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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5-36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본문은 때가 되자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내용을 시작으로 해서 라반이 만류했던 과정과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일한 품삯을 정한 이야기들 입니다.
1. 본문 25-26절은
“(25)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26)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입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매어 있던 것은 자기 봉사에 대해 제의된 보상 때문이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야곱이 자기 장인으로부터 놓여나기를 원하여 교활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이미 그의 마음에 들어 있었고 그는 자기의 의도를 허심탄회하게 공언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라반이 매우 부정직하고 표리부동하며 잔인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즉시 그를 떠나고 싶어했다 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둘째로, 오랜 공백 기간이 경과했으므로 그는 형의 마음이 진정되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부모에게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셋째로, 더군다나 그는 풍상풍우와 온갖 곤란한 일을 겪을 대로 겪었기에 어느 곳에 가더라도 이보다 악한 처지에 빠지랴 싶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의 염원을 무엇보다 강하게 부채질한 자극제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싫어하지 않고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가 ‘내 고향 내 본토로 돌아가겠다’ 고 선언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을 가리킵니다. 그는 자기가 가나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허락으로 자기에게 주어졌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가 만일 그 땅이 단순히 자기 고향이기 때문에 돌아가기를 소원하다고 말했다면 그는 조소를 받았을 것입니다. 야곱의 조부께서 끊임없이 거처를 바꾸면서 정착되지 못한 방랑의 생활을 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다른 곳에서 멀찍하게 거주할 수 있었더라도 가나안 땅이 그의 소유로 정해져 있다는 하나님 말씀은 그의 뇌리에 항상 새로웠을 것입니다.
그가 일시적으로 다른 사람의 만류에 굴하여 지체하더라도 떠나려는 그의 의도는 변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떠나지 못했던 불가피성은 삼촌 라반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데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의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무일푼으로 벌거벗은 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는 일정한 기간 삼촌에게 더 남아서 자신과 자기가족을 위해 무언가 획득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라반의 악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라반의 행위는 상식을 벗어났습니다. 그는 자기 생질이자 사위인 야곱을 십 사년간이나 중노동으로 끊임없이 혹사시켰습니다. 그를 거의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앞으로 주어야 할 품삯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제안도 하지 않습니다. 처음 야곱이 그에게 찾아왔을 때는 그래도 공평한 척이나마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공평이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야곱의 인내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횡포는 더욱 심해져서 야곱을 멋대로 착취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도 경건한 자들, 곧 하나님께 속한 자들의 온화한 성품을 남용합니다. 그들이 온유하게 행동하면 할수록 세상 사람들은 더욱 흉포하게 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처럼 세상에서 늑대의 횡포와 가해에 노출되어 있을지라도 그들이 우리를 해치거나 삼킬까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하늘에 계신 목자께서 우리를 자기 보호 아래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7-28절은
“(27)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28) 또 가로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입니다.
우리는 라반이 야곱을 순한 말로 달래는 것으로 보아 야곱이 부담스런 식객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와 같이 사정하는 것은 그를 더 오래 체재시켜 그의 봉사를 받으려는 속셈에서입니다. 라반은 야곱이란 존재가 어떤 이익의 근원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이야 비록 그가 인색하고 탐욕스러웠다고 하지만 야곱을 잠시라도 제 집에 머물러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반은 그를 쫒아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붙들어 두려고 노력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야곱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고를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한 수고는 대가족의 생계를 유지시키기에 충분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장인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 오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나중에 낮의 뜨거움과 밤의 추위를 겪었다고 하소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가 했던 어떤 수고보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분께서 주시는 복이 더 많은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그가 고백하는 대로 야곱이 일종의 풍요한 뿔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야곱의 성실성과 부지런함을 칭찬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야곱으로 인해 여호와의 복을 받았다는 것을 명백히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살피건대 라반의 재산은 야곱이 온 후로 너무나 많이 불어나서 마치 그의 소득이 하늘에서 내리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낙하쉬) 라는 말은 히브리인 사이에서 점을 통해 아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어떤 해석가들은 라반이 문복술을 배워서 야곱이 자기에게 유용하고 유익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 말씀을 보다 단순하게 해석하여 그가 경험에 의해 야곱의 그런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라반이 하나님의 복을 깨닫고 알아서 이런 말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예언에 의해 증명되었거나 아니면 점술로 판명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3. 본문 29절은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입니다.
