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27장 27-31절 희롱하는 자들
요즘 직장 내에 성희롱 문제가 매우 심각합니다. 그래서 성희롱을 당했다고 하는 여사원들이 직장 상사들을 고발하는 일이 매우 빈번해졌습니다. 그런데 성희롱의 기준이 매우 애매하기도 합니다. 대부분 여자가 불쾌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거나 수치심을 느끼면 성희롱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진짜로 남자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손으로 만지거나 말로 희롱했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보면 그런 의도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소를 당하는 경우도 없잖아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도 희롱과 폭행을 당하셨습니다. 성희롱은 아니지만 예수님 자신이 하신 말씀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근거로 심문하면서 희롱한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유대인들의 손에 넘겨주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온 군대를 모았습니다.
예수님을 애워싼 로마군사들은 빛나는 왕복을 입으셔야할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혔습니다. 그리고는 왕의 면류관을 쓰셔야할 머리에 가시관을 엮어 씌웠습니다. 그리고 왕의 홀을 잡으셔야할 오른 손에 갈대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면서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그리고는 예수님에게 침뱉고 갈대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그리고는 희롱을 다한 후에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님이 당하신 수모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이 희롱과 폭행은 계속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로부터 희롱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동네 형들로부터 많은 놀림을 당했습니다. 귀가 안들렸기 때문에 동네 형들과 친구들이 나를 보고 귀머거리고 했습니다. 또한 다리 종아리에 화상을 당한 자국이 보이자 친구들을 흉하다고 나를 멀리 했습니다. 그때부터 한 여름에도 짧은 바지를 안입었습니다. 그렇게 귀도 안들리고 생각하는 것도 단순한 것을 보면서 “문열이”라고 불렀습니다. 문열이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원래 표준어는 “무녀리”입니다. 이 뜻은 언행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못난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렇지만 원래의 뜻은 짐승의 많은 새끼들 가운데 가장 먼저 어미의 태를 열고 나온 새끼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다른 새끼들은 그 무녀리로 인해 수월하게 세상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쉽게 볼수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강아지들 가운데 제일 일찍 태어나는 것들 가운데는 가끔 무엇인가 부족함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문열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가장 먼저 나오느라고 있는 힘을 다하다 보니 어딘가 문제가 생겨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과만 보지 그 과정을 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키우던 바둑이도 역시 그런 강아지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눈도 이상이 있고 밭도 이상이 있었고 이빨도 이상하게 나서 딱딱한 것은 잘 씹지도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걷자 마자 집 밖으로 나가 창고 뒤 고랑으로 내려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수로까지 내려가면서 높은 데서 떨어져 다리까지 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키우자고 해서 키웠는데 어떤 분은 개도 아니라고 가져다 버리라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한 번은 죽을 뻔 하다가 겨우 살아났는데 그 이후로 간질 증세까지 나타났습니다. 바둑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가져다주면 흥분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옆으로 쓰러져서 발발 떨다가 한 참 지나면 일어나 그 음식을 먹었습니다.
사람들도 가끔 그런 사람이 있는데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나의 경우는 홍역을 앓다가 귀를 알았기 때문에 태생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당시에는 친구들을 단체로 놀리는 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오늘날의 왕따에 속할 정도였습니다. 거기다가 그런 놀림을 받을 때 친하다고 하는 친구들 조차도 나를 대변하거나 두둔해주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 놀리는 형들이 그들편을 안들면 맞게될까봐 무서워서 그랬을 것입니다. 아내도 나를 보면 마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데가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아내에게 고마워하게 됩니다. 그런 부족한 저의 뒷바라지를 다 해주면서 지금까지 묵묵히 같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셔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니게 하셨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셨고, 하나님으로 인한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꿈이 있었기 때문에 현실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여러분! 희롱하는 사람들의 악은 그렇게 희롱하면서 자기들끼리 킥킥대면서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희롱을 당하는 사람은 무척 마음이 상하고 괴로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죄책감도 없이 가볍게 공격적으로 말합니다. 만일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의 주변의 사람들이 그를 아주 위험한 악인으로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고 희롱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나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응의 날이 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한 말로 인해 심판을 받을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유다서 1장 15절을 보면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의 날에 주님 앞에서 자기들이 행한 경건지 않은 일과 경건하지 않은 말들로 인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행하는 행동과 말들이 예수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인지를 스스로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의 문제는 자기가 한 죄가 죄인지조차 모른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이야기해줘도 안들립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런 그들을 모두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행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는 악인들과 죄인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구원을 받으면 행동과 말이 예수님처럼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전에 당하신 고난이나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은 인류 안에 있는 모든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고난 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희롱은 이 땅에서 무언가 부족하고 모자라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는 정상적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면서 희롱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모든 희롱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낮은 자리에서 희롱을 당하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 지를 십자가 위에서 주시는 대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희롱했다면 하나님과 그 사람에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반면에 누구로부터 희롱을 당하든지 간에 희롱을 당한 적이 있거나 요즘 희롱을 당하고 계신다면 여러분들은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증거입니다. 그들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들이 자기들이 하는 행동조차 죄인 것을 알지 못하면서 행한다고 용서를 선포하신 것을 실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놀리고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여러분들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흉보는 그런 사람들이 용서하는 일이 가능합니까? 여러분들은 그들을 공격할 수 없어서 분을 삭히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때가 바로 예수님 앞에 기도할 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이 짓지 않은 죄로 덮어씌움을 당하시고도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모든 로마 군병들과 유대인들을 용서하셨다면 실제적으로 부족한 여러분들이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설사 그들이 여러분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공격한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들의 죄를 알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는 그런 용서는 절대 못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그런 용서를 마음으로부터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신 예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와 사랑의 마음은 바로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에서 생명수가 맨처음 나오는 곳은 바로 성전의 문지방입니다. 문지방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입니다. 그 문지방 아래에서 생명수 샘물이 터져나와 발목에 잠기고 무릎에 잠기고 허리에 잠기도 키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깊어진 것처럼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사람들은 자신 안에서 사랑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조차 용서하게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여러분 안에서 용서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채로 끝내야 한다는 것을 매우 힘들어 합니다. 굉장히 손해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분노의 마음이 조금도 사그러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은 엄청나게 손해를 보신 것입니다. 전혀 죄가 없었는데 죄인 중에 가장 극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나 달리는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들의 원수까지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을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비추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물론 이런 삶에 모든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것은 아니며 호감을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감동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칭찬하지도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군병들이 비웃고 희롱했듯이 더 무시하며 희롱합니다. 때로는 악이용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에 침묵하셨습니다. 힘이 없어서 침묵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열두 영도 더되는 하늘의 천군천사들을 동원하셔서 자신을 희롱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다 멸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고 멸망시키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고 풍성하게 살게 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참여했던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에베소서 5장 4절에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희롱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누군가 여러분들을 희롱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갈 길이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사랑의 마음으로 충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