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하여
김광한
칼릴 지브란'은 그의 저서 「예언자」에서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태양은 사람들에게 온몸을 태워가며 사랑을 선사하고 있다. 사람들은 태양에게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랑을 전달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기(利己)와 탐욕으로 인해 사랑의 의미를 잊고 있다. 태양은 그림자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사랑을 일깨우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그림자는 뒤를 따르고 있다. 사랑의 약속을 지키느라‥‥‥‥」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는 '사랑'이다.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사랑의 그림자는 늘 사람들의 뒤를 따라다닌다. 이는 사람들이 사랑 이외에 다른 짓을 하는가를 감시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남에게 사랑을 줄 때는 그림자도 아름다워지지만 사람들이 그늘 속에 들어가거나, 어둠 속에서 사랑 이외의 행위를 할 때는 그 사랑의 그림자가 곧 슬픔에 빠진다. 빛과 그림자, 암흑과 광명, 사랑과 증오 등 세상의 모든 사물 (事物)에는 이처럼 양면성(兩面性)이 있다. 인간의 내면도 양면성이 있다. 사랑과 증오, 악(惡)과 선(善)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영원한 악인(惡人)도 있을 수 없고, 영원한 선인(善人)도 역시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깨달아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때 악인(惡人)이었다가 회개하여 선인(善人)이 된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아오스팅 같은 성인(聖人)도 젊어서는 방탕과 노름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신(神)의 뜻을 깨달아 성인이 되었다.
그러나 성인처럼 행세하다가 악인이 된 사람도 우리 주위에는 얼마든지 있다 악(惡)을 신념(?)처럼 삼아,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특수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인간의 심성에는 선(善)이 자리 잡고 있다.
선(善)이란 궁극적으로 사랑과 통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비슷한 일생을 살고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부유한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또는 부모를 잘 만나서 귀하고 보람 있는 일생을 살다 간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생명의 함축된 시간을 살다 가는 것은 모두 다 똑같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열 달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고고 의 성(聲)을 발하여 태양 빛을 쪼이고, 가난한 집이건 부잣집이건 20여 세 내외로 결혼을 하게 되면, 처자식들 부양하기 위해 일용할 양식을 찾으려 허둥댄다. 이 과정이 어찌 보면 동물과도 똑같은 생리적인 행위 이외에 별것이 아니다.
동물도 제 새끼를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새끼를 먹여 살리고 보호한다. 거미는 새끼에게 제 몸까지 내어 주면서 죽을 정도로, 그리고 연어는 알을 부화하기 위해 수만 리도 넘는 개울가로 거슬러 올라와 죽을 정도로 자기 새끼를 살리기 위한 헌신적인 본능 행위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동물과 다르다면 사람은 자식이 사람노릇을 할 수 있도록 공부와 예절과 살아가기 위한 방법 등을 가르친다. 이것을 사람사회에서는 '교육'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여기에 드는 비용이 만만 치가 않다. 이것이 사람과 동물의 차이이다.
동물에게는 각혼(覺魂)이란 것이 있어서 본능적이고 생리적 이지만,인간에게는 영혼이란 것이 있어서 생리적인 것보다 영적인 생활을 추구하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다. 예로부터 교육이란 인간의 완성(完成)을 목표로 하여 그 이념을 정립해 왔다.
이미 사문화(死文化)된 국민교육헌장에서도 그것은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요즘의 교육, 즉 교육을 총괄하는 문화(文化)는 어쩐지 이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일찍이 60년대에 일본의 대중문화 속에 섞여 들어온 부도덕한 것들이 진실로 위장된 채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란 장사치(?) 나라에서 작가생활을 한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의 「부도덕 교육 강좌」나 이시하라 신따로(石原眞太郞) 같은 대중작가의 태양족(太陽族)을 본 딴 「너 죽고 나죽고」 식의 사고방식, 그리고 일본의 기업소설(企業小說)속에 묻어 들어온 「상사를 배신하라」,「20대의 사장학」, <기회를 노려 상대를 거꾸러뜨리는 법> 등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 것을 설포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그 방법적인 면까지를 세세히 적어 이 땅의 젊은이들의 영혼을 상당부분 손상시켰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버릴 때는 동물만도 못 하게 된다. 동물은 제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배신을 떡 먹듯이 한다. 소유(所有)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교활하게 여기에다 합리화(合理化)를 시키려 한다. 아버지같이 여기던 시저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칼로 난자한 부르터스의 배신이 그렇다.
'인생의 길'이란 커다란 질서 속에서 흘러가는 것이다. 물(水)이 역류를 할 수 없듯이 진리는 진리 그 자체일 뿐 변함이 없는 법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모든 가치의 판단이 제 자리에 들어 있을 때 사랑들은 잘못 살아온 인생을 후회한다. 이 세상의 모든 순리와 진리, 만남과 헤어짐이 사랑이란 끄나풀로 일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그래서 위대한 문학, 미술, 음악 등의 주요 테마는 사랑인 것이다. 사랑은 인간의 영원한 테마이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異邦人).에 등장하는 '뫼르쏘 란 인물의 무절제한 행위를 칭송하는 사람도 물론 더러는 있겠지만 그것은 실존(實存)에의 몸부림에 불과했지 인간의 기본적인 테마는 아니었다.
아무리 인간이 논리적으로 삶을 풀어 보려고 해도 사랑이 존재하는데 필요한 것은 사랑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소유란 무엇인가? 결국 땅덩이 속에서 파내고 땅에서 기른 것들을 가공(加工)해서 물건을 만들고, 여기에 가격을 붙여 내다 파는 것을 가지려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는 인간의 치밀한 과학적 지식이 필요하지만 이것들을 갖는다고 해서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결국 인간은 늙어 죽게 마련인데 말이다. 그 소유를 후손에게 전한들, 자신에게는 더럽게 소유했다는 오명만 남을 텐데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사랑이란 샘물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이 잘 살고 뭇 살고는 사람이 갖고 있는 사랑의 함량에 따라 달라진다. 즉 잘사는 사람은 사랑의 함량을 많이 갖고 사는 사람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의술을 펴다 죽은 슈바이처가 죽고 나서 남겨 놓은 것은 몇 가닥의 붕대와 낡은 침대 한 개가 전부였다. 그렇지만 그가 인류에게 남긴 정신적인 유산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그것을 한마디 말로 요약하면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중근, 윤봉길, 백범 김구 선생같이 파란만장하게 세상을 살다 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남들이 범접하지 못할 만큼의 커다란 사랑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노래는 영원한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불리워지는「까라! 죽여라!. 하는 식의 정체 모를 노래들이 단명(短命)하는 이유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첫댓글 와우! 대단히 좋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