이 말은 야곱의 대답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 보수를 인상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봉사 기간 연장을 요구한 라반의 행동이 부당하고 몰인정했기 때문에 야곱은 그에게 간하며 그의 행위를 탓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귀향에 대한 염원으로 이미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각으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떤 종류의 재물보다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 장인의 교활함과 비인도적인 점을 들어 넌지시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좀 더 오래 머물러야 할 경우 억지로라도 그에게서 약간의 재물을 받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는 그가 표리부동한 늙은 여우에게서 아무 것도 바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노쇠한 삼촌이 제 스스로 공평한 행동을 할 리가 만무했습니다. 야곱은 단지 자기가 근면하다는 사실을 드러내 놓고 칭찬할 뿐만 아니라 부당하고 가혹한 외삼촌과 따질 일이 있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또 관찰해야 할 점은 비록 야곱이 애써 수고했다고는 하지만 아무것도 자기가 수고한 결과로 돌리지 않고 라반이 부유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복 주신 덕분이라고 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충실히 자기 의무에 열중할 때 비록 그들이 수고를 아끼지 않더라도 그들의 성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한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가르침의 효능에 대해 사도 바울이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전3:7) 고 주장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험에서 추출된 비유로서 확대하여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의 용도는 양면적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무슨 일을 시도하거나 착수하거나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 수고에 복을 주셔서 그 일이 헛되거나 무익하게 되지 않도록 소원하는 것이 곧 우리 임무입니다.
그렇게 한 후에 우리가 만일 무엇이든지 얻는다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두 번째 의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없이는 사람이 일찍이 일어나 온종일 녹초가 되도록 수고하며 늦게 누우며 걱정의 떡을 먹고 근심의 물을 몇 모금 마셔도 헛일에 불과합니다.
4. 본문 30절은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입니다.
야곱은 “내가 보기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라고 말했는데 “내가 보기에는”이란 말에 대해서는 제롬이 ‘내가 오기 전에는’이란 말로 아주 능숙하게 잘 번역하였습니다. 모세는 야곱의 ‘얼굴’(면전)이란 말로 실제 라반과 동거한 사실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얼굴은 늘 자신의 얼굴 앞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얼굴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생활하였습니다. 또 야곱의 얼굴은 라반의 얼굴 앞에 있었습니다. 그는 비교적 건실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인 만큼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면전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을 쏟으면서 자기 가족에 대해서 소홀히 한 것은 부당하다고 이치를 따져서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가 자기에게 맡겨진 가족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은 자연이 명령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 샘에서 물을 마시며 강으로 네 이웃에 흐르게 하라”는 솔로몬의 잠언은 이 점에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제 혼자 뿐이었다면 남의 이익을 위해 보다 자유로이 헌실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네 명이나 되는 아내의 남편이요, 또 많은 자식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양육의 사명과 함께 받은 식구들을 잊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로 경영하는 자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야곱은 존엄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서 매우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5. 본문 31-32절은
“(31)라반이 가로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가로되 외삼촌께서 아무것도 내게 주실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32)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입니다.
우리는 본 절과 앞 절 간의 반제(反題)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위해 확정된 품삯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라반에게 조건을 제시합니다. 즉, 순수한 단일색의 양과 염소한테서 얼룩얼룩하고 반점이 있는 것이 태어나면 무조건 전부 다 제것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자체에는 다소 모호한 점이 있습니다. 처음에 야곱은 반점 있는 것을 제 품삯으로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33절에서는 또 다른 의미를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즉, 야곱은 양떼 중에서 잡색이 섞인 것을 전부 구별하여 라반의 아들들에게 사육하도록 넘겨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 자신은 점이 없는 양과 염소를 갖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금 이제껏 이득을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고백했던 야곱이 이제 자신을 위해 양떼 중 일부를 요구한다는 것은 확실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렇게 해서 얻는 이득은 정당히 얻는 것보다 훨씬 많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라반한테서 이런 이익을 얻을 가망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어떤 희망과 어떤 계획에 의해 이런 조건을 제시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납니다. 잠시 후면 모세는 순색의 양떼로부터 얼룩얼룩하고 점 있는 새끼가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 야곱이 사술을 이용했다고 기록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모세는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치심을 받아서 이처럼 행했다는 것을 보다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조건을 통한 협정이 야곱에게 유익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야곱은 하늘 명령에 복종합니다. 그는 하나님 뜻대로 부자가 되기를 소원할 뿐 다른 방법으로 부유해지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라반은 제 나름대로 계산을 해서 이 조건을 수락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유리하다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지 붙들고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수치스러운 탐욕을 실망시켜 버리십니다.
