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로 등과(登科)하기 위해서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이를 합쳐 생진과라고도 하고 소과라고도 했습니다. 생원과 진사는 수도 한양의 최고학부로, 지금의 국립대학 격인 성균관에 진학해 대과(大科)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대과는 3종류인데 갑-을-병과로 나뉩니다. 갑과가 가장 높은 등급의 관리가 되고 병과가 가장 낮은 등급의 관리가 되는 것이니 오늘날 공무원시험보다 훨씬 어려웠음을 알 수 있지요. 3년마다 치러지는 과거시험 중 정규시험은 식년시(式年試)라 했습니다. 이와 별도로 태종 때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생긴 증광시(增廣試)나 세조 때 별시(別試), 세종 때 국왕이 성균관으로 행차해 시험을 보는 알성문과가 있었지요. 다시 앞으로 돌아가 1515년 알성문과 때 문제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공자(孔子)가 자신이 등용된다면 3년 이내에 정치의 실효를 거둘 수 있다고 하였는데 어떠한 방식으로 행하였으며 괄목할만한 결과가 이었겠는가? 내(중종)가 즉위한 지 10년이 지났건만 나라의 기강과 법도가 바로 서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라 보는가?”
이때 중종을 비롯한 시험관들의 눈길을 확 끄는 답안지가 있었습니다. 그 답안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과 사람은 근본이 하나이며 하늘의 이치가 사람들에게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 성인들은 천지의 큰 것으로써 만백성을….” 이 수험생은 왕에게 정치의 이념을 유교(儒敎)로 확실히 삼고 그 이념대로 실천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시대 최고의 개혁가로 지금도 추앙받는 조광조(趙光祖ㆍ1482~1519)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을 세운 명문가였다 고합니다. 고조부가 종1품 좌찬성을 지낸 조온, 부친(조원강)은 성종 때 종6품 사헌부 감찰을 지냈습니다. 그는 열일곱 되던 해 평안도 희천에 유배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金宏弼ㆍ1454~1504)을 찾아가 제자가 됐으며 ‘소학’과 ‘근사록(近思錄)’을 숙독했다고 합니다.
- 정암 조광조 선생의 영정이다.
조선시대 유학사는 유교가 전해내려온 고려 말부터 시작됩니다. 제가 어느 정도 공부를 마친 후 이 부분을 언급하려 하는데 여하간 조선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과 김굉필의 스승 김종직(金宗直ㆍ431~1492)선생이라고 하겠습니다. 김종직의 학맥(學脈)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말 이방원에게 선죽교에서 철퇴를 맞아 사망한 포은 정몽주(鄭夢周ㆍ1337~1392)와 야은 길재(吉再ㆍ1353~1419)선생이 등장합니다. 야은은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즉 현실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후진들을 양성했으니 그 수제자격인 김종직은 조선 초 영남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袖)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광조는 그 3대째 적통을 이어받았는데 1510년 알성문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중종의 주목을 받았다고 전해지지요.
그 해 11월15일 진사 신분이던 조광조는 경복궁 사정전에서 행해진 강경(講經ㆍ경전을 강의하다)에 참가했는데 이것은 성균관 유생들을 테스트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날 조광조가 강(講)한 것은 ‘중용’이었는데 중종의 평가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조선실록에 따르면 강경이 있던 날 그는 ‘사림의 영수’로 기록됩니다. 중용에 대한 그의 해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림이란 무슨 뜻일까요? ‘선비들의 무리’라는 뜻 같은데 율곡이 정의한 사림이라는 단어에는 극찬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옛날의 도(道)를 사모하고 몸으로는 유자(儒者)의 행동에 힘쓰며 입으로는 정당한 말을 하면서 공론(公論)을 가지는 자!” 이런 사림의 영수로 지목된 조광조는 1515년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눈이 아찔할 정도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게 됩니다.
- 정암 조광조 선생이 사약마신 곳을 기린 비석이 서있다.
지금의 검찰총장격인 대사헌(大司憲)이 된 후 그는 추락하고 맙니다. 그는 조금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도 ‘소인배’로 칭했는데 하필 훈구파의 쌍두마차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소인배로 몰리자 그들은 “조광조를 반드시 죽여버리고 말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기묘사화’입니다. 기묘사화는 조광조가 앞장서 추천제로 관리를 등용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고 중종반정 때의 공신 가운데 76명의 공적을 없었던 것, 즉 삭훈(削勳)하면서 벌어졌다는 게 정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현량과로 28명을 선발했는데 이 가운데 23명이 친(親)조광조파였으니 훈구대신들은 “저 친구들이 우리를 견제하기 위해 자기 세력을 늘린다”고 의심했을 게 뻔합니다. 거기다 훈구파의 공적은 삭제됐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겠지요. 문제는 그 직전까지 조광조 같은 젊은 선비들 편에 섰던 중종이 오히려 밀지(密旨)를 내려 홍경주-남곤-심정 같은 훈구대신들을 부른 뒤 조광조 일파를 칠 계획을 세웠다는 거지요. 쿠데타로 집권한 이가 쿠데타를 두려워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이치입니다. 이때 등장하는 게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입니다. ‘주+초’를 합치면 ‘조’가 되니 조광조가 왕이 되려고 꿈꾼다는 뜻인데 이건 대역죄(大逆罪)입니다. 주초위왕은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가 나뭇잎에 꿀을 바른 뒤 벌레들이 갉아먹게 해 만들었다고 하지요. <中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