관상도 보실 것 같은데요." 기자의 질문에 살짝 미소만 짓는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인생만화' '제 억공화국' 등 박재동 화백의 책을 잔뜩 들고 와선 그 위에 캠코더를 올려놓고 그림 그리는 장면까지 찍고 있다. 아예 전화까지 받는다. "허허.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네요." 박 화백이 껄껄 웃자 길게 줄 선 사람들에게 웃음이 전염됐다.


캐리커처를 그리는 사이 1분이 멀다 하고 지인들의 악수 세례가 이어진다. 울산에 사는 동생 박수동 씨는 "형은 즐기면서 일을 하는 스타일이에요. 재미없으면 안 해요. 항상 주위에 사람이 많아, 잔칫집 분위기예요"라고 귀띔한다.

그 와중에 대구서 왔다는 젊은 교사는 따로 챙겨온 종이에 'OO공고 파이팅'이란 사인을 해 달라 부탁하고, 머리 짧은 아저씨는 '물처럼 공기처럼'이란 가훈도 캐리커처에 넣어 달라 신신당부한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면서도 번거로운 주문을 다 들어준다.


아버지 병수발 위해 가게 시작한 어머니
'불량업소' 편견에 울고 즉결재판까지 받아
꼴찌, 고교재수, 정학 그리고 서울대 합격
거듭된 실패·좌절 내 인생 큰 보약 됐죠


■세상에서 가장 긴 전시회

지난 6일 울산시 울주군 반구대암각화박물관 마당의 풍경이다. 19일까지 대곡천 4㎞ 구간을 따라 열린 '박재동의 선사길 십리전'과 연계한 행사다. 암각화박물관 주차장에서 박물관까지, 천전리 각석에서 박물관까지, 박물관에서 반구대 암각화까지, 박물관을 중심으로 Y자형으로 난 길에 무려 750점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난간 위, 풀숲 사이로 술잔을 기울이는 사내, 북한 개성의 풍경, 고향과 가족 이야기 등등이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다.

고향에서의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4일 귀국해 "시차 적응도 안 됐다"면서도 열정이 넘친다. 그는 지난달 28일부터 3일까지 '박재동과 함께하는 쿨투라 뉴욕 러브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미국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난생 첫 해외 전시를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첫 고향 전시를 연 거다.

"울주문예회관에서 손바닥 그림을 길에 전시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해왔어요. 10㎞에 1천 점을 전시할 작정이었어요. 영남 알프스 등산로에서 하자는 말도 나왔고, 태화강을 따라 전시하자는 안도 나왔어요. 우리나라 만화의 원형이라 할 반구대와 천전리 바위그림과 연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사시대 최초의 그림과 이 고장 출신 화가의 만남이란 콘셉트를 잡았어요." 

울산시 울주군 대곡천 4㎞ 구간을 따라 열린 '박재동의 선사길 십리전'에 나온 작품들.


■만화에 대한 편견에 울다

"나는 눈 감고 오뎅을 썰고, 재동이 너는 눈 감고 그림 그리고, 우리 시합할래?" 한석봉의 일화를 빗대 박재동의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어머니 신봉선 씨는 부산 전포동에서 22년 동안 '문예당'이란 만홧가게를 하면서 떡볶이를 팔고 팥빙수도 만들었다. 선생님 사모님이란 명예도 뒤로한 채 남편 병시중을 위해 선택한 험한 길이었다.

박 화백이 부산 성북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다. 담임선생님이 그를 불렀다. 포스터 한 장 그리란다. 만화방 가지 말고 불량 식품 사 먹지 말자는 내용이다. "마음이 착잡했어요. 우리 집에 오지 말란 포스터를 그려야 하는 거니까요. 포스터만 봐도 만화방에 가지 않도록 그려야 하는 게 작가(?)의 자존심이었지요. 하지만 만홧가게 아들로선 성공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만홧가게 풍경을 그리고 그 위에 가새표를 그었다. 담임선생님이 수고했다고 자장면을 사주셨다.

"먹고 싶었던 자장면이라도 인간 된 도리라면 그게 맛이 없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얄궂게도 그게 그리 맛있더라고요. 마음이 복잡했지요."

만화에 대한 편견은 지독했다. "김경언이란 만화가가 있었어요. 나중에 이름을 김소년으로 바꿨어요. 그 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 담임선생님이 만화책을 손에 들고는 이런 나쁜 책을 보면 안 된다고 아이들에게 말씀하셨대요. 아버지가 그린 책이었대요. 그 딸이 '아버지 만화 안 그리면 안 돼?' 울고불고했대요. 안 그릴 순 없으니까, 이름을 바꾼 거지요."