6. 본문 33-34절은
“(33)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 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34) 라반이 가로되 내가 내 말대로 하리라 하고” 입니다.
33절 중간을 문자 그대로 옮기자면 ‘나의 의가 내 안에 응하리이다’ 가 됩니다. 그러나 불변화사 (비)는 ‘내게’ 또는 ‘나를 위하여’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 의미는 명백해집니다.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분 면전에서 순전함을 통하지 않고는 성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 앞 문장에 대해서는 해석이 구구합니다. 어떤 자들은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라고 읽습니다. 그러나 다른 자들은 그것을 삼인칭으로 옮기면서 의에 대한 설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의가 와서 그 품삯을 조사하거나 야곱에게 보상하리라’ 는 것입니다. 어느 의미가 그 문장에 부합하든 간에 우리는 그 다음에 ‘그대 앞에’(한글 개역에는 없슴) 라는 말이 곧 추가되기 때문에 그것을 의로 해석합니다. ‘외삼촌께서 당신의 눈앞에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라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표현이 되는 까닭에서입니다.
이제 야곱의 의중에 있던 말은 충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노동에 대한 복된 결과 속에서 자기 믿음의 증거와 여호와께로부터 오는 의로움을 희망했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치 ‘나의 의를 가장 잘 판단하고 신원해 주시는 여호와께서 내가 이제껏 성실과 신실함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나타내실 것이다’ 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왕왕 죄인이 악한 계책으로 부유하게 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또 다른 사람의 재물을 부당한 방식으로 취함으로써 풍부한 이익을 얻도록 내버려두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선한 믿음과 공평에는 의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따른다는 철칙에 대한 실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자기가 수고한 만큼에 대한 성공 결과를 여호와께 맡겼다는 것을 자기 성실성에 대한 표징으로 내세웠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자기 순전함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본문이 주는 의미는 명백히 드러납니다. ‘내 의는 스스로 내게 셈해 주러 올 것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 공공연하게 증거 할 것이며 그것은 너무도 분명하여 외삼촌께로부터 숨기우지 못 하리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 가운데는 암암리에 책망이 숨어 있습니다. 이것은 라반이 거룩한 족장에게 품삯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해 라반이 자기 부당성을 절실히 느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라반이 얼마나 악했던 지를 결과로서 곧 증명해 보이신다고 하는 것도 암시되고 있습니다. 라반은 자기 조카에게 대한 의무를 악하게 은폐시켰습니다. 야곱은 어제나 전에는 라반으로부터 공평을 얻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내일 또는 후일에 의가 나를 위해 대답하리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때 우리는 미래와 과거 사이에 반제가 성립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 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 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라는 뜻이 됩니다. 야곱은 만일 양떼로부터 반점이 없는 양을 이끌어 가는 경우에는 자신을 절도 죄와 거기에 상응하는 벌에 적용시켜 주도록 자청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마치 ‘외삼촌께서 만일 내게서 반점이 없는 양을 찾아내신다면 나는 기꺼이 도둑으로 정죄받겠나이다. 나는 얼룩 있는 양 새끼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7. 본문 35-36절은
“(35)그 날에 그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암염소 중 흰바탕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양 중의 검은 자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붙이고
(36)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 입니다.
본 절에서는 계약 형태가 더욱 확실히 나타납니다. 라반은 양이든 염소든 점 있는 것이면 순수한 양떼나 염소 떼, 즉 흰 것이나 검은 것으로부터 분리하여 자기 아들들에게 치라고 맡기고 그 사이를 사흘길이 뜨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뒤섞임으로써 잡색종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먹이는 양떼 중에는 단일색 종자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나누는 어간에 이미 수태된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수태 후 주로 넉달 후에 양 새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자에게는 소득을 얻을 수 있는 희망이 실오라기같이 희미한 반면에 모든 규정은 라반에게만 유리하였습니다.
라반은 자기 떼를 따로 격리시켜 방목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거리로 보아 라반은 탐욕스러운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 않게 의심도 많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부정직한 사람은 대개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남들을 평가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항상 무엇이든지 믿지 못하며 단단히 경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희미하게 아는 자와 그런 방식으로 믿음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서 흔하게 나타나는 모습이 있다면 라반과 같은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점점 더 밝은 빛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에 대하여는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여야 합니다.