촌철살인 시사만평가
수십만 독자 앞에서
외줄타는 작업…
칼날 위 선 기분이었지만
날 만들어준 소중한 시간

평범한 이웃 담은
손바닥 아트 재미에 푹~
"낙서도 예술입니다
노래하듯 그림 그리세요
그리면 행복해집니다"
반구대암각화박물관 주변에 전시된 손바닥 그림을 둘러보며 박재동 화백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김경현 기자 view@


 
■ 실패와 좌절만큼 좋은 보약은 없다

만홧가게 아들답게 만화책 속에 묻혀 살았지만 박 화백은 당시 명문이던 부산중학교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중학교에서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림 그린다고 공부를 안 했어요. 만홧가게 봐준 삯 치고 서랍 속 돈을 조금씩 챙겨서 매일 영화 보러 다녔어요. 동보극장 태화극장 등 단골 극장의 제일 좋은 자리엔 사인도 해 놨어요. 얼마나 영화를 자주 봤는지 대사와 지문까지 욀 정도였어요."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다. 3학년 미술부장을 맡고 나선 월등한(?) 점수 차로 꼴찌를 했다. "초등학교 때 전교 1등도 하고, 중학교 땐 전교 꼴찌도 해봤어요. 그래서 1등과 꼴찌 의 심리를 다 알아요."

고등학교 입시에서 쓴맛을 봤다. "서면학원에서 재수하면서 소중한 친구인 상석이를 만났고, 생애 첫 만화책도 완성했어요. 만화를 그리고 좋은 친구를 또 사귈 수 있다면 두 번 세 번이라도 재수할 거예요."

그렇게 부산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이번엔 절도 혐의로 정학을 당했다. "부산 바다를 담을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마침 호주머니에 돈이 있었어요. 그 돈으로 캔버스 큰 걸 하나 사고 밑칠까지 끝냈는데, 그 돈이 바로 공납금이었어요. 후배 한 명이 꼬드겼어요. '형, 감만동 가면 폐가가 있는데 임자 없는 바둑판이 있어.' 그런데 덜컥 주인에게 걸린 거예요. 그동안 딴 놈들 훔쳐 간 것까지 물어 주고 일주일 정학까지 받았지요." 그 일주일 동안 다대포에서 대형 유화 한 점을 기어코 완성했다. 명문 코스를 밟았던 그에게 실패의 경험은 소중했다. "좌절의 한 해를 보내지 않았다면 교만해졌을 겁니다. 재수와 정학, 꼴찌의 경험이 강자가 아닌 약자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게 했어요."


■ 내 인생의 버팀목은 가족과 친구

그의 데뷔작(?)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장판에 '뚫은' 작품이다. "바다를 처음 본 날이었어요. 파도가 인상적이었어요. 그림은 그리고 싶은데 크레용도 종이도 없었어요. 송곳이 눈에 띄었어요. 송곳으로 장판을 뚫어 작품을 만들면서 스스로 감탄했어요. 막상 어머니가 오셨는데, 걱정이 되는 거예요. 어머니는 '잘 그렸다' 한마디뿐 꾸중도 않으셨어요. 다신 장판에 안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만약 그때 혼났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거예요."

그를 지금까지 버티게 한 데는 부모님의 힘이 컸다. 아들의 성적이 꼴찌란 말을 듣고 학교에 호출된 아버지도 그저 "1등이 있으면 꼴찌도 있는 법이야"라고 말할 뿐이었다.

지금은 해운대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있는 친구 이상석도 영원한 응원군이다. 서울대 입시 발표 하루 전날, 순경이 책꽂이에 꽂힌 만화책 한 권을 쑥 빼 보더니 불량만화 단속에 해당한다며 어머니를 데려갔다. 꼬박 하룻밤을 파출소에서 보내고 즉결재판까지 받고 돌아온 어머니의 관심사는 입시 결과였다. 그때 상석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저는 집에 오기도 전인데, 상석이가 '어머니 합격했습니다' 이랬다는 거예요. 어머니는 상석이가 합격한 줄 알고 축하한다고 했대요. '저 말고 재동이요.' 자긴 떨어졌는데 친구가 합격했다고 뛰어온 거예요. 나 같으면 위로받기에 급급했을 텐데."

박 화백의 부인은 배우 김선화 씨다. '제빵왕 김탁구'에선 어린 탁구네 집주인 역으로, 영화 '눈부신 날에'에선 원장 수녀 역으로 개성 있는 연기를 선보인 연기자다. 처음 박 화백에게 건넨 말이 당차다. "종교의 자유 보장하라, 연극의 자유 보장하라는 조건을 내걸었어요. 물론 다 들어준다고 했지요. 강한 캐릭터가 맞아요. 난 우유부단하고 어리어리한데, 집사람이 그걸 보완해 주지요." 아들과 딸은 제각각 아버지와 어머니의 길을 따라가고 있어 그 역시 그에겐 힘이 된다.


■ 시사만화는 수십만 명 보는 앞에서 외줄 타기

"하루는 수업 끝나고 노을을 보는데, 그리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가르치는 행복에 빠지다 보니 그림 그리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어요. 벼랑으로 나를 다시 몰아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교직을 그만뒀어요."

서울서 6년 동안 고등학교 미술 교사를 하던 그는 교직을 그만두고 강요배 박불똥 등과 함께 일러스트 회사에 다녔다. 1980년 민중미술의 모태가 된 '현실과 발언'이란 동인에 참여했던 그는 그림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운명처럼 한겨레신문 창간과 더불어 8년 동안 '한겨레 그림판'을 책임졌다.

"인사동 화랑에서 하는 전시와는 본질적으로 달라요. 시사만화는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해요. 수십만 명 보는 앞에서 외줄 타기 하는 것 같고 칼날 위에 선 것 같아요. 무조건 소통이 되어야 하는 거지요. 그것도 바로 보고 몇 초 만에 소통이 이뤄져야 하는 거죠."

시사만화는 박재동 이전과 박재동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그림은 세상을 바꾸는 무기가 됐다. "내 상식과 양심으로 못 그릴 게 없었어요. 그만큼 많은 민중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요즘은 그냥 슬쩍슬쩍 현실에 개입한다고 했다. 해고노동자 문제 해결을 위한 문화예술인 공동행동선언이나 이주여성을 위한 순회전시회, 제주 강정마을을 돕기 위한 기금마련전 등등 현장에서 종종 그를 만날 수 있다.


■ 노래하듯이 그림을 그리자

"오늘 영흥식당에서 삼겹살을 먹으며 식당 풍경 스케치를 하다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손바닥 풍속도를 그리자." 반구대 암각화 박물관 가는 길에 걸린 그림 중 하나다.

박재동 화백이 '노래부르듯 그림을 그립시다'라는 소망이 담긴 그림을 부산일보 독자들에게 보냈다
전시된 그림의 원본은 대부분 손바닥 크기다. 손바닥 그림은 '찌라시 아트'와도 연결된다. "눈물의 바겐세일 같은 벽보나 대리운전 전단을 주워 도화지 삼아 그렸는데 재미있더라고요. 영수증도 라면 봉지도 세상을 그릴 수 있는 훌륭한 캔버스예요."

그가 손바닥 그림을 그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졸업하고 나면 그림과는 담을 쌓아요. 음악은 노래방에서 노래하면서, 체육은 조기 축구나 등산으로라도 활용하잖아요." 그림을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크기 때문이라고 본다. 스케치북 크기를 채우려면 부담스럽다. 엽서 크기라면 해볼 만하다. "낙서도 예술이에요. 1㎝라도 선을 긋고 사인을 해 보세요. 소중히 여기면 낙서라고 생각했던 것도 작품이 되는 거지요. 멋지게 그리는 게 아니라 평생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소중해요."

문화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란다. "초·중·고 12년 동안 미술 수업을 받았는데 문외한인가요? 에베레스트 안 갔다고 등산하지 말란 법 없잖아요. 예술가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에요. 노래하듯 그림을 그렸으면 해요. 모두가 문화의 주인이고 예술가인 세상, 그런 세상이 꿈이지요."

 

취재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해찰 예술'이란 화두를 기자에게 던진다. "예술은 원래 하는 것 말고 괜히 해 보고 싶은 것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 술 심부름 갔다가 중간에 빠져서 메뚜기 잡고 서커스도 보는 게 해찰이죠. 세상에 쓸데없어 보이지만, 정말 하고 싶은 것. 예쁜 여자 그려진 사진에 괜히 낙서하고 싶은 것, 그런 거죠."  '해찰'이라. 그가 살아온 삶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었다.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그는 누구

박재동(59) 화백은 1952년 울산시 울주군 범서읍 서사마을에서 태어났다. 울산 서사초등학교를 다니다 3학년 때 성북초등학교로 전학을 와 부산 생활을 시작했다. 부산중학교, 부산고등학교, 서울대 회화과와 서울대 대학원 미술교육학과를 나왔다. 서울 휘문고와 중경고에서 미술 교사로 6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고, 1988년부터 8년간 한겨레신문에서 시사만평 '한겨레 그림판'을 맡아 그렸다. 한국만화 100주년 위원회 공동위원장과 부천국제만화축제 운영위원장을 지냈다.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로 있으면서 ㈜오돌또기 식구들과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고 있다. '만화 내사랑' '목 긴 사나이'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 '인생만화' 등의 책을 내놨다. 단편 애니메이션 '사람이 되어라'와 '송아지'도 찍었다.

부산일보 | 12면 | 입력시간: 2011-08-13 [16: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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